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약속
나는 1960년대 초, 넓은 호남평야를 끼고 있는 김제 만경에서 방앗간 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당시 우리 마을은 넓은 논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부자 동네로 소문났고, 그 중 방앗간을 하고 있는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부자였습니다.
자라면서 보고 들은 게 농사라 자연스럽게 농대에 진학해서 체계적으로 농업에 대해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부모님의 권유로 귀향하여 가업을 이으며 평생을 큰 어려움 없이 부유하게 살았다.
부모님께서 수십 년 간 쌓아놓으신 신용과 탄탄한 자본 그리고 대학에서 배운 첨단 농업기술과 경영기법을 적용한 ‘양곡도정사업’이 나날이 번창하여 가업을 인수한 지 10여 년 만에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성공하였고 사업은 탄탄대로를 달렸습니다.
그 어렵다던 IMF 고비도 무사히 넘기고 성공가도를 달리던 양곡도정 사업은 1999년, 믿었던 후배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나버렸습니다.
10년을 같이 일한 후배였는데 통장과 도장까지 맡기며 너무 믿었던 게 탈이었습니다.
회사 돈을 빼돌려 주식 투자를 해서 손실을 봤고, 그 손실을 메우려 회사를 담보로 엄청난 자금을 대출받은 결과 회사는 결국 부도가 났습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부도덕한 경제사범으로 몰려 2년 동안이나 옥고를 치러야했습니다. 감옥에 있던 처음 1년은 후배의 배신에 대한 분노, 직원 관리를 잘못한 나에 대한 원망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면서 난 그런 마음을 접고 모두를 용서하기로 하고 오직 나가서 회사를 다시 살리고 재기할 생각만 했습니다.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소한 후 감옥에서 구상한 사업을 실행에 옮겨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경제사범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나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정말 냉혹하였다. 한창 사업이 잘 나갈 때 간이며 쓸개까지 빼줄 듯 아첨하던 사람들, 친구들 모두 하나같이 나를 외면했다.
재기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나는 1년여를 폐인 아닌 폐인으로 지내면서 조울증이란 정신병까지 얻었다. 혼자 있으면 나락으로 떨어졌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몸무게는 20킬로가 줄어 맞는 옷이 없었다. 결국 믿었던 아내와 자식들마저 등을 돌렸고, 난 나게 마지막 남아 있는 생명의 끈마저 놓기로 마음먹고 밧줄을 넣은 등산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집에는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무능한 사람을 용서하지 마라!’라고 편지를 써 놓고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행선지도 모른 채 무조 건 처음 들어오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
한참을 간 다음 어느 산골 정류장에 내렸고 이름 모를 산을 무조건 올랐습니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 보니 산길을 조금 벗어난 곳에 적당한 크기의 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막상 내 스스로 내 삶의 끈을 놓으려고 하니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며 회한이 밀려왔습니다. 넋을 놓고 산 중턱에 앉아 한없이 가슴에서 피눈물이 쏟아지도록 울고 또 울었습니다. 소리도 쳐보고 땅에 뒹굴어도 보고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치면서 흘러간 시간들을 탓하였고 한없이 무기력해진 나를 원망했지만 결심을 돌이킬 순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끝나고 나는 나무에 올라 밧줄을 매었고 올가미에 목을 집어넣은 후 눈앞에 펼쳐진 산천을 한 바퀴 둘러봤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내 인생을 정리하려던 순간 내 시선 맞은편 산 중턱에 조그마한 산사가 눈에 들어왔고, 사업이 잘 안될 때 가끔씩 절을 찾아 마음에 위로를 받았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부처님이나 한번 뵈어야 겠다’라는 생각으로 일단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 비틀거리며 절을 향했습니다. 도착해보니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절이었고 법당에 들어가니 비구니 스님께서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한쪽 구석에서 힘들게 삼배를 하고 났더니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 쌓인 한이 솟구쳐 올라 “엉, 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불경을 외우던 스님이 내 울음소리에 불경을 멈추고 다가오셨습니다.
“거사님은 무슨 근심으로 그리 섧게 우시는지요? 나한테 그 근심 털어 놓아 보시지요.”
“예, 스님. 사실은...”
처음 본 스님에게 그동안 살아온 내 얘기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저 앞산에서 목을 매려다 이 절을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절이라도 드리면 극락을 갈까 싶어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에끼, 이 사람아! 목숨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거늘, 죽을 마음먹고 일하면 못할 일이 어디 있는가. 아직 앞길이 구만리 같은 사람이. 어디 그 사업구상, 내가 한번 들어 보세.”
“제 사업 구상이요? 그걸 스님이 들어서 뭐하시게요? 지금이 가을걷이 철이니까 벼를 사들여야 하구요, 창고도 빌려야 하고요, 그러자면 자금이...”
내 사업 구상을 묵묵히 다 듣고 난 스님이 내게 물었다.
“그럼 그 사업에 필요한 자금이 얼마면 되겠는가?”
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한 5천만 원 정도면 될 거 같습니다.”
내 대답을 듣고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던 스님이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 절에 불사를 하기 위해 모아 둔 돈 3천만 원이 있습니다. 좀 모자라지만 자져가서 사업을 일으키세요.”
“예? 스님께서 초면인 저를 어떻게 믿고 그 큰돈을...”
“얘기를 들어보니 그렇게 죽을 각오로 일한다면 반드시 사업을 일으킬 사람으로 보입니다. 절에서는 급하게 쓸 돈이 아니니까 3년 안에 갚겠다고 약속하세요. 이자는 필요 없고 원금만 갚으면 됩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더군다나 죽으러 왔다는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돈을 빌려주겠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난 거듭 스님의 진심을 확인하고 나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큰 절을 올리며 스님께 약속을 했다.
“스님, 반드시 성공해서 빌려준 원금은 꼭 갚겠습니다. 그리고 이자 대신 스님이 평생 드실 쌀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스님이 믿고 준 종자돈으로 난 양곡사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내게는 실패를 거울삼아 갖고 있던 노하우가 있었고, 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뛰었고, 결국 사업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3년 만에 자본원금을 회수할 수 있었고, 그 돈을 들고 스님을 찾아 갔습니다.
“스님,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흑.. 흑...”
“반드시 약속을 지킬 줄 알았어요. 앞으로는 과거를 거울삼아 너무 욕심 부리지 마시고 사업 잘 일으키세요.”
“스님, 이자는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이자라뇨? 원금만 갚으라고 했잖아요.”
“아닙니다. 스님이 아니라 부처님께 한 약속인데 반드시 지켜야지요.”
그 후 난 약속대로 스님에게 7년째 쌀을 시주를 하고 있다. 덧붙여, 스님이 계시던 사찰은 전라북도에 있는 한 사찰인데 스님이 사찰의 이름과 스님 성함을 밝히지 말라고 만류하셔서 방송을 해주신다면 비공개로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곽배현 /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 -
- 이 글은 여성시대 2014년 8월호에 실린 글을 옮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