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낙산사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산 5-2) 오봉산은 낙산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
해변에 위치한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사찰로,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 중의 하나이다.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이 설법을 펼치며 항상 머무는 곳을 이르는 보타락가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모든 소리를 듣고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분으로 특히 낙산사는 강화도 낙가산 보문사와 남해 금산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관음기도 도량. 낙산은 범어 보타락가(補陀落伽, Potalaka)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11년(671년) 의상(義相)대사에 의해 창건, 1300여년 이상 법등을 밝혀 오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음성지이다. 의상대사는 중국 당나라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하고 신라로 돌아와 양양의 관음굴(觀音窟, 현재 홍련암)에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한 뒤 낙산사를 창건했다 한다.
양양 낙산사와 홍련암은 양양읍에서 북쪽으로 약 7㎞ 떨어진 곳에 있는 사찰이다. 낙산의 정상부에서 남쪽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형의 가장 평탄한 능선 위에 낙산사의 주요 가람이 배치되어 있다. 사찰은 낙산의 지세에 따라 북서쪽에서 남동을 향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있으며, 북쪽과 서남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낙산사 일원은 2008년 12월 18일에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다.
산사의 고즈넉함과 해변의 활발함이 공존하는 장소로 낙산사 칠층석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보물3점 (낙산사 동종 2005년 화마로 인해 보물지정 해제)과 다수의 지역문화재를 보유, 휴식형과 체험형의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고, 산사가 갖는 이점과 낙산 해변에서의 해양수상레저 문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건네받았다는 일화가 있는 사찰로 해수관음상이 낙산 정상에 우뚝 솟아있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곳이자 낙산사 창건의 모태가 된 홍련암은 관음성지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의상대사가 동해를 바라보며 좌선하였던 곳으로 알려진 의상대는 현재 동해안 일출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화엄경』에는 「보살주처품」이 별도로 있어서 금강산에는 법기(法起)보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천관산에는 천관(天冠)보살이 상주설법(常住說法)한다고 설한다. 관음주처 신앙은『화엄경』의「입법계품」에 기초하고 있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나섰을 때 28번째로 만났던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이다.
858년(헌안왕 2년)에 범일스님이 3칸의 불전을 짓고 정취보살상을 봉안하였고, 1254년(고종 41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관음상과 정취보살상,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양주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양주성까지 함락되자 두 보주를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어 감창고(監倉庫)에 간직하다가 1258년(고종 45년) 두 보주를 어부(御府)로 옮겨 보관하였다. 1467년(세조13년)에 세조대왕이 행차하여 헌향하고 사찰 중건을 지시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당우가 소실된 후에도 중건 중수가 있었지만 6.25전쟁 때 전체 당우가 불타 없어졌다. 그래도 불사는 계속 이어졌고 1977년에는 고 육영수 여사의 발원으로 동양 최대의 해수관세음보살입상이 봉안되어 많은 참배객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특히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지역에 일어난 대형 산불로 인해 수많은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국민들과 불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천년고찰로서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낙산사의 창건 연기설화는 『삼국유사』의「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 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한 것이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 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동해 용(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니,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듯했다. 대나무는 다시없어졌으므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이상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전하는 낙산사의 창건연기 설화이지만, 이보다도 약 50년 전에 기록된 설화도 있다. 곧 13세기 전반에 활동한 석익장(釋益莊)의 「낙산사기(洛山寺記)」가 그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되어 있는 이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주(襄州) 동쪽 강선역(降仙驛)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몇 리쯤의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백 척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만 섬을 실은 배라도 드나들 만하다. 그 밑에는 항상 바닷물이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멍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굴 앞의 50보쯤 되는 바다 가운데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에 신라 의상대사가 친히 성용(聖龍)을 뵙고자 하여 돌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 14일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볼 수가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바다 속의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 대성(大聖)이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가 없다. 다만 굴 위의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이 나의 이마 위다. 거기에 불전을 짓고 상을 봉안하라."라고 했다. 용도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쳤다. 법사가 여의주를 받고 그 말과 같이 가서보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 불전을 짓고 용이 준 옥으로 상을 조성해서 봉안하니 바로 이 절이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파랑새가 나타난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낙산사 창건설화와 석익장의「낙산사기」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좌구를 물 위에 띄웠다고 했다. 그런데 굴 앞의 50보 쯤에 바위 하나가 있고, 의상이 그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는 「낙산사기」의 내용과 관련지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삼국유사』에서는 정성으로 기도하기 7일 만에 천룡팔부의 안내를 받으면서 굴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고 했는데, 「낙산사기」에서는 14일 동안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관음 진신을 친견할 수 없어서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 때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고 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다시 7일을 재계하여 진용을 친견했다고 했는데, 「낙산사기」에는 관음대성이 굴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산사기」에 의하면 동해용이 여의주와 함께 옥을 주었고, 이 옥으로 불상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금당에 소상(塑像)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처럼 두 기록을 보면, 관음진신이 일러준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서역의 보타낙가산에 관음진산이 항상 머문다는 설에 따라 동해의 낙산사에도 관음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이 정착되었다.
무지개 모양의 석문(石門)인 홍예문(虹霓門)으로 홍예문 위에는 누각(樓閣)이 있다. 처음 축조된 홍예문은 1467년(세조 13)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며, 누각은 1963년 10월에 지은 것이였으나 2005년 대화재로 소실되고 근래에 새로 복원하였다. 홍예문의 좌우에는 성벽과 같은 벽을 쌓아 사찰 경내와 밖을 구분했다. 원래의 홍예문에는 장방형으로 26개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에서 석재 하나씩을 내어 쌓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홍예문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낙산배의 시조목(始祖木)과 낙산배의 유래를 적은 석비이다.
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전각을 사천왕문이라고 한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경호실장)이 되었다.
범종루(泛鐘樓) 편액인데 범자를 보통 쓰는 '범어梵'자가 아닌 '뜰泛'자를 쓴 것이 특이하다.
사천왕문과 十자 형태의 범종루 건물
빈일루(賓日樓)는 '해를 맞이하는 루'라는 뜻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智冠)스님이 쓰신 빈일루(賓日樓) 편액(扁額)
응향각(凝香閣)과 빈일루(賓日樓)
요사채인 근행당(勤行堂)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있는 설선당(說禪堂) 우측에 있는 정취전(正趣殿)
낙산사의 중심법당인 원통보전이다. 의상스님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 받은 뒤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는데, 관음전은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이므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이 주된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이후 858년(헌안왕 2)에는 범일(梵日)스님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그 모습을 상(像)으로 만들어 불전에 봉안했다는데, 아마도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원통보전(圓通寶殿) 편액은 경봉(鏡峰)스님의 필적이다.
보물 제1362호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襄陽 洛山寺 乾漆觀音菩薩坐像)은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불상으로,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금속으로 만든 팔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자료출처 : 문화재청)
원통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은 조선시대 7층석탑으로서 현재 보물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탑의 상륜(相輪) 부분까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불탑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평면은 방형(方形)으로서 기단석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 위에 상륜부가 마련된 구조를 하고 있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우주(隅柱)가 새겨지지 않았고, 그 위에 얹은 갑석(甲石)은 아래 위가 수평인 하나의 돌로 된 판석(板石)인데, 그 밑에 부연(副椽)과 2단의 각형(角形) 고임이 있다. 기단 상면에는 겹잎[複蓮]의 복련(覆蓮) 24잎이 조각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서로 다른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옥신석에는 양쪽의 우주가 없으며, 각각의 옥신석마다 그 아래의 옥신석보다 조금 넓고 큰 별석(別石)의 받침돌이 끼워진 점이 특징이다. 이 같은 점은 기단부에 연꽃을 새긴 것과 함께 고려시대 탑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양식으로서, 이 낙산사 탑이 고려시대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옥개석의 추녀는 얇은 편으로서 밑이 위로 살짝 솟아 올라 반전(反轉)되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받침 수는 각 층마다 3단씩이다.
상륜부 역시 칠층 옥개석 위에 각 층의 옥신 고임과 똑같은 형태의 별석으로 된 받침돌을 놓았다. 그 위에는 아랫면에 3단의 받침이 있는 노반(露盤)을 놓았으며, 다시 그 위에 전부 청동제로 된 원형(圓形)의 복발(覆鉢), 앙화(仰花) 및 6륜(輪)으로 중첩된 원추형(圓錐形)의 보륜(寶輪)과 보주(寶珠) 등을 청동제 찰주(擦柱)에 꽂았다. 상륜부의 평면을 원형과 원추형으로 한 것은 중국 원대(元代)의 라마(Lama)식 탑의 상륜과 닮은 것으로서 이 탑의 또다른 특징이 된다.
원통보전 주위에는 그 둘레를 네모 낳게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담장인 원장(垣墻)이 있다. 축조된 시기는 세조가 절을 중건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이 담장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법당을 둘러싼 성역(聖域) 공간임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아울러 겸비하고 있다. 사찰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 담장이며, 현재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산사를 대표하는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이다. 고 육영수 여사의 발원으로 동양 최대의 해수관세음보살입상을 1977년 11월에 점안했다. 크기는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이며, 대좌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했다. 관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甘露水甁)을 받쳐 들고 있다. 이 해수관음상은 우리 나라에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약 700여 톤을 운반해와 조성한 것이다.
보타전(寶陀壂) 편액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의 필적이다. 여초는 '추사 이후 여초'라는 말을 들을 만큼 중국에서 전해온 모든 서예의 장점을 흡수하고, 모든 서체들을 연습해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김충현, 김창현과 형제인 서예가 집안으로, 추사 김정희의 맥을 이은 소전 손재형, 검여 유희강 이후 형인 김충현과 한국 서예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다.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팔작지붕의 보타전(寶陀殿)이다. 안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7관음인 천수관음(千手觀音), 성관음(聖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준제관음(准堤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寇索觀音)과 천오백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앞면 중앙에 천수관음을 비롯해서 좌우로 6관음, 그리고 뒤쪽으로 천오백관음상이 있다. 천수관음은 입상이며, 나머지 6관음은 좌상이다.
보타전과 마주하고 있는 중층의 건물로, 보타락(寶陀落)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보타락 편액은 여초 김응현의 글씨이다.(2015년 10 25일 촬영)
의상기념관
예서체의 "義湘臺" 편액은 성당 김돈희의 글씨이다. 같은 예서체인 남양주의 봉선사 "北斗閣"과 낙산사 "義湘臺" 편액도 성당 김돈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의상대(義湘臺)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 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坐禪) 수행처라고 전한다. 1925년에 정자를 새로 지었다. 그러나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다가 이듬해 중건되었으며, 1974년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이 곳은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곳이었으며, 지금도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들러 보는 곳이 되었다.
연하당(蓮河堂) 의상대에서 홍련암 가는 길에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