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친족 난민들은 참으로 서럽다
며칠 전에 미조람 마라디스트릭 안에 있는 3개의 미얀마 난민캠프를 방문하였다.
뉴델리에서 아이졸 까지 비행기로 3시간, 아이졸공항에서 룽레이 까지 지프로 7시간, 룽레이에서 티빠타운 까지 지프로 6시간, 티빠타운에서 티빠빌리지와 종그린까지 지프로 각각 30분~ 2시간 걸리는 여정이었다.
미조람주 전체가 산악지역이고 산들의 경사가 다 가팔라서 도로 폭이 좁고 도로가 마치 용수철처럼 산을 감고 있는데다 비포장 도로가 많아서 장거리여행이 참으로 어려운 곳이었다. 차가 덜컹거리며 아찔해지는 순간마다 ‘이렇게 험지인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텐데.’ 하며 후회하였다. 뿐만 아니라 허리가 시큰시큰 아프고 저릴 때 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난민들을 만나게 되면 막상 그런 마음이 다 사라지고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감내하며 살고 있는 그들이 너무 가엾고 안타까워 눈물이 앞을 가렸다. 모두 다 파리 한 마리 잡지 못할 것은 순하고 선량한 얼굴들이었다. 자기 권리 주장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이 묵묵히 순종하는 겸허와 인종이 몸에 베인 한 마리의 양이고 한 마리의 소이며 벌거벗은 산 위에 근근히 서있는 기근에 시달리는 나무들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고 자기들을 만나러 먼 길을 달려온 나에게 진정어린 감사를 하며 두 손을 모으는 그들의 마음이 진하게 내 가슴을 울렸다.
무엇보다 환영의 인사와 노래, 춤들이 너무 진지하고 경건해서 마치 거룩한 성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민들 전체를 대표한 지도자의 인사에 “우리가 난민이 되어 이곳에 온 지 3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난민을 돕는 단체가 많다고 하여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지금까지 어떤 외국인 단체도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만이 외국인으로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주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한국교회만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단체입니다. 우리 난민들을 대신해서 당신과 한국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의 인사는 외마디 비명이었고 절규였으며 불안과 절망의 신음이었다. 그의 인사는 나의 폐부를 찔렀고 긴급구호마저도 큰 이슈를 따라 움직이는 지구촌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세상에 수많은 NGO단체가 있지만 미얀마 내전은 세계 뉴스에서 핫 이슈가 되지 못하기에 팔레스틴과 우크라이나처럼 NGO단체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한국 TV에서도 미얀마 내전과 난민들의 이야기가 메인 뉴스로 나온 적이 없다. 내전 초기 뉴스가 뜨긴 떴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사람들 기억에 남을 정도의 강력한 이슈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뉴스를 통해서 세계 소식을 접하는 우리 교우들이 미얀마 난민들을 위해 모금하는 나에게 “미얀마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언제 일어났어요?” 또는 “그 나라가 아직도 전쟁 중인가요?”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난민 지도자 분들에게 미얀마 내전이 세계의 핫 이슈가 되지 못해서 세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점과 혹시 알더라도 내전이므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처럼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 혹시 안다고 하여도 미얀마 내 종족간의 권력 투쟁으로 이해하여 무관심할 수 있는 점, 혹이 내전과 난민의 실체를 안다하더라도 미조람이 너무 오지이고 산악지역이어서 접근하기 어려운 점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전이므로 군소 NGO단체들이 참여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말하며 세상의 무관심에 대하여 이해와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세상의 무관심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높이 들라고 하였다. 나의 권면이 참으로 공허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인도로서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이지만 난민으로서는 서러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조람 정부와 교회는 미얀마 난민들을 같은 ‘에쓰닉 브라더'(Ethnic Brother/ 소수민족 형제)로 환대하며 자신들의 빌리지나 타운 밖, 최소한 5리에서 20리 밖에 난민캠프를 세울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오두막을 지을 수 있는 건축허가와 대나무 자재 그리고 주방용품과 침구와 옷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오두막을 짓고 촌락을 형성한 후, 난민캠프 둘레 빈 공터에 채소를 가꾸고 병아리를 키우려고 하자 인도 빌리지 위원회에서 제재를 가하였다. 산에서 채취하는 것도 자유롭지 않았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도 허용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에스닉 부라더’ 라고 해도 미얀마 난민은 인도인이 아니고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피난을 떠나올 때 가지고 온 돈과 금붙이로 쌀과 부식을 사서 연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 지역 교회와 자선단체에서 오는 긴급구호가 줄어들며 난민생활 2년차가 되어 모든 것이 바닥이 났을 때야 비로소 인도 빌리지 위원회는 그들에게 채소를 가꾸고 닭을 키우며 강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난민들은 저마다 열심히 산자락을 일구어 씨앗을 뿌리고 병아리를 사서 키웠고 여분의 것들을 인근의 시장에 가서 팔았다. 그리하여 부족한 양식이나마 스스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3년차에는 채소를 가꾸고 물고기를 잡고 닭을 키울 수는 있어도 시장에 내다 팔수 없도록 새로운 제재를 가하였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미얀마 인에 의한 인도인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난민들의 외부출입이 완전히 통제되었다. 난민들은 빌리지위원회의 출입 허가 없이는 난민캠프 밖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독안의 쥐처럼 난민캠프 안에서만 살도록 허용이 되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투명 감옥(監獄)에 갇혔지만 인도 빌리지 위원회가 주는 제약을 거부할 수가 없다. 야속하고 서럽고 비참하고 구차해도 생존을 위해서 불평없이 원망없이 감수해야만 하는 터다.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조람 주정부의 딜렘마를 이해하였다.
영국이 식민지 통치를 하기 전에 그들은 '마라족'으로 한 소왕국의 백성이었다. 영국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통치권자는 바뀌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몸붙혀 살았다. 그런데 1948년 영국이 인도와 미얀마를 독립시키면서 '마라족'의 땅을 남북으로 금을 그어 서쪽은 인도에 동쪽은 미얀마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마라족'은 인도인과 미얀마 인으로 나뉘었다. 하루 아침에 부모는 인도인이 되고 아들과 딸은 미얀마인이 되는 희비극이 일어났다. 강대국에 의해 강제로 나뉜 그들은 '마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서로 국경선을 넘나들며 '마라족'의 끈끈한 혈연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런 전통과 역사 속에서 미조람의 주민들은 '에쓰닉 부라더'로서 난민이 된 미얀마 소수민족인 친족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인도 시골 마을의 주민보다도 난민들의 수가 두, 세배가 넘게 들어와 주민들이 도저히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미조람 주민들의 '에쓰닉 부라더'에 대한 호의와 관심, 동정심이 사라지고 나눔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미조람 주정부가 '에쓰닉 부라더'인 미얀마 난민들에게 베풀어준 호의와 혜택은 참으로 큰 것이다. 비록 일시적이지만 안정된 주거지역을 허락하고 난민집단캠프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민들에게 생존의 터를 마련해주었으나 난민들의 상행위를 금한 것은 주정부도 자국민 보호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정부는 자국민의 생계와 민원을 우선시하기에 난민들에게 채취와 수렵을 허용하고 여분의 채소와 닭을 인도인들의 시장에 와서 판매하는 것을 허락을 하였다가도 민원이 발생할 경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취소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난민 지도자들은 그런 중에도 고마운 것은 미조람 주정부가 도로공사와 다리공사 등의 토목 공사에 난민들을 일일 노동자로 써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이 한 달에 열흘이나 보름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비록 하루 노임이 한국 돈으로 2,000원에 불과하지만 그나마도 일이 없어 놀 때가 많아서 불안하고 우울해진다고 하였다.
제삼자인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양쪽의 입장이 절로 이해가 되었다. 나는 어느 쪽도 옳다 그르다, 잘한다 못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묵묵히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우며 양쪽이 다 잘되록 기도하며 속히 미얀마 내전이 끝나길 빌었다.
한국에서 부터 나의 최대의 관심사였던 내전이 언제 끝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2024년 3월 17일 주일 아침 사시
우담초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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