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인들과 함께 1박 2일로 다녀온 경주 역사 유적지중 불국사를 관광하겠습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0 or 11번 버스나 순회관광버스를 이용하면 가능함.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15
시작하여 김대성의 사망 후는 나라에서 이를 맡아 완공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고 몇년에 걸친 발굴 조사 와 복원을 통하여 현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 청운교·백운교, 연하교·칠보교 등의 문화재 를 보면 당시 신라사람들의 돌다루는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청운교·백운교 및 연하교·칠보교는 일찍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 되어 있으며 가구식석축(화강암석을 마치 나무로 만든 가구를 짜듯이 구 성하는 것) 또한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조건축으로 건축적 조형미는 물 론 그 기법이 매우 독특하며 신라 석조건축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에 국보급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그 중 잘 알려진 문화재로는 국보 제20호인 '불국사 다보탑' 국보제21호인 '불국사 삼층 석탑', 국보 제22호 '불국사 연화교·칠보교’, 국보 제23호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 좌상', 국보 제27호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 보물 제61호 '불국사 사리탑' 등이 있다.
남쪽의 증장천왕 (增長天王) 오른손엔 용을 움켜잡고, 서쪽의 광목천왕 (廣目天王) 삼지창과 보탑, 북쪽의 다문천왕 (多問天王) 비파를 잡고 튕기는 등 사방에 천왕을 일러 사천왕 또는 사대천왕이라 부른다.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쳐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말한다. 33계단은 33천을 상징하는 것으로 헛된 욕망을 버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걸어 올라가는 다리라고 한다. 거의 45°로 경사가 져 있기 때문에 연화교·칠보교보다 남성적이며 웅장하고 장대한 느낌을 준다. 다리 밑의 홍예(虹霓)는 무지개 모양의 U자를 거꾸로 놓은 듯한 모습 인데 한국 돌다리 홍예의 시원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옛날에는 구품연지로 흘러드는 물이 이 아래를 통과했다고 한다. 751년 불국사의 창건 때 세워져 1686년과 1715년에 중수되었고, 1973년 난간을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을 한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하였고 각부분의 길이 너비 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키는 등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안타깝게 다보탑은 일제에 나라를 빼았낀 설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다. 다보탑에는 본디 4마리의 돌사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1마리만 남아 있다. 높이는 10.4m이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 년 남원 실상사 동·서 3층 석탑의 머리장식을 본 따서 복원하였다. 특히 석탑은 민간 설화로 전해 내려온 석공 이사달과 그 연인 아사녀의 안타까운 이야기와 함께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무영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사의 대웅전으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11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44호로 지정되었다. 석가여래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으로, 불국사 경 내 중심 건물이다 삼국유사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대웅전중창단확기 (大雄殿重創 丹雘記)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년,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년,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 (751)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세종, 성종, 명종의 중건, 선조 26년(1593년) 임진왜란 때에 완전 소실.하였다. 그후 효종, 숙종, 숙종, 영조 등 조선 왕들이 중창, 중건, 보수를 하고 영조 41년(1767년) 단청이 완료되고 영조 45년(1769년)에 삼존불과 후불탱(後佛幀)을 완성하였다.
말로서 경론을 강설<講說)하는 곳임에도 무설이라 한것은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이 언어수단으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임을 표현한 것'이다. 670년경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최초로 강의를 하였다. 창건 이후 여러차례 중건 중수를 거쳐 1933년에 복원하였다. 건축양식은 조선 후기에 속한다.
불상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8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751년에 건립하였다. 건립 양식은 조선 후기에 속한다.
높이 1.77m 나발머리에 육계를 하고 엄숙하고 단정한 표현을 하고있으며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문화재청)
비로전 왼쪽의 보호각 안에 있는데, 지금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는 아니다.
나갔다가 1933년에 되돌아왔다. 겉모양은 석등과 비슷하며,「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 기록된 ‘광학부도(光學浮屠)’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탑은 받침돌 위에 몸돌과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받침돌은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로 이루어졌다. 아래받침돌- 연꽃잎 8개의 무늬가 새겨저 있다. 가운데 받침돌- 북모양인데 겉면이 구름무늬가 새겨저 있다. 윗받침돌-연꽃잎이 위로솟은 악련(악蓮)의 모습 9장이 돌려 조각 되어 있고 연꽃의 가운데에는 꽃무늬 모양의 원좌(圓座)가 얕게 돌을 새김 되어 있다.
를 모신 불전이다. 나한전은 70년대에 복원 증설 할 때 증설하지 못하고 주춧돌만 남아있는 법화전지의 터였다. 규모는 작지만 주위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찾는 사람도 적지만 불국사 경내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늑한 불전이다.
높은 승려를 의미한다.
떡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잘룩한 허리 등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 신라시대의 불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라 칭한다 땅에 닿는 아래쪽이 연화교와 청운교이다.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극락세계를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독특한 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 잎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아미타불이 거주하고 있는 극락이 연화와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는 불경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화교는 10단으로 디딤돌에 끝이 뾰족하고 옆으로 길게 퍼진 연꽃잎을 새겼다. 칠보교는 계단에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8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 밑에는 완만한 곡선을 지닌 무지개다리[虹霓]가 있다. 계단의 양쪽 끝에는 4개씩 정교하게 다듬은 돌기둥을 세워 원형의 난간대를 끼웠고 난간대 하부 중앙에는 난간동자를 세워 받쳤다
내려보면서 청운교와 백운교의 측면과 그앞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아쉬움은 청운교·백운교와 연화교·칠보교를 오르내리지 못했다. 이유는 보호를 위해 출입 금지로 되어있다. 인터넷에서 참고를 허락한 '다음 백과' 나 '불럭' '카페' '연구소' 등을 참조하여 같이 공유하고자 작성하여 지인들과 함께 공유합니다. 2018. 12. 6. 월용이가 제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