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일상으로 다가온 건축 미학
지난 몇 년간 세계적인 거장들의 마스터피스가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 우리 주변에는 도시를 읽고 반응하며, 작지만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건축물도 들어서 도시 속에서 아름다운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스스로 아이콘이 되는 오브제이기보다 주변과 관계를 맺는 일상의 아름다움. 건축의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은 건축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합의와 안목이 도달할 수 있는 현 지점을 말해준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앤 드뮐미스터 까지, 실험적이며 감각적인,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건축물 들여다보기.
가장 매혹적인 조합을 경험하다
아마도 시작은 삼성미술관 ‘리움’이었을 것이다. 기하학의 대칭적 완결성,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가치를 표출하는 형태, 외형을 드러내지 않고 대지 경계면을 따라 흐르는 세 작품은 거장의 이름에 걸맞은 품격을 드러냈다. 당시만 해도 생소했을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라는 이름은 이 흥미로운 건축물과 함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스위스를 기반으로 한 기하학적 건축의 거장 마리오 보타와 자유로운 행보를 보이는 프랑스의 장 누벨, 현대 건축의 극단을 넘나드는 이단아 렘 쿨하스가 한곳에 모이다니. 어찌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조합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리움이 서울에서 현대 건축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공간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들의 건축물이 우리 도시에 등장하다니!
건축주들이 필요로 한 건 조직 설계를 근간으로 한 전문 설계 집단의 전문성과 노하우였다. 간혹 이름 있는 해외 건축가가 대형 오피스 빌딩을 통해 등장했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초기 콘셉트가 결과물까지 이어지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한국의 현실과 예산에 맞게 적절히 원안이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5년 리움 미술관이 실체를 드러냈을 때, 이 세 건축가의 이름이 주는 가치는 명확했다. 그들은 작가적 성향을 지닌 - 렘 쿨하스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 세계적인 거장들이었다. 이후 강력한 미학적 가치와 완성도, 혹은 건축적 실험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이 초빙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에는 하나둘 거장들의 마스터피스가 들어섰다. 지금은 독일의 메르세데츠-벤츠 뮤지엄으로 더 알려진 유엔스튜디오가 갤러리아백화점 입면에 LED 조명을 수놓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도미니크 페로는 이화여대의 상징적 중심인 이화 캠퍼스 콤플렉스를 완공했고, 안양 아트밸리에는 알바로 시자의 건축 미학을 엿볼 수 있는 미술관이 들어섰다. 이질적이고도 매혹적인,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축물들이다. 작가적 성향을 갖춘 해외 건축가의 등장은 우리 도시가 원하는 바를 대신 말해주었다. 바로 건축의 미학적인 가치다.
더 많은 해외 건축가들이 등장하면서 건축물을 대하는 시선도 달라졌다. ‘명품(?) 건축’이라는 민망한 수식어는 그들을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들고 주변 건물들과 구분했다. 차별화된 디자인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최근 몇 년간 아파트나 오피스텔의 영역에서도 VVIP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운 것은 디자인이었다. 도시도 이름 있는 건축가와 아름다운 건축물을 통해 상징성을 얻고 싶어 했다.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뮤지엄이 주는 이른바 ‘빌바오 효과’처럼, 건축의 미학적 가치는 아이콘에 대한 도시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장 누벨, 벤 반 베르켈이 아파트 설계에 기용되었고, 여러 도시가 쿱 힘멜블라우, 알바로 시자, 자하 하디드 등의 이름을 얻었다. 건축가의 이름이 화려해지면서 아이콘의 성격은 더 강해졌다. 그러나 도시를 풍요롭게 하는 미학적 가치는 유명 건축가의 이름에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해외 건축가에 의존한 이 들뜬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한편에서는 조용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상징적 건축물 하나에 의존하는 대신 공공 예술 프로젝트처럼 도시 곳곳의 빈틈을 파고드는 소박한 공간 만들기와 형태적인 화려함에서 한 걸음 물러나 건축 본연의 가치에 주목한 건축물들이 조금씩 도시의 일상을 채웠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건축물들이다.
건축 미학, 일상으로 들어오다
새로운 콘크리트 사용법은 곧잘 건조하고 차가움으로 대변되는 콘크리트에 감성을 담고자 한 시도였다. 청담동 ‘Be_Twixt’에서는 아예 레진 재질의 작은 원형 창을 냈는데, 이곳을 통해 잔잔하게 새어나오는 빛은 숨을 내뿜는 구멍처럼 느껴진다. 커다란 전면 창에는 영상물을 쏘아 올려, 건물의 입면은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달콤한 콘크리트 만화경이 된다. 패브릭 거푸집으로 떠내어 마치 자유롭게 출렁이는 천을 둘러친 듯한 질감은 콘크리트의 유기적인 형태라는 모순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폐콘크리트를 재활용해 철망에 넣어 구성한 입면은 친환경에 대한 의미뿐만 아니라 헤르조그 & 드 뫼론이 나파밸리의 도미누스 와인 저장고에서 망태에 담은 돌 조각으로 표현한 디테일에 대한 오마주를 보여준다. 이로써 콘크리트는 건물을 구축하는 무표정한 벽이 아니라, 질감과 생동감을 담는 감성적인 재료가 된다.
내년 개관을 앞두고 있는 알바로 시자의 ‘미메시스 뮤지엄(파주출판도시 소재)’이 시적 은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라면, 제주도 ‘핀크스 미술관’은 자연을 반영하는 은유의 건축이다. 물과 바람, 소리와 빛을 끌어들인 ‘수, 풍, 석 미술관’은 건축 자체가 전시물이 되는 명상의 공간으로 조성됐다. 2006년 재일 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이 구조물들은 그의 대표작인 포도 호텔 근처, 비오토피아 타운하우스 내에 들어선 전시관이다. 깊은 사색을 이끌어내는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건축가는 개성을 절제하고 조형의 순수함을 얻고자 했다. 마치 물고기의 비늘이 반짝이듯 경쾌한 지붕의 디테일은 변화무쌍한 제주 하늘의 풍경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지만 재료의 질감과 조형성을 통해 건축물 자체를 체험하도록 이끈다. 그 결과 추상적인 공간은 건축물이 담을 수 있는 여백을 통해 자연을 담고 치유를 권한다. 중계동의 ‘데미안 빌딩’은 효율성과 경제적인 논리가 가장 첨예하게 맞서는 근린 생활시설에 건축가의 생각을 담은 예다. 건축가 김승회는 소규모 상가들이 밀집한 대로변의 천편일률적인 덩어리를 잘게 나누려는 듯, 건물에 수직 줄무늬를 그어 내렸다. 임대 건물의 상업적 욕망과 도시 풍경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자 하는 건축가의 욕망은 외관을 분절시키는 수직 바의 형태에서 접점을 찾았다. 마치 바코드의 선처럼 불규칙적으로 그어 내린 콘크리트 선은 어느 것이 기둥이고 스킨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덕분에 데미안 빌딩은 층층이 쌓아 올린 주변 건물과 달리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1층 진입부나 건물 후면에 빈 공간을 마련한 것은 경제 논리 내에서도 충분히 여유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의지의 반영이기도 한다.
부티크 모나코는 형태적인 새로움이 아니라, 기준 층이 반복되는 도미노 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무한 반복되는 기존 오피스텔의 틀을 깨고 49개의 다양한 유닛을 통해 불균질한 타워를 만들었다. 외부에서 보면 건물 전체에서 마치 15개의 덩어리를 파낸 듯한데, 최대 높이까지 건물을 높이고 넘치는 용적률만큼 부피를 덜어내 건물 전체의 여백으로 삼은 것이다. 이곳은 수직 정원으로 쓰인다. 커다란 타공이 반복되는 어번 하이브는 그 입면이 곧 구조라는 점에서 형태적인 새로움을 뛰어넘는다. 원형 패턴의 반복을 통해 건물의 스킨이 곧 구조가 되도록 해, 기준 층의 수평선이 반복되는 주변 타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주상 복합 빌딩인 부티크 모나코나 오피스 타워인 어번 하이브나 외관의 독특함만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두 건물 모두 저층부의 공용 공간을 대로변에 열어두어 사람들이 쉽게 접하고 유입될 수 있도록 한 것. 외부와 단절된 오피스 타워의 로비와 달리, 두 건물 모두 저층부의 거대한 구조물 사이에 열린 공간을 만들어 강남대로를 걷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신사동 도산공원 근처, 빽빽하게 들어선 콘크리트 건물 사이로 보이는 ‘앤 드뮐미스터 숍’은 수호초를 뒤집어쓴 이질적인 건물이다. 녹색 식물을 두른 유연한 외관과 달리, 숍이 들여다보이는 실내는 커다랗게 입을 벌린 어둑한 동굴과도 같다. 여기에 기둥 없이 매장 전체를 지지하고 있는 콘크리트 셀 구조와 내부를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지오텍스타일의 외벽, 유기적으로 뻗어 내려온 계단과 백색 공간, 축축한 이끼로 덮인 내부 벽은 마치 건축물 자체가 숨을 쉬는 커다란 화분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장식적이지 않고 잘 쓰이지 않을, 더구나 서로 어울리지 않을 소재를 재치 있게 섞어내는’ 앤의 스타일은 ‘진지하지만 엄중하지 않고, 세심하지만 실험적이며, 강하지만 감각적인’ 스타일로 조민석의 건축과 만난다. 녹색 외피를 둘러싼 장난꾸러기처럼 자연?인공, 외부?내부가 아무렇지 않은 듯 서로 융화하는 공간이다. 건축가는 기존 건물의 안과 밖을 뒤집어내고 식물을 둘러내 앤 드뮐미스터를 하나의 혼성적 유기물로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여기에 커다란 콘크리트 셀을 만들어냈고, 자연과 벗하는 풍경을 담는 것을 넘어 자연을 입은 건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완결된 건축물, 물리적 구축물에 머무르던 건축 대신, 끊임없이 가꾸고 다듬어야 하는 유기체의 건축을 수용한 것이다. 이 건물은 살아 있는 식물과 이끼를 두르고 있다. 담쟁이덩굴처럼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겨울이면 흙이 보였다가 다시 뒤덮기도 하고 철마다 가꾸고 가끔은 솎아내주어야 하는 이 외피는 디자이너 앤 드뮐미스터의 적극적인 지지와 건축주인 한섬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철마다 창호지를 바르고, 흙벽을 바르고, 초가의 지붕을 이듯, 끊임없이 살아 숨 쉬고 단장하는 건축물을 수용한다는 것은 손익을 셈하는 가치로는 답을 낼 수 없다. 이것은 건축물에 대한 형태적인 화려함을 벗어난 안목에 관한 문제다. 지난 몇 년간 등장한 이 건축물들은 스스로 아이콘이 되는 오브제가 아니라, 주변과 관계를 맺는 일상의 건축이다. 도시 혹은 자연에 반응하며 물성, 은유, 감성 그리고 친환경과 자연이라는 건축의 또 다른 가치를 풀어내는 건축물이 늘어날수록 우리는 더 다양한 도시의 표정을, 더 다양한 이야기를 갖게 되지 않을까? |
출처: 내 마음, 머무는 그곳은.... 원문보기 글쓴이: 孤雲(고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