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장에 맨손으로 도장 찍으셨던 선진님들의 자취를 찾아서 등반순례를 합니다.
매년 10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진행하는 성지등반순례가 10회를 맞이했습니다.
지금까지와 같이 순례에 함께하고 싶은 교당, 산악회, 개인 누구든 함께하면 됩니다. 가볍게 참여하면 됩니다.
올해는 영산성지 법인기도봉을 순례합니다.
오늘날 대종사님께서, 9인 선진님들께서 나를 보면 무어라고 하실까도 생각해 봅니다.
대종사님께서 혹시, 9인 선진님들께서 기쁨의 함박웃음을 터트리실까? 아니면 눈물지의실까?
법인광장에서 기동봉에서 선진님들이 걸의 섰던 그 길을 걸으며 오늘날 나를 찾는 시간의 순례가 이어집니다.
일시 :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27일)
모임장소 : 영산성지 대각전
시간 : 10시 30분~ 오후 4시까지
접수 : 교화훈련부 심현욱 교무(전화 063-850-3132)
문의 : 순례와 관련된 사항 서문 성 교무(011-9566-5889)
일정 : 10시 30분부터 영산 대각전에서 ‘옛 사진으로 보는 영산성지와 법인제자들’을 보고 점심 공양
점심공양 : 각자 준비, 간식도 각자 준비
회비 : 1000원(1회 때부터 1000원)
산행출발 : 12시 30분(산행 순례를 하며 기도봉에서 기도와 해설이 함께함)
산행하기 어려운 분들은 점심공양 후에 영산원 일원 순례하면 됩니다.
※ 접수 못하신 분들은 영산성지 대각전으로 오시면 됩니다.
칠산 유건 대호법(1880~1963)
커다란 심법의 소유자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칠산(七山) 유건(劉巾) 대호법(大護法)은 1880년 11월 11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유호일(劉浩一) 선생과 모친 이(李)씨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칠산 대호법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지혜와 용단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득도묘술(得道妙術)에만 발원하다가 결국 그것이 실없음을 깨닫고 32세 때에 그만 두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이루자 칠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보다 11세나 연상이요, 외숙임에도 불구하고 소태산 대종사의 덕화에 감동하고 대도회상 창립취지에 찬동하여 제자 될 것을 서원하고 생질(甥姪)되는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여 사제지의를 맺었다. 처음에는 생질 되는 소태산 대종사를 ‘스승님’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하기도 하였지만 차차 신성이 깊어감에 따라 추호의 계교심 없이 독실한 신성으로 받들었다.
칠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 앞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꼭 ‘종사님’이라 불렀다. 혹 주위 사람들이 묻기를 “생질을 스승님으로 모시기가 어색하지 않느냐?”고 하면 “육신은 생질이지만 법은 지존(至尊)의 스승님이시다.”고 하여 조그마한 일이라도 제자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칠산 대호법은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곤방(坤方)단원으로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기도 등 새 회상 창립에 공헌하였다. 법인성사를 이룬 후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건(巾), 법호는 칠산(七山)이며 본명은 성국(成國)이다.
칠산 대호법은 키가 크고 기상이 당당하며 특히 기력이 장하여 방언공사 때에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였고, 법인기도 때에도 가장 멀고 험한 기도봉을 다녔다.
원기 4년 (음) 3월 방언공사를 마친 후 준공기념비를 건립하려 했으나 돈이 없어 칠산 대호법의 발의로 자연석에 시멘트 판을 만들어 거기에다 소태산 대종사와 8인 단원의 이름과 공사의 시작과 마침을 새겼다. 새 회상 최초의 금석(金石) 기념물인 정관평(貞觀坪) 준공기념비 속칭 ‘방언조합 제명바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제명바위는 정관평 방언답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옥녀봉 동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가히 맨주먹으로 바다를 막아 그 거창한 사업을 이뤄놓은 조합원들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이 거창한 사업을 끝냈으니 그 기념으로 비석이나 하나 세워두자.”는 의견을 내었고, 조합원 전원이 일제히 찬성, 소태산 대종사께 진언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러나 비석을 세울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칠산 대호법이 “저 바위에 양회(洋灰, 시멘트)를 바르고 거기에 제명을 해두면 백년은 갈 것 아니냐?”는 의견에 모두 찬성하여 그래서 제명바위가 만들어졌다.
방언공사와 법인기도를 마친 후 칠산 대호법은 전무출신의 길에 나서지 않고 영광 사가(소태산 대종사 탄생가)에 계속 머물면서 가사에 주력하며 거진출진(居塵出塵)으로서 새 회상 발전에 조력하며 32년간을 지냈다.
원기 40년에 영산재방언공사가 시작되었다. 칠산 대호법은 재가교도로서 노동을 하겠다고 하므로 방언공사 책임자인 형산 김홍철이 말하였다.
“저는 팔산(김광선)님의 자손으로 어찌 칠산 선생님의 일하시는 것을 뵐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여기저기 다니시며 봐주시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칠산 대봉도가 이 말에 화를 내며 “어찌 나보고 빚을 지라 하느냐.” 하며 꼭 대중과 같이 일을 하고 교당에서는 식사도 안하였다.
원기 42년 78세시에는 후진들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총부 옆 중앙수양원으로 와 만년 수양에 힘쓰다가 원기 48년 2월 22일, 83세로 9인 선진 가운데 마지막으로 열반하였다.
칠산 대호법이 열반하자 대산 김대거 종법사는 칠산 대호법의 심법상 위대한 점을 말하였다.
첫째, 사가로 돌아간 후 아들이 병으로 누워있어 생활이 극도로 곤궁하였으나 땔나무하러 산에 다닐 때 남들은 다 교중(敎中) 산에서 나무를 베고 야단이 지마는 칠산 대호법은 손자를 데리고 교중 산을 넘어 10리, 20리 다니며 땔나무 한 점이요.
둘째, 9인 선진이었으나 후진에게도 법으로 대하여 조금도 9인 선진 가운데 한 분이라는 상(相)이 없었던 점이요.
셋째, 영산재방언공사 때 품팔이와 땅 떼기를 하므로 “일은 그만 두고 감독만 하시더라도 노임을 드리겠으니 그리하시라.”고 해도 “과거에 칠산이지, 지금도 칠산이냐!”고 하면서 일체를 마다하고 그대로 손자와 땅 떼기 한 점 등이다.
그 어른의 회상을 위하는 마음과 심법이 이와 같았다.
【새겨보는 문제】
㈎ 칠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보다 세나 연상이요, 외숙임에도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여 지의를 맺었다.
㈏ 소태산 대종사 앞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을 꿇고 앉았으며, 꼭 ‘님’이라 불렀다.
㈐ 칠산 대호법은 원기 년 2월 22일, 83세로 인 선진 가운데 마지막으로 열반하였다.
※ 칠산 유건 대호법 관련 법문
▲ 『대종경』 서품 5~15장. 『대종경선외록』 사제제우장 1절
팔산 김광선 대봉도(1879~1939)
소태산 대종사의 첫 번째 제자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이며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팔산(八山) 김광선(金光旋) 대봉도(大奉道)는 1879년 9월 6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김응오(金應五) 선생과 모친 강(姜)씨의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숙부 응칠(應七)에게 양자로 가서 양모인 조연풍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팔산 대봉도는 10세 때부터 한문사숙하고, 17세 때에는 길룡리 와탄천 건너 마촌(馬村) 산중에 들어가 천막을 치고 주문과 심축을 드리며 1년 동안 음양복술 공부를 하였다. 18세부터 가계를 돕기 위하여 농사도 짓고 혹은 상업도 경영하였으며, 31세부터 3년간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문중의 대동보를 꾸미었다.
팔산 대봉도는 세상모르고 입정삼매에 있는 소태산 대종사의 지극히 어렵고 고생스러운 생활을 보고 우연히 남다른 동정심이 발하여 가끔 찾아가 식사도 제공하는 등 물질적 살림을 보조하였다. 또한 공부하는 비용을 후원하여 고창 연화봉 등을 동반하며 공부하기도 하였다.
팔산 대봉도가 38세 되던 해에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어 그 동안 피골상접(皮骨相接)하던 몸이 다시 혈육 충만하고 용모의 모습이 일월(日月)같이 명랑 원만해 지는 것을 접하고 심중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리하여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12살 아래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가 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와 사제지의를 맺은 이후로는 수도생활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세상사를 청산하기 위하여 채무자에게 수금할 3천여 원의 채권증서를 스스로 모두 소각해 버린 후 빌려준 돈도 전부 탕감해 주어 놀라게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후 종종 허물없는 팔산 대봉도를 불러 ‘붓을 잡으라.’고 명하여 친히 문구(文句)와 시가(詩歌) 등을 불러주며 수필편집(受筆編集)을 하게 하였다. 그 책이 『법의대전(法義大全)』, 『백일소(白日蕭)』, 『심적편(心迹篇)』 등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후일 “그 책들로 말하면 일시적 발심조흥(發心助興)은 될지언정 사람들을 지도하는 정식 교과서는 못될 것”이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뜻에 따라 소각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태방(兌方)단원으로 임명되었고, 방언공사 당시에는 키가 크고 건강한 몸으로 8인 단원 중 으뜸가는 기력을 가졌고 가정 형편도 제일 넉넉한 편이어서 정신·육신·물질 3방면으로 솔선수범하였다. 어느 때에는 제방에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막으려고 애를 태우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인력으로 저 구멍을 막지 못한다면 내 육신으로 막겠노라.’하고 사지(死地)를 평지(平地)같이 뛰어들어 막았다.
팔산 대봉도는 방언공사를 마친 후 법인기도에 동참, 법인성사를 이루고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광선(光旋), 법호는 팔산(八山)이며 본명은 성섭(成燮)이다. 이어 원기 8년까지 방언답을 관리하며 영산성지의 일을 돌보면서 공사에 힘쓰던 중 당시 소태산 대종사와 백학명 선사의 뜻에 따라 정읍 내장사에 가서 잠시 머문 것이 본격적인 출가수도가 되었다.
원기 9년 46세에는 이리 송학리 부산 박원석의 집에서 사산 오창건·도산 이동안 등과 더불어 농사를 지었고, 익산총부 건설 당시 엿 만드는 일을 하였으며, 원기 10년에는 농업부의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원기 17년에는 마령교당 교무로 부임하여 창설초의 빈한한 교당이라 유지대책이 없었다. 팔산 대봉도는 부임하여 주경야독으로 교리훈련을 시키는 한편 친히 전답개간, 수박재배, 과수원 경영 등에 노력을 기울여 근무 3년 만에 논 4두락을 매입하여 마령교당의 토대를 세우는가 하면 선진농법을 지역사회에 전하였다.
팔산 대봉도는 원기 22년 4월, 59세시에 우연히 소화불량증으로 건강이 좋지 못하여 부득이 원평교당 교무를 사임하고 익산총부로 귀관하여 잠시 휴양하며 치료에 전력하였다. 그해 8월 교단 정기간행물인 『회보(會報)』 제37호에 ‘학이불능(學而不能)’이라는 글을 발표,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를 높이 찬양하였다.
학이불능의 내용은 팔산 대봉도가 옛날 증자의 문하생인 공명선의 배움에 대한 태도를 『소학(小學)』의 일절을 인용한 후 소태산 대종사의 위대한 점을 ① 순일하신 공심 ② 일관하신 성의 ③ 위대하신 포용력 등 3가지로 요약하였다.
원기 23년, 60세시에는 총부 순교무로 임명을 받아 각지를 순회하다 영산교당에 내려갔다. 그러나 7월부터 병이 재발하여 그곳 동지들과 가족들이 온갖 정성을 다 바쳐 노력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원기 24년 2월 21일, 영산교당에서 61세로 열반하였다. 중앙총부에서 팔산 대봉도의 열반 소식을 접한 소태산 대종사는 눈물을 보이며 비통해 하는 가운데 대각전에서 열반식을 거행케 한 후 법상에 올라 팔산 대봉도의 영혼천도를 위하여 ‘생사거래와 업보멸도’란 내용의 법문(『대종경』 천도품 28)을 설하였다.
팔산 대봉도 열반 후 원기 42년 4월, 주산 송도성에게 종사위, 구타원 이공주에게 대봉도위, 팔타원 황정신행에게 대호법위, 팔산 김광선에게 대봉도 위의 법훈을 증여하는 새 회상 최초 법훈증여식에서 팔산 대봉도를 대신하여 장남 형산 김홍철이 받았다.
이 법훈증여식에서 정산종사가 치사하시기를 “주산(主山) 구타원(九陀圓) 팔산(八山) 팔타원(八陀圓) 네 분 원훈에게 종사 대봉도 대호법 등 법훈위를 드리는 이 식전에 나는 그 분들이 초창기 우리 회상에 공헌한 공부 사업 두 방면의 위대한 법훈을 모든 대중과 더불어 높이 찬양하는 동시에, 재가출가의 남녀동지들이 여기에 마음을 다시 새로이 하여, 앞으로 우리 회상에 수많은 종사와 수많은 대봉도와 수많은 대호법이 끊임없이 배출되기를 빌고 바라노라.”고 하였다.
【새겨보는 문제】
㈎ 팔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의 구도당시 적으로 보조하고 고창 봉 등에 동반하여 공부하였다.
㈏ 팔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이루자 호호하던 12살 아래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 소태산 대종사가는 팔산 대봉도에게 문구와 시가 등을 불러주어 편집을 하게한 것이 『법의』, 『백일소』, 『심적편』 등이다.
※ 팔산 김광선 대봉도 관련 법문
김광선이 여쭙기를 “천지만물의 미생전(未生前)에는 무엇이 체(體)가 되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말하기 전 소식을 묵묵히 반조(返照)하여 보라.” 또 여쭙기를 “수행하는 데 견성이 무슨 필요가 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국문(國文)에 본문을 아는 것과 같나니라.” (『대종경』 성리품 20장)
김광선이 위연(謂然)히 찬탄하기를 “종문(宗門)에 모신 지 이십여 년에 대종사의 한 말씀 한 행동을 모두 우러러 흠모하여 본받아 행하고자 하되 그 만분의 일도 아직 감히 능하지 못하거니와, 그 가운데 가장 흠모하여 배우고자 하나 능하지 못함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순일무사하신 공심이요, 둘은 시종일관하신 성의요, 셋은 청탁병용(淸濁竝容) 하시는 포용이라. 대저, 대종사의 운심처사(運心處事) 하시는 것을 뵈오면 일언일동이 순연히 공(公)하나 뿐이시오, 사(私)라는 대상이 따로 있지 아니 하사, 오직 이 회상을 창건하시는 일 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말씀도 행동도 없으시나니, 이것이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요, 대종사의 사업하시는 것을 뵈오면 천품이 우월하시기도 하지마는 영광 길룡리에서 우리 구인을 지도하사 간석지를 개척하실 때에 보이시던 성의나 오랜 세월을 지낸 지금에 보이시는 성의가 전보다 오히려 더하실지언정 조금도 감소됨이 없으시나니, 이 또한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요, 대종사의 대중 거느리시는 것을 뵈오면 미운 짓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잘 무마하시고 애호하시며 항상 말씀하시기를 ‘좋은 사람이야 누가 잘못 보느냐. 미운사람을 잘 보는 것이 이른바 대자대비의 행이라.’하시니, 이 또한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라.” 하니라. (『대종경』 실시품 47장)
대종사 김성섭(金成燮, 광선)이 한문만 숭상하여 그에 구애됨을 알으시고 하루는 짐짓 물으시었다. “돌아오는 세상에 교법을 제정하려면 한문으로 경전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성섭이 의아하여 내심으로 생각하였다. ‘대종사께서는 본시 한학(漢學)을 충분히 하신 바 없으신데 어떻게 교법을 제정하시려는고.’ 성섭이 대답치 못함을 보시고 대종사 미소하시며 말씀하시었다. “내가 지금 한문으로 교법을 불러낼 것이니 그대는 즉시로 받아쓰라.” 대종사 즉석에서 수많은 한시(漢詩)와 한문(漢文)을 연속하여 불러 내리셨다. 성섭이 한참 동안 받아쓰다가 부르시는 글을 미처 다 수필(受筆)하지 못하고 황겁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도덕은 문자 여하에 매인 것이 아니니, 그대는 이제 한문에 얽매이는 생각을 놓아 버리라. 앞으로는 모든 경전을 일반 대중이 다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편찬해야 할 것이며 우리글이 세계의 명문이 되는 동시에 우리말로 편찬한 경전을 세계 사람들이 서로 번역하여 배우는 날이 멀지 아니하다. 그대는 다시 어려운 한문을 숭상하지 말라.” (『대종경선외록』 초도이적장 5절)
대종사 하루는 김성섭(金成燮: 八山)을 부르시어 말씀하시었다. “전북 정읍 땅에 경북 성주에서 온 송모라는 젊은이가 있거든 데리고 오라.” 팔산이 명을 받들어 찾아가던 즉시로 송도군(宋道君: 鼎山)을 만나 대종사의 말씀을 전하였다. 도군 또한 숙연임을 크게 깨달아 말하기를 “나 역시 큰 원을 품고 수 백리를 정처 없이 왔으나 항시 마음에 무엇이 걸린 것만 같아 주소로 걱정하던 중 오늘에 불러 주시니 이제 영겁대사를 해결할 날이 왔습니다.” 하며 멀리 사배를 올리고 즉시로 동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집 주인의 지극한 만류로 일시에 정의를 떼지 못하여 팔산과는 후약을 두고 갈리었다. 팔산이 돌아와 대종사께 그 사유를 고하니 대종사 미리 짐작하신 바 있으신듯 하였다. 2, 3개월이 지나매 친히 팔산을 대동하시고 그 곳을 찾아가 일숙하신 후 사제 겸 부자의 의를 맺으시고 말씀하시었다. “이 일이 우연한 일이랴. 숙겁 다생에 기약한바 컸었느니라.” 대종사 정산을 영광으로 데리고 오시어 중앙 위에 오르게 하시고 수기를 주시어 제반 사무를 대행케 하시므로 8위와 일반 대중은 19세의 연소한 분이나 장형같이 숭배하며 받들었다. (『대종경선외록』 자초지종장 1절)
대종사 초창 당시에 김성섭을 데리시고 노루목에서 같이 밀을 베시다가 팔산에게 낫질을 멈추라 하시고 글 한귀를 읊어 주시니 별안간 공기가 맑아지고 사방에 바람이 자면서 천지에 풍악이 진동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호남공중하처운(湖南空中何處云) 천하강산제일루(天下江山第一樓)’ (『대종경선외록』 자초지종장 3절)
▲ 『대종경』 서품 5~15장, 인도품 54장, 천도품 28장. 『대종경선외록』 사제제우장 1절, 5절, 6절, 9절, 인연과보장 1절. 『정산종사법어』 경륜편 20장
김광선의 열반
형산 김홍철이 아버지 팔산 김광선의 열반에 대한 이야기이다.
“원기 24년 1월 3일, 팔산 아버님의 열반은 내게 큰 슬픔이었다. 더 계시면서 지도해 주시고 깨우쳐 주셔야 할 아버님, 유난히도 근실 강직하셨고 용단력이 뛰어나시어 가시는 곳마다 이루어 놓으셨던 교단의 선진이시기도 하다. 대종사님과는 집안간의 두터운 인연으로 구도시절부터 초기교단 첫 제자가 되어 법인성사의 일원이 되셨고, 방언역사의 주역으로서 모든 것 다 바쳐 후세 교단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셨다.
아버님은 출가하시어 총부에서 일하시다가 마령교당 교무로 봉직, 이곳에서 전답개간과 수박재배 과원경영으로 전답 5두락을 매입하여 유지토대를 세워놓으셨다. 그 후 원평교당 교무로 계시면서 중환이 나셔 길룡리 본가로 오셨다.
거처를 사가로 옮겨 사가에서 요양을 하던 중 병환이 중해지니 열반 일주일 전에 다시 사가를 떠나며 자녀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우리 집에 가서 죽을 난다. 우리 집에 데려다 주라.’
자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영산(영산원)으로 가면서 말하였다.
‘나는 영산에 가서 물도 마시지 않고 죽을 난다.’
열반 열흘 전 사가에서 공가로 병석을 옮기신 후 ‘내 어찌 자리에 누워 하는 일 없이 공중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 하시고는 그때부터 곡기를 끊으시고 냉수만 마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매일 목욕을 하시며 심신을 청결하게 하였다.
열반 전날인 1월 2일 오전, 여전히 목욕하시고 상쾌한 기분으로 새 옷을 갈아입으신 후 정산종사님을 부르시고 가족들을 밖으로 물리치신 후 모든 사무와 유물 등을 인계하시며 굳게 손을 잡으셨다. 그리고 그동안 동지들로부터 약값에 보태라고 보내준 돈 20원을 요 밑에서 꺼내 놓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철없는 것들(가족을 일컬음)이라 아닌 마음 일어낼까 봐 밖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라고 하시며 전액을 드렸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형님, 이 돈 20원은 내가 병석에 누운 동안 위문 오는 동지들에게 받은 돈인데 쓰지 않고 모은 뜻은 내가 다행히 병이 회복하여 회무에 활동하게 되면 어떤 교당이든지 유지가 곤란한 교당에 보조할 계획이었더니 아마도 이제는 내가 세상에 더 있지 못하고 떠나게 될 것 같기로 형님에게 조용히 부탁하오니 아무데라도 회중사 긴요한 곳에 사용하여 주십시오.’
단돈 1원이라도 사가에 흐르게 할 수 없다는 철두철미한 공심의 표본이셨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모든 처리를 하신 후 나의 가족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언을 하셨다.
‘이 회상은 영겁을 두고 다시 만날 수 없는 대도회상이니 내가 대종사님을 받들어 모신 것을 명심하여 자손 대대로 전무출신하여 꽃다운 가훈을 천추에 전하여라.’
이 말씀을 최후로 남기시고 고요히 눈을 감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