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봉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桂棠山)에 있는 절로써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鑒禪師)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산수의 수려함을 보고 창건하였다. 철감선사의 법력과 덕망이 널리 퍼지자 왕이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쌍봉이었으므로 사찰명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한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선문9산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창건 이후 퇴락한 절을 1081년(문종 35)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하였고, 공민왕 때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절의 땅을 면세해 주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28년(인조 6)에 중건하였고, 1667년(현종 8)과 1724년(경종 4)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1962년 해체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년(숙종 16)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경종 4년)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각은 원래 대웅전 건물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한다. 총 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인 이 대웅전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우리 나라에서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4년 4월 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진되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인 극락전과 명부전·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있다. 라고 백과사전에 쓰여 있다.
[쌍봉사 경내 원형 연못안에 자그만 동산도...]
[쌍봉사 해탈문(雙峰寺 解脫門)...]
1990년에 설립한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거물에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내부에 살대가 있으나 존상을 봉안하지는 않았다. 해탈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돌담을 쌓아 사찰과 세속의 세계를 구획하였다. 해탈은 번뇌에 묶인 것에서 풀려 미혹의 고통에서 풀려나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또한,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 등 3종의 선정은 열반에 들어가는 문으로 해탈문이라고 한다.
[쌍봉사 범종각...]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으로 기둥을 세워 겹처마에 사모지붕을 올린 익공식(翼工式) 건물이다. 천정은 서까래를 노츨시킨 연등구조이며 중앙에 성덕대왕신종을 본떠 주조된 범종이 걸려 있다.
[쌍봉사 대웅전(雙峰寺 大雄殿)...]
쌍봉사에 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법당. 보물 제163호. 평면이 사각형인 3층 전각으로서, 목조탑파 형식을 유지한 희귀한 건축이다. 현재 제일 위의 3층 지붕은 팔작지붕이나, 1962년에 실시된 해체ㆍ복원공사에서, 그 원래의 형태는 보통 탑파건축과 같은 사모지붕이었음이 판명되었다. 각층마다 옥신은 4면이 한 칸 벽면을 이루고 있으며, 규모는 1층 1변이 4m, 2층은 3.3m, 3층은 2.6m이며, 2층과 3층에서는 옥신 높이가 극도로 줄어들어 벽체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위로 처마 밑에 받친 공포(包)들은 2ㆍ3층은 2출목(二出目), 초층은 3출목(三出目)이며, 공간포(空間包)는 초층과 2층이 2개씩, 3층은 1개를 배치하였다.
내부 초층에는 마루를 깔고 불단(佛壇)을 안치하였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그러나 2ㆍ3층은 통층(通層)으로 되어, 그 중심에 심주(心柱) 하나가 있는데, 각층 지붕의 춘설(春舌)들은 모두 그 뒤끝이 이 심주에 연결되어 있다. 62년 복원공사 당시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1724년(경종 4)에 삼중창(三重創)하였을 때의 상량문이다. 이중창(二重創)에서 삼중창에 이르는 기간은 30여 년에 불과하고, 삼중창은 부분적인 중수공사(重修工事)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현재의 건물은 1690년(숙종 16) 이중창 때에 세운 원형을 거의 그대로 남긴 것으로 믿어진다.
[쌍봉사 괘불지주(掛佛支株)...]
대웅전 앞 정원에 놓여 있는 괘불대 지주는 양쪽에 2개씩 1조를 이루고 있지만 원래의 자리에서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상부는 각을 없애고 호형으로 다듬어 모나지 않게 마무리하였다. 상부와 하부의 두께가 거의 일정하며 단면의 형태는 세장방형이다. 각각 상하에 구멍이 뚫려 있고 문양이나 명문은 없으며 면이 다소 거친 편이다. 조성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되며, 쌍봉사에도 괘불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쌍봉사 요사채...]
[대웅전 왼편 대나무숲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철감선사탑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길...]
[쌍봉사 철감선사탑(澈監禪師塔) ...]
통일신라시대 철감선사의 화강석 묘탑(墓塔). 국보 제57호. 높이 1.4m. 8각 원당형(圓堂形)에 속하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중에서 조식이 화려한 걸작품이다. 상하 각부가 평면 8각형을 이루는 것은 통식(通式)에 속하나, 2단을 이룬 하대석에는 하단에 구름무늬, 상단에 사자를 조각하고, 상대석에는 앙련(仰蓮) 위에 8각 대석이 있어, 2중으로 된 안상(眼象) 안에 가릉빈가(迦陵頻伽) 1구씩이 새겨져 있으며, 탑신을 받는 부분에는 연꽃무늬가 둘려 있다. 탑신은 각 우각(隅角)에 원주형(圓柱形)을 세우고, 각면에는 전후에 문비형(門扉形), 그 좌우에 신장상(神將像), 남은 2면에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었다.
옥개부에는 연목(椽木)과 기왓골이 모각(模刻)되고, 옥리(屋裏)에는 각 면에 1구씩의 비천상이 있다. 조루(彫鏤)가 매우 정교하고, 탑신 원주에서 엔타시스의 수법을 볼 수 있으며, 옥개 추녀 끝 막새에는 연꽃무늬까지 새겨져 있다. 능숙한 수법은 당시 조각의 대표가 될 만하며, 목조 가구(架構)의 충실한 모각은 당시의 목조건축 양식을 추측하게 한다. 868년(경문왕 8) 입적한 철감을 위하여 탑비와 함께 세워졌으며,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채 방치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였다. 건립은 철감이 입적한 후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쌍봉사 철감선사탑 - 국보제 57호...]
[쌍봉사 철감선사탑...]
[쌍봉사 철감선사탑...]
[쌍봉사 철감선사탑비(澈監禪師塔碑)...]
이 비는 통일신라시대 철감선사의 화강석 탑비. 보물 제170호. 귀부(龜趺) 비좌(碑坐) 둘레에 육각(肉刻)된 구름무늬나 복련(覆蓮)무늬의 조형형식은 연곡사 동부도비(東浮屠碑)와 같은 부류이다. 함주귀두(含珠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된 것이나 사실적이며, 귀배(龜背)의 중곽갑(重廓甲)무늬와 귀갑(龜甲)의 선곽(線廓)은 매우 선명하고 정연하며, 귀두와 4족(四足)과의 비례가 알맞다. 특히 앞쪽 오른발의 삼조(三瓜)를 들어올린 동적인 표현은 천편일률적인 형식을 벗어난 새로운 조형이다.
이수(首)의 조형도 반결룡형(蟠結龍形)이 생략된 구름무늬만의 연곡사 동부도비와 같은 형식이다. 탑비에 따르면, 철감선사는 한주(漢州) 사람으로 호는 쌍봉(雙峰), 속성은 박(朴)이며, 798년(원성왕 19)에 출생하였고, 18세에 중이 되어 귀신사(鬼神寺)에서 수학하였다. 825년(헌덕왕 17)에 당나라에 들어가 남천보원(南泉普願)의 법을 전승하고, 847년(문성왕 9)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시켰다. 868년(경문왕 8) 71세로 입적하였으며, 철감은 시호, 탑명(塔名)은 징소(澄昭)라 하였다.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좌측면...]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우측면...]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후면...]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좌측면...]
[쌍봉사 철감선사탑비와 철감선사탑...]
[쌍봉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모든 중생을 구원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원을 세운 지장보살이 계신 곳이다. 쌍봉사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죽은 이를 심판하는 시관, 판관, 귀왕, 동자, 사자 등 모두 21구의 목조상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높이104cm)의 머리는 보살의 특징대로 삭발한 민머리이며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데, 법의나 옷주름 등은 극락전의 아미타여래좌상이나 대웅전의 석가여래좌상과 비슷하다. 이런 양식은 같은 조각가나 그 일파가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지장보살 왼쪽에 서 있는 도명존자(높이146cm)는 민머리에 합장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무독귀왕(높이148cm)은 보관을 쓰고 있다.
[쌍봉사 지장전내 목조 지장보살상...]
이 지장삼존상 좌우에는 조선시대 시왕상 중에서 가장 빼어난 조각 기법의 국보급 시왕상(높이156cm)이 의장에 앉아 있다. 시왕상은 모두 머리에 관을 쓰고 있으며 옷은 융복과 곤룡포 차림이 섞여 있다. 의자 양쪽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생동감이 넘친다. 시왕들 사이에는 시왕을 보좌하는 판관, 귀왕, 동자, 사자 등 6구(높이100~120cm)가 서 있는데, 조상기에는 각 2구씩 8구가 기록되어 있어 2구가 분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목조상들의 채색은 아직도 현대기법으로 재현할 수 없어 퇴색한 예전 빛깔 그대로이다. 한편 각 상들의 명칭과 수량, 조성시기와 동기 조성자 등이 기록되어 있는 조상기는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쌍봉사 지장전 내부...]
[쌍봉사 극락전(極樂殿)...]
쌍봉사 극락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과히 크지 않은 다포계 건물이다. 높직하게 잡석으로 쌓아올린 기단위에 덤벙주초와 배흘림의 원형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창방과 평방을 돌렸다. 공포의 구성은 외2출목 내3출목이며 공간포는 주칸마다 1좌씩 배치하였다. 천장은 우물천정이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창문은 2분합으로 띠살문이다. 처마는 전면에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이며 양편에 방풍판을 달았다.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대(861~875) 철감선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1081년(고려문종35) 혜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쌍봉사 극락전내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극락전에는 아미타여래좌상(높이165cm)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있던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도난당해 최근에 다시 조성했다. 편안하고 든든한 느낌을 주는 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조상 그대로이다. 상호는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선 등 대웅전 석가여래좌성과 닮아 있다. 다만 등이 약간 굽은 석가여래좌상에 비해 허리를 바로잡아 늘씬한 모습을 볼 때 조성시기가 좀 뒤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손 모양(수인)은 오른손을 올리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중품하생인을 취하고 있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흘러내린 풍성한 법의는 원만한 얼굴선, 크고 두툼한 귀,
넓은 어깨 등과 잘 어울리어 아미타불 앞에 앉으면 누구라도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한다. 극락전도 대웅전 화재로 피해를 입을 뻔했으나 돌계단 옆의 수령이 수백 년 된 단풍나무가 불길을 막아 지켜냈다. 뜨거운 불길에 고목 한 가지를 잃은 단풍나무지만 삼라만상에 불성이 깃들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미타여래좌상은 조각양식 등을 참고해 볼 때 대웅전 석가여래좌상을 조각한 사람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좌의 묵서명과 발원문을 통해 조성 시기와 동기, 참여자 등을 알 수 있어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쌍봉사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법당 내부에는 중앙의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아난ㆍ가섭존자입상을 포함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었다. 또한 판관상 2구, 인왕상 2구, 동자상 4구가 목조로 조성되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과 불상 모두 최근에 같이 조성된 것이다. 쌍봉사 나한전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본존인 석가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상호는 네모난 편으로 머리에는 넓적한 육계와 반월형 계주가 솟아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승각기 매듭이 가슴 윗부분에 처리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대웅전의 석가여래좌상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요사채의 담이 그런데로 정감이...]
[꾸밈없는 돌담과 쪽문...]
[또다른 세상 속세의 가옥같은 기분이...]
[돌담의 모양이 꼭 제주도의 돌담을 닮아...]
[쌍봉사 호성전(護聖殿)...]
[쌍봉사 호성전...]
'丁' 자형을 이루고 있는 호성전은 2000년에 옛 모습을 고증하여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현재는 대웅전 보수로 인해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삼존상을 옮겨 봉안하고 있다.
[쌍봉사 호성전...]
[쌍봉사 작은 당간지주...]
[쌍봉사 부도군...]
이날 불에탄 삼층목탑이 1996년에 다시태어나 20년만에 또다시 보수를 하는중이라 철골로 쌓여있어 전체적으로의 아름다움은 느끼질 못했는데 사진들로 많이 봐왔고 또 형태는 아슬한 것이 꼭 구례군 토지면 산꼭데기에 숨어있는 문수사 삼층목탑, 아니 대웅전과 비슷하게 생겼다. 층이 높으면 어떻고 길이가 길면 어떠하리 하늘에대한 영광을 돌리고 땅에대한 신의를 가지며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갖는다면 무엇이 그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