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향, 꿈에서 깨어나다
창백한 얼굴과 칠흑 같은 머리칼의 소년. 길을 걷고 있다. 한 차례 비가 온 뒤 골목길 여기 저기에 보이는 물웅덩이. 타박타박 떨어지는 걸음소리, 어느 순간 멈춰지고. 거대한 물웅덩이 앞 수백 마리의 나비들, 물 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가. 가느다란 다리도, 은빛 몸통도, 눈부신 날개도 서서히 젖어든다. 파르르 떨리는 더듬이, 막히는 숨. 날카로운 비명에 베인 소년, 꿈에서 깨다.
EP발매 1년 만에 첫 앨범을 들고 나온 [잔향]은 격정적인 유년기를 막 넘긴 소년처럼 훨씬 더 아름답고 편안해져 있었다. 선 잠 속에서 들은 아름다운 멜로디 같은 이들의 앨범은 자아와 세계의 혼돈 속에서 어느 정도 직감적으로 방향을 잡아 걸음을 옮기고 있다. 잠에서 깨면 놓쳐 버릴 것 같은 안타까움 내지는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해석하지 않아도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열병을 한껏 앓고 난 [잔향]의 차분해진 이마 위로 흐르는 서늘한 땀방울을 닦아주고 꿈에서 깨어난 그들을 만나보았다.
◎ 잔향 음반
첫 EP [Leaving isle]
1집 앨범[자각몽]
◎ 잔향 멤버- 이순용(보컬, 기타, 건반) 신재진(리드기타), 강길태(베이스), 송경현(드럼)
1. 각자 음악을 시작하게된 결정적인 계기와 지금까지의 음악적 행보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
경현(드럼): 음악은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지만 이쪽 길을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평범하게 학교 다니는 학생이었고 전람회 같은 음악을 좋아했다. 중학교 때부터 취미로 악기를 하나 다루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길을 지나다 상점 안 TV에서 여성드러머가 드럼을 치는 모습을 보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 집이 강릉이라 드럼을 가르치는 곳이 없어 한참을 찾아 다녔었다. 고 3때 [이 길이 내 길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경현: 밴드는 2004년 3월 [잔향]을 하면서부터다. 전부터 알고 있었고 초기 멤버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관객 입장에서 공연하는 것도 보고 그랬는데 [잔향]을 좋아해서 같이 하고싶다는 뜻을 순용 오빠에게 전했고 함께 하게 됐다.
- 잔향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경현: 순용 오빠가 공연하는 모습이나 연주하는 모습이 굉장히 진실 되어 보였다. 많은 팀들이 있지만 사실 자신들의 색깔이 확고한 밴드는 흔치 않다. 잔향의 확실한 색깔과 그에 대한 리더의 확고한 신념이 인상적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쪽 음악을 좋아한 건 아닌데 그런 매력에 끌려 함께 하게 됐다.
- 본래는 어떤 음악을 좋아하나?
경현: Funk를 주로 들었고 [퓨전 재즈]와 [포크]를 좋아한다.
길태(베이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치는 여자가 너무 멋져 보여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동네 피아노 학원을 찾아갔다. 어린아이들부터 어른까지 학원생들이 전부 여자였는데 교복을 입고 들어간 내가 피아노를 배우러 왔다고 했더니 전부 웃고 난리가 났었다. 20대 초반의 남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군대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뭘 시작하기가 힘들다.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이렇게 그냥 제대해서 학교 다니고 취직해서 살면 분명히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제대하고 학원에 가서 베이스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순용(보컬): 어릴 때 피아노, 미술, 태권도 등 학원을 3군데나 다녔다. 태권도는 잘 안 갔었고… 그 중에서 피아노를 제일 열심히 했다. 한 3년 정도 다녔는데 원장 선생님이 별로 재능이 없다고 해서 6학년 졸업하면서 손을 다 뗐다.(웃음) 중학교 입학할 때쯤 어머니께서 시내에 나가 파란 세고비아 통기타를 사다 주셨다. 다른 친구들은 기타가 있어도 다 그냥 나무 색이었는데 그 기타는 정말 예뻤다.
- 뮤지션을 만들기로 작정을 하신 것 같다. 메탈리카 메가데스 판테라 등의 스래쉬 메탈과 레드제플린, 딥퍼플 등의 하드록을 좋아해 카피도 그런 쪽으로 했었다. 국내에서는 크래쉬가 [최후의 날에] 등을 부를 때였고 그때는 판테라의 필립 안젤모와 레드제플린의 로버트 플렌트가 세상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줄 알았다. 그 전까지는 음악을 그냥 접했던 것이고 고3 여름쯤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음악을 시작해도 늦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맘때 [도어즈]를 접하고 9월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심정적으로 많이 다운됐던 때였다. 다른 측면에선 앞으로 해나갈 음악에 대한 토대가 잡힌 시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사이키델릭한 것도 좋아하고 너바나나 시애틀 쪽 고 3때는 그런 류를 많이 들었다. 앨리스인 체인지나 펄잼도 좋았고.
고 3 여름에 음악을 해야 겠다는 일념으로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서울은 압구정동이 좋다길래 무작정 압구정동으로 가서 음악학원을 찾았다. 당시 기타 강사가 김도균 씨였는데 2달 정도 배우면서 전철역에서도 자고 하루 하루를 버티다 못해 다시 내려가게 됐다. 원래 하던 밴드를 다시 하면서 안동시내에서 최초로 단독공연을 준비했다. 안동에는 음악 하는 형들이나 스쿨밴드들이 좀 있었지만 단독공연을 했던 밴드는 한 팀도 없었다. 공연장도 없어서 우정 스포츠 프라자라고 결혼식장을 잡고 신발가게와 분식집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2∼3만원씩 스폰을 받았다. 시내에 레코드 가게가 7군데 정도 있었는데 표를 몇 십장씩 주고 팔아달라고 부탁도 했다. 졸업하고 2월 어느 날 단독공연을 했는데 안동시내에는 그런 팀이 없었던 지라 난리가 났었다. 해외에서 무슨 메탈리카가 온 정도의 반응이었다.
졸업을 하고 대학을 천안으로 갔는데 실제로는 거의 서울에 있었다. 당시에는 클럽이나 뮤직비디오 감상실을 다니면서 클럽 입구에다 구인광고를 써 붙여 멤버를 구했는데 처음 만든 밴드가 펑크 밴드였다. 20살부터 22살 때는 많은 밴드를 거쳤다. 보컬도 했다가 베이스도 했다가 파트 바꿔가면서 나름대로는 버티는 시기였던 것 같다. 22살 가을에 군대에 갔다 제대하자마자 다시 올라와서 와이즈 업이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시애틀 쪽을 했는데 나름대로 그때는 곡을 좀 써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에는 공연하면 카피가 10곡이고 자작곡이 3곡 정도라 곡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대단한데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듣는 것에만 의존해야되니까 한계가 있었다. 다음해인 2002년 가을에 그때까지 하던 밴드를 다 정리하고 재즈 아카데미 작·편곡과에 들어갔다. [곡을 좀 써봐야겠다. 자자곡이 많은 밴드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들어가 들어가자마자 밴드를 했고 그게 [잔향]이었다. 2002년 10월 달에 초기멤버들을 만나고 곡을 쓰면서 에그뮤직 사장님을 알게 되 1월 달부터 EP를 준비, 작년 11월 달에 발매했다.
2. 본인을 빼고 멤버가 다 바뀌었다. 밴드를 한다는 게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떤 점이 어려웠는지.
순용: 음악적인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드럼은 원래 브로큰 펄의 멤버로 당시에 그 밴드가 정비가 안된 상황이라 도와달라고 했었는데 EP를 내고 활동하면서 얘기하다보니 좀 벗어나는 부분이 있었다. 베이스 치는 친구도 그렇고. 기타 치는 친구와 둘이 하기로 했는데 많이 힘들어했었다. 둘이 남은 것에 대한 불안감도 많이 느꼈던 것 같고 물론 나도 그랬지만 서로 표현을 못했던 것인데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새로운 멤버들과의 작업은 어떤가?
순용: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원래 [잔향]이라는 이름으로 해야 하는 음악에 크게 조애가 있던 친구들은 아니다. 처음에 합주하면서 장단점이 바로 느껴졌는데 우선 그 류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다보니 새로운 것들이 많이 나온다. 반대로 얘기하면 뿔뿔히 흩어져 있는 것을 가지고 어떤 하나의 테두리를 만들어 가야했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하나로 모으는 것이 힘든 부분도 있었다.
- 네 명 다 재즈 아카데미 출신인가?
- 별로 밝히고 싶지 않은 듯 한데 이유가 있나?
순용: 재즈 아카데미 나왔다고 얘기하는 게 좋지 않은 것 같다.
재진: 물론 물어보면 대답은 하지만 재즈 아카데미 나왔다는 걸 강조하는 건 안 좋게 들릴 확률이 많다.
순용: 개인적으로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좀 배웠겠네] 라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출신을 만나면 물론 반갑다. 인정은 하지만 내세우고 싶진 않다는 이야기.
3. 1집 앨범 타이틀이 [자각몽] 인데
순용: [자각몽]을 풀이하자면 [스스로를 일깨우는 꿈] 이라는 뜻으로 처음에 앨범작업을 할 때 [자각몽]이라는 세 글자로 출발했다. 표현하고 싶은 말들이 그 세 글자 안에 다 내포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앨범을 보면 알겠지만 꿈에 대한 이야기다. 잠자는 꿈이던 동경의 대상이건 장래 희망이건 그런 꿈들을 다 담고 싶었는데 전체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 EP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데(표현에 있어서 더 가라앉은) 의도한 것인지.
순용: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주변사람들은 많이 달라졌다, 부드러워졌다고 얘기하는데 같은 사람이 곡을 썼는데 그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게 [내가 달라져서 그런 건가] 라는 의문도 들지만 결국엔 같은 테두리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 어떤 곡인가?
순용: 붉은 비탈과 미로.
- 평소에 꿈을 자주 꾸나?
순용: 많이 꾸는 편이다. 하루에 10개 정도. 시리즈로 꾸기도 하고.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꿈을 많이 꿨었다. 중학교 때는 [꿈노트] 가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그것부터 적었다. 내용을 다 쓸 수는 없지만 이미지나 본 것들을 적었다.
- 영감은 꿈에서 얻나?
순용: 거의 그렇다. 계획적으로 곡을 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젠 꿈노트가 중요하게 돼버렸다. 요즘은 기억이 너무 선명하게 남아서 아침에 바로 안 적고 저녁쯤 돼서 메모할 때 끄적거려도 된다. [붉은 비탈] 같은 경우는 꿈을 그대로 가사로 옮긴 것이고 꿈에 의지를 많이 하는 편이다. 곡이 멜로디나 코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 잔향의 음악에서 가사의 의미는
순용: 가사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곡을 풀어나갈 때 그것이 곡을 설명해준다고 본다.
- 가사가 여러모로 상징적인 편이다. 언어유희로 받아들여질 것에 대한 우려 내지 자기 안에 침참할 위험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본인의 음악적인 주제가 고립과 소통이라면 더욱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순용: 가사를 던져 놓고 알아서 해석하라는 뜻은 아니다. 내 나름대로 말하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다. 인간적인 고립이나 소통일 수도 있고 자연이나 전쟁 같은 것에도 다 적용되는 이야기다. 이미지만 이야기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를 풀이를 하고 그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한다. 가사에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을 많이 넣으려고 한다.
- 전보다 훨씬 귀에 잘 들어온다. 고려가 있었던 것인가?
순용: 글쎄. 의식적으로 좀 Easy listening 할만한 곡을 하나 쓰려고 한 결과물이 [편지]다. 가사도 그렇고. 녹음할 때 닭살이 돋아서 좀 괴로웠다.
- 다른 멤버들은 전에 외부에서 [잔향]의 음악을 들었을 때와 이번 앨범의 차이를 분명히 느낄 것 같다.
길태: 전에 EP와 비교하면 차이는 분명히 있다. 작업을 할 때 전에 EP를 듣고 색깔을 맞춰서 가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형이 곡을 만들어 오면 곡의 분위기에 맞게 내가 생각하는 라인을 만들고 형이 O.K하면 가는 시스템이었다.
재진: 작업 시작하려고 할 때 전의 EP와 관련해 고민이 많았다. 이미 사람들이 EP 들었다는 걸 고려해 그 연장선상으로 가려고 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판단이 들었고 나름대로는 중간선상에서 작업을 했다. 전에 EP를 들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전혀 다른 스타일의 기타를 들고나오면 좀 무리가 있을 것 같았고 생각은 5:5로 했는데 결과는 7:3 정도로(본인스타일: 기존의 분위기) 나온 것 같다.
경현: 그냥 순용 오빠가 곡의 모티프를 던져주면 거기서 떠오르는 걸 이끌어내는데 최선을 다했다.
4. 1집 앨범 작업 과정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부탁한다.
순용: 곡은 보통 내가 멜로디와 코드를 만들어 오면 멤버들과 합주를 통해 작업하는 식이다. 1집의 경우 애초에 홈에서 다 하려고 해서 초안을 집에서 PC로 작업했었다. 경현이를 불러서 같이 곡을 듣고 얘기하면서 드럼을 찍고, 베이스도 치고 기타도 치고 해서 초안을 잡았는데 부족한 것이 많아 도저히 안되겠더라. 드럼이라도 스튜디오에 가서 리얼로 쳐오자고 해서 곡이 나오는 상황에서 드럼 녹음을 하고 프로를 짜서 베이스 녹음도 가고 스튜디오에서 소스를 받아와서 룸에서 기타와 보이스를 녹음한 뒤 녹음된 소스를 스튜디오로 가져가 믹싱을 했다.
- 룸이라는 건 어딘가?
순용: 합주실 한편에 고시원 방만한 룸이 있었는데 거길 빌려서 2달 정도 묶으면서 녹음을 했다. 초안녹음은 전부터 조금씩 해놓았었고 올해 3월에 멤버들이 모이자마자 가이드 녹음을 3월∼5월까지 하고 7월∼9까지 스튜디오에 가서 리얼 녹음을 끝냈다.
재진: 막바지에는 녹음중이면서 편곡작업 하는 상태가 병행됐었다.
순용: 애초에 내가 다 해버린다는 식으로 앨범작업에 대해 욕심을 많이 냈다. 사실 EP는 시간도 촉박했었고 사운드도 간섭을 많이 못했다. 그 당시 그 시간에는 그런 결과물이 나왔던 것이고 이번에는 녹음부터 마스터링까지 다 해버리려고 했는데 녹음을 진행하면서 역부족임을 느꼈다.
- 밴드 사운드는 밴드가 제일 잘 안다는 측면에서 보면 홈레코딩을 통해 그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장비가 구축되어야 하고 많은 경험이 쌓여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밴드들에게 여의치 않은 것 같다.
순용: 할 수 있는데 정말 힘들어서 그런 것이지 상황은 핑계일 수 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하나 하나의 톤, [멤버 스스로 자기 톤을 확실하게 갖고 있느냐]는 것이 관건이다.
- 자켓이 인상적인데 부클릿을 보니 화가 박영균씨의 작품이라고 나와있다.
순용: 에그뮤직 사장님과 친분이 있는 분이다. 자켓을 그림으로 해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와 EP때 작품을 썼었는데 이번 1집도 개인전에 가서 맘에 드는 그림을 골라 자켓으로 사용하게 됐다.
- 부클릿의 가사를 손으로 썼는데 앨범의 느낌과 잘 어울린다.
순용: 손글씨가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았는데 경현이가 글씨를 잘 써서 쓰게 했다. 하얀색 색연필로 쓴 것이다.
5. 1집을 발매했는데 작업을 마치고 어땠는지.
순용: 결과물인 시디를 놓고 봤을 때 만족스럽지는 않다. 2004년 한해동안 이 시간의 내 모습이 이것이니까 받아들여야 하고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 멤버가 다 바뀐 상태에서 8개월만에 작업한 것인데
순용: 소속사에 우리말고 다른 밴드들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언제까지 내야 된다는 제한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6월 달이었는데 나름대로 압박감이 많았다. 결국 조금씩 밀리다보니 11월 달에 나오게 됐지만. 그냥 [앨범한번 내보자] 라는 생각이 아니라 언제까지 꼭 내야 한다는 제한된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재진: 앨범이 나오는 과정을 처음 해 본 것이라 배운 것이 많다.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도 많지만 다음 번에는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지금 내 모습을 그대로 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전의 EP에서는 노을이나 섬을 좋아했었는데 이번엔 곡 자체는 다 좋은 것 같다.
경현: 100%만족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작업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능력을 발휘했는지 스스로 질문을 많이 해본다. 아쉬운 것이 많지만 한편으론 작업한 것이 앨범으로 나와 뿌듯하고 기분 좋긴 하다.
길태: 당연히 아쉽다. 경험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과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앨범은 이미 나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여기서 더 정진해 앞으로 더 좋은 소리와 멋진 라인을 만드는 것이 할 일인 것 같다.
6. 전국 클럽 투어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결정하게 되었는지? 광주와 전주에서의 공연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순용: 활동에 대해서 한이 맺혔다고 해야 하나. EP나왔을 때도 단독공연을 포함해 3번 정도 공연 한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 앨범이 나오면 닥치는 대로 공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우리가 인지도 높은 밴드가 아니라 지방공연 하는 게 분명 힘들겠지만 한번 해보자고 사장님께 먼저 제안했다.
재진: 숫자가 몇 명이던 우리를 보기 위해 찾아 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우리를 기억하고 돌아간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알려진 밴드들의 경우도 지방투어를 갔다오면 대부분 충격을 받고 온다. 지방공연의 경우에는 밴드의 지명도보다도 얼마만큼 자주 그 지역을 방문했느냐가 관건이라는데 대부분은 자주 내려가질 못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것 같다.
순용: 관객도 관객이지만 그 날 공간 안에 있었던 사람들과 소통이 됐다는 것이 공연자체로 봤을 때 참 좋았다. 우리도 뭔가를 받았고 그 사람들도 받아갔다.
7. [언니네 이발관]의 인터뷰에서 보면 밴드의 아마추어적인 성향을 총체적인 의미의 프로듀서의 부재로(내지는 그것에 대한 고민의 부재) 말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총체적인 의미의 프로듀서란 밴드의 음악 뿐만 아니라 운용, 컨셉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인재를 뜻함)
순용: 그 기사 다 읽어봤다. 프로듀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동의한다. [잔향]의 경우도 내가 감독 같은 역할을 많이 하는데 간섭을 많이 하다보니 멤버들이 괴로워한다. 덧붙여서 얘기하자면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프로듀서가 엔지니어의 역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적인 면까지 가능하다면 프로밴드가 더 많이 나올 것 같다.
- 나머지 멤버들이 다 긴장하는 눈치다.(웃음) 물론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국에 섹스 피스톨스나 비틀즈도 밴드 멤버가 그런 일들을 한 건 아니고 제 삼자가 만들어 준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니 밴드들이 감당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녹록치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잘 되는 밴드들을 보면 어느 정도 그런 역할을 하는 리더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어떤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프로듀서가 있다고 한들 그들이 시간과 열정을 투자할 만큼 가능성이 있는 밴드가 있는가? 그리고 그 가능성이 한국에서 먹힐 것인가?
순용: 솔직히 메이저의 경우를 보면 거의 그런 식 아닌가? 다 만들어진 것이데. 그럼 그들은 프로인가?
재진: 한 앨범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그에 관련된 사람들의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본다. 지금은 그런 것들을 밴드 멤버들이나 리더가 머리를 짜내서 하고 있지만 10년이든 20년이든 후에는 그런 프로듀서 겸 엔지니어가 있어서 진행하는 게 맞다고 보고 정말 음악이 좋은 밴드는 소속사를 빨리 만나서 제반의 문제들을 알아서 해결해 줄 수 있는,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본다.
8. 근래 롤링홀이 오픈하고 공연장은 늘어나고 록 페스티벌도 많아졌다. 씬에서 음악을 하는 밴드로써 근래의 흐름은 어떤 것 같나?
순용: 주변의 밴드들이 공연하는 걸 봐도 스케줄은 잡혀서 라이브는 하는 것 같은데 막상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진 않다. 경기가 불황인 이유도 있겠지만 밴드들은 계속 음악을 하고 있는데 전보다 관심도는 줄은 것 같고 [홍대 클럽에는 밴드들이 많다] 는 어떤 명제가 있지만 그렇게 밴드가 많은 것 같지도 않다.
- 사실 인터뷰를 하려고 보면 할만한 팀이 없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음악적인 것도 있고 마인드도 있고 여러 가지를 보는데 바운더리 안에 있는 팀은 좀 있지만 공연을 봤을 때 어떤 감동이나 매력을 느끼는 경우는 많진 않다.
순용: 그렇다. [언니네 이발관] 인터뷰에도 나오지만 초창기 밴드말고 차세대를 이끌어 갈 뉴페이스가 나왔으면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재진: 클럽에서 라이브를 하는 것은 밴드에게 있어 중요하고 유일한 홍보 방법이지만 어떻게 보면 늦은 걸음일 수 있다. 준비된 신예 밴드들을 매체에서 좀 다뤄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순용: 밴드 입장에서야 그렇게 말하지만 거꾸로 보면 또 이석원씨 이야기와 맞물린다. 매체에서 내보내 주고 주목을 받으려면 아까 말한 것처럼 프로듀싱 된 밴드여야 하고 멤버들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야 뭔가 어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자기 색깔이 있고 어떤 식으로라도 튀는 밴드가 어디가서라도 더 알려지게 된다는 것인데 계속 돌아가는 얘기다.
재진: 그렇게 본다면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이석원] 씨 같은 사람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는가?
- 몇 안 되는 잘 된 밴드들도 자기 앞가림하는 데 정신이 없어 보인다. 본인들 활동에만도 벅찬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을 것 같다.
순용: 밴드 스스로가 힘을 키워야하고 그러려면 좀 독립적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 아까도 전략 얘기했지만 자기들 나름대로의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건 공감하는 얘기다. 곡을 정말 잘 쓰던지 라이브를 정말 잘하던지. 자신들의 가치관이 확고해야 한다. [클럽에서 계속 활동하다보면 기획사에서 와서 픽업하겠지]라는 생각은 상당히 위험하다. 주변에서 보면 아예 포기한 상태인데 활동을 하고 있는 밴드도 있다. [우리는 음악 어차피 좋아서 하는 건데 앨범은 무슨]이라며 공연은 꾸준히 하는데 앨범을 내고 싶다거나 앞으로 더 걸어나가야 한다던지 기획사에 데모라도 돌려서 음악을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접은 것이다. 나는 그냥 음악이 좋아서 하는 것이니 공연하고 그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 다른 직업이 있으면서 취미 정로도 공연을 하는 거라면 문제될 것은 없을 것 같은데.
순용: 넋 놓고 있다는 거다. 나이는 조금씩 먹어가는데 알바 같은 거 하면서 그러고 있으면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겠냐는 얘기다. 아까 말한 것처럼 서른이 되면 놓게 될 확률이 다분하다.
9. 위에서 말한 것들은 결국은 자신이 하는 음악이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인데. 음악을 해서 돈을 벌려면 일반적으로 기획사에서 컨택이 돼서(안된다고 해도) 앨범이 나오고 홍보가 돼서 앨범이 많이 나가고 콘서트가 매진되는 등의 일렬의 상황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지나 컨셉도 중요하겠지만 음악이 얼마나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될 것 같다.
순용: 언니네 이발관은 그런 것 같다. 자기 스스로가 대중적이니까 내가 좋으면 대중도 좋다는 것인데 그런 밴드도 있는 것이고 아닌 밴드도 있는 것이다. 모조리 다 그런 곡 만들기를 하면 재미없지 않나. [인디 속 밴드 이야기]의 허클베리핀 인터뷰도 봤는데 그쪽의 입장에 더 공감이 간다. 곡을 애초에 상업적으로 만들어야겠다 내지 좀 더 팔릴 음반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강하지도 않다. 곡을 쓸 때 내가 얘기하고 싶은 방향으로 가게 되기 때문에 완전히 그럴 수는 없다.
- 그것도 능력 아닌가? 자신들의 색깔과 대중적인 부분을 잘 믹스하고 싶은데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몰라서 고민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대중적인 요소를 알고 그 팀의 색깔과 적절한 비율을 믹스해 내는 것도 관건이다. [잔향]이 어느 정도 그 선을 알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인데.
순용: 글쎄.
Free talk !
유감독: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씬에서 밴드를 하는 사람들 중 30대, 40대까지 이어지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것이 50대, 60대까지 이어진다면.
예를 든다면 유럽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에서 킹 크림슨이 연주를 하고 있으면 50대, 60대 사람들로 꽉 차는 거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서로 다 인사를 한다. [안녕, 안녕] 그러다 연주 도중에 한 사람이 기침을 하니까 다들 그 사람을 쳐다봤는데 [아. 미안해] 그러더라는 것이다. 그 모습들을 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이상향도 분명히 목표가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과 연장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나.
밴드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나 어필하는 것에 너무 무딘 게 아닌가? 전략적이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TV에서 비를 봤는데 참 느낀 게 많았다. 단지 비가 문제가 아니라 노력하는 흔적, 대중적인 코드를 잘 끌어온다는 것, 어쩜 저렇게 입맛에 맞게 만들까 라는 것들이다.
[잔향]이라는 팀을 봤을 때, 분명히 매력적인데 좀 더 독보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각자 가지고 있는 장점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 면에 대해서 좀 더 어필을 하고 중심을 잡아가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40대가 돼서 좋아하는 일들을 해나간다는 건 놓인 위치가 여러분들과 다를 바 없다. 생계에서도 그렇고. 워낙 음악 좋아하고 춤 좋아하다 보니까 클럽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내가 만든 것이 [클럽데이] 였다. 나아가 공연기획을 하게되고 페스티벌을 만들면서는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록페스티벌의 주인공이 누군가? 밴드와 관객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주인공 역할을 하지 않는다. 연극에서 주인공은 도드라지고 연기도 잘하고 대사도 잘 치고 그렇지 않나? 그런데 록페스티벌의 주인공들은 [개런티 얼마? 누구랑 서나? 공연시간은 언제? 몇 곡? 리허설은 언제?] 를 물어보고 당일 날 자기 순서가 끝나자마자 사라진다. 그게 주인공이 할 역할인가? 나는 [그래서 이 씬이 안 되는구나] 라고 느꼈다.
기획 초기부터 끝날 때까지 밴드와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이 같이 가면 안되나? 무엇보다 전략적이어야 한다. 마이클 잭슨이나 보아, 비의 공연을 보면 그들은 뭔가 다르지 않나. 우리는 다른 점이 뭐가 있을까? 그냥 와 가지고 노래 좀 하다 물 뿌리고 간다. 그게 아니라 관객들한테 진짜 짜릿하게 뭔가를 팍팍 줄 수 있다면 어떨까? 음악을 포함해 관객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밴드들이 생각하고 최대한 서비스를 했으면 한다.
요즘에는 기획을 할 때 밴드들을 만나서 뭘 하고 싶고 무엇으로 강력하게 어필할지 묻는다. 그러면 무대 디자인, 조명, 특효 등이 그에 의해 달라지고 원하는 것들을 같이 한번 질러볼 수 있는 것이다.
김기자: 페스티벌을 하면서 위와 같은 부분 때문에 유감독님은 많은 충격을 받았지만 인터뷰를 하면서 물어보니까 이미 여기서는 그런 것들이 관례가 되 버린 것 같다. 밴드를 컨택 할 때도 컨셉이나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보다는 [언제, 누구랑, 몇 곡, 개런티] 정도만 이야기한다거나 친분으로 무작정 컨택 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주인공으로 대접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밴드들도 공연 갔다가 자기 순서만 하고 오는 것이다. 그냥 공연 뛰어주고 개런티 받는 식으로. 그만큼 기획자와 밴드들의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는 얘기다. 원인은 기획자나 밴드 양쪽에 다 책임이 있다고 보는데 페스티벌에 자기 순서가 끝나도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개런티 받고 공연만 하러 왔다고 하더라도 정말 공연이 멋지고 볼만하다면 그렇게 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만큼 지금 진행되고 있는 페스티벌들이 밴드들에게 메리트가 없다는 이야기고 실제로 밴드들에게 페스티벌로 인정되는 행사도 몇 개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기획하는 사람도 그렇고 밴드들도 많이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사실 커뮤니케이션도 쉽진 않다. 아까처럼 페스티벌에서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밴드들은 당황한다. 이런 걸 물어보는 경우가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건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해결할 일이다.
결론은 밴드와 관객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페스티벌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견 교환과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유감독: 감독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역할은 밴드들이 원하는 것들을 준비해 주는 것인데 밴드들은 그런 이야기를 안 한다.
김기자: 단절되는 이유 중 또 하나는 매니지먼트 때문이기도 하다. 통화를 매니저와 하면 대부분 밴드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인터뷰도 때도 뭘 하는지 모르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가 인터뷰를 하는 것은 그 팀의 음악과 그 팀에 대해 관심이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그들과 커뮤니케이션 하기 위함이다.
네바다가 그 이야기를 하더라. 미국에서는 림프 비즈킷과 브리트니가 나와서 둘 다 환호를 받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그것이 안되나? 그런데 그 부분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또는 그렇게 같이 무대에 오를 수 없는 상황도 문제가 되겠지만 그 이전에 밴드들이 자신들에 대해 많이 생각해야 한다. 한달 반 전 쯤에 취재 때문에 비의 쇼케이스에 갔었다. 매체를 비롯해 해외 팬들 400여명과 3천명 정도의 팬들이 왔다. 공교롭게 그 전에는 TV에서 노래하는 비를 본적이 없었다. 그 날 가서 보니 정말 잘 만들어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향은 귀가 아플 정도로‘웅웅’ 거렸음에도 중고생들은 넋이 나가 있었고 프레스들조차 매료되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씬은 과연 일반적인 관객을 끌어 모으는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경쟁력이 있는가. 그리고 그 관객들의 파워와 움직임은 어느 정도인가?
유감독: 많은 인원을 끌어오는 것도 문제지만 일단 적은 수라도 온 사람에게 강렬하게 어필하면 된다. 단 두 사람이 왔더라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 다음에는 네 사람이 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잔향]도 음악을 하게 된 계기가 뭔가를 보고 감동했기 때문 아닌가? 공간으로 예를 들면 요즘은 의자에 앉는 것보다 바닥에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는 것처럼 자유로운 걸 원한다. 공연도 마찬가지 아닐까. [델라구아다] 가 왜 인기를 끌었을까? 사람을 띄우고 물을 뿌리고 뭔가 달랐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잔향]이라는 팀을 얘기할 때 조금은 다르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장점이 참 많다. 굉장히 감성적인 음악 아닌가. 저번 공연 때 공연 도중에 다 같이 앉아서 연주하던데 그런 점도 재밌었다. 그런데 그 앉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봤는가? 자세에 따라서 180。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뭔가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고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늘은 인터뷰도 있지만 이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이 씬에 대해서 얘기해 볼 수도 있고 같이 뭔가 모색해 볼 수도 있고 이런 게 해보고 싶다고 얘기할 수도 있고. 같이 살아가는 것 아닌가? 이 씬에 애착이 있으니까 하는 것 아닌가. 좋은 음악이 있으면 같이 들어 볼 수도 있는 거고. 예전에 가장 마음 아팠던 게 [벨 앤 세바스찬]이라고 우리나라 모던록을 발전시키게 된 결정적인 장소가 없어진 것이다. 그곳에는 모던록 관련 음반이 3천장 정도 있었는데 밴드들이 그 음반들을 들으며 정말 많은 영감들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없어지지 않았나. 우리들이 뭔가 그러한 곳들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고 그 공간에서 연주도 할 수 있는 거다. 좀 다양한 접근과 갇혀있지 않은 사고를 같이 가졌으면 한다.
우리의 음악은 흔히 페스티벌에서 기대하는 업된 분위기 속에서 스탠딩으로 소리지르고 하는 축제용이 아닌데(웃음) 어떻게 그 자리에서 우리의 음악을 펼칠 수 있겠는가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 지금은 힘이 많이 빠진 상태고 [우리는 페스티벌용이 아닌가봐] 라는 생각도 한다.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공연하는 곳에 서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과연 거기서 공연하는 밴드들의 음악을 들어보고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을 하느냐는 것이다.
아까 김기자가 인터뷰 컨택을 위해서 최소한 그 밴드의 라이브를 3번 이상 본다고 했는데 참 마음에 드는 말이다. 어떤 행사를 준비할 때 인맥이던 좋아서 불렀던 그 밴드의 음악을 알고 특성을 살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 행사가 있는가?
준비 단계에서 그런 부분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보니 밴드는 그냥 가버리고 기획자 입장에서는 못 마땅한 것이다. 같은 밴드 입장에서 봐도 그런 자리에서 자기 무대 만하고 가버리는 밴드는 얄밉다. 물론 우리야 같이 음악 하는 사람들이니 다른 밴드들이 좀 잘못해도 덮어주고 같이 가고 싶지만 기획자들 입장에서는 [그래 인디 밴드들은 이래]라고 생각이 박혀 버린다.
서로 선입견을 가지는 것 같다. 밴드 입장에서는 일단 순서랑 몇 곡하느냐가 중요하니까 그런 거 먼저 챙기고 돈이 좀 되나 그런 생각부터 하고. 애초에 페스티벌 자체를 그렇게 대하는 밴드들이 정말 잘못된 것이지만 그 전 단계의 문제도 있다.
만약에 모니터가 안 되도 모니터 좀 더 올려 달라는 말하기가 어렵고 그런 위치에 있는 밴드들이 많기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 페스티벌이나 공연을 가면 아예 얘기를 안 하는 거다. 얘기 꺼내봤자 무시당할 것 같으니까. 그런데 인지도가 올라가서 어느 정도 인원이 동원되는 밴드들에게는 그런 부분들이 좀 통용이 되고 여유 있게 진행되지만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밴드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걸 한데 묶어서 같이 소통하는 것, 기획자와 밴드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시간 안에 될 일은 아니지만 시간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가진 공연 기획자 분들이 좀 더 펼쳐지고 밴드들도 같이 얘기하고 하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기자: 판의 생리에 영향을 받는 것도 있고 우리도 실수를 한다. 다들 저렇게 생각하는데 답답한 것도 많고 꿈을 가지고 움직여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선입견들은 정말 힘들다. 하지만 계속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실수를 하면 그걸 얘기해 줄 수 있는 밴드가 있어야 하고 같이 대화하면서 다음 번엔 좀 더 나아져야 한다. 작은 움직임이 모이고 모이면 큰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나.
순용: 그게 참 희망적인 얘기다.
혹 올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음악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사실 그게 아니다. 우리나라 클럽에서 DJ 한테 청소시키면 [전 DJ인데요]라며 청소를 안 한다. 일본 오사카의 한 클럽에 갔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이 서빙하던 애들이 9시가 되니까 다 DJ를 하는 거다. 거기다 디자인도 하고 굉장히 멀티풀하더라. 그 클럽을 살리기 위해서 옷도 팔고 디자인도 하고 사이트도 만들고 그러니까 서로가 버텨지더라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른데 가서 뭐 나르고 버는 돈 가지고 버티면서 음악하고, 그게 아니라 우리가 음악이라는 것을 같이 한다면 그것을 가지고 해결할 수도 있지 않나. 여기 있는 사람이 사운드 엔지니어링에 관심이 있다면 엔지니어하면서 음악하면 안되나? 같이 하면서 클럽이라는 공간, 공공적인 것들에 대해 역할을 가지고 우리 섹터를 우리가 잡아가야 하지 않나? 그렇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 밴드들이 얼마만큼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상적이고 희망적인 얘기가 아니라 하나씩 해나가자는 얘기다. 10년이라는 세월을 홍대 앞에서 보내면서 고민한 것은 [대안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언가?]였다. 한 씬이 그냥 커지면 예를 들어 페스티벌이 대박 터지면 스폰서가 다 달라붙는다. 그런데 그 씬을 만들기까지가 힘들다. 서울시도 처음에 하이서울 페스티벌의 프로그램으로 인디 밴드 리스트를 올렸더니 다 모른다며 난처해했다. (그 리스트에 있던 밴드들은 이 씬에서는 꽤나 유명한 팀들이었음에도 불고하고) 결국 어려움을 무릅쓰고 1회 하이서울 페스티벌을 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 이후에는 밴드들을 올리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김기자: 아니 우리가 제안한 그런 컨텐츠를 서울시나 관공서에서 자기들이 벤치마킹한다. 예전 같으면 시청 앞 잔디 광장에서 어떻게 밴드들이 공연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기획한 1회 하이 서울 페스티벌이 물고를 텄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모든 걸 다하려고 욕심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흐름을 만들어 주고 이 씬이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감독: 역사적으로 아쉬운 것이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 같은 것이 비가 그렇게 안 오고 성공했으면 페스티벌과 씬은 훨씬 커졌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만드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달라 붙여야 되는 것이지 어느 한 집단이나 팀이 한다고 된다는 건 아니라고 본다.
김기자: 아까 일본의 예는 밴드나 클럽 주인이나 그만큼 마인드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착취가 될 뿐이고 아주 위험한 일이다.
유감독: 우스운 이야기 하나. 행사를 기획하고 현장에 갔을 때 사람이 없고 바쁜데 트러스 꼭대기에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사람들에게 부탁하려고 하면 나는 음악하는 사람이고 나는 조명이고 나는 음향이니 올라가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럼 내가 올라가게 되는데 나는 왜 올라가야 하는가? 내 행사니까. 그런 생각들이 왜 없을까. 자기 행사 아닌가. 같이 달라붙어서 내 행사처럼 해야 모든 것들이 잘 만들어지지 자기들 단독공연에서만 그렇게 신경 써야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용: 밴드들이 정말 부족하게 그것 같다. 페스티벌은 많은 밴드들이 나오는데 그 시간만큼은 자기가 주인공인고 주체다라는 생각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생각이 부족한 거 같다.
10. 인터뷰에 추천하고 싶은 팀이 있다면?
잔향: 데미안(재진), 브로큰 펄(경현, 길태), 몽구스(순용)
2004.11 17 사진/유감독 인터뷰, 글/김기자 기사 작성 200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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