로버트 카파 ( Robert Capa, 미국, 1913∼19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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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Robert Capa)의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edman)으로 1913. 10. 22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태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이주한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틈틈이 '데포통신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프레드 아이젠슈태트'의 암실조수를 하면서 보도사진을 찍으며 돈을 벌었다.
1932년 우연히 코펜하겐에서 망명길에 오른 『네온 트로츠키』를 찍어 유명해지면서 정식 사진기자로 출발하는 행운을 잡았다.
1947년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빗 세이무어, 조지 로저, 윌리엄 반디 버트 등과 함께 매그넘(Magmum)을 창설한다.
그는 전장에서 산화한 종군기자로써
'당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좀 더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서 사라진 로버트 카파와 카파이즘
카파의 사진은 그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지고, 사진기는 단순히 그것을 완성시킬 뿐이다. 훌륭한 화가의 캔버스와 같이 카파는 대상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전쟁 그 자체를 사진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격정의 끝없는 확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밖에 있는 것을 찍어 그 격정을 표현한다. 그는 한 아이의 얼굴 속에서 그 민중 전체의 공포를 나타내고 있다. <존 스타인 벡>
제1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언론 매체에 보도되는 대개의 사진들은 자국의 승리를 찬양하고, 군인들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대중에게 쇼크를 줄 수 있는 그것이 분명 전쟁의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잔혹 행위나 죽은 이들의 비참한 모습은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가차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런 일련의 움직임의 정점에 서 있던 사진가가 바로 로버트 카파이다.
그는 전쟁터를 누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서 어느날 갑자기 불려나와 이름도 모르는 언덕과 골짜기, 초원에서 사라져가는 현장을 지켰고 그들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에는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로 소개된 그의 책 는 종군기자를 꿈꾸었던 많은 젊은 사진작가들에게 바이블이 되었으며 그의 너무 이르고 극적인 죽음은 그를 종군기자의 신화가 되도록 했다. 이제 종군기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때라도 자신을 지배하려드는 매스 미디어와 정부의 권력에 맞서 싸우려 들었다. 그것이 바로 카파이즘(Capaism)이다. |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과 연인 겔다의 죽음
로버트 카파란 이름이 마치 종군기자 혹은 전쟁 사진 전문가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전쟁만을 찍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겪어내야 했던 시대적 상황이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사진의 주된 소재로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전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것은 1936년 스페인 내란 중에 찍은 <왕당파 병사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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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시작으로 로버트 카파는 포토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 이 사진은 마침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1936년 「라이프Life」지에 게재(이 해에 라이프지가 창간되었다)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후세에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실제 사람의 본을 뜬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처럼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사진으로 카파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스페인 내란에서 자신의 아내 겔다를 잃고 만다. 그와 겔다가 아군 진지를 촬영하던 중 전선에서 후퇴해 온 아군 전차가 촬영 중인 겔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겔다를 치어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파는 얼이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겔다는 빌드락, 장 르느와르, 피카소, 아라공, 말로, 니생 등에 의해 정성껏 장례를 치뤄 주었지만 겔다의 죽음에 상심한 카파는 반 달 동안 숙소에 엎드려 계속 울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평생 전쟁터를 떠돌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hoto4love.com%2Fsp%2Fsajinsa%2Fcapa004.jpg) 로버트 카파와 그의 연인 겔다 타로 1935년 프랑스 파리. (Robert Capa and Gerda Taro) - photo by Fred 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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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가 겪은 다섯 차례의 전쟁
photo by Geoge Rodger
스페인 내란을 필두로 그는 1938년에 일어난 중일전쟁 때는 일본군의 잔학한 학살 참상과 비탄에 빠진 중국인들의 모습을 전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더 이상 유럽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카파는 그의 헝가리 국적으로 인해 적성국가 국민으로 분류되어 카메라조차 뺏길 형편에 처한다. 그러던 중 <커리어즈>에 의해 채용되면서 극적으로 종군기자에 복귀하게 되는 행운을 만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hoto4love.com%2Fsp%2Fsajinsa%2Fcapa009.jpg) 노르망디 상륙작전 The landing at Normandy, 1944. 이 사진이 잡지에 게재되면서 사진에 대한 캡션으로 사용된 말이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있는데 그때 사진은 상당히 흔들려서 사진이 떨린 상태이고 핀트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 사진에서는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더욱 절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제2차세계대전의 보도사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1945년 그는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1947년에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매그넘MAGNUM>을 결성한다. 그는 이 무렵 존 스타인 벡과 함께 소련에 촬영여행을 간다. 1949년과 51년에는 피카소의 가정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평화는 잠깐이었다.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취재하였다.
954년 카파는 일본의 한 신문사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그러나 <매그넘> 회원인 친구 잔 모리스가 뉴욕에서 그를 불렀다. <라이프>지에서 베트남 전세가 긴박해지자 카파에게 그곳에 가줄 것을 화급히 간청한 것이다.
카파는 베트남 행을 말리는 친구에게,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hoto4love.com%2Fsp%2Fsajinsa%2Fcapa-last.jpg) Nam Dinh, South of Hanoi, Vietnam, May 25th, 1954. 이 흑백 사진을 찍은 직후, 카파의 발 밑에서 지뢰가 터졌고, 로버트 카파는 더 이상 셔터를 누를 수 없게 되었다.
로버트 카파는 41살의 젊은 나이에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와 베트남간의)을 촬영하던 중 지뢰를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1954년 5월 25일의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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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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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탄이 빗발치는 전장. 인간성이 말살되는 살육의 현장이기에 증언하고 감시할 눈이 더더욱 필요하다. 그래서 기자들은 역설적이게도 전쟁현장 취재를 일생 최대의 꿈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기자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가끔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취재하는 광경을 머릿속에 한두 번은 그려봤을 것이다.
죽음의 위협과 기자의 사명감이 미묘하고도 긴박하게 교차하는 가운데 눈앞에 펼쳐지는 잔인한 장면들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오직 카메라에 의지한 채 현장을 기록하는 기자들. 이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기자정신은 로버트 카파로부터 시작된다.
전쟁사진이라면 그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본명은 엔드레 에르노 프리드만. 1913년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 1931년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베를린에서 사진기자 생활 시작.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파리로 간 그는 1936년 사진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의 가공의 미국인 사진가 행세를 하다 아예 그 이름으로 활동했다. 애인 게르다 타로와 함께 스페인내전에 뛰어들어 공화파인 인민전선쪽에서 취재하다 그해 9월 코르도바 전선의 참호에서 뛰쳐나온 인민전선 병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담은 사진이 미국 <라이프>에 실리면서 그의 이름이 전세계에 알려졌다. 포토 저널리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게 한 그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전쟁기록사진으로 평가받았다.
생사 경계선서 인간적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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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군이 시칠리아 트로이나에 진주한 직후 응급치료를 받은 아이를 안고 있는 현지 주민 모습. 1943년 8월 미군은 1주일간의 고전 끝에 트로이나를 탈환했다(위). 1944년 6월6일 감행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 공격 제1파 부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유명한 전투장면은 바로 카파가 찍은 이 사진들을 원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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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파는 그 뒤 중일전쟁, 2차 대전, 중동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 숱한 전장들을 취재하며 지금까지 모든 사진기자들에게 전쟁사진의 전설로 살아 있다. 자기희생과 위험을 무릅쓴 취재정신을 일컫는 ‘카파이즘’도 그 속에서 태어났다.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필맥 펴냄)는 카파가 찍고 쓴 2차대전 종군기다. 1944년 6월 2차대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종군해 106컷의 사진을 찍었으나 <라이프> 암실 직원의 실수로 대부분 소실되고 10장만 살아남았다. 그 10장을 실은 <라이프> 기사에 붙은 설명이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였다.
책은 뉴욕에서 백수로 뒹굴던 그가 2차 세계대전 발발 뒤 <콜리어스>의 의뢰를 받아 북아프리카 전투를 취재하러 떠나는 장면을 시작으로 베를린의 함락 때까지 매순간 전장의 최 일선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면서 찍은 사진과 그의 시각을 드러내는 생각과 인간적인 고민 등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글들을 담고 있다. 그도 사진기자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회의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면들이 곳곳에 산재돼 있다. 숱한 전장에서 피가 낭자한 사진을 찍어왔음에도 그는 처절한 장면을 볼 때마다 심한 구역질을 느끼며 자신이 장의사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시실리 작전에서 자신도 병사들과 같이 낙하산으로 현장에 뛰어들며 나눈 자신과의 대화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고민들을 현장에서 극복해 내면서 어떤 왜곡이나 미화도 하지 않고 오직 카메라로 전쟁의 실상을 알린 그의 숨은 휴머니즘과 기자정신이 어떻게 영글어갔는지 짐작하게 한다.
모든 전장에서 병사보다 더 가까이 전투현장에 다가가 촬영한 것으로 유명했던 그는 1954년 <라이프>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장에서 프랑스 전투부대원들을 촬영하다 지뢰를 밟고 숨졌다. 41살.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사망한 최초의 미국 종군기자로 기록됐다.
베트남 전장서 지뢰 밟고 숨져
카파가 평가받는 이유는 이런 극적인 요소 때문만은 아니다. 역자 우태정은 이렇게 말한다. “(그를 빼놓고 전쟁사진을 논할 수 없는 까닭은) 그가 유일한 전쟁사진가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로저 팬튼, 알렉산더 가드너와 같은 뛰어난 사진가들이 많이 있었다. 41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다섯 차례의 전쟁터를 누비다 결국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더더욱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전쟁의 진실을 전하고자 했던 그의 기자정신 때문이다.”
한국에선 간간이 그의 유작들을 볼 수 있는 기회들은 있었다. 사진 인구도 많아지고 유명한 초대전이 국내에서 열리면서 그의 유명한 사진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과 같이 했던 유작들의 숨은 이야기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종군 취재기가 담긴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는 카파이즘에 심취한 이들에게 목마름을 풀어주는 시원한 단물과 같다.
종군사진기자, 로버트 카파
강렬하고 생명감 넘치는 사진들
로버트 카파의 사진세계는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적나라한 실상에 대한 파악이다. 그는 전쟁을 전문으로 찍는 전쟁사진가로서, 스페인 내란 중에 일약 유명한 존재로 등장하여 일생동안 카메라를 들고 전쟁터만 누비다가 전쟁터에서 최후를 마쳤다.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로버트 카파는 본명이 엔드레 프리드만인데, 1931년 유대인인 그는 유태인을 탄압하는 독재정권을 피해서 독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베를린 대학에 다니는 한편 울스타인 통신사의 암실당당 조수로 학비를 벌었다. 1932년 러시아의 트츠키가 스탈린에게 축출되어 망명 기에 올랐을 때, 마침 이를 취재할 기자가 없어 대신 나가 취재한 사진이 특종이 되었다. 그리하여 암실 조수로부터 정식 사진기자로 임명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다시 유태인 박해를 피해 파리로 떠나 1935년부터는 로버트 카파로 이름을 바꾸어 보도사진가로서 새로운 활동에 들어간다. [라이프]가 창간된 1936년, 드디어 스페인에서 먼저 전쟁이 터졌다. 드디어 스페인서 먼저 전쟁이 터졌다. 프랑코가 독재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내란을 일으켰고, 인민전선파가 이에 맞서 대항한 것이다. 그는 이 전쟁에 뛰어들어 최전방으로 갔다. 어느 날 공격명령과 함께 인민전선파의 병사 하나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를 박차고 나가는 순간 머리에 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바로 가까이에 있던 로버트 카파는 이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것이 제대로 들어맞아 이 결정적 순간의 자면은 [라이프]지에 실려 온 세계에 공개 되었고,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은 하루 아침에 유명해졌다. 이것이 바로 그가 평생 전쟁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운명적인 계기가 되었다.
로버트 카파가 전쟁사진가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있다. 사진가로서 전쟁에 종군한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맡기는 위험한 모험행위이다. 자진해서 줄곧 전쟁터로만 뛰어들어 전쟁사진만 전문으로 찍은 것은 마치 외인부대에 자원한 군인들처럼 모험심에 불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유달리 힘차고 강렬하며 생명감이 넘친다.
그리고 도전과 응전의 팽팽한 대치 속에서 감도는 김박감이 고조되어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험속에 송두리째 내던져서 환기되는 생명적인 충일감이며, 또한 생존 적인 자기확인 행위이기도 하다. 그는 사진가로서 생명들의 결사적인 대결과 충돌의 소용들이 속에 뛰어들어 생명의 역동성과 솟구치는 존재의식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명적 존재의 식에 넘치며,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에서 끈질긴 생명의 몸부림을 하고 있다, 그의 사진은 다른 보도사진가들의 다큐멘터리 사진보다 더 직설적이며 현장성이 강하고 호소력이 있다.
로버트 카파의 남성적이고 능동적이며 대담한 성격은 일정한 직장이나 어떤조직체계에 얽매이기에는 너무나 활달한 것이었다. 그리셔 그는ㅁ 보도사진가로 출발한 처음부터 일정한 언론기관에 속하지 않고 프리랜서로서의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러나 편집자가 주도하는 잡지 제작체계에 그는 많은 제약을 받아야만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 1947년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비드 시무어와 함께 새로운 보도사진의 유통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일종의 사진운고 은행 격인 '매거넘'을 설립하였다. 이 기구는 보도사진가들이 자구책을 모색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적으로유명한 보도사진가들만으로 구성된 엘리트 사진집단이기도 하였다. 1955년 그가 마지막으로 종군한 싸움터는 인도차이나전쟁이었다. [라이프]의 요청으로 현지로 달려간 그는 그해 5월 25일 월맹군이 부설한 지뢰를 잘못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한 살이었다.
로버트 카파는 보도사진가로서의 업적도 길이 남을 만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보도사진의 유통체계를 뒤바꿈으로써 보도사진의 새로운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었다. 그리고 수동적으로 현집자의 기획과 지시에 따라 작업을 해야만 했던 사진가들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보도사진은 보다 더 개성적이고 전문적인 성격을 띠게 만들었다. 로버트 카파는 비록 단명 했지만 정력적이고 강한 추진력으로 많은 사진들을 찍었으며, 보도사진 계에 기여한 공헌 또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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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사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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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는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온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조국에서 쫓겨났고, 타국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의 이런 처지는 그로 하여금 세계 공통의 언어인 사진의 세계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베를린,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Alfred Eisenstaedt)의 암실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등장으로 더이상 베를린에 머물 수 없게 된다. 1933년에 그는 다시 파리로 왔고,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 겔다 타로(Gerda Taro)를 만나게 된다. 포르투갈 출신의 사진작가였던 겔다는 카파에게 있어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무렵 카파가 사진을 촬영해오면, 동생 코넬이 암실 작업을 하고, 겔다가 원고를 들고 잡지사를 찾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1936년,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자 카파는 겔다와 함께 인민전선파에 가담한다. 그는 평생을 종군 사진가로서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나버린 운명적인 삶을 살았다.
로버트 카파와 그의 연인 겔다 타로(Robert Capa and Gerda Taro), 1935년 프랑스 파리, photo by Fred Stein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인 카파의 본명은 안드레이 프리드만(Andrei Friedmann)이었지만, 종군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로버트 카파로 개명하였다. 그가 전설적인 종군기자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36년 스페인내란에서 총탄을 맞아 쓰러지는 병사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라이프>지에 실리게 되면서부터이다.
그의 짧은 생애동안 5차례의 전쟁을 취재했는데, 1936년의 스페인 내란의 촬영을 시작으로, 1938년에는 중일전쟁을 취재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에 종군하였으며, 특히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찍은 사진 연작들은 불후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1948년 팔레스티나의 이스라엘 독립전쟁에도 참여하였으며, 라이프지의 청탁으로 1954년, 5월 25일, 베트남 독립전쟁을 취재하던 도중, 지뢰를 밟아 41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기자 정신, 생사를 돌보지 않는 기자 정신을, 그의 이름을 빌어, 「카파이즘」이라 일컫는다. 카파의 연인이었던, 여성 종군기자 겔다 역시, 스페인 전쟁 때, 탱크에 깔려 사망했다고 하니, 그의 운명적인 삶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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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민전선 병사의 죽음(Republican militiaman (Federico Borrell Garcia) at the moment of death. ("The Falling Soldier" / September 5, 1936.)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 이 사진은 마침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1936년, 그 해 창간된,「라이프(Life)」지에 게재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 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후세에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마치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실제 사람의 본을 뜬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처럼,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실제 사진임이 증명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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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침투 (Normandy Invasion), 1944, 6, 6
오마하 해안 (Omaha Beach), 1944, 6, 6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riedwell.com%2Fphoto%2Fphotographer%2Frobert_capa%2FCitizen_Sharing_Wine_1944_7_28.jpg)
Notre Dame de Cenilly, southwest of St Lô, 1944, 6, 28,
(프랑스의 한 농부가 미국인 병사에게 사이다를 주고 있다.)
![-= IMAGE 1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34%2Ff1%2Fkwons999%2Ffolder%2F3338159%2Fimg_3338159_1240994_0%3F1105096527.jpg)
Meghalni a vegen
바르셀로나 근처 몽블랑(Montblanch. Near Barcelona), 1938년, 10월 25일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연합군에 지원하는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베트남의 하노이 지방 북부, 남딘 (Nam Dinh, South of Hanoi, Vietnam), 1954, 5, 25,
(이 흑백 사진을 찍은 직후, 발 밑에서 지뢰가 터졌고, 로버트 카파는 더 이상 셔터를 누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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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찰나의 거장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소설가, 알베르 까뮈
화가, 르노아르
소설가, 장 폴 싸르트르
미국 재즈 섹소포니스트, Joe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사상가, 수잔 손탁
소설가, 카슨 맥컬러즈
시인, 에즈라 파운드
정신분석, 심리학자, 칼 융
조각가, 쟈코메티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egloos.com%2Fpds%2F1%2F200507%2F16%2F63%2Fb0036363_1820778.jpg)
까르띠에 브레송 ( Henri Cartier Bresson, 프랑스, 1908 ~2004 )
사진의 선승(Zen master) -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Capa said to me: `Don't keep the label of a surrealist photographer. Be a photojournalist. If not you will fall into mannerism. Keep surrealism in your little heart, my dear. Don't fidget. Get moving!' This advice enlarged my field of vision." - Henri Cartier Bresson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을 말하면서 아마도 그의 사진집 제목으로부터 유래된
<결정적 순간 Image a La Sauvett, The Decisive moment>를 언급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까르띠에 브레송은 단순히 <결정적 순간>으로 응축되기에는
그 폭이 너무나 큰 작가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는 사진 예술을 통해 철학(哲學)한 인물이자
후대의 많은 사진 작가들에게 있어 숱한 영감과 감화를 준
위대한 사상가의 풍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가 어떤 말이나 글로 전했다기 보다는
그의 사진작업들을 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진 기자이기도 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과 Image의 추구
까르띠에 브레송은 190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섬유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까르띠에 브레송은 어려서부터 미술을 비롯해 당대의 여러 예술적 경향들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조건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후일 그가 사진 작업을 통해
평생 이미지를 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게 되는 첫 출발점이었다.
그는 처음엔 화가가 될 생각으로 1927년부터 2년 동안 그림을 공부했다.
그는 자크 에밀 블랑슈, 앙드레 로트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초현실파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테리아드 출판사를 드나들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형상(image)의 엄격성에 집중된다.
아프리카에 체류하면서 라이카 카메라를 처음 구입한 그는
멕시코, 미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폴 스트랜드 곁에서 영화를 배우고,
1932년에는 줄리안 레비 화랑에서 처녀전을 열기도 한다.
또 프랑스로 귀향한 뒤로 장 르누아르와 자크 베케르 감독과 함께
영화제작에 참여하기도 한다.
스물 두 살 무렵이던 1930년 마르세이유에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평생 라이카 카메라만을 애용했다.
당시는 중형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가 라이카를 즐겨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르포르타주 사진가로 활동한 사실과도 관련이 깊다.
1932년부터 2년 동안 스페인 지중해 연안, 멕시코, 미국의 각지를 다니면서
각종 사진을 찍었다. <폐허에서 노는 아이들>은 이때에 그가 찍은 대표작이다.
1936년 봄, 그는 파리의 어느 신문사 사진부에 들어가기 위해
입사시험을 보았는데 낙방하고 말았다.
이때 헝가리 출신의 로버트 카파와 데이비드 세이무어도 응시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그날 우연히 들른 어느 카페에서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날의 만남에서 의기투합한 그들은 후일 이란
사진작가들의 연합통신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 역시 프랑스군에 종군하여 영화사진반에 참가했으나
1940년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는 몇 번의 탈출 시도 끝에
1943년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파리에 돌아온 그는 이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했고,
이때부터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가들의 인물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까르띠에 브레송은 전쟁 후에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uge), 루오(Georges Rouault) 등을 촬영하며
예술가의 내면의 깊이를 어떻게 화면에 정착시킬 것인가에 노력을 쏟았다.
종전 후인 1946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열린
그의 작품전을 통해 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듬해인 1947년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 등이 중심이 되어
<매그넘MAGNUM>을 설립하게 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사진기자들의 불안한 지위와 특정 매체(신문사와 잡지)의
틀에 박힌 편집 방향과 포맷으로부터 벗어나 사진가의 개인의 관심과 개성
그리고 자유로운 해석을 보장받기 위해 창립된 사진 에이전시가 바로 <매그넘>이다.
(그러나 이런 매그넘의 경향과 탄생이 현재에 와서도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름인 매그넘MAGNUM이 '크다'라는 의미의 희랍어로
위대한 사진가를 지칭한다고 하지만 이는 동시에 대형연발권총을 의미하는
영어‘Magnum’의 동음이의적 관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의 탄생이 처음엔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었고,
근대성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매그넘은 닫힌 서구의 시각을
그대로 대변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경제적 착취와 기존 매체들의 모든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설립된 국제보도사진가 집단체로 세계에서 가장 실력있는 사진통신사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설립 이듬해 뉴욕에도 사무실을 개설했다.
매그넘의 주요사진가이자 주요 설립자 중 하나였던 카파는
1954년 인도차이나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했고,
침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데이비드 세이무어는 1956년 수에즈 상륙작전 때 사망했고,
베르너 비쇼프는 1954년 페루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러나 이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매그넘이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후로도 주로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젊은 신세대 사진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더욱 규모를 키워나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브레송은 그후 3년 동안 중공, 인도, 버마, 인도네시아, 이란 등으로 여행하여
동양 민족의 생활과 그 풍토를 촬영하였다.
그 사진들은 중공이 정권을 잡기 전후의 민중의 혼란 상태와
인도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태 등을 박진감 있게 표현하여 주목을 끌었다.
이제는 고전이 된 그의 첫번째 대형 사진집은 <재빠른 영상들>(1952)이다.
거의 20여 년간 그는 세계를 누비면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탐방기자로 대접받았다.
그 후 또다시 소련을 여행하며 공산주의 정권 아래의 민중의 일상생활 모습을
촬영하고 발표하는 한편 1955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진가로서는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진가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중량감있는 사진 표현으로 보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만약 그가 단지 그냥 한 명의 충실한 보도사진가라면
그가 지금처럼 유명한 사진작가로 추앙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보다 한발 더 나갔기 때문이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천재성은 매그넘의 모험을 따랐으나
자기 자신은 그보다 더 멀리 앞서 나갔다.
그러나 1933년의 스페인 여행에서 그는 본격적인 르포르타주 사진에 착수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이 두뇌를 써서 사공한 이미지보다 "결정적 순간"의 탐구에
훨씬 재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자의 사진찍는 행위를 가장 완벽하게 정의했던 인물이 바로 까르띠에 브레송이다.
"사진은 어떤 사실의 의미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한순간에 동시에 인지되는 것이다."
현실의 어떤 치밀한 순간을 포착하고 또 형태들이
함께 어울리도록 하는 데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이미지에서는 다소 차가우면서도 섬세한 멋이 나며,
그것은 찬양도 비판도 아닌, 단지 현실을 꼼꼼히 분해하고
거기에 어떤 스타일을 결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르포르타주는 승리를 거두고 있으면서도,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하는 사진가와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념적 체제 사이의 분열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불과 극소수의 작가들만이 가장 생생한(거친) 사실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표현 욕구에 제동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로 연출하지 않고, 트리밍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삼았다.
1952년 출판한 그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에서 그는 자신의 사진미학을 권두에 밝혀두고 있다.
그는 촬영 대상의 움직임 중 가장 좋은 순간을 가장 적절한 시간에 포착했다.
이를테면 그는 피사체에게 '아, 좋아요. 잠깐 거기 멈춰 서세요.'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에게 있어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적인 것이 아니고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그는, 촬영하는 동안 현실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되며,
실제의 자연광을 존중하지 않고서 플래시 라이트의 도움을 받으면
어떤 사진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사진찍히는 사람이 카메라나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고,
복잡한 장비나 반사판 등 사진을 찍기 위해 필요하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여러 기자재들은 멋진 작품을 만드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현상, 인화 과정에서의 조작과 사진을 트리밍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또한 그는 카메라의 앵글의 변화들을 통해 강조를 주고
주의를 환기하는 형태의 촬영에 반했고, 광각이나 망원렌즈로 촬영하는 것도 되도록 멀리했다.
그는 또한 칼라 사진에 대하여, 흑백사진에 의해 포착되는 삶의 움직임과
성취감을 손상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왜 트리밍조차 거부했는가?
까르띠에 브레송에게 있어서 사진은 일종의 구도(求道)와 같은 것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많은 사진작가들(드니 브리아, 마이너 화이트 등)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사수가 과녁을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자신과 과녁 사이의 거리를 재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과녁에 동화시킴으로써 과녁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진가는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다만 사물들의 존재만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연과 구성 사이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는 카메라를 자신의 눈의 연장으로 인식하고 마치 시선을 따라 사물이 보일 때
그것을 마음에 담는 기분으로 카메라를 조작했다.
그는 우리의 시선이 대상을 보이는 데로 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인위적으로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조작할 수 있는 수단의 절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진을 마치 불교의 선승이 도(道)에 이르는 과정과 흡사한 것으로 변화시켰다.
선승이 순간의 직관으로 도에 이르는 것처럼
그의 카메라 역시 순간으로 승부를 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직관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거기에서 '본질'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에게 사진의 시각적 구성이란, 사진가 자신의 감각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사라진 세계에서 이미지라는 도(道)를 추구한 철학자였다.
그는 당대의 많은 유명인들을 촬영했으나 정작 자신은 사진에 찍히기를 달가와 하지 않았고,
자신의 작품에 표제를 달지 않으려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엔 때와 장소만 있을 뿐 제목이 없다.
그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스쳐 지나가는 실재의 외관에 모든 능력이 집중되는 순간에 숨을 죽이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고, 그 순간이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나타난 순간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주위와의 관계와 광선 등의 상태까지 포함해서
'광선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된 순간'
즉, '대상과 촬영자의 내부의식의 일치'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사진가협회, 독일사진가협회등으로부터 문화상 등 많은상을 받았으며
1975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사진의 선승(zen-master)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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