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원주목사가 넘나들던 [어루니]라는 고갯길이 있다. 지금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안창리 월운동이다. 이 고갯마루에는 [욕바위]라는 널펀한 바위가 있는데 원님이 넘나들 때 백성이 이 바위에 서서 그 원님의 잘못을 규탄하고 백성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곳이다. 언론이 없던 옛날에는 이렇게 민성을 겸허하게 듣는 현장이 민속적으로 보장돼 있었던 것 같다. 한국 언론 사상에 특기할 만한 이 소중한 민족의 현장을 [언론리]라 불러 내렸으며, 그것이 [어루니]가 된 것까지는 좋은데, 고유지명을 한문으로 바꾸는 사대풍조에 희생되어 어루니가 월운리가 되고 만 것이다.
그 지명에 명맥을 이어 내린 소중한 언론의 민속이 여지없이 파괴되어 달, 구름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처럼 지명은 그것이 지명으로 끝나지 않고 그 하나 하나가 문화재인 것이다. 그 지명에는 역사와 민속과 고사, 그리고 지형이며 지표며 어떤 자연 현상, 인간 현상까지도 그 이름 속에 숨쉬고 있는데, 역사가 흐르는 동안 무척 들 파괴해 왔으며, 지금도 행정 구역을 합치고 떼고 할 때마다 지명을 별반 죄책감 없이 파괴하고 있다.
그런 기구한 운명을 지닌 지명으로 서울 영등포에 있는 문래동을 들 수 있다. 본 지명은 도림리였던 것이 일제 때 방직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하여 사옥정이라 바꾸더니 왜색 이름을 없앤다하여 역시 방직업과 연관시켜 실을 자아내는 [물레]동으로 고치고 있다. 한글 이름으로 두어 두었으면 될 것을 굳이 한자식 문래동으로 바꾼 바람에 물레와 동떨어진 연고로 국적 없는 이상한 지명이 되고 만 것이다.
건설부에서는 같은 지역인데 다르게 표기되거나 다르게 부르는 지명을 한 지명으로 표기되거나 다르게 부르는 지명을 한 지명으로 통일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한다. 물론 통일은 해야 한다. 한데 그 첫 작업 해 놓은 걸 보니 시대에 역행하는 지명을 선택하고 있다. 한문에 침식, 오염된 순수한 우리말, 우리 뜻 지명을 씻고 닦아 되찾아야만 했어야 하는데도 탑들이를 탑평으로, 된골을 직동으로, 가래올을 추동으로 하는 등 오히려 사대 풍조에 때묻은 한자 지명을 선택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전국의 지명을 고쳐 놓았다가는 엄청난 문화재 파괴로 후세에 지탄받게 될 것이 뻔하다. 여론에 물어 선택 원칙을 바꾸길 권한다. (조선일보: 1984. 이규태)
2. 서울의 길 이름
지명을 춘향이 정조 지키듯 지키는 나라가 있고, 음녀 서방 갈 듯 갈아치우는 나라가 있다. 앞 것의 전형적인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 런던의 [스코틀랜드 야드]하면 런던 시 경찰국을 뜻한다. 스코틀랜드 왕의 이궁이었던 지역을 그 역사적 연유로 스코틀랜드 야드라 했고, 바로 그 거리에 시 경찰국이 있었다 해서 경찰국을 스코틀랜드 야드로 불렀던 것이다.
지명에 대한 강인한 보수성이, 그 곳에 자리잡은 관공서 이름까지 동화시켜버린 것이다. 1967년에 그 경찰국은 빅토리아가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스코틀랜드 야드라는 호칭은 변함이 없다. 지명은 문화재이며, 이토록 소중히 아낀다.
이와는 반대로 러시아에서는 지명을 헌신짝 버리듯 버린다. 러시아 제 2의 도시인 페테루스부르그는 1914년에 페트로그라드로 바뀌고, 혁명 후인 1924년에는 레닌그라드로 바뀌고 있다. 볼가 강변에 있는 쓰아리쓰인은 1925년에 스탈린그라드로 바뀌더니, 스탈린이 죽고 격하된 다음에는 볼고그라드로 바뀌고 있다.
영국형이냐 소련형이냐 선택하라면 역사와 전통이 있는 우리 나라로서 영국형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데 우리 나라 지명은 순수한 원형에서 문화적, 정치적 불가항력으로 여러 번 바뀌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문 우위 문화가 몇 천년 지속되는 바람에 순수 지명 한자지명으로 바뀌었고, 다시 일제 침략기간에 일본 지명으로 바뀐 곳이 적지 않았다.
해방 후 일본 지명을 씻어 버린다고 역사적 연유도 없는 새 지명이 생겨났는가 하면, 행정 구역을 병합하면서 안이하게 두 지명의 머리말을 모아 뿌리도 피도 없는 지명을 양산해 놓고도 있다. 이를테면 지금 을지로의 순수지명은 구리개였다. 이것을 한자로 오염시켜 동현으로 바꾸었다가 일제 때는 황금정으로, 해방 후에 을지문덕과는 전혀 아랑곳없는 을지로가 된 것이다.
옛 진고개를 충무로라 바꾸고 있는데, 진짜 충무로는 필동에서 을지로 3가로 뻗는 마르내를 따라난 길에 붙였어야 옳았다. 왜냐하면 충무공 이 순신이 태어나 자란 집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이름이 없는 간선도로, 지선 도로에 길 이름을 새로 짓기로 했다던데, 그 길 이름 자체가 문화재가 되게끔 오염된 때를 씻고 닦아 역사성을 살리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기왕 지명위원회가 구성됐다면 길 이름 뿐 아니라 있는 지명의 오염도 씻는 작업을 아울러 맡아 주었으면 한다.
3. 길 이름의 실태
-서울과 지방도시를 살펴 본다.
서울시는 광복이듬해인 1946년 10월 1일 세종로, 종로, 을지로, 신문로, 태평로, 남대문로, 충무로, 퇴계로, 충정로, 원효로, 한강로, 의주로등 12개의 간선도로명을 제정 공포했다. 지금 우리들이 쉽게 기억하는 길 이름은 이렇게 38년 전에 지어진 것들이다.
그 후 1966년 11월 26일 45개 구간의 가로명이 더 만들어졌는데, 청계로, 소공로, 율곡로, 공항로, 삼일로, 다산로, 난계로, 안국로, 소월로등이 이 때 지어졌다. 그러나 그 이래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절반 이상은 시민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길 이름들이 활용되지 않은 것은 현장이나 지도상에 표시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이 때 지어진 가로명 중에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 정호의 아호인 고산자를 딴다는 것이 [3자 이내]의 원칙에 묶여 고산로로 붙여지는 망발이 있었고, 당시만 해도 호화상가로 지어졌던 진양, 세운상가 좌우의 폭 8m의 길을 번영동로 , 번영서로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 등 어색한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1972년 11월 26일에는 신개발 도로 58개 노선, 76년 6월 26일에 다시 5개 가로명이 추가 제정됐다.
1977년 6월에는 서울과 테헤란의 자매 결연 기념으로 영동지구를 동서로 관통하는 삼릉로의 이름이 테헤란로로 개정되었다.
78년 6월 29일 16개, 79년 1월 30일 6개가 추가된 데 이어, 81년 1월 21일 30개의 길이름이 새로 만들어졌는데 모두 1백 60개의 가로명이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백 60 개 길 가운데 가장 넓은 길은 폭 1백m의 세종로. 또 이름이 거창하기로는 근년에 놓인 한강 다리를 잇는 길들로 예외 없이 XX대로란 호칭을 사용하는 길들이다.
또 길 이름 중 상당수는 공사를 위해 붙여진 가명이 그대로 가로명 세정위원회에 의해 추인형식으로 굳어지기도 했는데, 동1.2로, 당산1.2.3로, 남1.2.3로, 서초1.2.3로 등이 이런 것들이다.
이쪽 저쪽 동네의 첫 글자를 따서 [누이 좋고 매부 좋게]만든 이름으로는 용마로(용산 ~마포 연결), 장석로(장위~석관동 연결)와 보신로(봉천~신림동 연결)등이 있고, 옛 지명인 살곶이벌을 따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3자 원칙]에 따라 관평로로 되는 넌센스도 있었다.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고 무미건조한 이름들이 생겨난 것은 서울시의 전문 기구인 가로명 제정위원회가 상설기구로 존속되지 못하고 몇 년에 한번씩 위원들을 불러 형식적 가로명 심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내무부는 1984년 1월, 전국 도시 지역에 길 이름을 지어주라고 지시했다. 취지는 날로 국제화되는 개방 시대에 외국처럼 고유한 가로명을 지어 그 거리의 특색이나 분위기를 살리고 또 찾기도 쉽게 하자는 것이다.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빨리 많은 거리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당위성도 강조되었다.
금년에 목표로 한 거리는 서울, 부산 등 대도시를 비롯하여 우선 전국의 시지역으로 국한했는데 대상 가로수는 867개소이다.
시 지역만 해도 실제 길의 숫자는 이보다 몇 백 배 더 많지만 우선은 대표적인 간선도로만이라도 작명하기로 했었다. 현재 추진 실적은 763개소로 내년 초 까지는 1차 목표지역은 모두 이름이 붙여질 것으로 보인다.
이름이 붙은 거리는 서울의 160개소를 제외하고라도 부산이 33개소, 대구 43개소, 인천 27개소였고 경기도가 8개 시 에서 81개 거리에 이름을 지었다.
강원도는 6개 시 에 68개, 충북은 32개, 충남은 2개 시 에 22개, 전북은 5개 시 에 27개, 전남 5개 시 에 52개소가 이름을 얻었다. 또 경남은 8개 시 에 1백 9개 소, 경북은 7개 시 에 81개소가 이름이 지어졌다. 제주도는 2개 시 지만 28개 거리가 이름이 있다.
거리에 작명을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각 시 별로 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잡한 심의과정을 거쳐 조례로 제정하는 행정적인 절차가 우선 복잡하다. 그러나 어려운 점은 행정 절차에 있는 게 아니라 알맞은 이름을 정하는 데 주민의 견해가 엇갈려 지역의식과 애향심을 고취한다는 본래 취지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은 데 있다.
대부분의 도시가 5~6명, 많으면 10여명이나 되는 학자, 향토사가, 문화재 전문가, 언론인, 유지 등으로 심의 위원회를 구성하지만 길 하나를 두고도 길 이쪽 주민과 저 쪽 주민, 이 동네 사이에 주장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모든 길 이름을 쉽게 일시에 붙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만 또 좀더 뜻 있고 아름다운 이름을 구하는 데는 심의위원간에도 의견이 엇갈려 2차~3차 심사를 거듭하기도 한다.
부산 중앙동 문화방송 앞에서 문현동 로터리에 이르는 4.3km의 거리는 임진왜란 때 충장공 정발장군이 왜적과 처음 접전한 길이라 하여 충장로라 했다. 인천의 우체국~화선장~배다리 철교에 이르는 길은 인천 개항이 대외적인 첫 문호 개방인 점을 상징하는 뜻에서 개항로라 지었다. 대전의 대전역~효동4거리에 이르는 길은 인동과 효동을 잇는 도로라는 점에서 인효로라 지어 주민 사이에 분쟁을 없앴고, 광주의 학동3거리에서 징심사에 이르는 길은 광주의 자랑이었던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 화백의 호를 따 현대 인물의 이름도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춘천시의 운교 로터리에서 5호 광장을 거쳐 후평 파출소까지의 길은 신흥로라 지어 신개발지의 무궁한 발전을 기약하는 미래지향적인 것도 있다.
내무부는 이들 가로명을 생활화, 주민 생활의 편익을 도모하고 지역적 일체감과 향토 의식을 높이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가로 표지판을 많이 만들고 가로명이 표기된 지도를 제작 보급하는 등 구체적인 방안이 뒤따라야 할 것이지만, 주민 스스로가 자기 마을과 고장의 거리 이름과 친숙해져 문화유산과 지역적 일체감을 빨리 체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한국일보, 1974.1.12)
4. 지어놓고 안 부르는 이름
거리에 이름을 붙여 주자는 주장도 활발했던 데다가 서울의 경우 같으면 변두리에 대소의 새 길이 여럿 뚫려서 무언가 이름을 지어 줄 필요도 급해서이겠지만, 서울시에서 가로명의 시안을 우선 공표를 해서 공론에 붙인 지도 한참이 된다. 여러 가지 반론도 신문에 나왔었다. 이런 의견을 좀더 집약시키기 위해서인지, 귀하의 의견은 어떤가 답신을 해달라는 인쇄물이 나에게도 왔다.
신문에서 거리 이름 붙여 주고자 했을 때는 을지로니 퇴계로니 하는 간선도로보다도 도리어 소로나 골목길에 정답고 알뜰한 이름을 붙여 줄 수 없을까 하는 인상이었는데, 시의 이번 시안은 이름에 문제가 있는 대로부터 손을 대 우선 현행 혹은 신규 명명예정의 대로명이 자그마치 244개로 일람표만 훑어봐도 시안이 생기기까지의 고심의 자취가 역력하다. 그러나 욕심 같아서는 좀더 이치에 닿아야 할 부분도 눈에 띄어, 원칙적인 한두 가지만 이 자리에서 지적하여 대방의 찬반을 묻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이름은 지어 놓고 실지로 쓰이지 않는 것들에 눈이 쏠린다. 율곡로, 다산로, 동일로, 장석로...가 어디냐는 퀴즈가 있다고 하면 택시 운전 기사 아저씨들도 정답을 할 이가 얼마나 될는지 의문이다. 율곡로는 옛 중앙청 앞~이화동~동대문, 다산로는 창신동~약수동, 동일로는 상봉동~도봉동, 장석로는 장위동~석관동이다. 한국일보사의 위치를 예로 들면, 고유명칭의 동(중학동), 동회 단위의 동(중학동을 포함한 종로 1.2가동), 구(종로구)...등 공부상의 이름은 따로이 있고, 그 위에 여러 개 동에 걸치는 가로명 율곡로가 지도나 표지판 같은 데에 표시가 안되니 지어 놓고 안 부르는 이름이 되기가 십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거리]이름이 없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리]이름과 [동네]이름을 우격다짐으로 일치시키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거리 이름이 잘 안 쓰이는 데는 그보다도 더 큰 이유가 있을 법하다. 일상에는 삼청동길, 왕십리길, 장충로, 역삼로...로 굳혀버린 것이다. 풀어서 쓰면 글자수가 많아진다든지 한자어로서의 권위가 떨어진다든지 한자어로서의 권위가 떨어진다든지 하는데 집착하는 한, 어색한 인조어가 오래 생명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 생각 같아서는 [로]대신 [길]을 원칙으로 하면 좋겠다. 내 생각이라기보다, 시가 이번 시안에서 [로]를 원칙으로 하되 노들길(노량의 [梁]은 실은 [돌]), 광나루길, 뚝섬길, 모래내길...등의 용단이 이미 몇 군데 시도되고 있는데, 이를 좀더 일반화 할 수 있다는 착상이다. 명동길, 반포길, 자하문길, 성균관길...[로]의 거의 전부를 [길]로 바꾸어도 부자연스러울 것이 없다기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길]을 원칙으로 한다고 해도 일부는 [로]도 예외로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는 인명이 붙은 로명이다. 세종길, 원효길...은 좀 어색하고 역시 세종로, 원효로...가 듣기에 순하다. 둘째는 오랜 관행으로 [로]가 거의 굳어진 경우로, 종로, 태평로...등 많아야 두세 개 정도가 있다. 이제 새삼스럽게 종각길, 태평관길...해도 어리둥절할 것만 같다. 며칠째 이것저것 뒤져보다가 새로 배운 것의 하나는 종로, 태평로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이름이라는 점이었다. 종로는 합방 후인 1914년에 처음으로 종로 1~6정목으로 등장했고, 그 이전에는 운종가 종루니 종각계(오늘의 구, 동에 해당하는 부ㆍ방ㆍ계의 시절)니 해서 지금 보신각일대의 소지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태평로도 같은 해에 처음으로 태평통1~2정목으로 등장하고 그 이전에는 태평관계니 태평동이니 해서 지금 남대문 안의 소지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70년이나 되었으니 오랜 관행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야기는 좀 달라지지만 시의 이번 시안에는 큰길에 3등급이 매겨져 있다. 노폭1백미터 이상이면 광로, 50미터 이상이면 [대로], 그 이하는 [로]다. [광로]는 세종로 한 건이고 5.16 광장(여의도)은 광장이라면 광장이지만 광로라면 광로이겠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 [대로]는 태평, 청계, 천호, 마포, 시흥, 도산, 강동, 송파등 여덟 개를 헤아린다. 나머지는 [로]다. 이 3등급을 꼭 표시해야 할까. 그저 천호로, 시흥로...해도 일반시민은 그게 큰길인 줄 알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시세가 더욱 더 커지면 노폭이야 여기저기 자꾸 달라질 텐데 그 때마다 [광로], [대로], [로]를 조정하자면 보통 일이 아니겠다.
또 하나는 인명이 붙은 노명의 문제다.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경우로는 율곡, 다산, 퇴계, 을지, 충무, 원효, 고산자, 대건(김대건), 난계, 충정, 도산...어디 내놓아도 버젓한 이름들인데, 시의 이번 시안에는 거기에 추사, 우암, 소파, 소월, 백범, 하정, 서거정, 무학, 낙서, 화산, 토정, 양녕대군, 효령대군, 삼학사(병자호란 때)가 추가되어 있다.
이 신규 인명에는 한국사에서 지명도가 제 1급인 인물도 들어있지만 반드시 그렇지 못한 경우도 들어있는 것 같다. 인명이 한 번 노명에 붙으면 변경이 어렵게 되는 점을 생각해서, 이번 시안에 새로 대상이 되는 인명은 좀더 신중히 재고해 볼 만하다. 그리고 이제는 고대, 중세 사람보다는 근대의 독립운동가나 문화 선각자 같은 데로 중점을 두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일람표를 보니 서울에 외국어로 된 노명이 들 있다. 하나는 현행중인 [테헤란로], 하나는 앞으로 에정되어 있는 [올림픽로]. 나로서는 배타적인 생각은 전혀 없는 터이어서 도리어 올림픽로 같은 이름은 한 번 가져 봄직하다는 생각이지만, 한편 우리의 중동진출을 기념하는 뜻인 듯한 [테헤란로]는 국내외 사정이 그 명명 당시와는 사뭇 달라져 있다. 중동 진출도 영원히 기념해야 할 만한 것이라면 가다가 곡절이 있더라도 끌고 나가 보는 것도 좋은데, 그렇다면 [테헤란로]하나만이 아니라 외국어의 노명이 몇 개는 더 생겨야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도대체 시사성에 민감한 노명은 처음부터 불안정한 것이었다.
끝으로 한 가지, 가로명 만이 아니라 지하철 노선의 명칭도 문제다. 1호선, 2호선...해 가지고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노선인지 알 수가 없다. 외국 도시의 지하철도 대개 이런 멋없는 노선명은 없는 줄로 안다. 숫자도 많거니와 언제 또 바뀔 지 모르는 시내 버스 노선의 번호와는 사정이 다르니만큼 지하철에도 무언가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하겠다. (한국일보, 1984.7.12. 천관우)
5. 길 이름과 도시
손수 운전을 하는 시민들이 부쩍 많아지면서 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최근 손수 운전 대열에 낀 김화일씨 (강남 서래마을)도 서울의 가로망 익히기는 골몰하는 사람이다.
평탄한 줄만 알았던 반포 대로에도 꽃마을 부근에 고갯마루가 있고, 북악 스카이웨이가 구절양장임을 이제야 실감한다. 늘 다니는 서울 팰리스 호텔 앞 도로 이름이 뭔가 했더니 동작로라고 했다. 잠수교 건너 오버패스나 강남 성모병원 앞 복잡한 4거리는 조그마한 녹지대도 있고 로터리 기능도 갖췄는데 그 이름들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다.
사실 서울 거리는 이름이 없는 거리가 태만이다. 어디 이뿐이랴, 도대체 길이 몇 개나 있는지도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참고 삼아 기자가 서울시에 [서울에는 길이 몇 개나 있는가]고 물었더니 시청 직원들은 정답이 있을 수 없다고 답변했다. 노폭이 12m 이상 (도로공학상 용어로 중로 이상)만 따지면 7백여 개 구간이 된다는 막연한 대답이다. 4m 이상 소형 승용자가 다닐 수 있는 길을 합치면 아마도 5~6천개 구간이 넘을 것이란 추측이다.
근년 들어 시민들이 길에 대해 관심을 깊게 가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내 버스에 몸을 맡길 때는 가로망이야 어떻든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택시를 자주 타고 손수 운전을 하면서부터 지름길을 택하고 혼잡이 덜한 샛길을 찾다 보니 자연히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지도 한 장을 들고 남대문, 동대문 시장을 찾아가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늘어나고 있다.
크고 작은 길마다 안내 표지판을 달아야 한다는 시민의 소리는 날로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 시내 길 이름을 30개만 쓰라]]는 문제가 상식과목으로 출제됐다고 가정할 때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빈 칸을 메울 수가 있을까.
세종로, 종로, 을지로, 퇴계로, 남대문로... 귀에 익은 이름들도 있지만 시민들이 아는 숫자는 고작 10~20개 수준이다. 그러나 서울니에 의하면 그 동안 이름을 짓고 공표한 가로명은 1백 60개나 된다.
하지만 서울 시내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의 총 연장이 6,379km인데 비해 이름을 가진 167구간의 연장은 720km에 불과하여 결국 전 도로의 89.3%가 이름이 없는 셈이다. 또 폭 12m 이상의 길만 따져봐도 전체 구간이 700개나 되는 데에 비해 이름이 있는 길은 160개 뿐이다.
파리시에만 6,300여 개의 길 이름이 있다는데 우리 나라는 전국 도시의 가로명을 모두 합쳐도 763개에 불과하다.
[모든 길에 이름 지어주자]는 국민의 컨센서스(합의)가 형성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국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은 방문하는 도시의 거리를 몇 백 km만 걸어도 그 도시의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정하는 것은 고장을 빛내고 자라는 세대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길이기도 하다.
춘원 이광수는 [차마가 자유로 다니도록 탄탄히 뚫린 대로에서 인생의 힘의 미를 느낀다]고 했지만, 도시의 가로는 다양하게 꾸며지고 이름지어져서 시민들에게 매력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600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이나 그 이상의 고도가 수두룩한 우리 나라는 이런 점에서 아름답고 유서 깊은 길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소재를 무진장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도시들은 자연 발생적으로 본때 없이 커져서 지번과 가로망이 인위적으로 합치된 서구 도시와 달리 길 이름을 지어 유용하게 쓰기가 어렵다고도 말한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길 이름도 쓰여지지 않는 마당에 더 많은 가로명을 정한다면 혼란만 가중될 게 아니냐는 우려도 없지 않다. 또 그 많은 골목길까지 무슨 수로 다양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지어질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동명과 번지로만 살아온 우리의 생활 습성이 가로 이름을 따라 위치를 찾게 되기까지는 어려움이 없지도 않다. 동명과 번지, 가로망을 과학적으로 일치를 찾게 되기까지는 어려움이 없지도 않다. 동명과 번지, 가로망을 과학적으로 일치시키는 데는 혁명적인 과정이 필요 할 것이다. 동명과 번지를 그대로 둔 채 이름 없는 길마다 새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은 편리하게 길을 찾기 위한 것일 뿐이다. 모든 길에 이름을 달고 그 이름들을 지도에 표시하면 처음 찾아오는 나그네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지도의 제작, 보급은 선진 외국처럼 주유소나 접객업소들이 많아도 좋다. 많은 길의 이름을 성급하게 외려고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자기 동네의 길 이름은 저절로 알게 될 테고 생소한 길은 지도나 현장 표지판을 이용하여 알아내면 된다. 골목길의 이름들을 다양하게 짓기 어렵다면 동네마다 [배밭골목]이나 [과수원길] [은행나무 길] 따위가 있어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일보. 1984.1.1.)
6. 지명을 지킨다는 것
1) 인간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무엇인가.
-혈연은 [인명]이며 [지명]으로 나타내어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의 본성은 동물이지만 그것에 [사회적]이라는 조건이 붙어서 처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 쉽게 말하면 인연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네 가지 인연이 있다. 혈연(가족, 친족), 지연(주거, 주소), 학연(학습, 교육), 직연(일, 기능)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혈연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인명]이고 지연을 나타내는 것은 [지명]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인연은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 [이름]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이름은 몸을 나타낸다]라고 말해지는 것처럼 인간에 있어서는 그 개성에 연계된다. 같은 이름이라 할 지라도 그 개성에 맞지 않을 대는 쉽게 [별명]이 생겨난다. 인간에 있어서 이름은 주어지는 것이며, 그 이름에 한 인간으로 되는 것이지만, 어떻게 해서도 적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것이 별명이 된다. 오히려 별명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존중되기도 한다. [이름]이 인명이든 지명이든 간에 인간 형성에 중요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나타내진다.
첫째, 인명, 지명은 모두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런 이름의 집에 태어났는가 하는 반문은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서 이런 곳에 태어났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가 있다. 앞 것이 [출생]이고 뒷 것이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선택성이 허용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명칭은 물건에 예를 들면 몇 개와 같은 것으로서, 태어나서부터 인명, 지명이 무조건 불려지게 되는 것이지만, 어느 틈엔가 우리는 이름이 몸을 만들게 된다. 이름이 몸을 만들게 된다. 이름은 숙명이라는 인간 관계 속에서 낙인과 같이 인간생활에 밀착한다. 이것을 명칭의 정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명칭에는 지배성이 있다. 박명의 일본 시인 이시가와는 고향의 산천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것이 없다. 다만, 감사할 뿐이다."라고 써 놓고 있다. 이 의미는 고향의 이름은 항상 [이시가와]라는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된다. 고향이라는 하는 일본말에는 이러한 감촉이 있다.
넷째, 명칭에는 여러 가지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인명의 경우에는 주로 인간관계가 지적되지만 지명의 경우에는 자연 환경에 근본을 갖는 것이 많다. 그러나 인간의 정착성이 진행됨에 따라 토지를 지배하고 스스로의 이름을 지명으로 하는 예가 보인다. 어쨌든 인간 이름은 인간에 있어서 인간과 환경을 상징하는 기술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2) 인간이 갖는 사회적 속성
-지명의 사회적 영향
지명이 인간과 다른 것은 사람 이름은 인간 형성에 개인적인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서 땅 이름은 사회적, 집단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에 있다. 이 점은 [지명은 지켜지는 것이다]라는 테마에 대해서 그대로 해답이 된다. 첫째, 인간은 스스로 성명을 가지면서 그 [출생][출신]을 성명의 관사( )로 나타낸다. 전국 시대 무사는 싸움을 하기 전에 먼저 이름을 내건다. 그 때 우선 자기가 [ 00국의 출신][고향이 어디다]라는 것으로 시작해서 어떤 집안의 몇 번째에 해당된다고 한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대화의 처음에는 자기 이름 다음으로 지명이다. [어디에 사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주소부정]이라고 대답하면 인간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성명과 주소(지명)는 인간의 속성으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지명은 인간을 만든다. 지명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 인간이 지명에 의해서 사회적 속성이 부여된다. 예를 들면, 서울 사람, 동경인, 런던인 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서울, 동경, 런던 등은 모두 지명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태어났다]는 인간은 각각의 지명의 관을 쓰고 앞에 불려진다. [에또꼬]라고 불리는 방법도 전형적인 것이다. [에또꼬는 5월의 잉어가 흘러가는 것, 말로써만은 알 수 없다]는 일본의 싯구절이 있다. 무엇이든 [에도]라는 지명이 그러한 성격을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에도]라고 불려지는 공간에 다수의 인간이 집단 생활을 하고 있으면 자연히 [개성 있는 인간]을 만들어 내고 그 사회적 속성은 점점 다음에 태어나는 인간에게 계속되어진다. 좋든 나쁘든 간에 지명에 [00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집단적, 사회적 속성을 만들게 된다.
셋째, 지명은 그 상징성에 있어서 다른 지역의 명칭이 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긴자]라는 지명은 본래는 동경 중심 지역의 고유 명사였다. 그러나 일본 국내 만에도 [긴자]라고 이름을 붙인 거리는 3백 곳이 넘는다고 한다. 본래는 고유 명사였던 것이 어느 틈엔가 추상 명사로 바뀌어서 [번화하는 상점가]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명의 추상화는 긴자 뿐이 아니다. 옛날에는 [오오사까는 일본의 맨체스터]라고 불리어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국제간에 있어서 도시교류 중에 자매도시 운동이 전개되어 있다. 이러한 자매도시에서는 1년의 1일만은 그 도시의 중심가를 상대 자매도시 중심가의 명칭으로 부른다. 예를 들어 동경과 뉴욕이 자매도시라면 1년에 한 번, 뉴욕의 중심가인 타임즈 스퀘어는 [긴자]로 불리어진다.
넷째, 일본에 [명소]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유명한 장소인데 [유명]이라는 것은 [이름이 나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부터 [명소]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명소는 도시의 심볼이다. 그래서 지명을 말하면 그 곳의 명소가 생각난다는 것이 지명의 2중주가 도시의 존재를 더욱 고정적으로 만드는 몫을 하고 있다.
3) 지명 변경과 사회
-합병, 산업 구조의 변화 전쟁 등으로 변한다.
지명이 갖는 이상과 같은 사회적 속성은 도시의 성장 발전을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명치유신으로 인하여 265년 계속된 도쿠가와 막부(1963~1867)의 수도였던 에도가 [동경]이 되었을 때 잠시 동안은 에도 시내에 불이 꺼진 같은 모양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동경]이라는 이름에 친숙해지기 위해서 이른바 [천배]행사가 실시되었다.
[천배]란 것은 [천황이 주는 술잔]을 뜻하는데 에도가 동경으로 개칭되어 천황이 에도성에 올 때 에도 시민은 반감을 가졌다. 그것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천황의 에도성 입성시에 시민에게 술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명의 변경은 대개의 경우가 도시의 합병, 산업 구조의 변화, 기타 전쟁 등의 사회 변동에 의한 것이 많다.
첫째, 도시가 합병될 경우에는 때때로 지명이 변경된다. 이를테면 중심도시가 주변도시를 합병한 경우에는 지명 변경은 거의 없다. 그러나, 대등 합병이 되었을 경우에는 지명 변경이 합병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일본 최근의 도시 합병에서 예를 들면, 기다규수의 5시합병을 들 수 있다. 문사, 소창, 팔반, 약송, 도다는 모두 중견도시로 번영했는데, 이 5시가 문자 그대로 대등 합병 하 는 데에는 30년이 지난 후에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 때 대등하게 하기 위해서 [기다규수]라는 명칭이 의외로 순조롭게 받아들여졌다. 이에 반하여 소화7년 (1932)당시의 동경시가 82개 도시를 합병해서 25구를 만들고, 그것이 전쟁 후 재편성을 실시할 때는 지명의 선정에 전연 합리성이 없었다. 그 예가 [대전구]의 실현 구 명칭 대립과 포전구를 합병해 [대]자와 [전]자를 합친 것인데 그것은 궁여의 졸작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명을 들으면 태전도권의 출생지가 아닐까 여길 것이다. 정치적인 싸움이 지명 본래의 구실을 도외시해 버려서 비합리적인 지명을 선택한 예라고 하겠다.
둘째, 도시의 산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지명의 변경이 따른다.
이 점에 있어서 에도 시대부터 지방의 지명을 옥호로 사용하는 관습이 계속되었다. 삼하옥, 월후옥, 준하옥 등등 이런 것들은 어느 것도 산업이 지명에 의존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산업 규모가 점차적으로 커지면서 기업의 명칭이 지명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고시, 도미다시, 히다찌시는 산업 우선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도시다. 미국에도 제철이나 자동차 산업이 도시의 상징적 기업이 돼 있는 것이 있다. 디트로이트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지만 포드시와 제너럴 모터 시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셋째, 일본 국내에 있어서 정치 체제의 변화로 지명이 변화한다. 처음에 말하였듯이 에도가 동경이 된 사례는 하나의 예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국제적으로 보면, 제정러시아의 수도 페델부르크가 레닌그라드로, 근자에는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호지명시가 된 예이다.
넷째, 전쟁에 의한 국경의 변경 등에 따른 지명 변경을 가끔 볼 수 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일시 점령한 도시 지명 등은 점령군이 마음대로 변경하였다. 거꾸로, 일본이 패전하여 동경을 비롯한 각지에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에는 그들 나름대로 지명을 변경하였다.
동경의 중심가에 워싱턴 하이츠, 그란드 하이츠 등의 이름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전쟁에 의한 지명의 변경은 그 땅에 사는 인간과의 교류를 결하고 있다. 따라서 앞에 말한 것처럼 인간성, 인간 관계의 상징으로서 지명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다. 이런 점에서 제 2차대전 후, 신생국 이스라엘은 주변의 아랍국들 사이에 계속 대립관계가 진행되고 있다. 성경에 있는 그리스도 탄생시대의 지명도 그것을 이스라엘과 아랍, 어느 쪽 이든가 점령하는 것에 의해 호칭이 달라져 왔던 것이다. 전쟁에 의한 지명 변경에는 지명을 지킨다는 그 자체가 전쟁을 유발하는 위험마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 지명 변경의 필경의 필요성
무성격인 도시 계획과 마을 이름의 정리는 인간성을 상실한다.
이상에서처럼 지명이 인간성, 지역성의 형성에 커다란 구실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한 존속시켜야 한다. 그 변경에는 굉장한 이유가 없지 않으면 안됨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 도시의 지명이 때때로 변경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근대적 도시 계획의 구상이다. 도시는 원칙적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인간은 [휴먼]이라고 불리는 인간성의 존중을 의미하는 것인데, 반드시 테크노크라트로서의 기술 우선을 의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은 인간을 지구상에서 전멸시킬 방사능 및 원자력을 발전시키기에 열심인 것처럼, 인간의 노력이 장시간 지나는 가운데 축적된 도시를 기술의 진보에 의해서 그것을 파괴한다. [스크람 엔드 빌트], 곧 파괴해서 다시 만든다는 말은 단적으로 이를 나타내고 있다. 물론, 도시는 끝없이 생성, 발전하고 부분적으로 서서히 변형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규모 도시 계획은 도시가 갖는 명칭을 변경하지 않고서도 부분적인 지명이나 가로명이 없어지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이는 전후 급속한 전재도시의 부흥을 위해서 실시된 동명과 지번정리의 구상이 그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명의 정리를 위한 도시 계획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둘째, 즉 [미니 도시 계획]이라고 불리는 동명, 지번 정리는 도시 주거의 [편리성][효율성]이라는 방침아래 그것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구상의 기초가 된 것은, 주로 미국의 대도시처럼 단순한 장기판 쪼개기 식의 구획을 복잡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지명을 [1정목] [2정목]이라는 극히 단순한 숫자로 바꾸어, 도로를 가운데 둔 긴자통, 아오야마통이라고 불려지는 것이지만, 도로가 구획의 경계가 된다면 지금까지 전통적 커뮤니티로써 인간 관계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 분할되는 결과를 낳는다. 만약 이러한 동네 이름과 지번의 정리가 늦어졌다면 도저히 그 지명의 실시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한 정리에는 주민의 의사에 반하는 위험상이 있는 변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동경이나 오오사까 등의 대도시는 똑같은 건물의 디자인과 똑같은 도로에 의한 설계인지 아닌지를 발견하기 어렵다. 무성격인 도시 계획과 동네 이름의 정리에 의해서 현대의 일본 도시사회에는 점점 더 인간성에서 유리되고, [생활]하는 것과 거의 유리된 [생존]하는 장소로서밖에 보여질 수 없는 현실이다.
5) 지명은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에 붙여지고 인간을 지키는 것
지명은 존중되어 간단한 변경은 허용되지 않는다. 지명은 지켜지고 전승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한 지명에 대한 향수적인 발상은 아니다. 인류사회에서 사람의 이름이 그 존재를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역에서의 지명은 그것이 인간의 발전을 위한 인간적 관계의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땅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 그 땅은 지명에 의해서 대변됨을 여태까지 인식한 적이 있는가. 일본을 잘 아는 미국인 에드윈. 올 .라이샤워 교수는 최근 <일본인>이라는 글에서, [현대 일본의 뛰어난 면은 일본 근대 역사의 소산이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동경의 번영을 지켜주는 근본은 [동경]이라는 지명과 연결되고 그 전통과 메커니즘 속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명은 대소 도시를 상징하는 동시에 작은 커뮤니티의 심벌도 된다. 지명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역 공간의 크기나 인구의 다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커뮤니티 형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관계의 존중과 연결되고, 이러한 연대성의 축적이 지명의 축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축적을 위해서 마을도 도시도, 그리고 나라도 안정된 인간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명은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지명은 거기에 인간의 출생과 성장을 축복하고 조용히 그 인간의 종말을 지켜주는 것이다. 지명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끝내 인간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7. 지명의 신비
나는 직업상 지도와 더불어 생활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지도는 땅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지도 위의 [지명]을 보고 있노라면 그 이름이 결코 우연히 지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수]자나 [온]자가 붙은 곳에 온천이 많이 나오고 [철]자가 붙은 곳에 철 광산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압록강 지류에 [허천강]이란 하천이 있다. 50년 전에 일본 사람들이 댐을 막아 물줄기를 동해안 쪽의 단천으로 역류시킴으로써 허천강은 강바닥 물이 말라 문자 그대로 [허천강]이 되고 말았다. 이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착공한 수풍댐 위치가 [수풍동]이란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5.16 후 섬진강댐 건설 때 수몰된 부락 이름이 수침동이었다는 것도 신비스럽지만, 팔당댐이 준공된 후 이곳에 상수도 취수탑을 설치한 곳의 동명이 수구동이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얼마 전 청주에 국제공항을 설치한다는 발표가 있었는데, 비행기가 착륙하는 활주로 끝에 있는 동네 이름이 비하리이고, 이륙하는 쪽 마을 이름이 비상리로 되어 있다.
과천은 조선조 5백년 동안 삼남지방의 통행을 통제하던 검문소가 있던 교통의 요지이다. 80년대에 정부 청사가 들어설 것을 미리 짐작이나 한 듯이 그 곳 지명을 관문리라 한 것도 기이한 일이다.
일본의 어떤 지리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경우, 백년마다 약 20%정도 지명이 바뀐다고 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조사해 본 적이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나라 이름鑁 바뀌고 사람 이름도 바뀌는데 지명이라고 만고불변일 수는 없다. 비근한 예로 서울은 6백년 동안 그 이름이 수십 번 바뀌었고, 화성이 수원으로, 달구벌이 대구로, 금산이 김천으로, 선주가 선산으로 바뀌는 등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근대적인 과학기술도 좋지만 지명을 토대로 자원 조사를 해 보는 것도 결코 헛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선일보. 1985. 김의원)
8. 풍수사상과 지명
풍수사상의 일단은 지명에 이제까지 보아 여러 곳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지형 자체가 어느 동물이나 물체와 비슷하여 그러한 지명이 생긴 것도 많지만, 어느 곳 이름은 풍수사상과 연결 지어져 이루어지기도 했고, 어떤 지명은 또 그와 관련하여 고쳐지기도 했던 것이다. 신라 말에 고려 태조에게 망한 궁예는 마진이라는 국호를 고쳐 태봉이라고 하고, 무태라는 연호를 고쳐 수덕만세라 한 것은 부처의 덕을 숭앙한 때문이라기보다는 신라의 국성이 김씨 였음으로 해서 금생수인 오행상생의 차례에 따라 물로써 신라에 대항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송악(개성)은 고려 왕실의 시조 호경이란 이가 백두산으로부터 유력하여 부소산(송악산)의 왼쪽 골짜기에서 산신이 되었는데, 옛 아내를 잊지 못하여 강충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 신라 풍수가인 감천팔원이라는 사람이 부소압군(지금 개성 서남)에 와서 부소산의 형세를 살핀 다음, 강충에게 "만약 고을을 산남에 옮기고 솔을 심어 산의 암석을 드러나지 않게 한다면 삼한을 통합할 사람이 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래서 강충은 군민들과 함께 산남에 옮겨 살면서 소나무를 널리 심고 고을 이름을 송악이라 하였다. 그는 드디어 이 고을의 상사찬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왕창근의 경문에는 어느 해 사년에 두 용이 서로 다른 쪽을 보고 푸른 소나무에 몸을 숨겼기 때문에 그 이름을 송악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고려 태조의 탄생을 신성시하려고 만든 설화인지도 모른다.
개성 동북쪽에 좌견교가 있는데, 이는 개성 남쪽의 삼각산이 역적의 칼같이 우뚝 솟아 고려의 국운을 축소시킨다고 하여, 이를 막는다는 의미에서 철견12필을 만들어 세운 곳이라고 한다. 부여는 고란사 북쪽 건너편에 호암리라는 동네가 있어 그 위협으로 절이 쇠하므로 그것에 대향하기 위하여 사자암을 경내에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서울 광화문 앞의 해태는 전방(남쪽)의 관악산이 화산이어서 시내에 화재가 자주 일어남을 예방한다는 의미에서 세운 것이다. <<택리지>>경상도 선산조에 의하면 남쪽에 선산이 있는데, 산천이 상주에 비하여 더욱 맑고 밝으며 뛰어났으므로 속담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문학에 뛰어난 선비가 많이 태어났다. 임진란 때 명나라 이 여송군사가 이 곳을 지날 때 술사가 있어 외국에 재주 있는 사람이 많다고 시기하여, 병졸을 시켜 읍의 후맥을 끊어 불타는 숯으로 이 곳을 태우고, 또 큰 쇠못을 박아 지운을 눌려버린 이후부터는 인재가 쇠잔하여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말기에 분망한 중에도 이런 짓을 함으로써 인재의 배출을 막으려 하였다. 이렇게 어느 명당자리에다가 큰 쇠못을 박아 생기를 인공적으로 쇠망케 하여 역적의 출현을 막았다는 예는 전국에 허다하니, 지금 지명에 [쇳대배기]라고 불리는 곳들은 모두가 그러한 유래를 가지고 있다. 또 지세. 지력이 음탕하다 하여 시장을 옮겨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함으로써 음탕한 지력한 지력을 꺾으려는 일은 각처에서 볼 수 있다. 전남 영암군의 독천시장은 원래 이웃마을 용산리에 있었다. 현재 시장을 면하는 곳에 명당인 이씨 일문의 산소가 있어 발복을 했지만 툭하면 간음자가 나왔다. 여근형으로 된 묘지의 국부에서는 지기가 왕성해서 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이 솟아났는데, 사실은 음수였기 때문에 자손에게 음기가 성하게 작용해서 간음자가 속출한다는 것이다. 명당을 이전하는 대신 비보의 방법으로, 묘에 음기가 왕성하다면 양기를 배함으로써 중화될 것이라 하여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시장을 묘 앞 독천리로 이전했다. 그 뒤로 간음은 종적을 끊었다 한다. 기린, 봉황, 학, 거북과 같은 서물류는 고래로부터 길하고 귀한 것으로 풍수에서도 봉황이나 학의 형상은 최길지로서 이를 위한 비보가 소중히 이뤄졌다.
경북 영천시를 둘러싼 지세가 비봉형인데, 봉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망한다 하여 봉이 좋아하는 대를 남녘 산에 심어 이를 죽방산이라 이름짓고, 또 봉은 까치소리를 들으면 이를 잡으려고 날아가지 않는다 하여 역시 시 남쪽산을 작산이라 하였다 한다. 경남 함안읍의 뒷산도 비봉형인데, 광해조 당시 군수 한강정 구가 땅을 돋우어 봉란으로 하고 그 위에다 고을의 청사를 지었으며, 읍의 동북방에 벽오동1천 그루를 심어 오동숲을 만들고, 대산리에 대를 심어 대숲을 이루어 봉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했다 한다. 전남 곡성의 진산은 비봉산이다. 이 산은 봉이 날아가는 지상인데, 봉이 날아가 버리면 곡성이 망하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지명으로 봉을 묶어놓았다. 즉 봉은 오동나무 가지 위가 아니면 살지 않으므로 봉이 쉴 수 있도록 오지리를 두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하므로 죽곡면을 두었으며, 봉은 고양이를 싫어하므로 묘천을 두고, 메추리를 보면 멈칫하므로 순자강을 두었다. 이와 같은 풍수지리설을 인용한 지명을 붙임으로써 곡성의 지기를 유지하였다. 평남 강서읍의 진산은 흡사 춤추는 학과 같은 지형이므로 산명을 무학산으로 개칭하고, 그 옆에 있는 구룡산을 서학산으로, 읍내에 있는 미륵지를 명학지로 각각 개칭하는 한편, 강서평야로 흐르는 수교천 북안의 작은 화산을 깎아 원추모양으로 수축하고, 돌을 달걀모양으로 깎아 산에 묻어 학란구라 명명했다 한다.
전남 여수반도의 남서부 반도와 이 반도에 연속되는 섬들은 풍수설에 유래되는 지명이 많다. 닭머리, 백야도, 제리도, 개도, 금오도, 안도, 소리도 등이 이러한 풍수지명이다. 이 지명들은 각각 닭-범-멧돼지-개-자라-기러기-소리개로 연결되어 풍수상 서로 견제한다고 한다. 서울의 성북역 부근에는 흑동, 연촌, 필암산이 있어서 세 지명이 서로 먹, 벼루, 붓으로 지세의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 지기의 결함을 보완함으로써 국운의 왕성을 노려 비보한 송도 대궐의 예를 보면, 개성 만월대의 지세가,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간다는 소위 노서하전형이라 하는데, 이는 부귀 안락하고 자손이 번창할 명당으로 동남쪽 자남산이 늙은 쥐의 새끼 형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새끼 쥐가 위협받거나 어디로 가면 어미인 늙은 쥐가 안심을 한다. 늙은 쥐가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은 만월궁과 그 도성이 평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궐과 도성이 오래도록 평안하자면 늙은 쥐가 오래도록 안거해야 한다. 그러자면 자남산의 새끼 쥐를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도성에는 소위 오수부동이라는 비보의 방법이 강구되었다. 자남산이란 지명 자체가 쥐를 뜻하는 것인데, 그 산을 중심으로 고양이, 개, 범, 코끼리의 네 유형을 배치했다. 쥐는 고양이가 노림으로서 움직이지 못하고, 고양이는 개가, 개는 호랑이가, 호랑이는 코끼리가 노려서 움직일 수 없고, 코끼리는 쥐가 제압해서 움직이지 못한다. 어느 한 짐승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세력의 견제로 균형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라면 자남산의 새끼 쥐는 하등의 위험도 없고 어디로 달아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월대는 지금 폐허이고 자남산 주변 네 짐승의 유형도 흔적이 없다. 개성 시내에 묘정, 구암, 호천, 상암이란 지명이 있는데, 자남산과 함께 고려가 비보한 흔적이다. 개풍군 중면 식현리 파평 윤 씨의 조상의 묘는 금릉으로 불리는데 형상이 꿩이 엎드린 복치형이다. 묘지의 후방에는 수리봉이, 전방에는 매봉이, 그 좌측에 황견곡이 있다. 개는 수리가, 매는 개가 노리기 때문에 꿩은 엎드린 채 아무 불안도 없이 새끼를 깔 수 있다는 형상, 즉 삼수부동인 길지이자 자손이 번성한다는 무덤이다. 이 무덤의 주인은 파평 윤씨의 30몇 대 조이다. 그의 고향인 경주로 운구 하는데 이 지점에 이르자 상여가 붙어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묻힌 자리가 바로 진혈이었다. 조선조 최후 순종의 비가 낙선재에 살던 순정효 황후 윤 씨이다. 서울 북 아현동 어귀에 있는 굴레방다리는, 풍수설에 의하면, 큰 소가 길마는 길마재에다 벗어놓고, 굴레는 이 곳에다 벗어논 다음, 서강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가서 누웠다고 한다. 이 태조가 도읍 터를 물색할 때 하 윤이 무악재 남쪽을 적극 찬성하나, 일부에서는 명당이 좁다고 반대하니 같은 3년 (1394)에 태조가 몸소 무학대사를 데리고 와서 다시 조사하였으므로 무학재, 또는 무학현이라 한다고 한다. 홍제동에 있는 모래내의 이름을 따서 모래재 또는 한자명으로 사현이라 한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 동 월이 이 고개를 보고 "하늘이 천 길의 한 관문을 만들어 한 사람의 병사가 천의 군사를 누를 만 하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영조 45년(1769)에 임금이 그의 부왕숙종의 무덤인 명릉의 역사를 시작하고 몸소 이 고개에 올라서서 그 쪽을 바라보며, 이 고개의 이름을 추모현이라 명명하였다. 길마재는 산의 모양이 길마처럼 생겼으므로 길마재, 또는 한자명으로 안산이라 하는데, 명종 때 예언자 남사고의 말이 "서울 동쪽에 낙산이 있고, 서쪽에는 안산이 있으니 반드시 당파가 생기는데, 낙자는 각마이니 동인은 갈라지고, 안자는 혁안이니 서인은 혁명한 후에야 안전하게 되리라"하였는데, 과연 동인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서인은 인조반정 후 안정되었다. 한편,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이 산을 [어머니의 산]이란 뜻으로 모악이라 하고, 이 산의 남쪽 고개를 떡고개, 남산의 동쪽 고개를 벌아령이라 하여, 집을 나가려는 어린애를 어머니가 떡으로써 꾀는 한편, 때리겠다고 얼러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서울 서대문구 갈현동의 궁말에서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중도의 벌고개는 경릉의 청룡이 되는데, 낮고 약하여 사람이 다니면 더욱 낮아질 염려가 있다 하여 못 다니게 금족령을 내리고, 만일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큰 벌을 주었으므로 벌고개 또는 버리고개라 했다 한다. 한자명으로는 벌현 또는 봉현이라고도 한다. 또 이곳은 옛날 범이 많이 나타나서 그 피해가 많았는데, 세조 11년 (1465) 8월 6일, 임금이 거동하여 병조판서 김 질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 범을 에워싸게 하였는데, 별안간 빠져나갔으므로, 임금이 친히 봉우리에 올라가서 모든 장수를 지휘하여 범을 잡았으나, 군사 두 사람이 범에게 상하니 내의를 보내 치료하고, 먹을 것도 하사했다는 고사가 있다.
또 서울의 갈현동에서 구파발로 넘어가는 박석고개는 풍수지리상 서오릉의 목이 되어 낮으므로 이 산맥이 더 깎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박석(얇고 넓은 돌)을 깔았다 하며, 창경원 정문 북녘 곧 월근문 쪽에 있는 박석고개도 경모궁(경모전)의 입수목이 되는데, 낮은 지맥을 보호하기 위하여 박석을 깔았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또 지금 청운동에 있는 창의문(자하골에 있으므로 자하문이라고도 함)도 태조 4년(1395)성을 쌓을 때 문 위에 나무 닭을 새겨 걸었는데, 이는 풍수설에 이 문밖의 지형이 지네 모양으로 되었으므로 그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닭과 지네는 상극이므로 그렇게 하였다 하며 인조 반정 때 의군이 이 문을 뚫고 들어왔었다. 또 한강은 한, 위에서는 대수, 광개토왕비엔 아리수, 백제 문헌엔 욱리하, 신라 문헌엔 상류를 이수, 하류를 왕봉하, 고려 때는 열수라 하였고 한수, 한강은 한문이 유행된 이후의 이름인 듯 하고 한산하, 북독이란 이름도 전한다. 지방 도읍의 배와 관계되는 지명으로 공주는 행주형이기 때문에 그 부근의 산 이름에는 배와 유관한 것이 많다. 즉 읍내의 남쪽에 있는 산은 주미산이고, 서북에 있는 산은 정지산이며, 음내에 사공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전북 무주는 전칠둔산, 후칠둔산이 있고 읍터는 배를 띄운 모양으로서 읍내동은 그 때문에 재운이 영구히 그치지 않는다고 전한다. 청주에는 배를 상징하기 위하여 고려 광종13년(962)에 세운 용두사 지철당간( :국보 41호)이 지금도 시내 남문로 한복판에 유적으로 남아 있고, 나주시도 남문동 길가에 고려 초 도선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석당간(보물 49호)이 남아 있다. 서울 남산의 꼭대기는 그 모양이 누에 머리처럼 되어 있어 속칭 잠두산이라 하는데, 이 산의 지덕을 배양하기 위해서 뽕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해서 사평리에 많은 뽕나무를 심어 여기를 잠실이라 이름하였다. 현재 잠원동 일대이다.
이미 살펴온 대로 한 고을이나 취락의 지리가 불길하거나 불만족한 상태라 해도 이미 주거의 집단이 생활과 직결되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옮길 수도 없으므로, 풍수설은 길지를 다른 것에 구해서 옮기지 않더라도 불만스런 요인을 보충하는 비보, 즉 지력을 보하거나 불길한 요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풍수상의 흉한 기를 인위적인 조작으로 눌러 이기는 압승의 방법을 사용했다. 비보의 관념은 풍수설뿐 아니라 고대 원시민족이 어떤 영력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것을 지님으로써, 약한 힘을 강하게 하고자 하는 차력신앙 내지 주부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행주형 고을의 서조가 날아가지 않게 난구를 만든 것이나 허한 곳을 보하거나 살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 봉토하여 조산하고 또는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드는 것도 비보의 예로서, 안동에는 비보조산이 15개나 있었다 한다.
삼각산 규봉에 대항키 위해 개성에서 등을 놓고 개를 만들어 규봉을 향하게 한 것이나, 개경의 왕기를 위해 한양 땅에 오얏나무를 심어 베어 버린다거나, 선산의 인재 배출을 꺼려 맥을 끊고 쇠못을 박아 정기를 눌렀다는 일 등이 모두 압승의 예라 할 것이다. 국도나 고을의 경우 농촌취락과는 달리, 그 규모가 크기 때문에 지리상의 흠은 있기 마련이고, 고을마다 많은 비보압승의 예가 허다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행주형 고을의 배와 관계 있는 지명, 서조형 고을의 봉황이나 학과 관계 있는 개명, 개성 만월대, 자남산을 중심으로 배치한 지명 등, 어떤 형상에 작명 또는 개명을 함으로써 비보나 압승이 된다면 그만치 손쉬운 일이 없었다. 이러한 풍수설에 의한 관념상 유희의 성행은 전국 고을마다 깊이 조사하면 그 실례가 허다할 것이다.
이 밖에도 과거 한국인의 민간 신앙으로 뿌리 깊게 스며든 풍수 지리의 의식 구조는 전국 도처에 풍수 지명의 유적을 남겼다. 전국적으로 계족산, 옥녀봉, 만매, 비봉산, 와룡산, 검산, 계룡산, 우산, 구봉산, 구룡산, 복귀정, 천보산, 응암, 치악, 작천, 명당리, 금오산, 기고산, 금계 등은 다 풍수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지명이라고 할 것이다. (울주지명유래, 1981. 강길부)
http://www.ulsankang.pe.kr/books_02_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