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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얘기 문간 스크랩 공수부대 장교가 체험한 光州사태
鶴山 추천 0 조회 115 15.11.28 06: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갑제닷컴

 

 

“아저씨, 광주 시민 다 죽이러 왔죠?”

 

[공수부대 장교가 체험한 光州사태 ①] 광주 시민들을, 무리하게 진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李正湜(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李正湜(1957~)

경북 영주 生으로 1979년 홍익대학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BFA)하고, ROTC 17기로 임관해 1179부대(11공수여단) 장교로 복무했다.1982년부터 1984년까지 중앙대학교 부속중학교 미술교사를 지냈고, 1986년 홍익대학 미술대학원 졸업 후 渡美(도미)했다. 1993년 뉴욕 프렛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 미술대학원 판화과 졸업(MFA)하고 미국에 정착, 현재 美 펜실베이니아주에 거주.



갑자기 하늘에서 못을 박는 듯한 울림이 들려왔다. 쿵…쿵…쿵. 이내 잦아지는 타닥거리는 종소리…. 넘어온 함성을 향해 타들어 간 불꽃. 그해 5월은 유난히 더웠다.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경 광주 금남로 전남도청 앞에선 수십 만의 군중과 1000여 명의 공수부대 간의 대치가 아침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철수 시간을 넘기자 폭도들은 화염병 투척과 동시에 차량으로 돌진해 군인을 깔아 죽이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약 50m 뒤에 포진하던 63대대와 戒嚴司(계엄사)에서 파견된 장갑차(APC)에서 중기관총(M2 Cal. 50)이 먼저 발사됐고, 이어 M-16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이 사격의 성격이 정당한 방어 사격인지 아니면 시민을 살해한 蠻行(만행)인지를 밝히는 것에 ‘방점’을 찍으면서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위로금

 

1979년 봄, 저는 홍익대를 졸업하고 ROTC 17기로 임관 후 광주 보병학교로 갔습니다. 초급간부 교육은 여러 교관으로부터 배우는 군사 지식과 다양한 체험으로 유익했던 성장의 시기였습니다. 독도법 시간 중 야외훈련이 있을 때 分隊員(분대원) 전원이 푸릇푸릇한 보리밭을 지나며 가곡 보리밭(윤용하 곡)을 합창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본 南道(남도)의 봄 언덕과 밭 풍경들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3개월간 교육이 끝나는 마지막 주에는 自隊(자대) 배치가 이루어집니다. 공수부대는 自願(자원)과 差出(차출), 두 가지 경로가 있는데 보병 병과 1800여 명 중 약 90명이 선발됩니다. 이 중에 50명 정도가 차출되니 ‘운이 없으면 끌려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1개 분대가 8명인데 당시 이런 억울한 차출을 위해 보험을 만드는 게 관례였습니다. 즉 1인당 1000원을 내어 공수부대로 가는 장교에게 8000원을 만들어 위로금으로 지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차출되었지만 전부터 막연하나마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ROTC 15기였던 같은 과 2년 선배도 차출된 적도 있고, 또 2년 후에는 후배가 차출되기도 했습니다. 중대 산악구보에서 4등으로 들어온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 거란 추측을 합니다. 2주에 걸친 유격 훈련 중 막바지에 실시하는 완전 무장 산악구보는 훈련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성적이 좋을수록 공수부대로 차출되는 비율이 높아진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선지 구보 당일, 산 정상에서 필요 이상 오래 휴식을 취하는 건장한 동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퇴교 전날 밤에 알게 된 특전사 차출자 명단을 보니 우리 분대는 8명 중 4명이나 가게 되었습니다. 보험금도 2000원으로 줄고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각자 스스로 위로하고 말았습니다.


공수부대 11여단 62대대에 전속

1979년 가을쯤 特殊戰(특수전) 교육을 마치고 11여단 62대대에 배치됐습니다. 전입된 지 채 한 달도 안 돼 4주간에 걸친 야외 유격훈련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일주일은 千里(천리)행군으로 부대에 복귀하는 것이었습니다. 천리행군 도중에 철책선 근처에 무장공비 출현이란 돌발 상황을 맞아 긴급복귀 명령으로 3일치 행군을 이틀 만에 끝냈습니다. 마지막 코스인 춘천에서 화천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도로가 아닌 계곡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날은 대대장님도 군장을 메고 앞뒤로 다니면서 행군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자정이 지나자 지친 병사들이 많아 隊伍(대오)를 유지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틀간 잠을 자지 못한 탓도 있고 좁고 어두운 길에서 부대원이 섞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몽사몽 길을 걷다 간신히 고개 정상에 도착했지만 내리막길에선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만 걷는 듯했습니다.

아침이 오고 부대 막사가 멀리서 신기루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단에서 보내준 군악대와 군인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연병장에 정렬하게 되었습니다. 부대원들은 다 끝났다는 안도감에서 왁자지껄 정신줄을 놓고 있었습니다. 대대장님이 사열대에 올라왔는데도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는 사람, 옷을 벗고 떠드는 사람 등 거의 난장판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때 대대장님이 육사 출신 대위인 선임 중대장을 불러올리더니 ‘엎드려뻗쳐’를 시킨 다음 지휘봉으로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더니 베레모를 바로 쓰고 줄을 정렬하고 한마디 말도 하지도 않았는데 부대가 훈련 출발 前 부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대신 맞았다면 그런 효과가 나지 않았겠지요.

1980년 봄이 되면서 폭동 진압훈련이 시작되었는데 개인적으론 하루 8시간 태권도 하는 것보단 수월한 교육이었습니다. 전문 교관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각 지휘관이 敎範(교범)을 봐가면서 즉석 교육을 했습니다.

포승줄을 맬 때는 어떻게 한다는 수준이었지, 포승을 거부하고 반항할 때 조치에 관한 건 교육해 본 적도 없고 잡아들인 폭도에 대한 관리 같은 건 아예 교범에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대규모 군중을 상대로 편제를 유지한 대형 훈련이나 선동에 대한 심리적 방어훈련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역대 단위 대형을 이뤄 진압하는 훈련은 했지만, 돌이 날아오면 그에 대한 방비나 분산 이후 再편성 관한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장비도 지급되지 않아 진압봉은 산에 가서 물푸레나무를 구해 춘천에 있는 목공소에서 주문 제작했습니다. 안면을 보호하는 防石網(방석망)도 철공소에서 만들었는데 비용은 모두 개인 부담이었습니다. 부대유지비를 서서 장구를 마련할 경우 손실·분실에 대한 책임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방석복이나 방패는 생각지도 못할 장비였습니다. 훈련이나 장비, 전술구사 면에선 전투경찰 수준도 못되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광주行 특급열차

서울 근처로 이동하여 공수1여단에서 며칠 대기하다가 5·18이 확대되자 동국대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곳곳에 걸려있는 현수막엔 붉은 페인트로 전두환을 비난하는 큰 글씨들이 피 흘리듯 쓰여 있었습니다. 동국대는 학생들과 큰 마찰이 없이 조용하게 접수했습니다.

오후가 되니 광주가 조용치 않다고 해서 61대대는 비행기로 62, 63대대는 기차로 이동했는데 중간에 한 번도 멈추질 않았던 특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차를 타기 전에 집에다 공중전화로 광주로 가게 됐다고 알렸습니다. 안 알리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광주 뉴스가 있을 때마다 온 가족이 저를 걱정하느라 노심초사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새벽에 광주에 도착한 후 조선大에 군장을 풀고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게 됩니다. 아침에 한 트럭 당 20여 명을 태우고 시내로 威力(위력) 시위를 합니다. 차가 여러 곳을 돌아서 충장로에 이르자 일단의 대학생들이 投石(투석)하기 시작합니다.

방석망이 없는 선두 차량인 대대장 차에 돌이 날아들자 대대장 이재원 중령이 지휘봉으로 뒤에 따르던 저희에게 “잡아라”하고 명령했습니다. 갑자기 막연하지만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불안감이 스쳐 갔습니다. 이때 폭도를 진압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 구체적 방법은 내려온 적이 없었습니다. “때려라” 혹은 “절대 때리면 안 된다”란 것 중 어느 쪽의 지침도 없었던 것입니다.


구타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트럭에서 내렸지만 제가 저의 대원을 장악하기도 전에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고의로 2, 3명씩 조를 짜서 푼 게 아닙니다. 학생들도 군인들이 달려오자 도망을 갔습니다. 그들은 이곳 지리를 잘 아니까 쉽게 도피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시민들이 2층 창문에서 군인들에게 욕과 야유를 했습니다. 광주 시민 입장에선 전날 공수7여단의 과격 진압을 경험해 보아 분노를 숨기지 않았지만, 11여단은 오늘 새벽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투입된 지 10분도 안 되었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욕을 먹는 것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여관으로 달아난 한 학생을 따라가 보니 입구에서 일하는 청년들과 다투고 있었습니다. 공수부대원은 여관 안으로 달아났다고 말하나, 그쪽에선 학생들이 들어온 적이 없다 하니 거짓말한다며 구타를 하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대학생들은 못 잡고, 일하는 청년들만 다그치고 일부는 거리로 끌고 나오게 된 겁니다. 근처 시민이 말리거나 비명을 지르면 그쪽도 때리게 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다방에 들어간 학생을 따라갔을 때도 주변의 손님들이 수색에 대해 非협조적이었으며 오히려 비난과 항의로 반발할 때 공수부대가 할 수 있는 건 구타 밖에 없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국가안전에 마지막 보루라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기에, 광주 시민들의 반응을 두려워하기보단 그들의 냉소와 비난에 대한 분노도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너희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는 원망이 뒤섞여 무고한 시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주변을 무차별 구타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술기운이나 약 기운 탓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이런 난폭함에 겁을 먹고 사태가 진정되길 바라는 단순하고 일방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 봅니다. 그러나 일부 과격 학생들의 시위는 이미 구타로 통제하기엔 그 수위를 한참 넘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광주 시민 다 죽이러 왔죠?”

점심 시간쯤에 조선大로 철수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있을 무렵 시내에서 시위대의 방화로 건물이 불타오르자 밥도 대충 먹고 다시 출동하게 됩니다. 이때는 부대를 유지했습니다. 오전과 마찬가지로 저항하는 학생과 폭력을 휘두르는 시민들의 색출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상황은 오전과 달랐습니다. 시민들의 반응이 더욱 사나워진 걸 느꼈습니다. 욕설과 비난은 물론이고 投石도 심해졌습니다. 개인행동에 제한을 느낄 정도로 적대적인 감정을 느꼈습니다. 저녁에 길바닥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장독대에서 어린 학생이 내려다보며 “아저씨 광주시민을 다 죽이러 왔죠”하고 묻길래 시민이란 말이 거슬려 우리는 국민이 보내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계엄군과 시민들간의 상호불신의 온도 차는, 어른과 아이를 막론하고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날 밤은 조선大로 못 돌아가고 체육관에 모여 잤습니다. 당시 기록된 수첩을 보면 지휘관들의 무능한 대처를 탓하는 대목이 많지만, 저 자신을 포함한 장교들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敵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시민에게 총이 아닌 무기로 싸워 보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반 년 전에 있었던 釜馬(부마)사태는 해병대가 진압할 수 없었던 곳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과격한 폭력으로 진압에 성공했을 뿐, 그것이 광주에서도 통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해서 진압이 안 되었을 때 대비할 수 있는 차선책은 전혀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아울러 폭도를 敵으로 규정하거나 발포를 포함한 모든 조치에 책임감과 도덕적 비난을 감내할 만한 명령권자가 없었다는 점도, 무능한 작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공수부대가 전투경찰보다 못한 작전을 하게 된 배경은 목표도, 과정도, 책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광주를 손봐야겠다는 신군부의 계획이 없었음을 反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5월20일은 가능한 폭력 행위를 삼가고 금남로를 중심으로 사람들의 통행을 차단한다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과격한 구타를 한 지 단 하루 만에 宥和(유화) 작전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일부 시민들은 박쥐 마크(11여단)는 좀 덜하다는 식의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은 “왜 갑자기 부드러워졌지?”라는 뜻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우리 地隊(지대)는 우체국과 농협을 중심으로 차단작전을 실행했지만, 大路(대로)가 아닌 길 안쪽으로 들어가면 화난 시민들이 노골적인 공격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공수부대원이 대여섯 명 몰려있으면 몇 십 명이 둘러싸고 발길질하는 경우도 있었고, 오토바이로 군인을 치고 달아나면 둘러싼 군중들이 박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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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원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아스팔트 열기에 익어 버렸고…

 

[공수부대 장교가 체험한 光州사태 ②] 시민도, 군인도 죽고 다쳤지만 비난의 화살은 우리에게만 쏟아졌다.

 

李正湜(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공수부대의 도덕적 책임

저녁이 되었지만, 식사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상황의 심각성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을 각자 해결해야 하니 밥을 사 먹는 대원도 있었으나, 어떤 식당은 판매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밤이 되면서 금남로는 시위대와 공수부대 간에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그들은 投石(투석)과 자동차를 앞세우고 수백 명씩 돌진하는 등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數的(수적)으로 우세해 휴식을 취하면서 공격하는 시위대와 빈 총을 들고 진압봉 하나만으로 버티는 공수부대원과는 사기에 있어 많은 차이가 났습니다.

저도 돌진했다가 옆 골목에서 갑자기 나타난 시위대에 갇혔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 소강 국면에 이르자 서로 소리만 크게 치는 양상이 되었습니다. 밤에는 소리만 전달되니 진압봉이 부러졌을 정도로 쓰레기통, 드럼통을 두드리다 탈진이 되고 말았습니다.

5월20일 저녁까지 시민군 측은 사망자 4명과 다수의 부상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5월18~19일까지 군인들의 일방적 구타에도 불구하고, 사상자가 적었다는 것은 머리가 터지고 칼에 찔렸다는 표현이 난무했던 것에 비하면 예상 밖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군인들이 着劍(착검)한 것은 보았어도, 시민군을 겨냥해 帶劍(대검)을 사용하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

이○○ 목사은 자신의 手記에서, 중사 한 사람이 20명을 찌른 뒤 자랑했다는 식으로 써놓았습니다. 그게 그렇게 흔한 일이었다면, 刺傷(자상)에 의한 사망자 수가 많이 나왔어야 할 것입니다. 5·18 全 기간 동안 刺傷으로 인한 시체는 10구 내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공수부대가 原罪(원죄)처럼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는 성공하지 못한 작전으로 인해 구타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을 施展(시전)한 것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입니다.


구타 명령 받은 적도, 내린 적도 없다

5월19일 공수부대원의 폭력 행위는 각자 의식과 판단에 따른 것으로, “강압에 의한 마지 못한 행위”였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폭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구타를 했을 것이고, 반대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누구에게도 구타 명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구타하라고 명령을 내린 적도 없습니다. 이런 변명이 군인으로 책임 회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누구는 이같은 일종의 放任(방임)이 고도의 계산된 것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과 무차별 폭력 행사는 의도된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공수부대원이 일반인보다 거칠 수는 있지만, 폭력으로 생활하는 깡패 집단은 아닙니다.

최소 학력이 고졸이며 같이 참가한 ROTC 16기 선배 이○○ 중위는 부친이 미국 대통령과 사진을 찍을 정도로 유수의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저와 미혼 장교 숙소(BOQ) 룸메이트였던 송○○ 중위는, 조선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와 조선대를 졸업한 단축 마라톤 선수였습니다. 그는 충장로에서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인사하고 다니기 바빴습니다. 조직적 학살 음모가 있었다면 이들 중 누구는 지금쯤 양심선언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례가 있다는 걸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5월21일 새벽이 됩니다. 광주사태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떠오릅니다. 5·18의 꽃이자, ‘東學(동학) 亂의 전봉준’과 대비되는 전 모 여인이 등장합니다. 확성기를 통해 가두방송을 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제 생각엔 그 여인이 없었으면 5·18은 釜馬사태처럼 데모의 주동자인 학생들이나 反체제 정치인, 일부 불만을 가진 시민들의 참여로 흐지부지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과격진압에 대한 항의로 10만 명이 이상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5월21일 공수부대의 발포로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이에 대한 항의 집회는 대규모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공수부대가 떠난 탓도 있겠으나 전○○와 같이 시민을 모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주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마치 화약이 타들어 가도 뇌관이 없으면 폭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文人들이 즐겨 표현하는 ‘금남로에서 자유와 민주 시민 물결’은 전○○의 개인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군중을 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며칠 뒤 이 전 모 여인은 광주 시민들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격리,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5·18과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는 무관

전○○가 광주 시민이 생각했던 것처럼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이었다면, 북한의 특수군 침투를 사실로 볼 정황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5·18은 북한과 직접 연관이 없다고 보는 게 상식입니다.

5월22일 이후부터 광주에선 계엄사 소속 보안부대원들의 宣撫工作(선무공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자기 신분이 노출되는 걸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고정간첩이나 미리 南派(남파)된 요원의 정찰, 상황보고, 유언비어 살포 등 보이지 않는 지원과 선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두 집단 간의 활약 차이에서, 보안부대는 사태를 줄이려고 작전했지만,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사건의 확대에 있었을 것입니다.

개인적 판단으론 공수부대와 한 번도 접촉하지 않은 특수군-광주사태를 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된-의 존재를 600명씩이나 인정하기보다는 아예 한 명도 없었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실제로 그런 정황은 본 적도 발견된 적도 없었습니다.


태극기 덮은 시체 앞세워 선동

새벽 무렵 시민들은 손수레에 태극기를 덮은 시체 두 구를 앞세우고 등장합니다. 장비라곤 보조하는 사람 몇 명과 앰프, 손에 든 마이크가 전부였습니다. 공수부대가 포진하고 있는 전면 10m 앞에서 광주 시민을 깨우기 시작합니다. 태극기를 덮은 시체를 보니 제 자신도 우리가 잘못한 것처럼 당혹스러웠습니다.

누가 애국자인지 누가 폭도인지 혼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전○○로 추정되는 여인은, “강릉으로 약혼여행 중이었지만 동생이 시위 도중 맞아 죽었다 해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당시는 약혼여행 같은 걸 잘 가지 않을 때라 별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누나가 있기에 ‘만약 내가 죽었으면 우리 누나도 그랬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 5층에 애기가 우유를 먹다가 최루탄 연기에 질식했다”, “지금 공수부대원이 광주 사람을 다 죽이고 있으니 궐기하라”고 시민군이 만들어 내는 즉석 멘트(약간은 선동에 가까운)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활화산 같은 시위대의 에너지는 주저하는 자에게는, 시위에 참여해야 할 것 같은 욕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이런 선동이 약 10시간 이상, 오후 1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이 모여 들기 시작, 100명에서 1000명, 만 명을 넘어 10만이 됩니다. 차량도 수백 대 규모로 불어나고 폭도들은 군인들을 향해 힘으로 위협을 가했습니다. 몇몇 학생과 시민들은 폭도와 공수부대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었습니다.

12시를 넘어서자 군중은 10만을 넘어 거친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전○○는 공수부대를 지켜주는 방파제가 되어 언제 넘쳐날지 모르는 쓰나미를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규모 群集(군집)의 우레와 같은 함성은 10만 개 이상의 축전지가 되어, 폭도라는 선풍기를 돌려 그 앞의 모든 것을 쓸어내려 하고 있었습니다. 폭풍과 쓰나미의 조합 앞에 공수부대원은 육체적·정신적으로 이미 지쳐 있었습니다.


인간의 야수성

여기까지는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전○○와 시민들은 원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었습니다. 市長(시장) 나오라고 하면 시장이 나와야 했고, 道知事(도지사) 나오라고 하면 도지사가 나와야 했습니다. 그들 중 누군가 시민 쪽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들은 목숨을 건 베팅을 시민 쪽에 다 걸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공직자인 그들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수부대장 나오라면 선임 61대대장(安富雄 중령)이 나와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주된 것은 조선대학교 內에 억류된 시위자 석방과 공수부대 철수에 관한 것이었는 데, 시위대는 이미 다 석방되었을 때이고 병력 철수 문제는 여단장(崔雄 준장)이라 한들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폭발하는 상태라 중압감이 많았을 텐데 당당하게 잘 대처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철수 문제를 상부에 전했지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철수 요구 시간인 12시를 넘기고 말았습니다. 계엄사령부는 진압을 포기하고 철수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현장이 얼마나 급한지 실감을 못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청 앞은 수 만의 시위대로 인해 헬기 이외엔 출입이 안 될 정도로 고립된 상황이라 단편적인 無電(무전) 정보로는 적절한 판단을 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대원들은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습니다. 폭도들은 트럭 위에서 얼굴에 치약을 바르거나 숯을 칠하고, 두건을 쓴 채 긴 막대기에 쇠갈고리, 낫, 식칼 등을 묶어서 눈만 뜨고 졸고 있는 공수부대원 머리 위를 향해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맞서 빈 총을 들고 있는 초라함은 상대방이 도발하도록 자극하는 꼴이었습니다. 약하게 보이면 용서를 하는 게 아니라 밟게 되는 인간의 야수성이 나타나는 건 당연했습니다.


시민군 장갑차의 등장

이와는 별개로 양쪽 편 건물에서 계속 던지는 돌멩이를 피하고자 뒤로 후퇴를 거듭하고 분수대 쪽으로 계속 밀리고 있었습니다. 광주 주변 도시에서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도착할 때마다 소개를 하고 군중들은 환호를 외쳤습니다. 드디어 아세아 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장갑차와 군용 트럭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정규 군인이 참여한 것으로 오해, 무척 당황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시민들과 공수부대와 폭도 사이에 앉아서 완충지대 노릇을 하던 대학생 그룹은 사라졌습니다.

1시가 넘어서자 도로 우측 나무 위에서 화염병이 날아와 우리 측 장갑차 상단에 맞아 불이 붙었습니다. 운전병이 장갑차 안으로 들어가 갑자기 後進(후진)을 했습니다. 그 빈틈 사이로 폭도들의 장갑차와 군용트럭들이 몰려왔습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 차례대로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파도가 흐르듯 자연스레 덮쳐들어 온 것입니다.

前列(전열)에 있었던 61대대, 62대대 요원들 약 500명은 차를 피해 양쪽 옆 건물 쪽으로 피하게 되었습니다. 바닥에 돌이 많아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최루탄 연기로 앞도 안 보이니 방독면도 벗어젖힌 후 서로 밀치며 대피해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장갑차에 머리 눌린 공수부대원

도청 쪽에서 갑자기 큰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하늘을 향해 쏜 후, 나중에는 직접 장갑차를 향해 쏜 것입니다. 곧이어 M-16 소리가 처음에는 두세 명이 쏘던 것에서 여러 명이 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 틈에 도로를 따라오다 보니 공수부대원 한 명이 장갑차에 머리가 반합 크기만 하게 눌려 있고, 그 주위로 피가 나와 검게 굳어져 있었습니다. 흘러나온 피는 금세 검붉은색으로 바뀌었고, 아스팔트 열기로 달걀부침 같이 두텁게 익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체를 치울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담벼락 아래로 피한 후 실탄 한 클립(10발)을 손과 손을 통해 전해 받았습니다. 무척 빠른 속도로 장전 후엔 마음속으로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그 사이 장갑차가 분수대를 돌아 다시 돌진했고, 트럭과 버스들의 돌진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차량에 대한 중기관총 사격이 있고 난 후 공격행위는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전방을 보니 63대대 대원들이 부처님 오신날 봉축 광고탑을 쓰러뜨린 후, 수십 명이 應射(응사) 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대 쪽으로 이동하여 분수대 물로 얼굴과 손은 물론, 군화를 벗고 발까지 씻었습니다. 누군가 지친 몸을 물가로 데려가 쉬게 하는 듯 시원하고 산뜻했습니다.

63대대 출신 이○○ 목사의 手記를 보면, 5월21일 도청 앞에서 장갑차가 돌진할 때 공수부대원은 서 있지 않아 다친 사람이 없었고, 죽은 공수부대원은 군인들의 장갑차에 당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반면 시민군이었던 이○○ 씨 手記를 보면 “왕창 밀었다”는 표현을 합니다. 밀려면 밀어야 할 대상이 있는 게 맞을 것입니다.

63대대는 後衛(후위)로 도청 쪽에 있어 前方(전방)에 있던 61, 62대대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증언 내용이 사실인 양 주장하는 것은 그 증언의 동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목사 手記는, 개인 감상이란 점도 문제지만 사실에 입각한 다른 증언을 무력화하는 데 종종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의 증언도 많이 있었음에도, 목사라는 직분이 주는 신뢰감 덕분에 手記 내용이 양심 고백을 넘어 진실처럼 각인된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폭도에 의한 교도소 습격이 당시 부대 日誌(일지)에도 기록된 사실임에도, 이후 교도소장의 否認(부인)이 있으면 사실 여부와 별개로 교도소 습격 사건은 軍에 의한 조작으로 치부되는 것입니다.


理想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던 실제 현장

잠시 후 높은 건물이 많은 곳에서 낮은 곳에 포진하는 게 위험하다 느껴 지역대는 가까운 수협 건물로 올라갔습니다. 건물 속에서 四周(사주) 경계를 하면서 쌍방의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일제 사격이 있고 난 후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시민군의 총기 발포는 군인들 발포 이후에, 총기 탈취는 오전 쯤 防産(방산) 물자를 탈취할 무렵 시작된 듯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반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5월21일 도청 앞 발포로 생겨난 사상자 가운데 M-16으로 인한 사망자가 수십 명에 그친 것은 그나마 절제된 사격의 결과라 말할 수 있습니다. 10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10만의 군중을 조준사격만 했다면 몇 배의 사상자가 나오는 게 정상일 것입니다.

혹자는 돌진하는 차량에만 사격해야지 무고한 시민에게 발포는 학살이라는 데, 이건 마치 미국이 原爆(원폭)을 터뜨려 일본 국민을 죽인 걸 비난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듯합니다. 군인만 죽이고 군사시설만 폭격해야 함에도 민간인을 겨냥해선 안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건 실제 전쟁의 잔혹함과 의외성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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恐慌(공황)에 빠진 공수부대, ‘최후의 전투’에 임하다-

 

[공수부대 장교가 체험한 光州사태 (끝)] 거의 알려지지 않은, 5월21일 오후의 금남로 앞 대치상황을 직접 그려보았다

 

李正湜(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죽음의 소리’, ‘구원의 소리’

전남도청 앞 발포사건도 그러합니다. 시민에 대한 무자비한 조준사격이라는 관점도 있고 갑작스러운 폭도들의 공격으로 국가에서 파견된 군인들이 죽어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그날 울린 총소리가 시민의 생명을 빼앗은 것일 수도 있지만, 저의 할머니 귀엔 외손자의 목숨을 구한 구원의 종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종소리에 점 하나를 찍으면 총소리가 되는 묘한 울림이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5·18에 대한 광주 시민의 심리적 자부심의 근거는 10만 이상의 군중의 결집해 시위한 점과 200여 명의 사상자에 대한 책임 요구로부터 나온다고 봅니다. 하지만 5월21일 발포사건에서 발포 책임자를 찾을 수 없다는 조사결과가 도청 앞 발포 사건의 정황을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달리 말해 對峙(대치)의 긴장을 깨뜨린 후 군인을 깔아뭉개고 사태의 판을 키운 건 폭도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즉, 200여 명 사상자가 발생한 직접 원인과 책임은 화염병을 던지고 차량 공격을 시도한 폭도들의 경솔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면 발포 책임자와 발포자를 찾아내 처벌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5월21일 오후의 금남로 앞 상황

 
그러나 천천히 보면 그 당시 차량 공격이 없었어도 시위대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을 것이지만, 반대로 방어사격이 없었다면 다수 공수부대원의 피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차이가 대량 인명손실에 대한 책임소재를 가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궁지에 몰린 공수부대원의 이유 없는 총질에, 분노한 군중이 무장 대응으로 맞서는 용기’라든지 ‘어떻게 군인이 민간인에게 총질할 수가 있는가’하는 것들은, 시위대와 공수부대원 간에 최전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데서 오는 반응입니다.

의아한 것은 그 주위엔 제법 많은 수의 내·외신 기자가 있었는데, 중요한 현장인 5월21일 오후 1~2시를 담은 현장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후 1시 상황을 기억에 의존해 다음과 같이 그려봤습니다. 개략도이기에 생략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상상화는 아닙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전날(5월20일) 사진이나 5월21일 오전 사진보다 더 정확한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사본문 이미지


금남로는 중심도로고 兩(양) 옆에는 많은 좁은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차량이나 인원이 쉽게 모이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차량시위 때도 뒤에 있는 차들은 돌아 앞쪽으로 이동하곤 했습니다. 장갑차를 비롯한 군용 트럭들이 제일 나중에 도착했음에도, 맨 앞쪽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옆 도로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전남도청 앞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로터리이기에 장갑차가 돌진한 다음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온 뒤 재차 돌진했습니다.

5·18기념재단이 주장하는 ‘10시30분에 실탄 받은 대원 맨 앞으로 교체’, ‘애국가가 울리면서 일제사격’과 같은 내용이 사실인 양 계속 유지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차량 돌진 당시 공수부대의 혼란 상황을 공식적으론 ‘장갑차 1대 도청 광장으로 기습 진출’이라 썼는데, 이런 한 줄로 다 설명할 수 없는 恐慌(공황)이 공수부대 내부에 있었습니다.


공수부대를 휩쓴 10만의 격랑

한 예로 62대대 5지역대 6중대장이 심각한 위협을 느낀 나머지 民家(민가)로 잠입 피신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약 3주간 광주 시민이 그를 보살펴 주었고 광주가 완전히 평정된 뒤에 부대로 복귀하게 됩니다. 또 병사 1명은 무등산 軍부대로 피신했다가 1주일 뒤에 복귀했습니다. “장갑차 한 대가 기습 진출했다”는 내용과 “중대장과 병사가 현장을 이탈했다”라고 하기보다는 이미 사기가 瀕死(빈사) 상태에 이른 시점에 10만 명의 激浪(격랑)이 쓰나미처럼 공수부대를 쓸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들이 느꼈던 공포와 혼란에 대해 “이게 무슨 당나라 군대야?”라고 이 비웃을 수만은 없을 겁니다. 이와 관련해 상부에선 戰場(전장) 이탈이나 지휘 소홀에 대해 책임 추궁이나 처벌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군인들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불가항력적 상황을 참작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1시30분경 차량 돌진이 뜸해진 가운데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시위대 중 한 명이 두 팔로 욕을 만들어 하자 누군가 사격을 해 고꾸라졌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기어 나와 쓰러진 사람을 부축해 들어갔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누구는 그런 非이성적인 행동은 自衛(자위)를 넘어선 범죄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총을 쏘고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선생, 사람 죽여 봤어요?”

제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일입니다. 아버지뻘 되는 윤리 선생님이 저에게 묻습니다.
 “이 선생, 광주 다녀왔죠.”
 “예.”
 “사람 죽여 봤어요?”
 “선생님이라면 그런 경우 죽이겠습니까?
 “아니, 제가 왜 죽여요?
 “선생님이 안 죽일 거라면, 저는 왜 죽인다고 생각하세요?”
 “아이! 그때 사람이 많이 죽었다니까 그러는 거죠.”

많은 사람은 자신은 善하고 이성적이어서 그런 상황에서 객관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에 처하면 생각과는 달리 혼돈의 연속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모두는 그 자리에 각자의 맡은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점차 시민들이 敵으로 보여…

5월21일 오후 공수부대는 수협 빌딩에서 조선大로 이동하면서 작은 골목길을 건너면서도 위협사격을 하며 철수합니다. 몇몇 대원들의 공포와 분노가 서린 총질이었으나, 막는다고 시민들이 들을 단계는 이미 지난 뒤였습니다. 그건 광주 시민을 시민에서 폭도, 폭도에서 敵으로 간주하는 순간처럼 보였습니다.

저녁을 먹고 조선大를 이탈한 후 안전지역을 향해 출발했지만, 목적지의 地名(지명)도 좌표도 몰랐습니다. 대대 작전참모가 지도 한 장 가지고 자기만 따라오라는 데, 그것도 밤에 산길을 1열 종대로 300여 명이 이동하는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단지 2~3시간 행군하면 도달할 거리라고 해서 군장도 대충 꾸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저녁 10시 쯤, 계획에 따르면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야 할 시간임에도 行軍(행군)이라기보다는 멈춰 대기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탓에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제 바로 앞의 병사가 총을 배낭에 걸어둔 채 앉다가 실탄이 장전된 총이 땅에 닿는 충격으로 발사되었습니다.

내 귀에서 1m 정도 거리에서 하늘로 발사된 총소리에 근처에 있었던 대원 모두가 놀랐습니다. 우리의 위치가 폭로되자 잠시 후 산 아래서 차량 소리가 나더니 우리 쪽을 향해 기관총을 무작위로 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멀리 있어 보이지 않았기에 應射(응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폭도들의 차량이 철수한 뒤 행군이 계속되었으나, 그건 행군이라기보다는 조별 각개 약진이었습니다. 목적지도 모르는 밤길 기차놀이는 작전참모와 대대장님마저 각각 분산되었습니다.

敵이 추적해오는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주변의 敵이 어디쯤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행동은 제약이 많았습니다. 또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이유는 낮에 있었던 발포로 인한 당혹스러웠던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탓인 듯했습니다. 대대장님도 본인이 월남전도 참전해 봤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 겪는다고 했습니다.


피신가던 학생들

개인적으론 이날의 철수과정이 광주에서 수행한 작전 중 가장 미숙하고 부끄러운 작전으로 기억됩니다. 결국 2~3시간이면 갈 수 있다는 길을 자정을 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물론 도착한 곳이 원래 계획한 곳에 제대로 온 것인지 누구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묘지 근처에서 눈을 붙이다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5월22일 아침이 되자 주변이 갑자기 소란해졌습니다. 두 명의 청소년이 멈춰 서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논을 가로질러 도망을 갔고, 대원 한 명이 따라갔습니다. 잠시 후 앞쪽에 숙영하던 대원이 한 발을 쏘았고, 달아나던 한 명이 쓰러지자, 그 바람에 놀란 나머지 한 명이 도망을 포기한 후 생포되어 대대장님 앞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고등학생이기에 대대장님의 간단한 심문이 있었던 후 제가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은 친구 사이로 광주가 안전치 않다고 판단해 친척 집에 피신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운이 없게도 야산의 군인들 숙영지 앞을 지나다 멈추라는 소리에 당황해 도망가다 당한 경우였습니다. 책가방 속에는 수학 연습장과 《정통 종합 영어》 책이 있었는데 가지런히 정리된 수학 연습장을 보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생존한 학생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같이 이동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로 금방 친해졌습니다. 학생이 자발적으로 군장도 들어주고 산길을 나온 후 오후 늦게 안전 지역인 헬기장에서 헤어졌습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대결

광주 비행장에 도착해서 며칠 간 휴식과 정비를 취했습니다. 비행기 격납고 속이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지붕이 있고 평평한 바닥에서 자는 잠이라 편히 있을 수 있었고 훈련도 간단한 구보 이외는 경계 근무조차 없었기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도청 진압이 결정되자 11여단에선 1개 지역대만 차출되었습니다. 참여 지역대는 명령에 의한 지정이 아니라 9개 지역대장 사이에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1개 지역대 100여 명 生死가 걸린 문제가 이런 식으로 정해졌다는 게 인생이고 현실인가 봅니다.

작전 당일 광주 시민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알겠지만, 공수부대가 왜 보병부대 옷을 입고 진압작전을 해야 했는지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작전은 도청을 점령한 폭도를 敵으로 규정한 ‘敵과의 전투’였습니다. 왜냐하면 시민군이 소총에 조준경을 장착, 조준 사격을 감행했기 때문입니다.

그 실제 결과도 프로와 아마추어의 대결처럼 일방적으로 끝났습니다. 진압 전날 선무작전을 통해 내일 새벽에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란 걸 다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남은 사람은 죽기를 각오한 자들입니다. 그들의 시민군에 대한 충정과 生을 포기한 결단의 비장감은 이해되지만, 역사에 있어 승자와 패자가 있어야 한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군악대의 합주가 울려 퍼지는 송정리역에서 해태종합선물을 1인당 한 세트씩 副賞(부상)으로 받고 서울의 국민대학교로 재배치되었습니다. 저도 면회 온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정강이에는 던진 돌에 까진 상처가 있으며 내 마음 속엔 광주에서 죽었던 대원이 운송 트럭 위에서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맞으며 흔들리고 있었던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5월21일 도청 앞 그 긴장된 대치 국면에서 화염병 하나가 균형을 깼습니다. 이로 인해 차량 돌진과 발포가 시작됐고, 쌍방의 무력 사용이 5월27일 도청 진압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200여 명 희생을 줄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화염병 던지기 직전까지였다고 봅니다.

시민들이, 과격 진압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의 평화적인 철수를 허용했다면 대자대비한 사랑으로 충만한 ‘평화 민주화 운동’이라 불려도 어색치 않았을 겁니다. 그런 면에선 차량 돌진 때 피신해 들어간 공수부대원을 인도적 차원에서 몇 주씩이나 보호해준 따뜻한 마음씨가 광주의 진정한 자랑이 아닐까 합니다.

5·18을 치르고 35년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갖게 된 것에 공수부대의 일원으로서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과 동시에, 5·18이 광주의 恨으로 남아 대한민국의 화합과 발전에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리라는 말씀을 동시에 드려봅니다. 저는 광주가 민주화의 聖地(성지)로 자부하는 정치적인 도시보다는 南道(남도)의 멋과 맛을 간직한 예술의 本鄕(본향)으로 되돌아오길 바라는 맘이 간절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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