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어났던 아르누보 운동의 중심지이다. 아르누보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독일과의 분쟁을 짚어야 한다. 낭시가 주도인 로렌지방은 15세기부터 독일과 크고 작은 국경 분쟁을 벌였다. 혹시 교과서에 실렸던 알퐁스 도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을 기억하시는가? 어느날 갑자기 프랑스땅에서 독일땅으로 변해 마지막 수업을 받는 교실의 풍경을 그린 ‘마지막 수업’은 1870년부터 2년동안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소재로 했다. 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프랑스는 알사스 로렌을 독일에 뺏겼고 1차대전 후 독일에 승리한 뒤 알사스 로렌 지방을 돌려받았다. 낭시는 다행히 독일로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전쟁 후 난민피난처가 됐다.
난민 중에는 많은 기업가와 예술가들도 섞여 있었다. 풍부한 자본과 예술인들이 모여든 소도시. 이들이 일으킨 문화운동이 바로 ‘아르누보’다. 아르누보는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자는 것. 벨기에에서 처음 시작됐지만 가장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든 곳이 낭시다. 루이 마조렐, 에밀 갈레, 유진 발랭, 자크 그루베 등이 낭시에서 활동했다.
아르누보의 흔적은 스타니슬라스 광장의 미술관, 공작의 궁이었던 로렌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 아르누보는 그림보다는 건축과 공예, 가구 등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현재 낭시에 남아 있는 아르누보 건축만 80여동. 도심투어에서는 철과 나무, 대리석 등 다양한 소재를 쓴 집들을 통해 아르누보를 엿볼 수 있다.
건축가 앙드레가 지은 기찻길 옆 튤립모양의 발코니가 있는 포니에 르포의 집은 최초의 아르누보 건축. 소흐지역의 루이 마조렐의 집은 낭시 지방정부가 사들여 관광코스로 개방하고 있다. 또 그가 만든 가구를 전시한 박물관은 유럽은 물론 일본인들의 발길도 끊이질 않는다. 실용성은 없고 아름다움만 추구했던 아르누보 운동은 얼마 가지 못했다. 1차대전 이후엔 단순미를 강조한 아르데코가 일어났다.
〈낭시|최병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