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GUN
국제 무대 전천후 플레이어 활약 고려대 김일두
세계 농구 유망주들이 총출동한 영맨선수권대회에서 한국팀 선수 중 가장 빛난
활약을 해준 것은 김일두였다. 첫경기였던 이스라엘전에서 잘했을 때만 하더라도 오늘 하루뿐이려니 했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대회 내내 한국 선수중에 가장 인상적이고 기복없는 플레이를 보여줬다.
글/한기윤 객원기자 사진/문복주 기자
이스라엘전을 마치고 끝나고 기자회견장으로 향하는 도중 최부영 감독은 김일두에게 “일두, 오늘처럼만 하면 너 스타되는거야.”라고 말했다. 김일두는 이후에도 계속 위축되지
않는 플레이로 결국 영맨스타가 되었다.
김일두를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는 에너지와
배짱일 것이다. 이번대회에서 한국 선수중에
유일하게 잘한 것도, 제일 잘한 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 중에 가장 자신있고 시원시원한 플레이 그리고 외국의 장신 선수들을 상대로 어찌보면 겁없는 플레이로 코치진을 흡족시킨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김일두는 이번대회에서 자신이 올린 성과 및
경험에 대해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 한국에서
훈련했을 때 김일두는 센터 포지션으로 연습했으나 영맨대회에서 골밑 뿐 아니라 외곽포까지 가동시키며 슈터로서의 면모도 보여줬다. 김일두는 평소 학교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골밑 지키기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플레이를 맘껏 하지 못했다.
김일두는 “나름대로 준비한 것은 장신들을 상대로 몸싸움도 한번 해보고 파워포워드 플레이도 좀 해보고 싶었는데 몸싸움도 해보고 외곽플레이도 해볼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어요.”라며 자신의 플레이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김일두는 일본과의 두게임을 꼽는다.
두번 모두 패했기 때문에 가장 아쉬운 것도 역시 한일전 두 경기라고 한다. 예선전, 첫 한일전에서 심판이 엄청난 일본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적용해 한국 선수들은 7명이나 퇴장당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 7이라는 숫자는 또한 김일두의 파울 개수와도 일치한다. 김일두는 1차 연장전에서 5개의 파울을 범했으나 심판이 한국벤치에 선수교체 신호를 보내지 않아서 계속 뛰었고 이후 6파울 그리고 7파울이 되서야 퇴장당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김일두는 “당연히 알고 있었죠. 그러나 본부석이나 심판진이 아무런 지시를
안내려서 뛰어도 되겠구나 생각해서 계속 뛰었어요. 농구한지 10년 정도 되는데 그것도 몰랐겠어요.”라며 자신도 어이없었다고 한다.
일본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나선 11-12위전 경기에서 한국은 경기가 잘
풀려 3쿼터 중반까지 18점차의 리드를 잡았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방심한 사이에 일본은 역전시켜 15초 남은 상황에서 2점 앞서있었다. 이때 김일두가 천금같은 결승골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파울 앤드 원을 얻어내고 자유투마저 성공시켜 80:79로 역전시켰다.
그러나 종료 2초전 일본의 타부세가 역전골을 성공시켜 한국을 또다시 패배의
늪에 빠뜨려버렸다. 김일두는 “게임 막판에 역전슛까지 성공시켰는데 그 슛을
쏠때의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어요. 농구 10년하면서 종료직전에 결승골을 터뜨려본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자유투 쏘면서 이제 드디어 한번 해보는구나 생각했는데 또다시 역전당해 아쉬웠어요.”라며 한일전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일두가 농구선수로서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서게 된 것에는 철저한 몸관리에 있다. 그는 웨이트로 다져진 튼튼한 몸과 중학교때부터 계속한 스트레칭으로 유연함까지 겸비하여 농구선수로서 더없이 훌륭한 몸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타 선수들에 비해 경기전후로 스트레칭을 많이 하는 편이고
항상 테이핑도 신경쓰면서 하는 등 몸관리를 철저히 한다.
김일두가 이렇게 몸관리에 대해 신경쓰게 된 것에는 부상의 시련이 계기가 되었다. 김일두는 초등학교 3학년 방학 때 종로 YMCA에서 농구와 수영을 배우면서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YMCA에서 농구가 재밌어진 김일두는 농구를 하기 위해
농구부가 있는 여러 초등학교를 알아본 후 대방초등학교에 가면서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3때 정말 화려한 농구로 각광을
받는 선수로까지 성장했다.
한참 자라고 성장할 나이에 김일두는 첫 번째 시련을 맞이했다. 휘문중 3학년때 휘문고 선배들과 섞여서 5:5로 연습경기를 하는 도중 발등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이 부상으로 기브스만 8주를 했지만 그래도 뼈가 완전히 붙지 않아서 6개월간 운동을 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3 겨울때부터 다시 몸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농구를 하다가 학산배 농구대회를 앞두고 같은
곳이 또다시 부러지는 불운을 겪었다. 김일두는 개인적으로 두 번 다쳐서 약 1년 정도 쉬게 된 것을 선수생활하면서 가장 아쉬운점으로 꼽는다.
“두번 다쳐서 쉰게 1년이고 또다시 몸만들려고 투자한 시간은 그것보다 더 길었어요. 그 부상만 아니었어도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선수가 됐을거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더 아쉽고 한편으로 억울해요.” 이후로 김일두는 테이핑과 스트레칭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스트레칭을 통해 자신의 컨디션까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되고 징크스까지 됐다고 한다.
“게임이 안 풀리면 스트레칭을 안해서 그런거라는 생각이 들고 경기전에 스트레칭을 해보면 잘되는 날이 있고 좀 뻣뻣한 날이 있어요. 그러면 아.. 오늘은 몸이 좀 가볍겠구나 아니면 무겁겠구나 하는걸 이제 알겠더라고요.”김일두는 부상 때문에 실력이 하락한 것도 아쉽지만 부모님께도 상당히 죄송스럽고 앞으로
부모님께서 만족할만한 경기내용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고등학교 와서 실력이 계속 올라가다가 부상 때문에 오히려 실력이 줄었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상당히 맘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여태까지 잘 내색 안했는데 부모님께 정말 죄송하고요. 앞으로 개인 연습을 많이 해서 좋은 선수돼서 부모님 마음 시원하게 게임 한번 잘해봤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일본에서 잘해봤자 부모님이 못 보시잖아요.”
최승태! 네 몫까지 뛰었다. |
김일두는 자신이 이번 대회에서 잘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두가지를 꼽는다. 첫
번째는 첫 게임이 잘 풀리고 주위 사람들이 칭찬해주셔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연대 새내기 최승태였다.
지금은 두 선수가 고대와 연대로 진로가 갈리어 영원한 맞수가 되었지만 초등학교때 두 선수는 대방초등학교에서 같이 운동을 하였다. 초등학교 이후 김일두는 휘문중, 최승태는 양정중으로 진로를 정하면서 두 선수는 이별을 해야했다. 그리고 7년 뒤인 올해 드디어 다시 같은 팀에서 뛸 수 있게 되었다. 두 선수는 같은 팀에 뛰게 되어 기뻤는지 훈련에도 가장 성실히 임했고 영맨대표팀 훈련장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최승태가 신림고와의 연습경기 종료 직전에 무릎을 다쳐서
대표팀에 교체되는 불운을 안았다. 김일두는 “가기전에 승태하고 통화하면서
승태가 자기 몫까지 열심히 하고 와달라고 했어요. 승태하고 초등학교때 같이
뛴 이후 처음으로 다시 같이 뛰게 돼 기분이 좋았어요. 승태가 다치는 바람에
무산되어 안타까웠죠. 그래서 승태 몫까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라며 죽마고우를 위해 이번 대회에서 더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김일두가 최승태의 공백을 아쉬워했던 다른 이유는 대표팀의 전력 때문이었다.
최승태는 다치기 전까지 가장 열의있는 훈련자세와 본래 뛰어난 실력으로 코치진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어 영맨대회에서 큰 활약을 할 것으로 기대됐었다.
김일두는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한건데 승태도 있지만 방성윤과 이정석도 대표팀에 빠졌잖아요. 같이 있었다면 아마 9위 이상은 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어요.”라며 이들의 공백을 아쉬워했다. |
PROFILE 생년월일: 1982. 4. 23 | 포지션: C/PF | 신장: 198cm | 체중:
95kg | 출신교: 대방초등학교-휘문중-경복고-고대1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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