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는 말
30년대 식민지 한국의 대중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통속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 작가이다. 그간 그의 작품은 일방적 시각에서 재단되어 작품성이 운위되어 왔고 따라서 논의의 장에 들어서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학이 현실의 반영물이고 사회와의 상관물일 수 밖에 없다는 견지에서 보면 비록 통속성을 표방한 대중취향의 소설이라 하더라도 그 나름의 문학적 공과는 냉정히 검증 받아야 할 것으로 본다. (방인근소설에 나타난 작가적 자아의 실상) 윤정헌의 논문 서론 부분에 이렇게 방인근의 작품을 평하고 있다.
또한 2005년 5월 10일자 중도일보에 안영진님은 많은 작품을 쓰고 거금 2만원(당시 쌀 한가마에 2원 이었음)을 투자하여 조선문단을 간행하고 문학진흥과 신인등용 및 육성에 앞장섰던 방인근 시대의 민족정서와 문학에 공헌한 인물인데도 그의 고향에 목비하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라고 말하였다.
2004. 7. 26일자 무한 정보신문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광수와 함께 조선문단을 이끈 작가이며 30년대 식민지 한국의 대중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통속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보였다라고 평하고 있다
한편 동국대 대학원 김현진님의 논문에 통속소설과 대중소설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방인근의 소설은 시대적으로 문학인들이 분열되어 있으며 그들의 고민과 불행을 대중적 소설로 승화 시키려하였는데 이는 신문의 연재를 통해 더욱 더 큰 효과를 거두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2. 방인근의 삶
1899년 12월 29일(음력)에 예산의 금오산 밑에서 태어났다 방인근의 그의 자서전 <황혼을 가는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호적에는 아산군 온양읍 읍내리 103-8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 예산의 향토사학자 성부제님은 그가 사직동에서 태어났으며 문예회관 근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자료를 구할 수 없다 이는 호적이 1924년도에 정리된 관계로 방인근의 아버지 방한태의 기록을 예산에서는 찾을 수 가 없었다.
방인근의 아버지는 당시 미남호걸에 유명한 풍객쟁이로 특히 퉁소의 명수였는데 여성편력이 심해 낙향한 세도양반 김판서의 애첩 녹화와의 밀애로 쫓기고 대신 잡혀간 어머니와 젖먹이인 방인근과 함께 옥중생활을 하게 되면서 방인근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역정을 격게된다. 방인근이 6살 되던 해 온양으로 이사하여 포목잡화상을 하면서 방인근의 상당한 재력을 지니게 되는데 아버지의 여성편력은 계속되고 이를 지켜보는 방인근의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온양보통학교와 공주영명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을 졸업한 방인근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아오야마학원 중학부 5학년에 편입한후 여관집딸 그녀의 친구 하숙집 젊은 여주인 급우의 누이등과 염문을 뿌리며 아버지의 여성편력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동경제대를 낙방하고 귀국한 그는 많은 신여성들과 선을 보게 되고 그중 배재학당 은사의 동생과 약혼하였지만. 3.1운동직후 재일유학생 비밀문예사건으로 일본으로 도피하여 일본 유학 때 친구인 전영택의 누이동생 전유덕을 만나 파혼하고 그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방인근의 여성편력은 끝나지 않았으며 전유덕이 지병으로 죽고 윤봉환과 재혼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3. 그의 문학
일본 아오야마 중학부에서 창조에 투고하는 등 습작 활동을 시작하여 3.1운동의 발발로 귀국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초기 시를 썼던 그는 신생명 8월호에(1923) <하늘과 바다>로 등단하였다
가을의 선물
방인근
여름에 이불을 아니 덮던 습관으로 요새 밤에도
이불을 차버리고 잤더니 뱃병이 났습니다
가을은 이렇게 벌써 서늘한 바람을 가지고 왔습니다
가을은 붉은 감, 붉은 대추, 모든 알맹이든 곡식을
고무풍선 장사처럼 주렁주렁 달고 왔습니다.
가을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부모와 같습니다
가을은 산에 오르기가 좋습니다
단풍이 (봉사)드린 붉은 다섯 손가락을 짝! 벌리고 우리를 부릅니다.
그리고 단풍은 바위 등뒤에서 갸웃이 내다보고 방끗 웃습니다
가을은 하늘이 맑고 높으며 달이 몹시도 밝은데
모든 어여쁜 벌레들이 이슬의 은방울 맺힌 풀숲에
앉아 음악회를 합니다
우리도 같이하려고 소리를 내며 벌레들은 우리의 노래를 들으려고 뚝 ! 그칩니다.
그의 작품이다 20세 초반의 작품이라서 작품의 완성도는 다소 낮은데 비해 그의 문학적 감수성은 실로 대단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는 산문성이 강해 결국 소설을 쓰게 되는데
그의 소설은 100여 편에 이르지만 대표적인 작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작품명
발표지
발표년도
비고
작품명
발표지
발표년도
비고
눈오는밤
창조
20.5
두 처녀
신여성
31.10
분투
신생명1
23.7
괴청년
동아일보
31.10-12
어머니
조선문단1
24.10
울며 세배받는이
신생36
31.11
비 오는 날
조선문단2
24.11
눈물 지팡이
신동아3
32.1
살인
조선문다3-6
24.12-25.3
바다를 건너서
신생39
32.3
금붕어
시대일보
25.1
모던 뽀이 모던걸
신생40
32.5
죽지못하는 사람들
조선문단7
25.4
사랑
신여성
32.10
자동차 운전수
조선문단9
25.6
마도의 향불
동아일보
32.11-33.6
마지막편지
조선문단11
25.9
평화로운 봄
신생51
33.3
외로움
조선문단14
26.3
방랑의 가인
매일신보
33.6-11
노총각
조선문단15
26.4
박철
조선문단21-24
35.2-7
최박사
신민13
26.5
노총각
삼천리60
35.3
재수록
강신애
조선문단17
26.6
홍운백운
매일신보
35.7-12
자기를 찾는 자
동광4
26.8
비련
중앙34-35
36.8-9
미완
남자의 마음
신민19
26.11
쌍홍무
조선일보
36.9-37.4
반동
신민21
27.1
춘몽
조광11-14
36.9-12
순간의 낙원
동광
27.1
황금
농민생활
37.1
백의인 농민
청년67
27.4
그 후의 방랑의 가인
야담22
37.10
살인 방화
신민24
27.4
선혈
조광26-29
37.12-39.3
어떤 여자의 편지
신민29
27.9
새벽길
매일신보
38.6-10
금비녀
청년74
27.11
슬픈 해결
여성32-36
38.11-39.3
목사딸 연애
동아일보
28.1-2
영관
학우구락부1
39.1
처녀의 머리채
여시1
28.6
모녀
야담40
39.4
행진곡
신생17-20
30.2-5
거미
야담41
39.5
낙조
조선일보
30.9-10
바다의 여인
실환
39.6
또한 대중소설 뿐 아니라 공상과학소설도 썼는데 1933년 과학조선에 연재한 “여신”이라는 작품도 있다. 뿐만 아니라 평론 극작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여 그의 문학에 대한 천재성을 엿볼 수 있었다.
4. 문학사에 공헌
유학을 마치고 온 춘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출동생과 재산을 분해하고 상속한 후 상경하여 처남 전영택과 우리 나라 최초의 신인추천 문예지 조선문단을 창간한다
1924년 창간된 조선 문단은 종합문예월간지로 (李光洙 주재) 이 시기 문단을 풍미하였던 계급주의적 프로레타리아 문학운동에 대항 민족주의 문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수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방인근(方仁根)이 아버지의 유산인 2만 원을 투자하여 창간한 순 문예지이다. 제1~4호는 이광수(李光洙) 가 주재하였고, 이후 편집 방침을 두고 춘원과 마찰을 빚은 방인근은 제5~18호는 방인근이 직접 주재하였으며, 이후 재정난으로 휴간했다가 1927년 1월 속간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다시 휴간했다가 1935년 2월 통권 21호를 속간 1호로 발간하여 26호까지 펴내고 종간하였다.
이 잡지의 추천제에 의하여 작가가 된 사람은 최학송·채만식·한병도·박화성·유도순·이은상·임영빈·송순일 등이다. 이광수·방인근·염상섭·김억·주요한·김동인·전영택·현진건·박종화· 나도향·이상화·김소월·김동인·양주동·이은상·노자영·진우촌·양백화· 조운·이일·김여수 등의 당대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김동인의 <감자>, 전영택의 <화수분>, 현진건의 <B사감과러브레터>, 최학송의 <탈출기>, 나도향의 <물레방아>, 계용묵의 <백치아다다>등 한국 신문학 초창기의 문제작들을 게재하는 등 문학사에 끼친 공로가 컸다. 그밖에도 작시법 ·소설작법 ·문학강화 등에 관한 계몽적 논문이 실려 있어 한국문학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방인근를 춘해(방인근) 그의 처를 춘강(전유덕)이라 호를 정해주고 자신의 호를 춘원리라 부를 정도로 친했던 이광수와의 갈등 뿐 아니라 문예지의 적자 때문에 힘든 시기를 보내기 시작하던 그는 1927년 숭덕중학교 교사를 지냈으나 곧 1929년 기독교신보사에 입사하였다가 다시 문예지를 창간하게 된다
1929년 《문예공론》 월간. 국판 162면. 발행인 방인근(方仁根). 주간 양주동(梁柱東). 창간호부터 일제의 검열로 고초를 겪었다. 그런 중에도 염상섭(廉想涉)의 평론 <문학상의 집단의식과 개인의식>, 심훈(沈熏)의 <문예작품의 영화화 문제>, 정인보(鄭寅普)·이은상(李殷相)의 시조, 김억(金億)·박종화(朴鍾和)·이장희(李章熙)의 시 등이 실렸고, 양주동의 <조선의맥락>이 실릴 수 있었던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29년 6월 10일에 간행된 2호에는 김기진(金基鎭)·한설야(韓雪野)·양주동·문일평(文一平)의 평론과 김동인(金東仁)의 장편 <태평행(太平行)> 제1회, 한설야·이태준(李泰俊)의 소설과 많은 신인들의 추천시·입선시가 특집으로 꾸며졌다. 같은 해 7월에 간행된 3호에는 현진건(玄鎭健)·전영택(田榮澤)의 소설, 방인근의 희곡, 김소월의 시 <단장(斷章)> 등이 특기할 만한 내용이었다. 같은 해 7월에 간행된 3호로 종간되었다.
문예출판인으로 성공하지 못한 그는 문예지의 편집가로 활동하게 된다.
《신생》 《여시(如是)》의 편집을 거쳐 1935년 《시조(時兆)》 편집국장을 지내다 동아일보에 <마도의 향불>을 연재하면서 작가로의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하다가 1943년 방송국 촉탁이 되었다.
해방 후 영화사업에도 관여하여 1954년 춘해 프로덕션의 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 때 본인이 직접 각본을 쓰기도 하였는데 1959년 젊은 아내(감독 이강천, 제작사 협립영화사, 출연 노경희 최남현 최지희)라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그의 원작이 영화로 제작된 것을 보면 1958년 회심(감독 신경균, 각색 임희재, 제작사 동보영화사, 출연 김동원 양미희 박암 도금봉 이민자 김승호 최삼 복혜숙 고선애 장훈), 그이 대표작 마도의 향불(감독 신경균, 각색 권철휘, 제작사 삼우영화사, 출연 최무룡 주증녀 석금성 김을백 김승호 안나영 강계식 이병희 김희갑 장훈)과 그후 2967년 새벽길(감독 이혁수, 각보 나재우 이두형, 제작자 합동영화주식회사, 출연 신성일 고은아 남정임 전양자)등이 있다.
또한 방인근은 당시 브르조아문학이다 순수문학이다 참여문학이다 등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예술가들의 분열을 보면서 통합된 문학 단체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예로 문예가 협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문예가 협회의 준비위원으로 선출된 사람으로는 방인근,김동인,김상용,염상섭,현진건,김동환,유진오,박팔양,이헌구,김광섭,이효석,이석훈,이학인,오희병,김남천,정지용,이하윤,김기림이다.
인간관계를 가장 중요시 여기고 있었던 방인근은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교류를 갖고 있었는데 정동예배당 청년회 조직에서도 보면 김활란, 모윤숙,김일엽, 최산월, 김현순, 안기영 등 당대의 엘리트들과 모두 교류를 갖게된다.
그러한 생활은 일제의 강압과 함께 분열되어 있는 문학의 한쪽에 발 딛고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문학인들이 혐오하고 있는 대중성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통속소설의 길로 접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후에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 보려는 생활의 방편이 되면서 더욱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한달에 한편의 소설을 써내는 작가의 가벼움에 그는 얼마나 스스로를 질책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가산을 이복동생에게 빼앗기고 문예지 발행으로 가산을 탕진한 방인근은 이광수의 집에서 세들어 살다가 처남이 살던 대구로 이사를 가고 다시 상경하여 돈암동 종점에서 여관업을 하게 되었지만 곤궁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는 1963년 그의 자서전 <황혼을 가는길>에서 밝혔듯이 40번 이사를 다닐 정도의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자신의 부와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문학과 예술의 대중성에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면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였다.
5. 나가는 말
한 사람이 문학과 예술에 일생을 바쳤다면 그의 사적인 생활과 작품에 대한 예술성을 논하기 전에 그 열정을 평가해야 한다. 춘해 방인근 그가 만일 자신의 부를 지키려고 했다면 방탕한 생활이 그를 말년에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겠는가 ? 아니다 그는 일생을 문학과 예술에 바쳤으면 그 끓어 오르는 열정을 시대적 억압으로 막혀 통제할 수 없을 때, 돌파구를 찾았을 것이고 이것이 여성편력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많은 사람들이 방인근이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고 문학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와의 인연으로 등장한 많은 작가들을 보라 면면히 그 시대의 금자탑을 쌓았던 사람들이다. 그가 죽고 그의 작품이 통속적이라고 해서 그의 평가를 간과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인근에 대한 평가를 예산 사람들이 찾아 주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많은 평론가들이 춘해에 대한 작품과 문학사에 끼친 영향을 재평가하고 그의 업적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지역 문인들도 모두 한 마음으로 그들을 도와 새롭게 태어나는 춘해 방인근을 만들어야 한다. 방인근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자료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더욱 많은 자료를 찾아 춘해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계승해야 나아가야겠다.
첫댓글 예산에 훌륭하신 분들이 많네요...좋은 글,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