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
사무엘상: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13)
하나님의 선교적 부르심에 응답하라
삼상 11:1-15 (봉독: 1-11)
오늘은 단기선교파송주일로 드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삼으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가라고 하시며 파송하셨습니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지상대위임령 혹은 “위대한 사명”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선교의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선교는 ‘옵션’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차피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텐데 무엇 하러 선교를 하느냐는 겁니다.
아닙니다. 전하는 자가 없다면 복음을 들을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또 하나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입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산에서 만나며 모든 종교는 지류는 달라도 큰 강에서 만나므로 선교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분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진리가 바로 선교를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전히 선교에 대해 수동적인 마음을 갖고 계시다면, 오늘 사무엘상 메시지는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사울도 하나님의 선교적 부르심에 수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제사장적 나라이지요.
출애굽기 19장 6절에 보면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나라의 왕이 사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왕이 되었지만, 짐짝 사이에 숨어 있을 정도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온 지파가 모인 자리에서 그가 왕이 되었음을 제비뽑기 형태로 보여주었지요.
사울은 하나님이 택하신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왕으로 추대된 이후 다시 자신의 고향인 ‘기브아’로 돌아가
밭을 갈며 농부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이러한 태도를 보며 “아, 서민적이다. 참 겸손한 왕이구나” 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울이 밭을 간 이유는 그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울 이전에 왕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선례가 없고 전통도 없었습니다.
당시 왕궁도 없고 왕의 보좌도 없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직무기술서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농사를 더 잘 지으라고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농사는 이제 농사짓는 이들에게 맡기고, 사울은 왕으로서의 직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암몬 족속의 길르앗 야베스 침략
바로 이때에 한 사건이 터집니다. 요단 동편에 있는 암몬 사람 나하스가 이스라엘 요단 동편 땅인
길르앗 야베스까지 와서 그들을 포위한 것입니다. “암몬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아남은 후에 롯과 그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후손입니다. 이스라엘과는 사촌 지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은 암몬 족속을 그 태생 때문에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사기 시절에 암몬은 늘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괴롭혔던 족속입니다.
그래서 길르앗 사람 사사 입다가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암몬 족속을 물리치고 암몬의 도시 스무 곳을 점령한 적이 있었습니다(삿 11:33). 그래서 이스라엘과 암몬은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 암몬이 요단 동편 길르앗 야베스에 쳐들어왔고, 암몬을 이길 수 없었던 야베스 사람들은 조약을 맺으면 암몬을 섬기겠다고 하지요. 그런데 암몬 사람 나하스가 끔찍하고도 모욕적인 말을 합니다.
[삼상 11:2] 그러나 암몬 사람 나하스는 "내가 너희의 오른쪽 눈을 모조리 빼겠다.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는 조건에서만 너희와 조약을 맺겠다" 하고 대답하였다.
고대 중동에는 죄수의 눈을 멀게 하는 형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삼손도 블레셋에게 잡혀 갔을 때 눈이 뽑힌 채 맷돌을 돌려야 했고,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왕도 바벨론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힌 채 끌려갔습니다. 또한 고대 전쟁에서는 승전국에서 포로들의 오른 눈을 빼는 일이 있었는데, 평형 감각, 원근 감각을 상실하게 하여 상대방의 전투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행위였습니다. 한마디로 ‘나하스’는 오른 눈을 없애서 전쟁 수행 능력은 없는 노예로 삼고 그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잠깐 우리는 여기서 암몬 사람 ‘나하스’의 영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몬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공격하며 조롱하는 족속입니다.
놀랍게도 그 암몬 족속의 지도자 나하스라는 이름의 뜻은 “뱀”입니다.
옛 뱀, 도둑으로 불리는 마귀가 하는 일은 오직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입니다(요 10:10).
특히 나하스가 원하는 것은 백성들의 오른 눈을 빼는 것이었지요.
토마스 왓슨이라는 한 청교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왼쪽 눈(세상일에 대한 지식)만 남겨 놓고 오른쪽 눈을 빼버려
경건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 토마스 왓슨(1620-1686)
세상 지식과 일에 대해서는 박사입니다. 그런데 삼위 일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복음의 영광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면, 그것은 바로 나하스에 의해 공격당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뱀으로 불리는 마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4:4] ... 이 세상의 신(마귀)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길르앗 야베스의 사람들이 처한 위기가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위기입니다.
왜냐하면 나하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을 치르지 못하도록 속이고, 보고도 보지 못하도록 영적인 눈을 뽑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의 유다 백성들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렘 5:20-21] 20 "너는 이 말을 야곱의 자손에게 전하고, 유다 백성에게 들려주어라.
21 이 어리석고 깨달을 줄 모르는 백성아,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는 백성아, 너희는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이것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려 하고 인생을 보려 한다면,
만일 그렇다면, 정확히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위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이 바로 여전히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나눠 드린 단기선교 소개 책자에 보시면 각 나라와 국내 선교지와 사역 및 기도제목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 지난주에 충남에 다녀온 한 팀의 선교지 소개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마을은 교회에 대한 적대감은 없지만,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토속신앙이나 미신을 신봉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교회에 출석하는 것까지는 마음을 열지 않는 겁니다.
제가 중미에 있는 “아이티”라는 나라에 선교를 갔더니 거기에는 영화에서만 보던 부두교가 남아 있더군요. 인형에 주술을 걸어서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거 보셨죠? 부두교 주술사가 아직도 많이 존재하고, 아이티 사람들 중에 가톨릭 개신교도 꽤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상 부두교를 믿습니다. 여러분, 눈이 있고 귀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토속신앙과 미신, 부두교를 통해 나하스, 즉 옛 뱀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하스가 오른 눈을 뽑아버리겠다고 하자, 그때, 야베스의 장로들이 나하스에게 제안합니다.
자신들에게 칠 일의 시간을 달라는 겁니다. 우리가 전령을 보내겠다는 겁니다.
[삼상 11:3, 개정] 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지금 끔찍한 폭력과 억압의 위기에 처한 야베스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할 자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열방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실상 충남, 청양, 곡성, 고흥, 국내 선교지에서, 태국, 네팔, 캄보디아, 일본 등 해외 선교지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할 자를 보내달라고, 알려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52팀이 국내와 해외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베스 사람들의 구원 요청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하나님은 사울을 부르십니다.
야베스의 전령들이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에 가서 이 소식을 전하면서 큰 소리로 웁니다.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죽는 것도 두렵지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눈을 다 뽑아버리겠다고 하니,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사람입니까?
사울이 소를 몰며 밭을 갈다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가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사실 이 길르앗 야베스와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과거에 사사기에서 베냐민 지파가 다른 모든 지파들의 연합 공격에 의해 지파 멸절 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길르앗 야베스의 처녀들이 베냐민 지파 남자들과 결혼해서 베냐민 지파의 명맥이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 보면 사돈이요 가족 같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위기에 처했으니 사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나하스의 협박을 들은 사울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6절입니다.
[삼상 11:6] 이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니,
그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읽을 때 의문점을 가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영이 임했는데,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을까요?
하나님의 영과 분노가 공존할 수 있나요? 분노는 죄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분노는 죄가 맞습니다.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분노는 그 사람의 영을 잠식하여 파멸시킬 수 있는 무서운 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 성령이 임했는데 무서운 분노가 터질 수 있나요?
선하고 거룩한 분노가 있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모든 분노가 죄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분노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선하고 거룩하며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분노는 불과 같아서 부엌에 있으면 음식을 요리하지만, 부엌 바깥으로 나오면 집안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악과 불의에 대한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라는 성품에서 비롯된 분노입니다.
[롬 2:8] (하나님께서)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불의에 대한 심판의 분노이기에, 오히려 불의에 대해 적절하게 분노하지 못할 때,
즉 “분노의 부재”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의에 분노하지 못하면 공의와 정의가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하고 거룩한 분노는 무기력하게 억압당하고 폭력을 당하는 이들의 권리를
지켜주고 하나님의 은혜가 구현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였을 때, 그가 무섭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하스라는 뱀으로 상징되는 불의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의를 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미가서 6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do justice)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walk humbly with your God)이 아니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친밀히 주님과 교제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에 마음을 쏟고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오직 정의를 행하는 것을 원하시고 인자, 즉 은혜와 긍휼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핵심 주제입니다.
여기서 “정의”라는 단어는 “미쉬파트מִשְׁפָּט”인데,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공평하게 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인종이나 배경을 떠나서 각 사람에게 부여된 고유한 권리를 지켜주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미쉬파트를 행하시는 분이심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 바로 예레미야서 22장 3절입니다.
[렘 2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바로 이 말씀이, 왜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는지 설명해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억압받고 고통당하고 있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위해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일어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탈취 당한 자들을 압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지는 것이,
사울에게 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억압받는 이들의 울부짖음과 외침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를 보지 못하도록
그들의 눈을 가리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야베스 사람들이 눈이 뽑히기 직전인데, 모른 채 하고 그냥 갈던 밭이나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위기의 때를 위해서 사울에게 미리 기름을 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때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얼마나 긍휼이 크시며 공의로운 분이신지를
세상이 알게 하라고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고, 저와 여러분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도 사랑하기 위해 선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또한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도 선교의 중요한 동력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억압받는 자를 위해 공의를 행하는 것이고, 공의를 행하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사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은 바로 사울이 미슈파트, 공의를 행함으로써 결국 사랑을 구현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들 가운데 드러내라고 임한 것인데, 이것이 선교입니다.
사울, 이스라엘 군대를 소집하여 암몬을 물리치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에게 거룩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는 자기가 몰던 소 두 마리를 여러 토막으로 내서 이스라엘 모든 지역으로 보냅니다.
그는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이런 꼴을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군대를 소집합니다.
그래서 베섹이라는 곳에 이스라엘에서 총 30만 명, 유다에서 3만 명, 총 33만 명이 모입니다.
엄청난 숫자의 군대입니다. 성령께서 분열되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외부의 적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먼저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다시 암몬 사람 나하스에게 가서 내일 항복하겠다고 하며 그들을 안심하게 합니다.
대신, 사울은 다음날 새벽에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서 적진 한복판에 침투합니다.
새벽 기습 작전, “길르앗 여명 작전”이었고 이것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삼상 11:11] 다음날 아침 일찍 사울은 군인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가지고, 새벽녘에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날이 한창 뜨거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쳐서 죽였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다 흩어져서,
두 사람도 함께 있는 일이 없었다.
사울의 첫 전투가 대승리로 끝납니다.
억압받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자유하게 되었고, 포위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들은 오른쪽 눈을 잃고 평생 종으로 살 뻔했으나 풀려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울이 암몬의 나하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해 보이든지,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전쟁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하스는 끊임없이 우리의 오른 눈을 뽑거나 가려서 경건의 비밀,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엡 6:12, 개정]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지금 악한 영들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국내에, 해외에, 선교지에.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의 중보자로, 복음의 선포자로 부르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던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악한 영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승리는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가정에 있었던 일을 익명으로 나누면서 기도 부탁을 드립니다.
이 여자 성도님의 남편은 젊은 시절에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 해요.
그 이후 남편의 아버지는 도박과 유흥에 빠져 가정을 포기하셨답니다.
그래서 남편과 여동생만 남게 된 겁니다. 게다가 남편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숱한 교통사고로 여러 차례 죽을 뻔했으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고 해요. 또한 여동생도 죽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 많았으나 정말 기적처럼 살게 되어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귀가 한 가정을 파멸시키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남편 분은 선한목자교회에서 양육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자 그럼 이제 누가 주님께 돌아와야 하죠? 여동생입니다.
어느 날 남편의 여동생이 아내 분에게 전화해서 그렇게 울더랍니다. 그러면서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 그렇게 말하길래 당연히
“아가씨, 예수님 믿어야 해” 이렇게 복음을 전한 겁니다.
그러자 그 아가씨가 아닌 악한 영이 나와 말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남편에게 말하기를 “너, 왜 세례 받았어? 얘는 내 거야...”
여러분, 악한 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체를 드러낸 것은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겁니다.
누구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가 노예 삼은 이 자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두 분이 교구 목사님을 찾아가서 기도 지원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금요성령집회 때, 저에게 기도 받으러 오셔서 동생을 만나러 가니 안수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마치 나하스에게 사로 잡혀있는 길르앗 야베스와 같은 여동생을 구하러 지방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엄청난 전투를 앞두고 지원 요청하며 연합군을 형성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축복하며 기도하면서 말씀드렸어요.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악한 영보다 강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하십시오. 그렇게 파송되어 가셨습니다.
어제, 여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악한 영이 알고 오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그래도 우리는 간다. 그리고 다시 교회에 지원 요청을 하고 가셨어요.
저녁부터 새벽까지 사투를 벌이셨다고 해요. 그리고 오늘 새벽에 여동생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남편과 아내와 교회가 연합군이 되어 나아갔을 때, 나하스에 사로잡혔던 가족이 풀려난 것입니다.
선교의 동력은 그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악한 영에 대한 거룩한 분노입니다.
한 영혼과 한 가정을 파괴시키며 멸하려고 하는 악한 영에 대한 선한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구원하심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미 승리는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날의 승리의 공로를 오직 하나님께 돌립니다.
[삼상 11:13] ... 오늘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신 날이오...
이날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구원이심을 드러낸 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여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교적 군대를 일으키셨습니다.
나하스로 상징되는 뱀에 의해 억압받고 속고 있는 이들을 구원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영혼에 대한 사랑이 부어지고, 동시에 악한 영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올해 하나님의 선교적 부르심에 52개 팀이 응답하여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아직 한 번도 단기선교에 참여해 보지 못한 분들은 내년에는 꼭 동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시야가 달라지고 세상과 열방을 보는 눈이 열릴 것입니다.
올해 나가지 못한 분들은 저와 여러분을 중보 기도하는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파란 책자를 하나씩 드렸습니다.
날짜별로 각 선교팀이 가게 될 나라와 지역과 기도제목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 선교적 공동체가 되어 예수님의 위대한 사명에 순종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