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하던 장례식장에는 갑자기 어디선가 팡파르가 울려 펴졌다.
정부의 요인이 연설대에 오르거나 연예인이 무대에 오를 때 울리는 그 음악이다.
음악에 맞춘 듯이 입구에 나타난 문상객은 검은 양복에 검은 셔츠와 검은 넥타이, 검은 구두를 신은 오칠닥이다. 그는 양쪽에 그보다는 젊어 보이는 여성 한 사람과 사내 한 사람을 대동하고는 죽은 오칠닥을 문상 온 것이다.
오칠닥 일행은 죽은 오칠닥의 영정 앞에 나란히 섰다.
칠닥이가 한 발 나서서 향로에 향을 꽂고는 잠시 묵념이 이어지고 음, 하는 신호에 따라 일행은 죽은 오칠닥을 향해 두 번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상주 일행과 맞절은 한다. 고개를 든 칠닥이가 상주 강하를 넌지시 건너보면서 입을 뗀다.
“강하가 상주로서 고생하는구나.”
“아뇨, 당연히 치러야 할 행사이고 묵묵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강하는 의연한 표정과 정감 어린 눈으로 칠닥에게 차분한 어조로 대답을 한다.
“그래, 아빠가 돌아가시니 슬프더냐?”
“슬프다가 보다는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돌아가신 아빠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생전에 그분께서 뭔가는 저에게 많은 말씀을 해 주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만, 별로 들어본 적이 없군요. 방문하시는 문상객들을 대하면서 또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무슨 말씀이신지 해 주실 말씀이 참 많으셨을 거라는 이상한 직감 같은 걸 느끼게 되지요.”
“그래, 그 말씀들은 네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듣게 될 것이다. 네가 무엇을 지향하고자 할 때 그 무엇이 아빠의 말씀으로 생각하면 되지 싶구나.”
“네, 아버지. 어디 자리 잡으시고 요기 좀 하시지요.”
“그래, 문상객 대부분이 낯익은 사람들이구나. 저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너와는 따로 시간을 가지자꾸나.”
강하는 칠닥이와 동행한 일행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호림이 삼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이시군요. 전혀 연세가 들어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이 선생님이시죠? 돌아가신 아빠가 변산에 살 때 선생님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지요. 반갑습니다!”
“그래요, 강하군을 만나서 반가워요! 장례식장에서 반갑다는 표현이 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도 어쨌거나 잘 만난 거예요.”
오칠닥의 일행이 조문을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서자 장내에는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힘차게 결혼 행진곡 음악이 울려 퍼지고 연회석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며 역시 요란스럽지가 않은 환영의 박수를 한참이나 쳐 주었다.
칠닥이는 연회장 상석에 계시는 어머니 봉순이에게 절을 하고는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는 그의 형, 개동이와도 악수를 나누고 그의 형제를 두루 살피고는 이 손님 저 손님과 인사를 하며 죽은 자신의 장례에 참석해준 감사를 표한다.
천천히 장내를 도는 동안은 호민이와 이 선생이 마치 요인을 경호하듯이 간발의 간격을 두고 칠닥이와 동행하면서 그들 역시도 문상객들에게 묵례하고는 하는 것이다.
유세 현장을 방문한 정치인처럼 방문객을 한 바퀴 돈 칠닥이는 소복을 입고 계시는 어머니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호민이와 이 선생도 옆자리를 잡고는 상을 받는다.
“엄마는 별일 없니 껴?”
“내야 별일이 있을 게 뭐 있나, 니는 좀 어떤노?”
“내가 그동안 뭘 해도 되는 게 없었잔니껴. 같이 온 저기 호림이나 이 선생이나 어울리면서 그저 물 흐르듯이 팔자대로 살라니더. 돈 많이 벌어야 잘 사는 게 아이라지 좋아하는 짓거리 하면서 사는 게 잘 사는게 아일리껴?”
“맞다. 니 어릴 때는 하도 알뜰해 싸, 형제 중에서도 니가 돈 젤로 많이 벌고 부자 되면서 산다꼬 했는데 나는 니 생각만 하면 많은 자식 중에서도 안타깝기만 하다.”
“그라이께 생각나네. 우리가 양철지붕 집에 살 때, 좋은 장닭 한 마리 산다꼬 돈 육백 원을 꼬깃꼬깃 몇 달째 가지고 댕기께는 형이나 금자 누나가 그랬지요. 하이고 내 같으면 벌써 써 버릴 건데 자는 참말로 대단테이~ 근데, 돈은 금자 누나가 벌었어요. 이~ 그 게 인생이고 팔자 아이껴? 사람이 운명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뭐, 별로 없다고 보니더. 그런데도 잘 된 놈들 지가 노력해서 잘 됐다고 하고 못된 놈은 운명이다. 그러는 갑디더. 그러고 보면 잘 못된 놈이 운명의 측면에서 본다면 더 겸손한 놈이다, 할 수 있제요.”
“호림이라는 이는 니가 변산에 갈 때 같이 간 사람이 아이라?”
“변산에 가서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농사들 짓는다고 들 줄곧 어울리기를 했제요. 나는 변산에, 저 친구는 울진에 가서는 농사일을 했었는데, 서로가 끝까지 그 일을 못 하고는 떠났지요. 내가 서울서 버스운전 일을 할 때 저 사람은 집 짓는 일을 하고 다녔니더. 그러다가 이 선생과 연결이 된 제가 저 친구를 부르게 된 거지요.”
“이 선생이라는 저 여자는 뭐 하는 사람이로?”
“음, 혁명가라 할 수 있지요. 하하하 혁명가, 맞네요! 혁명가!”
칠닥이가 죽은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하자 내려앉아 있던 식장의 분위기는 활기에 넘쳤고 죽은 칠닥이와 인연이 있어서 찾아온 문상객들은 이 사람 저 사람 앞을 다투어 칠닥이와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고자 하여 다소 소란스럽기까지 하였다.
북적거리는 군중들 머리 위로 아련한 영상을 칠닥이가 발견하기로는 소란이 좀 가려 앉은 때다. 희미하면서 뚜렷하기도 한 안개와 같은 여운에 갇혀 있으면서도 생생한 영상을 발견한 칠닥이 눈동자가 크고 밝게 빛이 났다.
“아, 무현이 형님! 형님이 우에 여기를 다 오셨니껴? 하이고~ 내사 형님을 어예 모셔야 할지 모르겠니더.”
영상은 잔잔하고 흐뭇한 미소가 흐르며 동굴 속에서 울리는 그런 음성이 흘렀다.
“모시기는, 뭘 모실라꼬 하노. 이자 동새이 나를 기억하고자 하이, 나 또한 동새이나 나를 조문해 주신 500만 국민이 그리워 이래 나타나게 되는 기 아이라. 나는 내 것이 아이라 그리워지는 모든 분의 공동소유물 아니냐. 허 허 허 ”
무현이 형님은 칠닥이가 어린 시절에 너무 닮고 싶었던 사람이다.
“형님이 내보다야 열한 살이나 많은 46년생 개띠이니, 57년 닭띠인 칠닥이가 오칠닥이면 무현이 형님은 사륙개인가요? 하 하 하.”
예천상회 오부자는 홍정골 봉순이를 얻어 사십 줄 느지막하게 본 아들이 개동이지만 풍기 장터에, 오부자 나이 때의 남정네들은 그 자식들이 이미 장성해 있는 것이다.
예천상회 바로 아랫집인 서울상회만 해도 아들이 장성해서 객지에 나가 공부하고 있고 그 아래 자전거포의 우복이네도 큰형인 우철이는 아버지 대신에 자전거를 수리해서 손님을 상대할 정도로 청년이 되어있으며 풍기극장과 담을 같이 하는 솥 전 집 큰아들은 칠닥이와 동갑인 그 집 막내 익준이와는 열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 있었다.
중앙시장 시장 안 옹기집 인수 형님이나 그 밑에 국수 공장 조정섭네의 큰아들은 벌써 머리가 훤히 벗겨지고 있는 상태이다.
덕기네 아버지 전 장로의 큰딸은 양과점을 내고 있었는데 덕기의 손에 이끌려 서양식 탁자가 즐비한 양과점으로 들어서면 어린 칠닥이가 입안이 시어지고 얼굴 달아오르는 것은 그 누나가 무릎 위로 깡총한 짧은 치마에 뽀얀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는 맞이해 주고 하였기 때문이다. 누나가 허리를 굽혀서는 탁자라도 닦을라치면 그 치마 속으로 얼핏 보이는 색깔 연한 팬티가 살짝 보여 잠시 넋을 잃었던 것이 어린 칠닥이의 추억이다.
그 누나 또래가 오부자의 본처 김 씨의 둘째 딸이고 칠닥이의 배다른 누나인 미자이다.
이렇게 칠닥이의 형인 개동이 또래의 또 몇 살 상위에 그런 형들이 있었고 그런 또래 중에는 무현이 형님이 인상 강하게 아직도 칠닥이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과보호 속에만 커갔던 개동이가 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적응을 못 했다.
학교에 보내 놓으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되어 급기야는 공부 시간에도 성내교회 계단에 앉아 있다가는 돌아오고는 하였다. 그러는 개동이에게 오부자는 집에다 개인 교사를 붙였다.
개동이의 개인 교사가 노무현 형이었다. 무현이 형은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이었다.
오부자 생각으로는 무현이 같으면 훌륭한 선생이 될 거라는 것이다. 개동이가 공부뿐 아니라 행실도 무현이를 닮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무현이는 이제 갓 고등학생일 뿐이지만 그 기품이 나이 든 자신이 보기에도 부러울 정도이다.
말하는 품새도 조용하고 빠르지 않지만 어른스럽기가 여간하지 않다. 개동이가 공부하지 않겠다고 도망가면 무현이는 성큼 다가가서는 개동이를 보따리를 안듯이 말아 안고는 마주하는 큰 밥상 앞에 턱 하니 앉히고는 하였다. 그러는 믿음직한 모습을 지긋이 바라다보는 오부자는 흐뭇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어린 칠닥이도 무현이 형이 제 형을 가르치자고 집에 오면 안기고 왠지 싶은 마음으로 그냥 좋기만 했다. 그 형은 그 또래 형들 중에서도 대장처럼 우아함이 서려 있으면서도 뭔지 잘 모르는 인간적인 정서가 어린 칠닥이에게 각인 되고 있었다.
노무현이는 어릴 때 별명이 작고 단단하다는 뜻의 돌콩이나 노천재로 불리었다.
머리도 좋았지만, 웅변력이 뛰어나서 그를 아끼던 선생님의 권유로 중학교 때는 당당히 학생회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는 부정한 방법으로 붓글씨대회에서 1등을 한 교사 자제의 행위를 용서 못 하고 자신의 2등 상을 반납하기도 하였다.
무현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학교에서는 독재자 이승만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글제를 주어 작문을 하게 하였는데 무현은 학우들을 선동하여 백지 동맹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 번은 극장 앞에 청년들이 몰려 있고 그 청년들을 칠닥이와 같이 어린 아이들이 에워싸고 구경거리로 삼고 있는 중이다. 무현이 또래의 형들이 모여서 짐바리자전거 들어 올리는 시합을 하고 있다.
또래 중에는 술도가에서 배달하는 이도 있었는데 그이가 그 짐바리 자전거를 중앙에 떡하니 세워두고는 청년들이 하나씩 나와서는 한 손으로 들어 올려서 어깨 위로 뻗는 시합이다. 술도가의 짐 자전거는 일반 짐바리 자전거보다도 더 크고 무거운 것이다. 짐칸의 4귀에 쇠고리를 달아 술통을 걸게 되어있으며 짐칸에도 테두리를 만들어 술통을 얹도록 만들어서 무게가 만만치 않다. 한 번 넘어지면 자전거를 세우는 것조차 어른이라 하더라도 힘겨울 일이고 배달꾼들도 일단 술을 실으면 곧바로 자전거에 올라 비빌 수가 있는 게 아니라 받침대에서 자전거를 밀어내면 왼손으로는 자전거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중심을 잡기 위하여 짐칸의 술통을 부여잡고는 한 발 두 발 앞으로 민다. 그러면 자전거에 탄력이 생기게 되고 그 탄력에 휙 하니 안장에 올라 페달을 첨에는 반 바퀴씩 까닥까닥 밟아서 탄력을 더 주어 일단 안정을 취한다. 자전거가 그제야 가겠다는 느낌을 받으면 반바지 힘살 솟은 종아리에 푸르름 한 동맥이 불끈 불거지도록 페달을 밟아 술 배달에 나서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나와 자전거를 들어보지만 만만치 않은 일이다. 여럿이 실패를 거듭한 중에 무현 형의 차례가 왔다. 그 형은 단박에 자전거를 들지는 않았다. 우선 자전거에 허리를 붙이고 무거운 자전거의 중심이 어딘가 하고, 허리에 오른손을 붙여 무게의 중앙을 찾았다. 일단 맥을 짚은 다음에 오른 다리를 자전거 중심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뻗고 한 손으로 그 중앙에 정확히 부여잡고는 다리에 반동과 동시에 오른 어깨 위로 힘껏 뻗었다.
“으라 차차!”
자전거는 순간 하늘 높이 치켜 들렸다.
“우 와!!!”
노무현이 힘을 줄 때 같이 힘을 주며 구경하던 칠닥이는 그 무거운 자전거를 마치 자기가 들어 올린 양 소리 지르며 기뻐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 군부 실력자들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군사 반란으로 제거를 하였다. 그리고 후임으로 임명된 이희승 참모총장이 서해안의 해안부대 시찰 일정이 잡힌 레이더기지는 근 한 달째 분주하기가 짝이 없었다. 보병사단의 인적 물적 지원을 받고 지역대대의 지휘로 기지가 새롭게 탈바꿈을 하는 중이다. 대대장은 수시로 기지 미화 사업을 점검하였고 보병 중대장과 레이더 운영 대장은 아예 기지에서 사병들과 숙식을 같이 했다. 보병들은 기지의 외곽을 꾸미고 레이더 통신병들은 기기와 장비, 상황실과 총장을 대상으로 하는 브리핑 연습에 주력했다. 기지장, 노무현 준위는 그 북새통에 마음 한구석이 휑하였다. 며칠 전 서산에 있는 레이더 운영 대의 박 상사가 찾아와서 대화를 나눈 것이 머리끝을 맴 맴돌다.
“박 상사, 도대체 우째 돌아가나? 본부에서 들은 대로 풀어 보그라.”
노 준위는 2.4종 재고 조사를 핑계로 기지에 찾아온 입대 동기 박 상사를 다그쳤다.
“글씨, 고 소령 말인디 이~ 군 내부에는 하나회라는 경상도 출신 별들이 있다는 것이여. 오래전부터 말임 씨. 그 선두가 전두환 아닝가? 전 소장이 보안사령관으로서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 함시롱, 아 김재규를 구속하고 봉께로 요놈의 정승화 참모총장의 뒤도 구리다 그 말 임씨이!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 싶응께로 쫄다구들 시켜서 총장공관으로 총 들고 쳐들어간 것이랴. 그런디, 박 소령 말로는 말이여 전 두하니가 채규하 대통령 재가도 없이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 나중에 역사적인 논란 일 거라는 것이여. 그렇거나 말거나 정승화가 나가리 되고부터는 빠르게 육본의 모든 높은 군바리들은 전두화니 쪽으로 줄을 섰다는 것이여 어. 요번에 이희승 총장도 그 패거리는 물건이고 말임씨.”
“전 소장도 대단하다 안그렀나? 별 두 개가, 네 개를 일거에 쳐 내고 말이다. 목숨을 건 거 아니겠나.”
노 준위의 경악에 박 상사는 화답을 한다.
“사내답다 할 수 있지러.”
이희승 참모총장의 부대 방문이 임박하자 운영대의 고 소령의 재촉이 심해졌다.
“노 준위, 이리 와! 내가 통신실 문에 안이 보이도록 유리를 넣으라 했냐 안 했냐?”
“시키는 데로 그대로 한 겁니다.”
고 소령은 노 준위의 쪼인트를 까면서 다그쳤고 뒷걸음으로 정강이를 피하는 노 준위는 항의를 한다.
“왜, 이러십니까.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행정처분 하십시오! 제 부하들도 보고 있는데 잘하시는 겁니까?”
고 소령은 찔끔하였다. 준위가 소령의 기를 죽인 셈이다. 노무현 준위는 원칙을 기준으로 하는 당당함으로 군인의 품격을 지키고는 하였다. 여럿의 작업병력과 함께 목격한 오칠닥 병장은 그때 그 용기 있는 광경을 인생에 있어 몇 번이고 흉내를 내고는 하였다.
더는 버틸 수 없어서 사람들은 아파트 입주권을 팔기 시작하였다. 행복동에 철거가 감행되자 다방 종업원에서 캐디로 캐디에서 버스 안내양으로 전전하던 명희는 통장에 19만 원을 남기고 자살을 한다. 명희 어머니는 그 돈으로 난장이네 전세 돈 빼 주는 데 쓴다.
70년대 박정희의 개발독재 시절에 이 비극적인 사회적 현상이 줄거리인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 소설이 박정희와 꼭 닮은 80년대 전두환의 쿠데타 정권 시절에 부산의 여러 대학생을 구속게 하는 시초가 된다. 이것이 1981년의 부림사건이다.
부림사건은 1981년 부산의 사회과학 독서 모임을 국가전복과 사회주의 건설을 모의한 국가변란조직으로 몰아간 부산지역 사상 최대의 조작 공안사건이다. 공안 당국이 독서 모임인 부산 양서 판매이용 협동조합 회원인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19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최장 60 여일까지 불법 감금·고문하고 구속기소 해 유죄 판결이 나왔다. 당시 이 사건 변론을 맡았던 노무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부림사건은 1981년 부산지역 사상 최대의 조작 공안사건이다. 당시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로 있던 검사 최병국이 지휘했고 수사 검사는 고영주였다. 국가보안법이 정권의 안위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된다. 부림사건의 무죄 판결 판사는 서석구 판사였다. 서석구 변호사는 부림사건 1심 재판장으로 국보법 무죄 판결 내렸던 장본인이었는데, 1990년대 중반부터 운동권과 결별하여 보수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장날마다 장꾼들 상대로 밥장사를 하는 인섭이네 집의 넓은 방에 칠닥이를 포함한 동네 꼬마들이 다 모였다. 월남전에서 제대한 노무현 병장이 미제 커피를 가져와서는 동네 사람들 맛을 보라고 한 상자를 인섭이네 집에 맡겼고 인섭이 엄마는 낮에는 어른들 불러서 한 솥 끓여서 대접하였고 저녁에는 꼬마들 차례인 셈이다. 큰 방에 벽으로 한 바퀴 쭉 아이들이 들러앉았고 인섭이 어머니가 크고 노란 주전자에 듣도 보도 못한 커피라는 걸 팔팔 끓여서 들어오자 아이들은 기대의 눈망울을 바쁘게 굴렀다.
“하이고, 이 씨거운 걸 미국놈들은 왜 먹노 이?”
하얀 사기 사발에 가득 담긴 커피를 한 입 맛본 아이들은 미간을 찡그리며 한마디씩 하였다.
“맞제? 내가 맛없다 안카드나. 무현이가 부탁하이, 내가 오늘 몇 솥을 끓여 냈지만 한 사람도 좋다는 사람은 못 봤다.”
인섭이 엄마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도 동네 사람들은 무현이 형이 푸는 전투식량이라는 것도 차례로 맛을 보게 되는데 칠닥이 입맛에는 고기 맛이 흠뻑 한 맛 나는 것도 있었지만 속이 니글거리는 생경한 것이 더 많았다.
칠닥인 제 형의 가정교사였던 무현이 형을 보면 자꾸만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싶은 욕구가 일지만 정작 무현이 형 손을 자주 잡고 걷는 이는 양숙이 누나였다. 칠닥이 기억으로는 무현이 형이나 양숙이 누나가 나란히 개천의 뚝방 길을 걷는 모습을 목격한 것은 꽤 오래되었다. 두 사람 다 교복을 입은 모습이니 아마 고등학교 학창 때일 것이다. 두 사람 뒤로 석양이 찬란하게 비치는 광경에 칠닥이도 고등학생이 되면 여느 여학생과 같이 걸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일고는 하였다.
칠닥이 인생에 있어서 그래도 잘 된 것이 있다면 늦은 나이였지만 그래도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여 소원이었던 농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과, 요번에 서울시 공용 시내버스회사에 입사한 일리라고 스스로 생각해 본다. 마을버스인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시내버스로 진입하기 위하여 꼬박 이 년 가까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과정만 이야기해도 소설책 한 권 감이다. 모든 게 이토록 소중한 순간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기가 그지없다.
“어이, 오형 왜 그리 표정이 굳어 있냐?”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확실한 중매쟁이가 되었던 경용이가 흐뭇한 표정으로 놀리듯이 물어 온다.
처음 소개를 받고 고개를 가로젓던 경용이는 어떤 계기에서인지 전력을 다해 주었다. 칠닥이가 입사하는데 결점은, 이혼했다는 점과 음주운전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입사 채용평가를 하는 처지에서는 이혼하고는 매일 술이나 먹고 음주운전까지 하는 불성실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노조 위원장에게 입사 허락을 얻어 내고 회사 쪽의 담당 직원을 거쳐서 과장, 부장, 상무에 이르는 여러 난관 중에 상무, 김광마는 숫제, 칠닥이를 떨어트리지 못하여 안달하는 인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사장 면접을 최종으로 입사가 허락되고 한 달간의 견, 실습을 받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낸 인생이 이제사 풀리는 갑다. 시내버스는 연봉이 삼천만 원에 이른다. 삼 분의 일은 강하, 하정이의 학비로 쓰고 삼 분의 일은 생활비로 써도 일 년에 천만 원은 저축할 수 있다. 그동안 연속된 불운의 보답인 셈이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된 꼬마 청년들의 더욱더 어른스러운 행동거지 중의 하나는 끼리끼리 모여서 중국집에 가서 어른스럽게 음식을 시켜 먹어 보는 것이다. 부모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때다.
“우리가 31번 중국집에서 짜장면 먹으러 갔을 때, 뒷방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옆방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궁금 안 하나? 중국이 놈이 창호지에 침 바른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고는 딜다 본 거야. 그란데 뜻밖에 무현이 선배하고 양숙이 누나가 있는 거야. 혹시 둘이서 뽀뽀나 하나하고 모두 숨을 죽이고 돌아가며 딜다 보다가 딱, 걸린 거 아이라. 야, 무현이 형 찐짜 눈치 빠르드라 이?”
“그라이께, 왜 아이노. 무현이 형이 눈을 부라리며 미닫이문을 확 열디만은 영어로 막 뭐라 하는 거야. 그라이 우리가 머노, 그저 정신없이 대가리만 숙이고 있는데 형이 또 그 영어를 해석해 주는 거야. (이놈들 어째서 남의 방을 몰래 살피는 얍삽한 행동이냐?) 뜻이라 하지 않겠어?”
“그래! 나는 무현이 형이 머 미국 사람 같구나! 했다. 우리 영어 선생보다도 더 혓바닥이 잘 돌아 가드라. 우리는 꼴 밤 한 대씩 씨게 맞았고 영어 단어라도 한 개 더 외워야 할 녀석들이 엉뚱한 행동을 한다며 훈계를 하고는 형이랑 누나는 먼저 나갔제.”
“우리도 히죽거리며 짜장면 다 머꼬 나가이 아, 우리 짜장면값을 내고 간 거라. 그래서 역시 무현이 형은 무현이 형이다, 싶더라.”
“양숙이 누나가 옆에 있쓰이 멋찌게 보일라꼬, 형이 우리 꺼도 낸기라.”
“지랄, 내가 물어 본께로 돈은 도로 양숙이 누나가 냈다카더라.”
2008년 2월 2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오늘 이 자리에 와서 보니까 대통령 오 년 동안 가장 보람된 시간이 뭐냐고 누가 다시 묻는다면 오늘 그렇게 답 할랍니다. 마치고, 고향 내려가서 고향 사람들하고 그리고 내보고 잘했다는 사람하고 이렇게 다 함께 모셔 놓고 귀향 보고를 하는 시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제가 오늘 딱 말 놓고 하고 싶은 얘기 한마디 하겠습니다. 아 흐, 야~ 아 기분 좋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그는 그렇게 귀향하였다.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인파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많게는 하루에 삼만 명이나 몰렸으니 시골 작은 마을에 경이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수시로 사람들이 몰려와 사저 앞에서 그를 불러내었다.
“대통령님, 나와 주셔요!”
노무현은 하루 세 번의 시간을 정해서 대중 앞에 서야 할 지경이 되었고 전직 대통령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제가, 열씨미 일할 때는 짜드라지게 욕해 싸더니 이제 이래 노니까 좋데요. 노무혀니 나온나! 얼굴 한번 보자! 이래요.”
노무현 특유의 서민적 언사와 행동에 대중들은 더더욱 열광하였다.
이 시기에 노무현 정부를 이은 이명박 정권은 반대로 심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국민은 광우병 수입 쇠고기 문제로 연일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이어졌고 날이 갈수록 그 규모가 커져만 가서 경찰이 급기야 청와대 진입을 막고자 컨테이너로 거대한 방어벽을 쌓아 <명박 산성>이라 불리었다. 이명박은 대국민 사과에서 자신이 청와대 뒷산에 올라 광화문에서 울리는 함성을 들으면서 <아침이슬> 운동가요를 부르며 자괴했다는 믿을 수 없는 언사로 면피를 하려 했다. 그런 중에서 가슴 깊게 봉하마을의 노무현에 대한 심각한 자격지심이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늦봄 이른 아침에 좃데, 실성 사이다의 지방 영업소에서 직원 조회가 사무실 앞마당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제 우리 회사에서 노동청에 간 사람이 있다. 그래, 그런 델 가서 회사의 치부를 꼬아 바쳐서 잘 될 것 같은가? 내가 그런 배신자에게는 그만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
이 인한 소장은 그의 특유의 번득거리는 눈빛으로 직원들을 압도하면서 조회 시간에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는 중이다. 최석규였다. 노동청에 고발했다면 최석규일 가능성일 가장 높다. 그는 임시직으로 입사 한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보조 직원인데 지난달은 한 달 동안 꼬박 하루도 쉬지를 않았다. 그런데도 회사에서는 휴일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것이다. 박정희를 이은 전두환 정권 시기에도 사회적인 분위기가 역시나 그랬던 것이다.
(씨발, 개새끼들 노동청이면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정부 기관이 아니야?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동자가 찾아와서 처지를 호소하는데 공무원이 그 가해자인 회사 책임자에게 노동자 신상을 통보해 준다? 이게 나라냐? 좆이나 희망이 절망이다!)
이 소장은 위압을 가한 후에 판매실적에 대하여 일갈을 시작한다.
“고가 콜라는 냉장고에 가득한데 실성 사이다가 냉장고에 없는데 실적이 오를 수 있겠는가? 매장마다 들러서 냉장고 가득히 사이다를 집어넣으란 말이야!”
“아직, 시중에는 냉장고를 돌리지 않습니다.”
도열 해 있는 판매사원 중에 소장의 훈시에 돌연 반기를 든 이는 점촌담당, 판매 사수인노 무현이었다.
“뭬야? 냉장고를 안 돌린다고?”
“그렇습니다. 아직 덥지 않은 쌀쌀한 날씨인데 점포에서 냉장고를 왜 돌리겠습니까.”
노 무현의 뒷줄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사수 칠닥이는 순간에 모골이 서늘해졌다. 설사 소장이 예시를 잘못 짚었다 해도 전격적으로 반격을 하는 무현이 형에게 존경과 걱정이 한꺼번에 일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진 소장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야, 노 무현! 점촌에서는 냉장고를 돌리나 안 돌리나 확인해 볼까?”
“그래 보십시오.”
방금에도 공무원조차 자기편임을 강조한 소장은 뜻밖의 저항에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좋아, 너하고 나하고 같이 간다. 만약에 점촌에 냉장고를 돌리는 점포가 하나도 없으면 내가 사표를 쓴다, 돌리는 데가 있으면 니가 사표를 써라!”
“그렇게 합시다!”
칠닥이는 무현이 형과 한 조가 되어 같이 사이다 판매를 다니면서 적잖이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무현이 형은 불합리한 경우에는 맞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칠닥이는 무현이 형을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2007년 12월 19일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여권에서는 방송국 앵커출신 정동영이 후보로 나서고 야권의 한나라당에서는 강력한 당선 후보인 이명박, 민주노동당에서는 역시 권영길이 나섰고 이인제도 출마했다.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를 감행한다. 17대 대선에서 특이한 인물은 문국현이다.
문국현은 유한킴벌리 회사의 사장을 지냈으며 시민운동에도 투신한 바로 타 후보보다 상대적으로 참신함으로 주목받았다.
정동영 측에서는 자신과의 단일화를 구원했지만, 문국현은 이미 정동영의 당선 불가를 계산하고 대선에서 완주하지만, 득표율은 5.8%에 불과하다. 이명박은 48.1%로 당선되므로 국민은 보수 세력을 선택한 것이다.
17대 대통령은 재벌기업가 출신 이명박이 되었다.
이명박이 집권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촛불시위가 거세어 가는 시간에 경남의 봉하마을에는 하루에도 수만의 군중들이 노무현을 찾았다.
국민은 진한 인간미가 넘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노무현에 환호를 보냈고 대통령도 행복해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봉하마을로 귀향한 노무현 대통령은 화포천 정화작업부터 시작하였다. 대통령과 이웃들이 어울려서 개천에 쓰레기를 줍고 보트를 타고 강을 거슬러 폐기물을 건져 낸다. 마을 야산에는 장군 차를 심어서 마을의 특화 품으로 삼겠다고 했고. 들판에 벼농사를 유기농업 체제로 바꾸어 친환경 농업에 전진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국가의 원수가 귀향하여 작은 시골 마을에 이장이 되어 분주하게 활동하는 셈이다. 이 무렵에 서울의 구로구 구로동에서 마을버스 운전자인 오칠닥이 대통령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존경하는 노무현 대통령님, 저는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마을버스를 운전하는 오십 대 중반의 남성입니다.
대통령님께서 임기를 마치자마자 귀향하셔서 화포천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장군 차를 육성하며 벼농사를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모습에 큰 감동과 적잖은 격동을 저는 느낍니다.
어린 시절을 시골의 농가에서 자란 저는 나이가 들어서도 그 추억을 못 이겨 인생 중반에 방송통신대학의 농학과에 입학하여 농업을 학습하고 급기야는 전라도 변산에 귀농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골 생활은 녹녹지가 않아서 오 년 만에 실패를 겪고 도시로 도로 돌아와서 노동자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요번에 대통령님께서 마을사업을 추진하시는 보도를 접하고 그 일에 동참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고 있는 상태입니다. 저를 한 번 살피어 보시고 부디 한 일원으로서 받아 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상서를 올립니다. 한 가지 배려를 바라는 바는 슬하에 대학교 입학을 앞둔 두 명의 자녀가 있어서 자원봉사로만 하기에는 가정적인 책임이 있어서 적당한 임금을 받기를 원합니다.
추진하는 사업에 발전을 기원하면서 아울러 대통령님,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08년 5월 23일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오칠닥 올림.>
하는 내용의 일곱 장에 달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부터 답장은 쉬이 오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칠닥이는 시내버스 정규직으로 마침내 진입하게 된다.
1575년생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
중국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명나라에 전쟁이 일자 조정 대신은 군사를 파견하여 명을 도와서 금을 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전하! 기마 오백 두에 궁수 삼천에 기병 일천을 포함한 군사 이만을 파병함이 옳은 줄 아뢰오!”
“아니, 그만한 병사를 차출 하자면 우리의 국방이 염려되지 않겠소?”
반대파에서 한 마디 건네자 발끈하여 큰소리로 훈시하듯이 일갈을 한다.
“이 나라가 누구 덕에 종묘사직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명이 있어야 조선이 있는 것! 오랑캐에 짓밟히는 한이 있어도 사대의 예를 다하는 것이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라 사료됩니다. 윤허하여 주소서~”
“경의 뜻대로 하시오.”
“다음은 태황태후께 바칠 품목이옵니다. 궁녀 사십, 채단….”
“적당히 하시오! 적당히들. 대체,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뭐라? 이 땅이 오랑캐에 짓밟혀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명 황제가 좋으면 이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시오! 그깟 사대의 명분이 뭐기에, 이만의 병사를 사지로 내몰라는 말이요. 임금이라면, 백성이 지아비라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 부끄러운 줄 아시오!”
1923년, 서인 김류, 김자겸, 이귀, 이괄, 심기원등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실리외교를 펼치는 광해군에 반대하여 반정을 일으킨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광해군정권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압살당한다.
1946년생, 16대 대통령 노무현.
2006년 평화통일 자문 회의에서 노무현은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관한 연설을 하게 된다.
“작통권 회수하면 안 된다고 줄줄이 몰려가서 성명을 내고 그럽니다. 작통권 돌려받으면 한국 사람들 잘해요. 경제도 잘하고 문화도 잘 하고 영화도 만들고 배도 잘 만들고 차도 만들고 전화기도 잘 만들고요. 외국에 나가 보니까 못 하는 게 없는데, 왜 작전통제권만 못한다는 말입니까. 미국하고 외교가 있으면 중국하고도 북한하고도 외교가 있는 겁니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자주 국가의 안보의식이 있어야 미국과 대등한 외교를 할 수 있는 것이지 언제까지 미국의 바짓가랑이 잡고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하면서 매달려서야 독립국으로서 최소한 체면 유지하고 심리적 의존관계를 해소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외교상 실리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요. 대한민국 군대들 지금까지 뭐 했나 말이요. 북한보다도 국방비를 열 배나 넘게 근 이십 년 썼는데, 그 많은 돈을 쓰고도 아직도 북한보다 약하다면 옛날에 국방장관들 직무유기한 거 아닙니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명박 정권의 청와대에서는 시비를 걸어왔고 얼마 후 검찰이 나서기 시작하였다.
2009년 4월 30일 검찰은 노무현을 뇌물수수 혐의로 소환했고 언론은 그 모습을 대대적으로 중계하였다.
노무현을 조사하는 담당 검사는 중앙수사부장 이 인규와 1과장 우 병우와 홍 만표가 맡았다.
이인규는 당시 대통령 이명박과는 이미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이었다.
검찰총장인 임채진을 배제하고 청와대와 직접 의견을 조율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우병우는 경북 봉화 출생으로 영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법대를 졸업했으며 박근혜 정권 때는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임명된다. 동료 검찰조차도 그들에게 힘없는 노무현만 족치는 망나니라 불렀다.
검찰은 지속해서 노무현의 측근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국세청도 노무현 후원자인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을 비롯하여 제주도에서 골프장을 경영하는 지인을, 심지어는 노무현의 허리 수술을 해 준 병원과 그가 즐기던 삼계탕을 파는 식당에까지 세무의 칼날을 들이댔다.
최측근 안희정, 이광재, 정상문의 조사는 물론이고 영부인 권양숙 여사에게도 검찰 출두를 예고하고 있었다.
증거를 제시하라고 외치는 노무현에게 검찰은 포괄적 뇌물죄라는 희한한 논리로 불충분한 증거로 여론몰이를 즐기고 있었다.
노무현을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봉하마을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자신을 버리라고 호소하였다.
망나니들은 서울 대검찰청에 봉하의 노무현을 불러 톡톡히 망신을 주고도 그의 구속 여부를 결정치 않고 시간 끌기를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내버스의 한 달간의 운행 실습은 다소 지루하고 긴장감이 이어지는 피곤한 일이었다. 칠닥은 어렵게 입사한 만큼 혹여 실수가 나오랴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였고, 또는 자신을 못 믿어야 했던 김광마 상무에게도 명예회복을 하고 싶었다. 아주 성실하게 세 개의 노선을 차례로 또 반복해서 견습 하고 실습을 이어갔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가 하는 말이다. 칠닥이는 느닷없이 목줄기가 울컥해지고 콧날이 찡해졌다. 참으로 팔자도 세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따라지학교라는 농고農高를 떨어졌을 때부터 그의 희망은 난간에 부딪혔다. 걸쭉한 인물, 김용을 교장의 개척학교인 공고工高를 졸업하는 해에 문을 연 책방, 샘터서림은 겨우 일 년을 버텼을 뿐이다. 샘터서림에서 두어 집 옆으로 태백 직물에는 그 댁의 딸, 김신홍을 가끔씩 목격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성수동 공단에서 진풍물산이라 하는 70년대의 허접한 공장에서 사흘을 꼬박 밤새워 연속으로 일하는 뼈저린 극심한 노동의 고통도 맛봐야 했다. 진풍물산의 공예과 경리인 미스 민은 그 먼지 구덩이에서 백합처럼 피어 있었던 여자였다. 공단을 벗어나 화려한 서울의 중심지로 나왔다. 종로2가에 있는 한림출판사에서 월부책 판매원이 되었다. 연고자가 없는 개척 판매라는 것은 마른 땅에 머리 박기였고 매번 머리만 깨지고 피가 날 뿐이다. 거의 굶다시피 한 그 생활에서 사장 비서인 미스 김은 목소리가 착 착 감기는 매력적인 아가씨에 대한 기억은 오래오래 계속되었다. 의무적으로 입대한 군대에서는 참 군인 한상수 준위를 만났고, 발랄한 성격의 서 귀자와 헌신적 성격의 호승연은 부대 주위에 사는 그 또래의 여자들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성실 사이다 회사에 입사하였지만 비열하고 치밀하게 대기업에 노동 착취를 당해야만 했다. 당시에 의성의 분식집 아서원에는 대만 국적의 중국 미인 곡도연이 늘 음식을 내어 왔다. 어쩌다 결혼하고 그 일 년 후에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전 재산인 장사밑천을 몽땅 도둑맞았다. 미아삼거리의 삼양동 입구에 있는 강릉빌딩의 회장댁 자가용 기사가 되었으나 부자에게 농락만 당한 셈이다. 그 댁 며느리며 한국의 삼대 철학자라는 대학자大學者의 딸인, 미리 엄마는 그 심정을 알아주었을까 한다. 새롭게 시내버스 기사가 되었다. 한 오 년 일하면서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묵은 빚을 청산하고는 이혼을 했다. 경기도 안산 생활을 이 년 거쳐서 변산으로 귀농하였다. 귀농하기 한 달 만에 첫 불운을 맞았고 불운은 사 년 육 개월 동안 골고루 재생되었다. 변산에서는 일생일대에 치열한 사랑을 해봤으나 그것은 단연코 비정상적이었다. 변산을 떠나서 다시 안산생활 이 년을 거쳐서 서울 구로동에서 마을버스 기사가 된다. 또, 다시 운전대를 잡아 보니 거기의 희망은 시내버스, 정규직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번거롭고 힘들고 어렵게 결국은 시내버스로 마침내 진입한 것이다.
봉하로 귀향한 16대 대통령 노무현은 작금에 와서 현상에 대하여 몹시 힘들어했다.
17대로대를 이은 이명박 정권이 본격적으로 노무현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대통령님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뜻에서
제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99년도 당시에도 무일푼인 제가 귀농을 결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의 영농조합에 농산물 차량을 운전하면서 실무를 맡기로 해 얼마의 소득이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귀농 채 한 달 만에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어 면허가 취소되고 소득의 보장은 사라졌습니다.
분명한 저의 잘못입니다만, 형사적인 처벌보다도 더 큰 현실적인 죗값은 참으로 가혹했습니다.
그 길로 대책 없는 낭떠러지로 몰려서 결국은 오 년을 더 버티지 못하고 빚을 진 채로 귀농을 접어야 했습니다. 농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돈이 들었습니다.
도시로 회귀하였습니다.
과거의 경력으로 삼아서 시내버스회사에 취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음주운전 경력에다 이혼남이라는 이유로 아무 곳도 저를 써 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딱, “이혼하고는 매일 술이나 처먹다 신용까지….” 이런 인상에서 변명할 여지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쟝발잔이었습니다.
도시에서 여러 일, 바닥을 기면서도 상대적으로 취업이 쉬운 마을버스를 거쳐서 시내버스회사 문을 다시 두드리기를 수년 만에 한 회사에 취업이 결정되었습니다.
저는 너무 좋아했습니다. 여기 봉하마을 홈페이지에도 정규직 진입이라 했던 것이 그 말이었고, 제 주위 사람도 부러워하면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소득의 상승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둬야 할 두 아이의 학비가 보장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 된 것입니다.
버스회사에서 2주간의 수습하고 운전 실습 3일째, 저는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차고지에서 주차하면서 뒤 주차 차량을 접촉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고입니다.
의외로 매우 격노한 회장님의 질책에 아무도 손을 쓸 엄두도 못 내고 그대로 잘렸습니다.
99년도 음주사건 이후 꼭 10년 만에 터진 불행입니다.
분명하고도 틀림없는 제 잘못입니다.
10년 전과 같이 앞으로 얼마나 제 인생이 험난해야 할지, 그에 따르는 두 아이의 장래에 몸서리치는 두려움이 사무칩니다.
도시 주택가의 옥탑방에 대책 없이 갇힌 지 사나흘 되었습니다.
이대로 딱 죽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하고 틀림없는 잘못이긴 하여도 어째, 그 죗값이 이토록 즉각적이고 매정하고 냉정한 처벌이 내려져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햇볕이 쨍한 옥상을 어슬렁거리며 대통령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대통령님!
저는 어쨌거나 살아 보렵니다.
실제의 심정으로는 그냥 죽는 게 더 편하겠습니다.
10년의 죗값에, 수년의 염원이 한순간에 물거품 되고 말았지만,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여러 방도로 또 문을 두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은 대통령님의 일신을 해명하거나 변명하는 곳이 아니라고 봅니다.
못다 이룬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특히나 친환경 동호회는 우리 농업 발전에 일조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이 차곡차곡 쌓여 가자면 최근의 일련의 사태는 점으로 남거나 과정 중에 하나로 기록될 뿐일 것입니다.
저는 십 년 전에도 그랬듯이
요번의 황당하고도 당혹스러운 제 잘못을 의연하게 감수하겠습니다.
대통령님도 그렇게 하실 거지요?
칠닥은 사람 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장문의 글을 올린다. 대통령께서 읽어 주셨으면 하였다.
1999년 9월 30일은 전 세계적으로 봐도 언론사상 참으로 치욕스럽고 민망스럽기 짝이 없는 행태가 대한민국 대검찰청 청사에서 벌어졌다.
“오신다! 오셔, 자~ 줄을 맞추고 김 기자, 박 기자 이쪽으로….”
“자, 손을 높이 들고 하나, 두울~ 셋!”
“사장님, 힘내세요!”
“사장님! 힘내세요.”
“힘, 내세요!”
이날은 중앙일보 사장 홍석현이 조세포탈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으러 대검찰청에 출두하는 중이고 역시 중앙일보기자 40여 명이 청사 입구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도착하는 홍석현을 맞아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신문사 기자가 사주라는 이유로 범죄자를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등록금이 아깝다.’ ‘삼성 사보를 만들지.’라며 공부 많이 한 사람이 기자정신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고 사주의 머슴이라는 모습을 확실히 보여 줬다.
중앙일보기자의 막장 행동은 이뿐만 아니다. 삼성 엑스파일 사건시에도 홍석현을 검찰에 출두하게 된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피켓을 들고 항의 시위를 했는데 중앙일보기자들은 취재가 아니라 홍석현의 경호원이 되어 노동자들을 몸으로 막고 멱살을 잡으며 충성심을 발휘하였다.
중앙일보 여기자 두 명은 미국산 쇠고기가 잘 팔린다는 기사를 작성하면서 자신이 마치 손님인 양 위장하여 연출 사진을 내보내기도 하였다. 이로써 중앙일보 일부 기자들은 온 세계 기자들 얼굴에 먹칠하면서 기네스북에 기록될 만 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퇴임한 노무현 대통령의 사저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고 악의적인 보도를 한 기자도 중앙일보기자이며 이 이는 노무현이 서거하자 반성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박은식,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 중 많은 사람이 기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현상이다.
- 얼마나 다른 개들에게 쪽팔릴까? 도둑의 집을 지키는 저 개는. -
더러 노무현을 흉보는 이를 보게 된다.
뻔뻔한 그 표정에서 노무현의 반의반의 모습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고 노무현에 관한 글을 쓰면서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류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서울방송 SBS>
1991년에는 6공화국의 노태우 정권 당시에 국내에서는 민영방송이 시작되었다. 국영방송 케이비씨나 공영방송 엠비시에 이어 서울방송이라는 민영방송이 탄생한 것이다. 서울, 경기, 충청 및 강원 일부를 가청구역으로 1991년 3월 30일 라디오방송국을 열고, 같은 해 12월 9일에 텔레비전 전파를 발사하였다. 1995년 5월에는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에도 민영 방송국이 설립되어 지방화 시대에 발맞춰 가시청 지역을 확대하였다.
새롭게 방송이 하나 설립되는 기준에서 기존 신문사 소유회사나 기업재벌은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 민영방송 출범 시에는 한 해 150억에서 500억 원까지 수입을 봤는데 설립자본금 1,000억인 SBS는 설립 4년 만에 순이익으로 1,000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민영방송 참여를 희망한 회사나 단체는 기독교방송을 비롯하여 농심, 인켈, 중소기업 중앙회, 한독 시계, 태영, 비디오 아트, 대성 자본, 일진 등이 있었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건설업계 34위인 태영이 선정되었는데 이 회사는 대중이 알지 못하는 듣도 보도 못한 잡스러운 존재로 이전에도 방송 관계는 전무 한 회사이므로 시중에는 당연히 특혜시비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정부는 농심은 롯데와 형제 회사라는 이유로 기독교방송은 특정 종교라는 이유로, 중소기업 중앙회는 특정 이익단체로 배제하였다. 그러나 그런 가시적인 원인보다도 더한 각종 의혹의 실체인 태영이 선정하게 된 것이다. 노 정권은 6.29 선언 이후에 방송사 노조의 목소리가 커지자 정부의 여당의 의사가 유리하게 전달해지지 않다는 것과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 대비한 정권의 확실한 나팔수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묘책을 낸 것이다. 88년 엠비시노조의 파업이나 88년 케이비에스 노조의 파업 직전까지 간 것이나 90년 케이비에스의 파업으로 위기를 느낀 정권은 민방방송 탄생을 설립고자, 방송관계법 개정을 시도하게 이른다. 이에 전국 신문방송학과 교수 예순한 명이 반대 성명을 냈고 4개 방송노조가 동맹파업 강행하고 야당의 극렬저항에도 불구하고 민자당은 국회에서 날치기로 이 법을 통과시켰다. 결국은 서울방송, 오늘에 에스비에스는 날치기의 산물인 셈이다.
서기 2009년 5월 23일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에 부엉이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이었다.
노무현은 서거 나흘 전에 이렇게 마지막 육성을 남겼다.
“내가 알고 모르고 이런 수준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 나는 봉화산 같은 존재야 산맥이 없어. 딱 홀로 서 있는 돌출돼 있는 산이야. 여기서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내가 돌아온 곳은 이곳을 떠나기 전의 삶보다 더 고달픈 삶으로 돌아와 버렸어. ‘이제 해방되는구나!’ 하고 돌아왔는데, 새로운 일을 좀 해 본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옛날 여기 살 때 최대 관심사가 먹고 사는 것이었어. 마지막에 돌아와서도 지금 딱 부닥쳐 보니까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한 사람, 그 수준으로 돌아와 버린 것 같아. 어릴 땐 끊임없이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희망이 없어져 버렸어. 이미 전세가 기울어버린 전장에서 마지막 옥쇄하겠다는…. 싸움터에서 빨리 빠져나가야 해 도망가야 해. 사람들은 여길 떠나서 다른 성채를 구축해야 해... 정치라는 것이 싸움일 수밖에 없지만, 시민이 싸움에 휘말리면 정치의 하위세력이 될 수밖에 없어. 시민은 중심추거든. 시민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좋은 놈 선택하는 것이고 덜 나쁜 놈 선택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쟤가 어떤 정책을 할 것이냐’가 제일 중요해. 그렇게 보고 고심을 해야 하는데…. 제일 절박한 것이 밥그릇이 없어지는 것이거든. 그럴 절박한 상황이 아니면 이것저것 해 볼 수…. 혼자 버틸 수 있으면 버티고…. 조직의 전망이 없으면 개인의 전망도 없는 것이거든. 일의 전망 이것을 놓고…. 담배 하나 주게. 담배 한 개 주게. 이 정도 합시다.”
2009년 4월 30일 봉하마을의 노무현 대통령이 서울에 있는 대검찰청에 출두했다. 언론은 헬기까지 띄우면서 긴 시간의 출두 과정을 실시간으로 중계방송을 하면서 전직 대통령을 망신 주기에 온 힘을 다했다.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검찰청사에 들어서는 순간 사방이 난리 통인 속에서 청사 고층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비열한 미소를 짓는 검사, 三 人이 있었다. 이인규 중앙수사부 부장, 우병우 1과장, 홍만표 수사기획관이었다.
우병우는 1967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태어났다. 시골 학교에서 교육자인 부모는 그를 경북 북단의 시市, 영주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시켰다. 촌에서는 남다른 특혜의 시작이다. 1984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는데 시골의 영주고등학교에서 서울대에 입학하기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로 우병우로서는 자신은 특별하기 그지없는 존재로서 선민의식에 사로잡히는 계기 되었다. 그의 능력은 인정을 받더라도 진솔한 친구는 없었고 우병우 자신도 번거롭게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1987년 대학교 4학년 때 만 20세의 나이로 제29회 사법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하였다. 이른바 소년급제였다. 경북의 깡촌인 봉화에서 큰 인재가 탄생한 셈이다. 그의 부모는 단박에 지방의 유지가 되었고 우병우는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을 자신감이 섰다. 이후 신체검사를 받아 ‘질병 또는 심신장애’를 이유로 신체 등급 5급 제2 국민역을 판정을 받아 군 복무를 사실상 면제받았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검찰청 특수부 계통의 검사로 활동했다. 승승장구를 거듭한 그는 결혼 상대도 자신의 위상을 드높일 환경에 있는 상대를 하이에나의 사냥 근성처럼 찾아 나섰다.
이상달은 우병우의 장인이다. 1962년 경희대학교 나와 1970년대 건설경기 붐이 일 때 재일교포인 아는 형이 불도저를 사줘 1969년 30세에 회사 약수건설을 설립하고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경우회가 사업권을 따낸 골프장, 기흥컨트리클럽을 염두에 둔다. 전두환의 형, 전경환을 경남 합천의 경찰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그의 힘을 빌려 그 골프장에 투자하면서 거부가 되는 계기가 된다. 전형적인 권력 유착형 기업가라 하겠다. 돈을 쥔 이상달은 권력까지 쥐고 싶었다. 이상달의 둘째 딸에게 차출된 이가 우병우다. 그러함으로써 우병우 역시 가진 권력에 돈까지 쥐게 되어 공직자 재산공개 당시 독보적인 재산을 과시하게 된다. 돈과 권력을 함께 쥔 자의 오만은 여지없이 나타나기도 했다. 우병우는 노무현 대통령을 수사할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노무현 씨 당신은 더 대통령도, 사법고시 선배도 아닌, 그저 뇌물수수 혐의자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겁니다.”
이인규李仁圭는 경기도 용인 출생으로 1958년생, 58년 개띠로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 과와는 동갑이며 이명박 정부에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되었다.
이인규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를 맡았다. 주변 인물, 일가족을 모조리 소환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무리하게 수사하였다. 일가족은 몇 차례나 소환되었고, 수사 현황은 실시간 언론에 브리핑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일가가 고가의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등 허위 사실이 매체에 유포되면서, 심적 고통을 견디지 못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다. 이후 권력에 대하여는 형식적으로만 수사하면서 죽은 권력에 대해서만 먼지떨이 식으로 수사를 진행하였다는
이명박과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검찰 요직인 중수부장에 임명되어 모두 정권의 실세로 등장한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번 노무현 수사에서 임채진 검찰총장은 배제되고 이 부장이 청와대와 직접 이견을 조율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수사의 발단은 2008년 7월 국세청 한상률 전 청장이 담당이 아닌 조사4국을 시켜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을 세무 조사한 후 박연차 씨와 노 전 대통령 가족 간의 돈거래 내용을 이상득 의원에게 보고하며 시작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2008년 12월 검찰에 구속될 때 원래 입이 무겁기로 유명한 박연차는 지금까지 정관계 인사에게 현금이나 상품권만 주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검찰은 그의 외아들의 병역기록을 검토하고 태광실업 경영을 맡고 있던 장녀를 비롯한 세 딸과 사위를 출국 금지하고 소환했으며 상속세를 탈세했는지 검토를 시작하자 결국 박연차 회장은 수사 협조를 약속했다. 그러자 딸과 사위에 대한 출국 금지가 풀렸으며 외아들의 병역문제도 '문제가 없다'라고 결론을 냈다. 이때 검찰은 박연차와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의 거래는 퇴임 후 사적 거래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몇 개월 후 검찰 인사 이후 검찰 수사팀은 다시 꾸려졌고, 이인규, 홍만표 등이 합류하였다. 이인규는 공공연히 이전 검찰의 수사기록을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주변 인물과 일가족의 줄소환이 시작되었다. 한 사람씩 차례차례 소환이 이루어지다 2009년 4월 12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 여사가 중수부의 조사를 받았다. 이어서, 4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했다. 한편, 이 당시 검찰청사에 도착한 전직 대통령을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며 웃음 짓는 몇몇 검사가 카메라에 찍혀서 유명해졌다. 이때 참여정부의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문재인 변호사가 동행했는데, 문재인은 자서전에서 조사실에서 이인규 중수부장이 노무현 대통령 소환 조사 시 대단히 건방졌으며,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5월 13일, 회갑 선물로 받은 억대 고가의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권양숙 여사가 검찰에서 증언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인규는 임채진 검찰총장 등과 함께 민주당과 시민에 의해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당하였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 이인규는 6월 12일 6개월에 걸친 '박연차 리스트' 수사 결과를 5분 만의 발표로 종결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혐의는 '뇌물수수'로 밝혔다. 하지만 구체적 증거를 내놓지는 않고 '역사적 진실'은 수사기록에 남겨 보존하겠다고 하였고, 수사 과정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며 수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에 문재인 변호사는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두 번 욕보이는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변호인단은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와 함께 이번 수사 결과 발표는 책임 회피와 자기변명으로 일관됐다고 비판했다
2015년 1월, 이인규와 같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한 우병우 당시 중수 1과장이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으로 내정되자, 이인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가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한 진술은 국정원의 조작이었으며, 당시 국정원은 대검에 망신 주기 여론몰이를 제안하였다고 밝히면서 국정원이 여론몰이한 것으로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대통령님,
왜 그러셨습니까.
전과 수범인 자가 대통령직에 있고, 쿠데타 수괴도 살아 있다고 하잖습니까?
정권의 개에게 물린 상처가 그토록 깊었을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머잖아,
대통령님께서 기운을 차리시어 봉하마을에 농사를 지휘할 거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농업, 농촌을 살릴 가장 영향력 있으신 분으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이맘때 귀향하신 대통령께서의 환경농업 계획이 알려질 때 함께하고 싶어서 대통령님께 이력서를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멀리서 봉하마을이 발전하는 농업농촌의 모델로 변해가는 모습에 그윽이 행복하였고 기대감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며칠 전에는 그런 심정으로 대통령님을 존경하고 찬양하는 글을 올렸다가는 진부한 것 같아서 지워 버렸는데 그냥 둘 걸 그랬습니다.
이제, 그런 행복감과 기대치를 접어야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당신께서 떠나신 것을 인정해야겠군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노무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바람이 불면 당신 줄 알겠습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2002년 11월 2일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부산에서 열리는 국민참여운동본부 발대식에서 연설한다.
“이 노무현이 대통령깜이 되는냐? 노무현이 깜이 되는냐 말할 때 저도 됩니다. 말하기에는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저는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깜이 됩니다. 하고 당당하게 말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아주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을 제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감이 됩니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 제일 좋은 친구로 둔 사람이 제일 좋은 대통령 후보가 아니겠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 여러분~”
문재인!
문재인은 1953년 경남 거제의 피난민 가정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 중·고등학교를 나오며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빈부격차가 확연한 경남중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 세상의 불공평함과 위화감을 피부로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1년 재수 후 경희대 법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75년 전국적으로 유신 반대 투쟁이 본격화되자, 문재인은 총학생회장 대행으로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이끌고, 유신독재 화형식을 주도하다 경찰에 구속·수감 됐다. 재판에서 징역 2년을 구형받았으나 징역, 10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났다.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영 영장이 나와 강제징집됐다. 군에서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되어 폭파병으로 훈련을 받고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과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는 등 특A급 사병이었다.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으나,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당한 후 '서울의 봄'이 오자 1980년 3월 학교에 복학했다.
문재인은 복학생 대표로서 학원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투쟁 중 2차 시험을 봤고,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발표한 5월 17일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된 상태에서 유치장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후 수사가 유야무야되며 석방됐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대학 시절부터 만난 김정숙 씨와 결혼했다. 변호사가 되기로 한 문재인은 로펌의 제안도 있었으나 어머니가 계신 부산으로 갔다.
1982년 문재인은 부산에서 연수원 동기 박정규의 소개로 당시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던 노무현을 만났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부산 서구 부민동 법원 후문 근처에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설립했다. 둘은 '깨끗한 변호사를 해 보자.'라고 의기투합했다.
노무현은 이미 부림사건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을 맡은 바 있었고, 문재인이 합류한 이후 이들은 부산은 물론 울산·창원·거제 지역의 대표적인 노동·인권변호사가 됐다. 문재인과 노무현은 시국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부산 민주시민협의회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재야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노무현은 상임집행위원장을, 문재인은 상임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노무현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문재인은 부산에 남아 혼자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다 1995년 여러 변호사와 함께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했다. 문재인은 직접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를 맡고 부산노동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노동문제를 상담하고 노조설립 활동을 지원하는 데 집중했다.
2002년 노무현이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문재인은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았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기용됐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과정에서는 대통령 대리인단 간사를 맡아 실무적 역할과 언론 대응을 진행했다.
노 대통령이 대통령에 복귀한 직후 문재인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다시 민정수석을 거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노무현 정부 말까지 청와대에서 일했다. '왕수석'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엄격한 자기 절제로 특별한 문제 없이 청와대 보좌 업무를 마치고, 2008년 경남 양산으로 내려가 칩거했다.
그러나 문재인은 노무현의 서거 이후 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노무현의 서거 소식을 국민에게 직접 발표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국장을 이끄는 '상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장례 실무를 도맡았다. 특히 장례식장을 찾은 당시 대통령 이명박에게 백원우 의원이 '사죄하라'라고 항의하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0년 재단법인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의 이사장을 맡으며 정치권과 거리를 뒀으나 정치권에서는 줄곧 '역할론'이 제기됐다. 문재인은 노무현 서거 이후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는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라고 표현했다.
15쪽, 157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