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실패로 파산… 패자부활전도 없어"
2000년대 초까지는 정말 잘나갔다. 건설업계의 꽃이라는 '종합건설 현장소장'까지 올랐다. 서울·대구·부산까지 대한민국에 지하철이 놓이는 곳이라면 늘 그가 있었다. 연봉도 6000만원이 넘었다.
2010년 5월, 조준혁(가명·51·서울 영등포구)씨는 개인 파산을 선고받은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월 43만원의 정부 지원을 받아 고시원 방값 25만원 내고 나머지로 버틴다. 부산에서 대학을 나와 현대중공업 등 유수의 건설사를 거치면서 승승장구했으나, 모았던 4억6000만원을 투자해 2001년 전문 건설업체를 차렸다가 망했다. 한 번 실패하니 패자 부활전이라곤 없었다.
온 나라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던 성장시대의 주역 4050세대가 이제 계층 하락의 '미끄럼틀'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본인 노력으로 빈곤의 고리를 끊어냈던 4050세대는 IMF 위기와 신용대란, 글로벌 금융위기의 풍파를 겪으며 곳곳에서 빈곤층으로 추락하고 있다.
인천에서 H택배 대리점을 하는 이경호(50)씨가 한달에 집에 가져가는 돈은 120만원 안팎이다. 그래도 13년 만에 품어보는 희망의 씨앗이다. 이씨는 중견 무역회사 영업직으로 15년을 근무하다 IMF 사태 때 구조조정당했다. 이때부터 미끄럼틀 인생이었다. 택시기사, 보험설계사, 다시 택시기사….
2004년, 자꾸 배가 고팠다. 당뇨에다 갑상선저하증이라는 합병증이었다. 병원비 내다 보니 그 길로 네 식구가 기초수급자가 됐다. 다행히 마이크로크레디트(서민 소액무담보대출)를 받아 택배대리점을 꾸렸지만 이씨는 "고3인 딸, 대학생인 아들을 졸업시킬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4050세대는 탈락자를 보듬는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시화공단에서 18년 동안 금형공장을 운영하다 부도를 맞은 박모씨(55)는 "정부는 기초수급자로 떨어지지 않도록 돕는 게 아니라 기초수급자로 떨어져야 그제야 도와준다"면서 "나락에 한번 떨어지면 일어설 힘도 없는데…"라고 했다.
"첫발 딛지도 못하고 3류인생 되나 불안"
서울 모 사립대 경영학과 출신의 박모씨(30)는 캐나다 어학연수까지 다녀왔지만 졸업한 지 4년이 되도록 취업을 못했다. 은행원으로 퇴직한 아버지 퇴직금에서 아직도 용돈을 타 쓴다.
그는 토익도 800점 후반대이고 학점도 4점(4.5 만점)에 가깝다. 박씨는 "대기업체 10여곳에 응시했지만 죄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아무 기업에나 취업하고 싶지는 않아 답답해 미칠 지경"이라며 "이러다가 시작도 못 해보고 3류 인생이 되나 싶어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고성장이 멈춘 이후 사회에 진출한 2030세대는 "사다리에 한번 올라타기라도 해봤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은다.
▲ 방송사 정규 PD가 돼 멋진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스물 여덟 살의 조진화씨. 연봉 1500만원에 외주 제작사에서 일하는 그는 “갈수록 꿈을 이루기 힘들다는 생각이 커진다”고 말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서울의 사립대 사범대를 졸업한 최모씨(26·여)는 2008년 8월 졸업 후 직장을 네번 옮겼다. 첫 직장은 유아 교재를 만드는 중소기업이었다. 뭔가 연구·개발도 하고 창의적인 능력도 발휘할까 싶었지만, 다른 교재를 베끼는 일이나 거래처 접대 자리에 끌려가는 일이 더 많았다. 최씨는 "과연 이곳에서 내가 인생을 걸 수 있을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작년 경북대를 졸업한 취업 재수생 이모씨(28)는 "기업마다 스펙(조건)보다 능력을 본다고 하는데 직접 지원해보면 그렇지 않다"면서 "해외연수 등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갖추기 힘든 조건으로 합격하는 것을 보면 좌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나마 취업을 해도 희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방송 프로그램 외주 제작사 PD로 일하는 조진화(28)씨의 연봉은 1500만원을 조금 넘긴다. 3년차인데 입사 후 연봉은 50만원 올랐다. 동료들은 대부분 6개월도 안 돼 그만둔다. 이 고비를 넘기면 뭔가 앞날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입사 경쟁이 워낙 치열한 데다 자신 같은 경력직이 옮겨갈 기회는 전무하다. 그는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우리는 입사 합격증 3~4개 두고 고민하다 골라 취직했다'는 말을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 같다"고 말했다.
2만8000여명 실태조사도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지는 한국 사회의 구조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 취재팀은 국민연금연구원·사회통합위원회·삼성경제연구소·중소기업연구원·토지주택연구원·한국개발연구원·한국노동연구원·고려대·중앙대 소속 자문단 20여명과 함께 각종 기초 통계를 새롭게 분석하는 방대한 작업을 석달간 진행했습니다.
자문단은 통계청 도시가계조사 20년치를 토대로 조사 참여 가구의 소득 분포가 연도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분석하고, 한국노동패널조사 10년치를 활용해 도시 지역 5000가구의 삶이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를 정밀 추적했습니다. 팀스(TIMSS·국가 간 학력비교시험) 결과 8년치를 토대로 계층별로 성적이 어떻게 오르고 떨어졌는지도 살펴봤습니다.
취재팀은 또 한국고용정보원·잡코리아·한국여성재단·한국한부모사랑회와 공동으로 무주택 서민, 청년 실업자, 한부모 가정 등 우리 사회의 약자 2만8000여명의 삶을 실태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일자리·교육·주택 등의 각 경로에 존재하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하나둘씩 무너져가고 있음을 객관적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디지털조선 영상취재팀 프로듀서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3~5분 분량의 미니 다큐멘터리 동영상으로 제작돼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