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 둘씩 둘씩 보내시며 말씀/ 마가복음 6:1-29 요절/ 마가복음 6:7 | 2024. 5. 19 | |
마가복음 제 9 강 |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 파송은 어둡고 불의한 시대 속에서 별과 같이 빛이 납니다. 전도하는 제자들이 없으면 세상은 어둡기만 합니다. 귀신과 질병, 정욕과 물질, 타락한 권력자가 판을 치게 됩니다. 전도하는 제자들이야말로 세상의 소망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할 일이 무엇일까요?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어 전도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 한 사람이 세상의 소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말씀을 가르치셨고 여러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젯거리였습니다. 어디에서 또 어떤 일을 하실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1절을 보면 가버나움을 떠나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나사렛 촌 동네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왔으니 고향 사람들이 금의환향하며 반겨 줄 것만 같았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현수막을 걸고 카퍼레이드하며 예수님 일행을 마중 나와 큰 잔치를 벌일 것만 같았습니다. 보스턴 허누가 선교사님이 박사가 되었을 때 마을 입구에 “허만백의 아들 허성구 박사 졸업, 축하”라는 현수막이 걸렸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고향에 도착하여 평상시처럼 안실일 날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2b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속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에 대하여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충격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고 진지하게 바라보며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깊이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놀람이나 충격이 믿음으로 연결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왜 배척하였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에서 30년 동안 함께 살면서 그들은 자신들과 다름없던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가족들도 잘 알고 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은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종교지도자들의 반응과 비슷합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그 능력의 출처가 귀신의 왕이라고 모독하였습니다. 결국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한 마리는 편견이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선입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는 생각이 그들을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그들의 눈을 감게 만들고 귀를 닫게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 가운데 하나는 책을 단 한 권만 읽는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한 권이 전부인 줄 알고, 한 권의 시야로만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참다운 신앙은 “내 생각에는”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기 위해선 우리가 갖고 있는 인본적인 생각과 자기 생각을 내려놔야 합니다. 말씀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해야 합니다. 안다는 교만을 내려놔야 합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고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할 때 예수님의 은혜를 덧입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됩니다.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받은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받은 배척을 선지자가 받는 배척으로 이해하셨습니다. 배척받음으로 위축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배척받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제자의 길이 어떠한지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어색하고 익숙해지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 중의 하나가 ‘거절감’이라고 합니다. 특히 가까운 친구, 부모, 남편, 아내에게 자식에게 받은 배척은 큰 상처가 되고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도 배척받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받으셨고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은 배반하였습니다. 하지만 배반한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셨고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배척과 배반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배척하고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목자님들을 통해, 말씀을 통해 찾아오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는 안다는 생각, 가기 고집과 편견과 교만으로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였고 내 죄로 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런 나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계속하여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용서의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해야겠습니다. 이 은혜에 힘입어 거절 받은 아픔과 상처를 씻어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절 받아 아파하는 이들을 위로해 주고 도와줄 수 있는 자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6절을 보면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반응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닌 마을 대부분 사람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그의 권능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고 고치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능력으로 치료하고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에겐 그의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후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예수님은 배척 앞에 위축되거나 상처받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힘을 내어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들을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6개팀으로 나누어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말씀을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세상과 사단 마귀는 자꾸 우리를 위축되게 만듭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이들을 통해 위축되게 만듭니다. 위축되면 사람이 부정적으로 됩니다. 마음이 쪼그라듭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세상이 보이고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믿음을 갖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도전하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합니다. 위축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문제와 상황 앞에 도전하고 부딪쳐야 합니다.
청년 학생들 가운데 24학번 어린 양들이 세례 준비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훈련은 매일 일용할 양식 먹고 발표하고 기도하기, 주일예배, 소감 모임에 대한 절대성 갖고 참여, 새벽기도, 5페이지 인생 소감, 둘씩 둘씩 전도하는 것입니다. 훈련내용을 듣고 한 형제는 속으로 경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경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고 위축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하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시고 믿음만 남겨 달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캠퍼스에 나아가 둘씩 둘씩 전도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요 남에게 다가가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자와 함께 둘씩 전도하는데 목자보다 먼저 다가가 전도하였습니다. 그는 전도 후 소감모임 때 고백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경악하였고 두려웠지만, 막상 믿음으로 도전해 보니 할 만하였다고 하며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캠퍼스 복음화율이 2%라고 합니다. 더 이상 청년 사역은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이제는 전도가 아닌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고 합니다. 제자양성은 먼 옛날이야기라고 합니다. 어두운 시대요. 힘든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생각하면 위축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세상 앞에 기죽지 말고 배척과 실패에 대해 두려워 말고 말씀의 능력을 믿고 도전해야 합니다. 두루 다니며 전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둘씩 둘씩 보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는 합심 동역의 역사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한 두 사람의 원맨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족하더라도 합심하여 함께 동역하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전도서 4:9-12은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또한 합심하여 기도하도록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 없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소원 있는 양들을 만나게 하시고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십니다. 봄학기 3명의 마리아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했을 때 하나님은 24학번 3명의 자매를 보내주셨고 일대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예수님은 전도 여행할 때 가져가야 할 것과 가져가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주십니다. 보통 여행할 때는 가져가야 할 게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도 여행할 때 가져가야 하는 것보단 가져가지 말아야 할 것에 포인트를 두십니다. 그들이 가져가는 것은 지팡이와 신입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신발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나타냅니다. 전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붙잡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부르시고 보내셨음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권능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보호받을 수 있고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10,11절을 보면 영접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이들의 거처에 거하며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십니다. 누구에게 다가가 전도를 한 것은 용기와 믿음으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절당하면 낙심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거절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 매이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거절한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대한 기억을 털어버리도록 하십니다. 나아가 그들이 듣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음으로써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십니다.
2024년 믿음 생명 여름 수양회에 30명 청년 학생들 초청을 위해 기도하며 도전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현재 있는 양들이라도 잘 도와 데려가면 될 것 같습니다. 현실을 생각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고 덜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둘씩 둘씩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합심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최고의 동역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사단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기도 없이는 말씀을 전할 수 없고 한 사람도 주님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둘씩 둘씩 나가며, 기도하는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가 힘있게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제자들은 순종해서 예수님이 주시는 권능만을 믿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이 쫓겨나고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듣고 좋아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도 전한 메시지는 회개의 메시지였습니다. 왜 듣기 싫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까? 이는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때만이 죄 사함과 구원이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불신앙이란 말이 있습니다. 믿는다곤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배운다고 하지만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섬기지 않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나로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신앙인이지만 불신앙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권능이 임하여 삶이 변화되고 가족들과 양들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일반적으로 귀신을 쫓아냈거나 병을 치료한 그 사람의 이름이 알려집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이름 대신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납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쫓고 병을 고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만을 믿고 나갈 때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병든 자를 고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믿고 “회개하라” 복음을 전파하자 온 유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국 헤롯 왕까지 두려워 떨게 했습니다.
17절부터 29절까지 세례 요한의 죽음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간음죄를 고발하며 회개토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옥에 갇히고 결국 헤로디아의 간계로 헤롯의 생일날 목 베임을 당해 죽고 맙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이 너무나 허망하고 헛된 죽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헤롯이 요한의 목을 벨 순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전도인은 죽지만 전도인이 뿌린 말씀은 죽지 않고 계속하여 뻗어나가고 결국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인 터툴리안(AD 155-240)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박해를 통해서 복음 역사가 오히려 힘을 발휘하고 왕성해진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죽음은 어찌 보면 세상 권력자 앞에 아무런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부당하게 죽은 억울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의 삶이 허망해 보이고 아무 쓸모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의인의 삶과 죽음은 헛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주시고 번성케 하십니다. 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두운 이 시대에 위축되지 않고 의인의 길,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의 죽음은 앞으로 예수님이 걸어가실 길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제자들의 길이기도 하며 신자들의 길, 우리들의 길이기도 합니다.
저는 말씀을 통해 배척받으셨지만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더 힘써 말씀을 전하시고 제자들까지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스피릿에 감동되었습니다. 저는 거절 받는 것을 매우 힘들어 합니다.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데도 그러하였습니다. 역사를 섬기며 여러 가지 동역을 구해야 하지만 거절당할 것 같아 적극적으로 동역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스피릿과 믿음을 배웁니다.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동역을 구함을 통해 동역의 역사를 이뤄가야겠습니다. 날마다 예수님께 나아감을 통해 은혜 안에서 강한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또한 전도하며 많은 배척을 받지만 그럴수록 더 힘써 두루 다니며 말씀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전도할 제자들을 계속하여 세워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전도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전도자를 환영하는 이들은 극소수입니다. 헤롯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권력자들이 여전히 판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고 둘씩 둘씩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오히려 더 힘을 내어 말씀을 전하고 제자들을 보내야겠습니다. 나 한 사람이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복음전도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전도자들이 어두운 세상의 소망임을 믿고 그러한 제자들을 세워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