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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선의 호락호락] 정지훈 박사의 2024 IT산업 대전망
신혜선
세계 인재 모이는 미국, IT산업 패권국 지속된다
실리콘밸리를 벗어나 미 동부로 확산하는 신IT 지형도
오픈AI vs 앤스로픽...반도체-멀티모달 시장 등 AI경쟁 이제 서막
플랫폼 독점=자본 쏠림...아날로그 트랜스포메이션 주목
미국 내 형성되는 한국IT벨트 주목...'친한' 문화 형성까지 새로운 기회
2024 피렌체의식탁 신년대담의 두 번째로 정지훈 IT 전문가를 모셨다. 미중 패권경쟁, 다극화... 정지훈 박사는 '지금 세계의 인재들이 모두 미국으로 모여들고 있다'며 미국의 우위를 전망했다. 이민 2, 3세대가 아닌 새로운 이민 1세대들이 미국의 혁신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쇠퇴를 이야기하지만 이는 미국 전역이 실리콘밸리화 되는 현상의 이면일 뿐이다. 거의 모든 것을 아웃소싱, 바깥으로 내보냈던 미국은 팬데믹과 미중 경쟁 등을 거치며 제조업으로 다시 눈을 돌리고 있다. 한편 디지털이 기본이 된 시대, 이제 누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잘 결합해 새로운 서비스와 상품을 내놓을 것인지 '아날로그 트팬스포메이션'이 관건이다. 한국 자본에게 이는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경쟁을 위한 기회다. 실리콘밸리의 위축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AI반도체의 경쟁에 주목하라는 이야기까지로 이어진다. 흥미진진한 2024년이다. [편집자 주]
2024년 신년대담으로 피렌체의식탁을 찾은 정지훈 박사(K2G 테크펀드 제너럴파트너)와 신혜선 메디치미디어 미디어본부장(왼쪽)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지훈 박사는 2024년부터 피렌체의식탁에 지금 진화하며 격전 중인 AI의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거의 모든 AI의 역사' 연재를 시작했다. / 사진=백범선 영상팀장
IT팍스아메리카는 진행중... 신산업지형 새 판 짠다
신혜선 메디치미디어 미디어본부장(이하 신혜선): 미중 패권경쟁의 본질은 경제다. 세계화라는 구호가 무색할 정도로 경제 블록화가 심화되고 있는데, 특히 미국이 최강인 IT산업 분야는 어떤가.
정지훈 K2G 테크펀드 제너럴파트너(이하 정지훈): 세계 경제 주도권을 잡은 미국의 승기는 객관적 수치로 이미 증명되고 있다. 거의 5% 가까운 GDP 성장률을 보여준다. 미국 같은 거대 국가가 이런 성장률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이 성장동력의 주요한 힘은 기술혁신이다. 21세기 기술혁신의 기본인 인터넷은 이제 당연한 인프라다. 이걸 바탕으로 지식을 중심으로 하는 행동가들, 뛰어난 혁신가들이 얼마나 있느냐에 경쟁력이 좌우되지 않겠는가. 즉, 인재의 밀도와 수가 중요한데, 미국이 압도하고 있다고 본다. ‘40년 만에 미국 유학 인재 수가 가장 많이 늘어났다’는 지난해 뉴스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미국의 인재는 이민자 2, 3세가 아니라 미국에 와서 공부한 타국 출신들이다. 그들 스스로가 1세대인 거다. 이는 미국이 세계의 인재를 모두 흡수하고 있다는 의미다. IT만이 아니라 우주, 신재생에너지 등 전 분야에 걸쳐서다. 넓은 땅에 모험할 사람(혁신가)과 그들을 지원할 자본 모두를 갖춘 곳이 미국이고, 그 힘이 더욱 세지고 있다.
신혜선: 그런데 그런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상징하던 벤처의 메카 실리콘밸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들리던데...
정지훈: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 사회로 변하면서 실리콘밸리에 관련 플랫폼을 제공하는 기업 거의가 모여들었다. 실리콘밸리도 처음엔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많았는데, 인터넷 서비스로 옮겨가는 식이었다. 그런 실리콘밸리가 디지털의 습격을 받았다. 코로나19를 계기로 기업은 ‘이곳에 다 모여 있을 필요가 없구나’, 개인은 ‘출근하지 않고 일해도 되는 게 인터넷인데 왜 우리는 출근에 목맸지?’를 깨달은 거다. 왜냐면, 혁신 기업과 인재들이 속속 모이면서 고액 연봉자들이 모였지만, 정작 이곳은 천문학적 돈을 번 창업자나 C레벨(*Chief의 C로 시작하는 CEO, CFO, CMO, CTO 등 기업의 최고 경영진) 외에는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곳이 됐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집값, 교육비 등 물가는 고액 연봉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심각해진 지 오래다. 이 지역 빈부격차는 이미 사회문제가 됐다. 그러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자리를 잡으며, 기업 입장에서는 실리콘밸리를 떠나도, 개인이 물가가 싼 지역에서 살면서 원격으로 일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거다. 그러니 실리콘밸리 지역 자체는 위축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코로나19 이후 일부 기업은 강제 출근을 권하고 있지만, 실리콘밸리는 그 복귀율이 무척 낮다.
정 박사는 ‘탈 실리콘밸리’가 새로운 IT산업 지형도를 만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여기엔 팬데믹 상황을 겪으며 처참히 무너진 미국이 ‘제조업 부활’을 외치며 크고 작은 외국 기업의 공장을 지역 내 유치하려는 움직임과도 궤를 함께 한다. 정 박사는 미국과 한국 관계에서 미국 주요 지역에 제조 인프라가 어떻게 벨트로 형성되고 있는지 주목했다.
한국이 주목해야 할 미국 내 한국 관련 산업 지형도. 워싱턴주 시애틀은 AI시대를 맞아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도시다. AI산업을 떠받치는 클라우드 관련 기업들이 모두 시애틀에 자리를 잡으면서 관련 기업과 인재들이 몰리고 있다. 텍사스주 테일러에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동남부의 앨라배마와 조지아에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를 중심으로 한국 산업벨트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 그래픽=조주희
*미국 곳곳에 형성되는 한국 산업벨트
우선, 실리콘밸리에 살면서 일하던 이들이 가장 가까운 남부 캘리포니아, LA나 샌디에고 쪽으로 많이 내려갔다. 이 지역은 콘텐츠나 게임, 넷플릭스 제작사나 패션, 물류사들이 많이 포진해 있어 이주민들이 도시로 문화적으로 편입하기가 쉽다.
전통 산업의 강자 뉴욕도 혁신산업의 거점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뉴욕엔 자본이 모인다. 더불어 유럽과 연결고리가 핵심인 곳이다. 미국 내 혁신 통로라는 의미다. 핀테크나 미디어의 성장지역으로 안성맞춤이다.
텍사스는 미국 내 대표적인 반도체 공장 지역이다. 삼성전자 공장이 있다. 삼성이 새로 짓는 공장 위치도 텍사스 테일러다. 정 박사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이쪽으로 많이 이전했다.”며 “법인세와 소득세 등이 없는 텍사스주의 세제 혜택이 최고의 이점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텍사스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지역인데 혁신 기업의 이전과 정착이 문화적으로 충돌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정 박사는 “석유 산유량 등 주 자체가 풍족해서 외려 주변 인구를 흡수하는 현상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미국 주별 인구수는 캘리포니아가 1등이고 텍사스가 2등인데, 성장률은 텍사스가 더 빠르다. 심지어 캘리포니아 인구가 텍사스로 옮겨가는 비율이 가장 높다. 전체 유입인구의 30~40% 정도가 캘리포니아에서 들어오고 있다.
MS 본사가 있는 시애틀은 AI시대에 다시 조명받는 도시다. AI시대 핵심 인프라 중 하나는 클라우드. 클라우드를 핵심 서비스로 하는 기업 대부분은 시애틀에 본사가 있다. MS 이외에도 아마존(아마존 웹 서비스), 구글 클라우드, 애플의 인공지능 서비스인 시리(Siri) 팀이 모두 시애틀에 있다. 일종의 동종업종 효과다. 이쪽 엔지니어가 몰려 있다보니, 구직구인을 위해 자연스럽게 모여든 것이다. 정 박사는 “전 세계 서버 엔지니어링, 컴퓨터 사이언스 서버쪽 인력의 최대 집합지”라고 시애틀을 설명했다.
정 박사는 향후 제조뿐 아니라 디지털 산업 패권경쟁의 핵심인 반도체를 고려할 때 한국 기업에서는 애틀랜타(조지아주)를 중심에 두고 주변 앨라배마, 테네시, 사우스/노스 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등을 함께 볼 것도 권한다. 이들 지역은 주는 다르지만, 조지아의 애틀랜타를 중심에 두고 인접해 있다. 특히 앨라배마의 몽고메리에서 조지아의 애틀랜타는 자동차로 85번 도로를 따라 2시간 반 정도 거리다. 몽고메리에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애틀랜타에는 기아자동차 공장이 있다. 미국 내 ‘친한(親韓)’ 정서가 두 주를 거쳐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자동차 산업의 특성은 관련 중소기업, 즉 공급망 측면에서 연관 산업이 밸트를 형성하는 것인데, 현대-기아차 공장이 있는 두 지역과 물류를 책임지는 85번 도로 주변에 한국 중소기업이 거점을 형성하고 있는 중이다. 정 박사는 “자동차 산업을 토대로 ‘예습’한 미국인들이 반도체, 신재생에너지, 첨단 과학 등에서 한국 기업이 들어오는 데 대해 거부감이 덜하다.”고 분석했다. 애틀랜타는 중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미국의 이른바 ‘IRA법’이 처음 적용된 곳이기도 하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이제는 LG엔솔이나 한화큐셀, SK온 등 국내 에너지 관련 대기업들이 애틀랜타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에너지 밸트를 형성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사항이다. ‘한미 밀착 제조벨트’가 강화되며 미국 내 고용 창출에 한국 기업이 역할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팬데믹을 거치며 공급망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다. 기초 물품조차 모두 아웃소잉으로 바꾸고 미국 밖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수입해 쓰는 상황의 비극을 겪었다. 중국과 갈등 국면에서는 반도체 수급에도 문제가 생겼다. ‘미국을 제조의 천국으로’라는 구호가 나온 이유다.”
정 박사는 팬데믹을 통해 호되게 경험한 미국이 중국과 패권경쟁에서 승기를 잡은 후 진보 보수할 것 없이 자국 내 제조 인프라 구축을 공통 목표로 삼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혜선: 미국에 진출하려는 한국 스타트업 외에도 반도체나 에너지 분야의 국내 대기업이 미국을 발판으로 삼을 새로운 기회가 있다는 의미인가.
정지훈: 그렇다. 낙수 효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한국 시장에서가 아니다. 미국에서 승부를 걸고, 거기서 낙수 효과를 기대해야 한다.
신혜선: 한국의 경쟁력은 뭘까.
정지훈: 긍정의 의미로 ‘과잉교육’이다. 교육받고 똑똑한데 대접 못 받는 사람이 많다. 리서치 인력도 꽤 있다고 본다. 소비 측면에서 한국인만큼 혁신(상품)을 좇는 경우도 드물다. 한마디로 시장을 연구하고 테스트하기 좋다. 사업은 미국에서 하되 연구와 시장조사 등에 대한 매력이 있다. 또, 국가 차원의 ‘규제 샌드박스’도 강하다. 새 기술을 만들고 실험하고 미국에서 키워나가는 형식에 적합하다.
* 규제 샌드박스: 산업 육성을 위하여 사업자가 새로운 서비스나 상품을 출시하면 기존 규제를 유예하여 일정 기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나중에 규제하는 제도. |
정 박사는 구글 최고 경영자 순다 피차이를 이야기했다. “꼭 한국에서 하려고 하지 말자. 우리 땅에서만 뭘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순다 피차이처럼 그가 성공해 얻은 네트워크로 인도 기업이 낙수 효과를 얻는다. 이 좁은 땅에서, 극심한 인구 밀도 속에서 싸움질하고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
신혜선: 설명을 듣다보니, 제조 기반 수출은 그렇다 쳐도 혁신기술이 필요로 한 미래 산업의 입장에서는 현재를 위기 상황으로만 볼 일은 아닌 듯하다.
정지훈: 기회다. 전통산업은 확실히 중국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했다. 새 시장에서 중국 의존도는 낮다. 미국과 연결고리가 중요하다.
정 박사는 한국 R&D 정책에 대해서도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 박사는 최근의 R&D 예산 대폭 삭감에 대해 “R&D에 생산성을 바로 대입한 결과로, 사회를 경제 생산성으로만 보려는 시각이 불러온 참사”라고 규정했다.
“만약 지금 관점대로 하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불가능했다. 첨단기술 부분은 생산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엘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이 미래 시장가치를 그래프로 그려본 뒤 되겠다고 결론 내리고 투자하는 줄 아는가. 모험자본을 퍼붓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해나가면서 지금의 위치를 만든 나라다. 우리는 자원이 없으니 그렇게 못했던 거고. 지금까지는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쫓아가기 위해 기술 쪽에 집중 투자하는 식이었는데, 그나마 반도체는 굉장히 투자를 많이 해 지금에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대략 1등이다. 그러다보니 비전을 갖고 방향을 제시하는 목소리보다 ‘숫자놀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기는 형국이 됐다. 미래를 팔아버리고 현재의 떡고물에 너무 집착한다.”
2024년 IT 산업 경쟁과 AI시대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중인 정지훈 박사. 《거의 모든 IT의 역사》,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등으로 인터넷과 IT 산업에 대해 정리했던 정 박사는 AI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이라며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 사진=백범선
구글 ‘반독점법 위반’ 혐의... 플랫폼 규제받을 때 됐다
신혜선: 구글에 대한 반독점법 위반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큰 패러다임 변화를 맞게 될까.
정지훈: 미국의 반독점법 적용 사례는 회사까지 쪼개진 사례가 별로 없을 뿐이지, 10~20년 주기로 늘 있었다. 스탠더드 오일, JP모건, US스틸, AT&T, MS... 미국은 한 개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면 안 된다는 뿌리 깊은 믿음이 있다. 공화당, 민주당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 역사의 맥락이다. MS의 끼워팔기 문제는 비록 회사 분할은 막았으나, 지금 플랫폼 기업처럼 맘대로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만약 그런 견제가 없었다면, 윈도우 점유율 99%였던 MS는 무소불위로 무엇이든 했을 거다. 지금은 크롬이 80% 아닌가. 이제는 플랫폼 기업 차례다. 외려, 플랫폼 기업이 전 세계를 통일해가는 지금 상황이 이례적인 거다. 민주당 정권 이후 실리콘밸리가 급상승할 때 제약받지 않은 결과다.
신혜선: 구글이 그 대상이 됐을 뿐 독점에 대한 미국 사회의 감시는 그대로라는 의미인가.
정지훈: 그렇다. 구글만이 아니고 아마존, 애플(스토어)도 위험하다. 유럽은 물론 이런 변화를 반기고 있다. 앞으로 핵심 이슈는 AI다. AI는 다른 인프라와 달리 부가가치 창출이 매우 크다. 이조차 클라우드를 중심으로 몇몇 기업이 독점한다면, 마치 석유같은 에너지 자원을 특정 기업에 저당 잡힌 꼴이 되는 거다. 이런 상황은 나도 우려한다. 유럽 외에 중동 등에서도 IT에서 일종의 보호무역 같은 관점이 형성되는 이유다.
정 박사는 “플랫폼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했다. “독점을 분산화하고 경쟁하면서도 한편 다수를 위한 공공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 정 박사는 “구글 핵심 이슈는 플랫폼의 힘에 대한 문제”라며 “결과에 따라서 한국의 규제 방향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혜선: 그래도 플랫폼 비즈니스가 끝났다는 전망은 과하지 않나.
정지훈: 너무 단언하듯이 얘기한 것 같은데, 특정 기업이 돈으로 모든 것을 끌어모은다는 의미에서 더는 불가능한 모델이라고 말한 거다. 플랫폼은 양면시장이다. 한쪽엔 고객이 있고, 한쪽엔 서비스나 상품을 제공하는 기업이 있다. 양쪽을 연계하면서 네트워크 효과가 발생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고객 락인(Lock-in)’ 효과가 강해진다. 즉, 이용자가 묶이면서 플랫폼의 힘이 커진다. 그 힘으로 자기 맘대로 한다. 이상적인 것은 선두기업 뒤에 2, 3주자가 나와서 자연스럽게 경쟁 구도가 형성돼야 하는데, 1등이 독점해버리는 거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본 자체가 1등 플랫폼에 쏠릴 수밖에 없다. 여기부터는 불공정 경쟁이라고 봐야 한다. 벤처캐피탈 속성상 돈이 몰린다. 플랫폼 독점이 주는 위험의 진짜 문제는 자본의 쏠림현상이다. 이 이야기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신혜선: 우리도 플랫폼 사업자를 규제해야 한다고 보는가.
정지훈: 먼저 할 필요는 없지만, 글로벌 규제가 어느 정도 만들어질 때가 됐다. 특정 기업에 과도하게 쏠림 현상이 벌어지면서 공적 측면에서 무리가 생기면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신혜선: 의외다. IT산업의 규제 관점이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거 같다.
정지훈: 플랫폼은 비유하자면 SOC(사회간접자본)에 해당한다. 에너지 공급하고, 고속도로 만들고, 상수도 설치하고. 은행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소셜 인프라에 정부의 개입이 일정 필요하다고 본다. 어느 정도 지위에 올랐을 때, 규제도 필요하고 보호도 필요하다. 거대화된 플랫폼 기업은 상당 부분 공적 역할을 갖게 된 사기업이 될 수밖에 없다. 논란이 일 수 있다. 기업의 지배구조나 본질에 대한 논의다. 하지만, 그 정도 지위에 오른 기업이라면 사회적 동의(consensus)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문제 맞다. 지금은 민주주의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과거에 어땠는지와 비슷한 문제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자본주의가 만들어놨던 체계가 무조건 옳다고 따라가는 게 과연 맞을까.” 정 박사는 과거의 제도가 틀려 지금을 이루었듯, 현재의 제도 역시 현재와 미래의 관점에서 달라질 수 있음을, 달라져야 함을 강조했다.
여기서 네이버나 카카오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네이버는 검색시장, 음원시장 등 양면시장 규제를 피했지만, 늘 논쟁의 한가운데 섰다. 잘 나가던 카카오는 회사가 아수라장이 됐고, 김범수 의장이 국회에 불려갔다.
그는 네이버와 카카오를 비교 설명했다.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는 걸 전제로 정 박사는 “카카오식이 이론적으로는 이상할 게 없다.”고 했다. 부분별로 자율적 성장, 그리고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계열사가 더불어 성장할 수 있도록 중앙(카카오) 집중 지원. 독점 이전 규제를 전혀 받지 않는 플랫폼 기업의 미국식 성장방식 그 자체라는 것이다. 카카오의 경영진들이 우리사주를 실현하는 문제도 한국적 관점의 도덕적 문제이지 미국식으로는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 카카오는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고 판단하는 건 거침없이 추진했다. 실제 규제를 받은 적이 없다. 모두 열광했고, 정책적으로 호응했다. 카카오 임원은 모두 철저한 자본적 인식을 갖춘 이들이다. 정 박사는 “나쁜 의도가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정석을 그대로 따랐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플랫폼의 영향력이 커지고, 플랫폼 노동자가 등장하고, 플랫폼을 운영하는 사업자의 사회적 책임이 본격 논의되면서 카카오의 사업 방식을 새로운 관점에서 평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네이버는 초기부터 정부나 미디어(언론)의 견제를 받아왔다. 정 박사는 “네이버는 언론 눈치를 봐야 했고, 신규 사업을 하려다 외부 반발이 생기면 접어버리기를 반복했다.”며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두에 두면서 조심스런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고 차이를 설명했다. 카카오 사태에 대해 정 박사는 “카카오 내부에서는 억울하다는 소리가 큰 걸로 안다.”며 “실제 위법 사항은 밝혀진 게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법을 떠난 한 사회의 눈높이 변화 결과”라고 부연했다.
앤스로픽의 홈페이지 첫 화면.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AI 연구 및 제품"을 가장 먼저 내세우고 있다. AI에 대한 대중의 걱정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고려한 캐치프레이즈다.
이제 승부처는 아날로그다
신혜선: 승승장구하던 플랫폼 비즈니스가 규제 위기라면, 다음 주목할 비즈니스는 무엇일까.
정지훈: 아날로그를 주목할 때라고 본다. 나는 앞으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Trasnsformation)’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생각이다. 디지털 없이는 존재 의미가 없는 세상이 됐다. 개인조차 미디어 채널이 있는 세상이다. 문제는 디지털은 있는데 아날로그가 없다는 점이다. 제때에 제공이 안 되는 물건, 배달할 사람이 없는 상황, 집, 땅, 안전하게 먹을 것... ‘아날로그 트랜스포메이션’을 누가 잘하느냐에 승패가 갈릴 거로 본다.
그는 지금 주목받는 클라우드 서비스를 예로 들었다. 아마존 웹 서비스를 위한 데이터센터는 대략 세계 100여 개 국에 있다. 한 데이터센터(리전, Regioin) 당 1~5만 대 정도 서버를 갖췄다. 그만한 땅이 있어야 하고, 전기가 충분히 공급되어야 하고, 또 잘 숙련된 사람이 운영해야 한다. 국가별 규제도 뚫어야 한다. 이 서비스 승패는 아날로그적 물적 기반을 얼마나 잘 갖췄느냐에 달려 있다. 이 인프라를 제대로 다 갖춘 곳은 아직 몇 개 없다. 이 서비스를 디지털로 이해하지만, 핵심적인 차이는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에서 만들어진다는 거다.
AI시대 반도체 수급도 같은 원리로 해석했다. MS, 오픈AI 등을 이야기하지만, 돈을 버는 기업은 엔비디아다. 연산을 CPU와 같은 AI반도체로 하기 때문이다. 서비스 비용 상당 부분은 전기 요금이다. 더 싸게 이를 해결하는 자가 이긴다.
쿠팡이 앱을 잘 만들었지만, 이 기업의 경쟁력은 좋은 상품과 빠른 배송이다. 아마존이 페덱스를 제치고 미국 내 물류 1위 기업이 된 이유는 곳곳에 확보한 물류창고 덕이다. 전통 산업과 결합해 아날로그 인프라를 확보하는 것. MS나 아마존 같은 기업이 또 나오기 힘들어도, 수많은 전통 산업의 기업들에 기회가 오고 있다.
정 박사는 “실리콘밸리에 플랫폼 기업이 모여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그 지역을 떠나는 이유는 그 안에 생산을 책임지는 산업이 없어서”라고 분석했다. 제조업이 몰려있는 지역 가까이 옮겨 아날로그 트랜스포메이션과 결합을 꾀한다는 거다.
오픈AI vs 앤스로픽... AI가 인터넷처럼 사용되는 시대, 왕자의 자리는 아직
신혜선: (지난 칼럼에서) 오픈AI보다 앤스로픽을 주목하라고 했다.
정지훈: 오픈AI보다 더 주목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접근 방법을 가진 경쟁기업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거다. 앤스로픽은 오픈AI에서 가장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나와서 창업한 기업이다(다리오와 다니엘라 아모데이 남매가 핵심 멤버다. 이들은 AI 보안 전문가다.) 오픈AI는 단순하게 말해 ‘AI 민주화’ 때문에 만든 비영리기업이다. 거기에 MS가 투자하면서 모양이 이상해졌다. MS는 영리법인이다. 이익이 날 구조를 만드는 게 당연하니, 기존 이사회가 오픈AI를 지배할 수 없다. 그래서 영리사업을 할 사업구조를 따로 만들었다. 초기 창업 정신에 동의해 함께한 이들 중 배신감을 느낄만 하지 않나. 그래서 그들이 나와 다시 만든 회사가 앤스로픽이다.
다리오 아모데이(오른쪽), 다니엘라 아모데이 남매. / 사진=다니엘라 아모데이 엑스, Paris Peace Forum.
신혜선: 그렇다면 앤스로픽은 비영리로 출발했나.
정지훈: 아니다. 영리로 출발했다. 대신, 구조는 단순화하고, 영리기업이면서도 공공적 역할을 살릴 수 있는 미국 제도를 활용했다(미국에는 영리법인과 비영리법인 중간단계의 기업을 만들 수 있는 법적 형태가 있다). 이 기업을 주목하는 이유는 오픈AI에 대적할 역량 때문이다. 아마존이 4조 원, 구글이 2조 원을 투자했다. 국내에선 SK텔레콤도 1천억 원을 투자했다. 공교롭게 챗GPT 분야에서 MS 대 구글-아마존 등의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현재 ‘클로드2.1’까지 선보였는데, 언어기반모델 AI인프라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실은 AI 전쟁 자체가 이제 시작이다. 겨우 언어 기반 모델의 챗GPT, 생성형AI가 나오고 있을 뿐이다. 삼성과 애플 같은 단말기(이제 스마트폰에 챗GPT와 같은 기능을 기본으로 탑재하는 건 당연한 발상이다) 업체들도 움직일 거고, 인텔, 퀄컴 등 칩 업체도 주목해야 한다. 앤스로픽에 투자한 아마존, 구글 등도 주요한 사업자다. 지금 1등한다고 계속 1등할 것이란 생각은 위험하다.
정 박사는 “AI 분야에선 아직 락인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생성형AI 기업이 제공하는 툴은 언제든 후발 주자가 추월할 수 있다. 오히려 ‘온 디바이스AI(원하는 만큼 사용하고 지불하는 개념의 서비스)’의 출현을 기대한다. 고객과 가장 밀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애플, 구글, 아마존 등 AI와 무관해 보이지만 현재 고객 접점이 가장 큰 기업들이 온 디맨드 형태로 서비스를 제공하면 판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오픈AI(MS)와 엔비디아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AI 시장에서 아직 본격적인 경쟁은 시작하지 않았다는 게 정 박사의 주장이다.
신혜선: 샘 알트만 해임이 해프닝으로 끝났다. 당분간 챗GPT 서비스가 시장을 리드하는 건가.
정지훈: 아직은 기술적 우위를 갖고 있고, MS가 어떻게 이용자를 붙잡아둘지 관건이다. 구글의 ‘알파고’를 기억해보자. 그 당시 알파고와 함께 구글/딥마인드는 AI 개발프레임워크로 ‘텐서플로우’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구글이 알파고를 앞세워 AI 붐을 이용한 결과 많은 수의 AI 개발자들이 ‘텐서플로우’로 개발을 시작하고, 한때 시장을 점령하는 듯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지금은 ‘파이토치’가 더 주목받고 있다. 메타(페이스북)가 적극 지원하는 서비스다. 이처럼 초기에 어떤 것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고 게임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성숙기에 들어가게 되면서 양상이 바뀌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앞으로도 많은 스타트업이 나오고 사라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신혜선: AI 시대를 이야기할 때,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우리 일상에 들어오고, 사람들의 실제 업무에 적용될지 예상하지 못했다.
정지훈: 스마트폰 시대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이미 100% AI를 사용하고 있다. 인지만 못했을 뿐이다. 미세하게 흔들린 사진을 자동으로 보정해주는 기능도 AI칩의 역할이다. AI는 인터넷과 똑같아질 거다. 모두 기본으로 인터넷을 사용하듯, AI도 그렇게 사용하는 식이다. 자동통역, 채팅 등 일상에서 AI 사용이 인터넷처럼 되는 세상이 오고 있다.
앞으로 5년은 반도체 경쟁에 주목하라
신혜선: ‘특이점(singularity; AI가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기점)’이 더 당겨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통상 2035~2040년 정도로 이야기돼왔다.
정지훈: 미래 예측이 더 힘들어졌다. 과거엔 예측하면 5년이나 10년 뒤 구현됐다. 기술은 갖춰졌는데 사회가 수용하는 시간 차이가 필요했다. AI는 모든 예측에서 원래 생각했던 시기보다 계속 빨라지고 있어 뭐라고 말하기 겁날 정도다.
신혜선: 2024년 IT산업 전망, 어떤 키워드에 주목하면 좋을까.
정지훈: 향후 5년은 무조건 반도체다. 앞서 말한대로 AI 인프라 구축 싸움이다. 초고속인터넷망 구축 경쟁이 시작됐을 때 시스코, 쓰리콤 이런 네트워크 회사들이 시장을 주도했다. 다음엔 ISP라는 인터넷 서비스 공급업체가 주도했고, 이어서 웹브라우저를 통해 웹을 지배한 기업들(구글, 아마존) 등이 등장한 것과 같은 식이다. 엔비디아처럼 AI 관련 인프라가 당분간은 계속 주목받을 거다. 여기에 더해 2, 3년 내에는 챗GPT와 같은 원시적인 채팅 형태의 AI 서비스는 2~3년간 멀티-모달(multi-modal, 언어 뿐 아니라 음성, 이미지, 영상, 로봇 등 다양한 모드가 결합) 형태로 발전할 거고. 일종에 스피커라든지 또는 로봇이라든지 이렇게 서로 다른 부분들이 AI를 중간에 두고 함께 결합해 서로 다른 미디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인프라, 거기에 활용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및 이들에 가장 적합한 하드웨어나 디바이스의 등장이 중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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