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 교수의 역사칼럼(48)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其鑑不遠
그 역사의 거울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새 정부가 들어 선 다음부터 북쪽에서는 이른바 919남북 군사합의를 위반한 군사 활동이 심해졌다는 보도다. 지난 정부시절에 북과 이른 바 협정을 맺어서 피차 군사적 충돌을 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를 위반하는 것이 심해졌고 노골적이라는 말이다.
국가 간의 협정이란 신의(信義)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말뿐이다. 신의란 피차간의 오랜 교섭과정을 통하여 자연적으로 쌓아지는 것이어서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신도 만찬가지인데, 쌓여진 그 경험을 모르는 체하면서 반복하여 다시 협정을 하려고 든다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과거에 잘못되었던 경험을 항상 기억하고 그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말라는 교훈으로 사용되는 말 가운데 은감불원(殷鑑不遠)이란 말이 있다. 똑똑하고 야심에 찼던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차츰 사치와 잔혹한 정치를 하다가 결국 주(周) 무왕(武王)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이것이 은(殷)이 겪은 실패한 역사적 경험이다. 물론 은이 망하고 난 다음에 이를 보고도 이와 비슷한 짓거리를 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은감불원은 이런 사람에 대한 경고로 ‘은나라의 망한 역사적 교훈을 보라. 그것에 그대 가까이에 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은감불원과 같은 상황이 남송 고종(高宗)시기에 일어났다. 원래 북송시절에 송(宋)은 거란족(契丹族)의 요(遼)와 연운(燕雲) 16주(州)를 가지고 다투었다. 원래는 한족(漢族)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였던 이 지역은 오대(五代)를 거치면서 등장한 거란(契丹) 세력이 밀고 내려와 차지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을 두고 송과 요는 전쟁을 하였지만, 송은 오히려 전연(澶淵)의 맹(盟)이라는 협약으로 매년 막대한 세폐를 요에 보내야 했다. 이만큼 송에게 연운지역이란 목구멍에 있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 후에 시대가 바뀌어 하얼빈일대에서 여진족(女眞族)이 금(金)을 세우고 나자 송은 금(金)과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요(遼)를 협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전리품으로 송은 연운지역을 차지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국제조약인 셈이다. 그 결과는 잘 지켜졌을까?
금(金)은 요(遼)를 멸망시킨 다음에 연운(燕雲)지역을 송(宋)에 귀속(歸屬)시키기는커녕 도리어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군사를 동원하여 송의 도읍인 개봉(開封)을 두 번이나 포위하고 자기 점령지역에서 수탈하며 금은보화를 모조리 거두어 갔다. 급기야 황제에서 물러난 휘종(徽宗)과 새로 등극한 흠종(欽宗)까지 금(金)의 군전(軍前)으로 오게 하여 포로로 잡아 갔으며 궁실의 비빈들은 물론 황실의 종족도 모조리 잡아갔다.
다행스럽게 휘종의 아들인 조구(趙構)가 마침 개봉(開封)에 있지 않았던 터여서 포로가 되는 신세를 면하고 송(宋)의 명맥을 이어서 황제에 오를 수가 있었는데 그가 남송의 고종(高宗)이다. 그가 황제에 오른 가장 큰 명분은 그의 아버지와 형님인 휘종과 흠종을 모셔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금(金)에 사신을 보내어 금(金)에 화의(和議)하자고 애원하였다. 양국이 화의하게 되면 휘종과 흠종, 이른 바 이성(二聖)이 돌아 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사자를 보냈지만 사신으로 갔던 사람마저도 대부분 금(金)에 잡혀 있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수모를 견디며 고종은 한편으로 군대도 만들어 유지하면서 12년이 지난 시점에서 반대로 금에서 사신을 송에 보냈다. 이제 송·금이 화의하고 사신이 교환되면 고종이 그렇게 원하던 두 황제와 고종의 생모도 귀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화의를 좋은 기회로 알고 추진하던 사람은 재상 진회(秦檜)였다.
물론 금에서도 송(宋)을 공격하였던 태종(太宗)이 죽고 젊은 황제 희종(熙宗)이 등극한 뒤로 내부적으로 분쟁이 일어나고 송에게서 빼앗을 땅도 다 관리하기 힘들어서 화의(和議)하자는 이야기도 나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宋)으로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금(金)에서 하자는 대로 받아 주면서 화의를 해야 할 것인가? 고종(高宗)과 재상인 진회는 이른바 굴기(屈己) 즉, 자신을 굽혀서라도 화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즈음 말로 굴욕외교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미 죽은 휘종(徽宗)의 재궁(梓宮, 靈柩)과 흠종, 고종의 생모인 황태후를 돌아올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금의 사신은 남송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에 한때 송군(宋軍)을 총 지휘하여 금과 대결하였다가 뒷방으로 물러 가 있는 장준(張浚)이 상소문을 올렸다. 이제 금과 화의를 하면서는 요(遼)를 협공하자고 금(金)과 협약하였고 그 협약은 기대와 달리 깨지고, 오히려 송(宋)이 금(金)에게 침탈된 역사를 되돌아보라고 간곡히 건의하였다. 그러면서 ‘그 실패한 역사적 거울은 먼 옛날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其鑑不遠)’이라고 일깨웠다. 장군 악비(岳飛)도 “금인(金人)들은 믿을 수 없으며 화의(和議)도 믿을 수 없으며 상신(相臣)이 국가를 모략(謀略)하는 것은 훌륭하지 아니 하니 아마도 후인(後人)들에게 비웃음을 끼칠까 걱정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진회는 듣지 않았다.
이렇게 일깨워 주었지만 당국자는 어찌하였을까? 당장 화의가 급하다고 반대의견을 뒤로한 채 허겁지겁 화의를 진행하였다. 드디어 소흥 9년(1139년)에 송(宋)과 금(金)은 화의하기로 합의하였다. 물론 1차 목표인 휘종의 재궁과 흠종을 귀환하고 금에 칭신하며, 매해 25만량의 세폐를 보내기로 하고 황하 이남을 다 달라는 남송의 요구는 거절당하고 하남과 섬서(陝西) 지역만을 남송에 귀속시키기로 하였다. 송에는 큰 부담이었지만 그것이라도 제대로 지켜졌을까?
힘없이 협약을 하고 지켜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짓이다. 금(金)에서 주전파(主戰派)인 완안종필(完顔宗弼)이 군대를 끌고 다시 남침해 왔다. 그래도 남송의 악비(岳飛)와 대결하여 두 번이나 금군(金軍)을 이기어서 완안종필도 비로소 송금화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바로 협의대로 휘종의 재궁을 돌려 준 것은 아니었다. 겨우 금에서 2급 작위를 주었던 죽은 휘종에게 작위를 한 등급 올려주었을 뿐이었다. 대신 남송에서는 화의의 실행을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남송을 버티던 장군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유기(劉錡), 양기중(楊沂中)의 병권(兵權)을 회수하여 화의 실행을 준비하더니 그것도 부족한지 악비(岳飛)를 사사(賜死)하였다.
이처럼 송은 화의 실행의 조건을 만들었어도 금은 완전히 이행하지 않았다. 휘종의 재궁과 그의 위현비(韋賢妃, 고종의 생모)는 돌려보냈지만 흠종은 금(金)에서 그 후 15년을 더 살다 그곳에서 죽어야 했다. 장준의 말대로 지난 실패한 역사의 거울을 보지 않은 결과로 나타났고 또 실패의 역사적 거울이 되었다.
남북 간의 협정을 그동안 적지 않았다. 박대통령시절부터였으니까...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대화나 협의는 해야 하겠지만 항상 지난 실패한 역사의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첫댓글 좋은 역사 평론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역사의 교훈의 적용은 어딘가 공허한 감이 듭니다.
과거와 현재의 상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정교수님, 의견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글을 쓰면서 내가 보았던 남북간의 합의를 돌아 보았습니다. 박대통령시절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에 갔던 일이 생각 납니다. 그후 지금까지 많은 남북합의가 있었지요.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은 큰 합의였지요. 그런데 번번이 깨졌습니다. 왜일까요? 신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상대를 이용하려고만 했던 것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이 방북하고 피차 서명을 하고 군사시설도 일부 철수 하는 합의를 했지요. 이 합의가 잘 지켜 집니까? 북쪽에서는 오늘도 수백발의 포탄과 미사일을 쏘아 댔네요. 이를 보면서 오히려 합의를 안한 것만 같지 못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 이렇게 실패하는 합의를 계속할까? 바로 앞에서 실패한 합의를 거울로 삼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남북간의 합의가 마치 남송이 금과 화의하면서 몇번씩 계속 실패한 것과 같다고 생각이 들어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