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가입 해놓고 눈팅만 하던 eeje 입니다.
오늘 부터 다룰 주제는 재벌입니다. tv를 봐도,호이 4를 해도 곳곳에 재벌이 있습니다. 또 모니터,스마트폰,tv등 가전제품도 재벌이 만든거고..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물건 대부분이 재벌이 만든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 재벌이 어떻게 형성되서 성장했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은 재벌 형성 과정에 대해 알아보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항복했습니다. 조선인민들은 일제가 물러나자 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를 만듭니다. 인민위원회를 만들어서 자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소련군이 북쪽에서 내려와 평양에 머무릅니다. 미국은 1달뒤인 9월달에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에 머무릅니다.
일본은 도망가면서 많은 산업시설과 집을 놔두고 갑니다. 이때 집과 산업시설을 각각 적산가옥,적산기업이라 합니다.
적산이란 말 그대로 "적이 남기고간 재산"이란 뜻이죠.
미군정이 설립되고 하지는 인민위원회를 떄려잡기 시작합니다. 왜냐?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는 조선을 몰랐기 때문에 영어가 되는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 정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또 친일파들을 다시 불러들입니다. 이는 미국 말 잘 듣는 사람이면 출신이 어디든지 상관하지 않겠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적산을 불하할때 자신들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나 말 잘듣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불하를 해주게 되는 거죠. 이로 인해 있는 놈들이 더 부자가 됩니다.
왜 부자가 되느냐? 1948년 도매물가지수는 1936년을 기준으로 67배,1944년을 기준으로 8배나 뛰어있었습니다. 그런대 해방 전 가격으로 불하를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땅짚고 해엄치기 아니겠습니까? 또 미군정은 불하받는 민간인들에게 장기신용대부도 해줬습니다. 아! 이런 공식이 성립되는 순간입니다.
돈이없다→국가에 돈을 빌린다→적산기업을 산다→나중에 천~천히 갚는다. 이것을 놓칠리가 없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로비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쨋든 로비를 할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일제강점기때 한 자리씩 차지 하고 있어야 이 돈이 있지 않겠습니까?
적산을 불하받은 민간인들은 원조물자 독점 배당,저리의 금융 특혜,독과점,담합등 온갖 특혜로 재벌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완전 거지가 됩니다.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을 불하받아 손쉽게 재벌을 일군 사람들은 삼성 이병철,한화 김종희,선경 최종건,두산 박두병,한진 조중훈 등입니다.
1.두산 박두병
두산그룹을 만든 사람은 박두병입니다. 그러나 박두병의 아버지인 박승직이 없었다면 지금의 두산도 없었습니다.
박두병은 아버지가 닦아 놓은 터를 기반으로 기린맥주를 불하받았고 그 기린맥주가 지금의 OB맥주가 된 것입니다.
박두병의 아버지 박승직은 1864년 음력 6월 22일에 태어납니다. 박승직의 아버지 박문희는 농사를 지었는데 당시 세도가였던 여흥 민씨의 땅을 소작했습니다. 그때는 민씨가 국정을 농단했을 때라 민씨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벼슬을 줄때였으니 민영완이라는 자가 해남 군수로 갈때 같이 갑니다. 민영완이 박승직의 총명함과 부지런함을 높게 산 듯 합니다.
박승직은 해남 장터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배웁니다. 첫 장사는 석유 판매로, 75냥 주고 산 석유를 115냥에 팔아 40냥의 마진을 남깁니다. 이때 부터 장사의 위력을 알게 됩니다.
박승직은 1882년부터 본격적인 장사를 하는데 보부상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보부상의 한계를 절감하고 1889년에 260냥을 주고 종로4가 92번지 배오개에 집을 사 '박승직 상점'을 만듭니다.
이때 부터 그는 "배오개의 거상"으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1905년 메가다 쇼타로가 주도 하는 화폐정리사업(조선에서 쓰던 엽전이나 은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과 같은 화폐를 쓰는 시책) 이 사업은 일본 상인들이 조선경제를 완전히 제압하려는 속셈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화폐의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지게 되고 조선 상인중 상당수가 파산합니다.
박승직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광장주식회사를 만들지만 일본 상인들은 미에이 판매 동맹을 맺고 미쓰이 물산에 위탁 판매를 맡겨 포목수입을 독점해서 가격을 폭등시켰습니다.
박승직은 일본과 직접 거래를 하고 싶어 공익사라는 합명회사를 만듭니다. 이 회사를 만들즈음 이토 히로부미는 제일은행 지점장에게 박승직을 도와주라고 했으니 박승직이 공익사로 어떤 이득을 보고 어떻게 사업을 번창시켰는지 잘 알수있죠.
박승직은 2만 9천원을 출자해 니시하라 류조라는 일본인을 알선책으로 두고 일본의 이토추상사와 손을 잡았습니다.
공익사는 이토추상사의 돈을 끌어들여 1년만에 자본금을 두 배로 늘리고 7년이 지난 1914년에는 자본금을 50만원으로 늘렸습니다. 동시에 주식회사로 개편했는데 이때부터 이토추 계열 주식이 공익사 지분 중 절반 이상을 차지 합니다.
자본금과 취급품목을 늘리면서 공익사는 눈부신 성장을 했으나 1919년,만주공익사를 창립하고 만주 내 모든 사업을 만주공익사에 양도합니다. 즉 공익사는 이토추상사가 만주에 진출하고자 만든 교두보에 불과했던 것이죠.
박두병은 해방 뒤, 기린맥주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취임하면서 기린맥주를 불하받을 준비를 하는데, 그가 기린맥주를 불하받을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 박승직 덕이 있었기 때문이죠.
1946년 정정숙과 박두병의 부인 명계춘이 포드 승용차 1대와 트럭 1대로 운수업을 시작했으나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이 사업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운수업체 이름이 '두산상회'였다는 점입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 간 박두병 일가는 당시 원조 물자를 운송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깨닫고 다시 운수사업에 뛰어듭니다.
이때부터 박승직 상점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주식회사 두산상회'가 나타납니다.
박두병은 서울로 올라와 기린맥주의 또 다른 조선인 주주 김연수에 양해를 얻어 공개입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독입찰로 동양맥주주식회사를 34억 천 3백 66만 3백 60원에 불하받았습니다. 이때가 1952년 5월 22일로, 이날이 동양맥주 창립기념일이 됩니다. 그리고 동양맥주는 오늘날 두산그룹의 모태가 됐습니다.
다음은 선경을 다루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승만 리 가카께서 도와주죠. 그래서 자유경제원이나 전경련에 승만 리 가카의 사진이 있다나 뭐라나
@이상엽 적산은 조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대 그걸 손쉽게 얻었지 않습니까?
앙 귀족띠~
허어... 이 카페에서 ~~띠 라는 단어를 볼줄이야....
말머리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