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주말극(이하 KBS 주말극) ‘신사와 아가씨’가 3월 27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냥 ‘막을 내렸다’가 아니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라 말한 것은 2021년 9월 25일 시작해 장장 6개월간이나 전파를 탄 ‘신사와 아가씨’여서다. 지난 해 12월 5년 만에 대하드라마가 부활돼 지금 ‘태종 이방원’이 방송중이지만, 고작 32부작일 뿐이다.
KBS 주말극은, 이를테면 시즌 구분없이 6개월간이나 방송되는 유일한 드라마인 셈이다. 덩달아 나로선 토ㆍ일요일 밤 메인 뉴스를 온전히 보지 못하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방송시간이 겹쳐서인데, 내가 KBS 주말극을 보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콘크리트 같은 인기 때문이다. 30%대 시청률은 KBS 주말극만의 전매특허처럼 된 지 꽤 오래 됐다.
‘신사와 아가씨’는 시청률 22.7%(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이하 같음.)로 출발했다. 그런데 1회 시청률이 최저 기록으로 나타났다. 이후 인기가 꾸준히 상승했다는 얘기다. 최고 시청률 38.2%(48회)를 찍어 40% 돌파 기대감을 높였지만, 거기까지였다. 최종회 시청률은 36.8%다. 평균 시청률 31.28%로 직전 KBS 주말극 ‘오케이 광자매’의 26.88%를 훌쩍 뛰어 넘었다.
그래서 그런지 당초 50부작이던 ‘신사와 아가씨’는 2회 연장돼 52부작으로 종영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 중계로 2차례 결방했지만, 다른 방송사 금토드라마인 ‘트레이서’ㆍ‘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과 다른 점이 읽힌다. 3차례나 시간을 앞당긴 편성으로 결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높은 시청률과 관련 있는 전략적 편성이지 싶다.
그러나 “요즘 국민 두 명중 한 명이 본다는 한 드라마”(서울신문, 2019.3.13.)인 ‘하나뿐인 내편’(2018.9.15.~2019.3.17.)에 비해선 다소 저조한 시청률이라 할 수 있다. ‘하나뿐인 내편’은 최고 시청률 49.4%를 찍으며 꿈의 시청률이라는 50%를 기록할지 언론(신문)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던KBS 주말극이다. 평균 시청률은 32.3%다.
‘하나뿐인 내편’ 역시 김사경 작가의 작품이라 굳이 비교해본 것이다. 나는 ‘하나뿐인 내편’에 대해 ‘막장 논란 국민 드라마’라고 쓴 바 있다. 그렇다. 김사경은 ‘막장’으로 유명한 스타 작가다. ‘미우나 고우나’(2007)ㆍ‘오자룡이 간다’(2012) 같은 일일극과 ‘장미빛 연인들’(2014)ㆍ‘불어라 미풍아’(2016~2017)ㆍ‘하나뿐인 내편’ 등 주말드라마가 그의 히트작들이다.
스포츠서울(2022.3.16.)은 “작가 특유의 필력과 뒷심이 좋은 반면, 개연성 없는 스토리 전개와 억지스러운 설정 때문에 시청자로부터 원성이 높다”고 하면서도 “드라마는 연일 휘몰아치는 전개와 엔딩으로 높은 몰입감을 선사, 시청률과 화제성을 동시에 잡으며 막장을 쓰려면 이 정도로 써야 한다는 선례를 남기고 있다”고 말한다.
‘신사와 아가씨’는 41세로 세 아이 아빠이면서 홀아비인 이영국(지현우)과 갓난이때 친모 애나킴(이일화)으로부터 버려졌던 27살 청춘 박단단(이세희)이 백년가약을 맺는 이야기다. 14살 차이의, 누가 봐도 이상한 결혼이지만 그런 해피엔딩은 일단 흐뭇하다. 이상한 결혼에 대한 당위성 부여라든가 면죄부 주기에 핀트를 맞춘 전개 덕분이다.
오히려 영국과 단단, 이세련(윤진이)과 박대범(안우연)이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과정이 지루할 정도로 반복돼 짜증나기까지 하는데, 그것만 놓고 보면 막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나이차가 많거나 연상녀인 부부를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지 않은가? 다소 황당해 보이면서도 그들의 이상한 결혼이 흐뭇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물론 기억상실 같은 질병을 장난처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췌장암의 시한부 환자를 내세우는 따위 상투적이면서도 식상한 전반적 이야기 축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선뜻 이해가 안 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억지도 많다. 가령 친자식도 아닌 세종(서우진)을 계속 키우기 위해 50억 원을 친부 진상구(전승빈)에게 주는 영국이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재벌 모습과는 상반되는 착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개털’인 대범을 죽자사자 쫓아다니며 기어이 결혼하고야마는 세련의 사랑 올인에서도 확인된다. 온갖 속물적 캐릭터로 나오는 왕대란(차화연)의 막판 참회도 그 연장선이다. 악행의 재벌은 뉴스나 다른 드라마에서 익히 보던 것일 뿐이다.
확실한 권선징악이 눈길을 끌기도 한다. 가령 남편 박수철(이종원)과 핏덩이 딸을 버린 애나킴이 수술도 받지 못한 채 췌장암 악화로 죽는 식이다. 차건(강은탁)의 뱃속 아이로 사기를 친 조사라(박하나)는 유산과 함께 외국으로 떠나고, 대란의 금괴 등을 훔친 ‘도둑년’ 이기자(이휘향)는 감옥에 가있기도 하다. 요컨대 자식을 버리는 등 나쁜 짓하면 천벌을 받는단 얘기다.
단, 영국으로부터 50억 원을 받아먹고 떨어진 상구는 예외다. 거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변화된 핏줄에 대한 인식이다. 낳기만 한다고 부모가 아니긴 하지만, 진짜로 그럴까. 친부는 양부로부터 돈이나 받아처먹는 존재여야 하나. 애나킴은 그 반대지점에서 때늦은 모성(母性)을 보여 상구와 대조를 이루지만, 왜 그런 일들이 드라마에선 비일비재 벌어지는지 모를 일이다.
이 드라마를 보며 되게 불편했던 건 따로 있다. 노년 캐릭터를 하나같이 속물을 넘어 ‘진상’으로 그리고 있는 점이다. 60대 초반인 왕대란ㆍ이기자ㆍ장미숙(임예진)이 그들이다. 그들에겐 연륜이나 지혜로운 어른으로서의 모습이 없다. 생각이라곤 1도 없는 ‘푼수’로 희화되거나 툭하면 상대방 머리채부터 잡고 보는 싸움닭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노년 등장인물 모두에 대한 이런 노골적인 폄하가 어느 드라마에 또 있었던가 싶다.
앞에서 ‘억지스러운 설정’을 말했는데, 사실은 13살 소녀 단단과 20대 중ㆍ후반 영국이 만나는 1회부터가 그렇다. 그들은 집 찾느라 골목길을 자전거로 뺑뺑 돌고 두더지 잡기놀이까지 한다. 가는 영국을 보며 단단인 “저 아저씨를 언젠가는 꼭 만날 것 같다”고 말한다. 나름 복선을 깐 셈이지만, 그럴 듯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대범보다 7살이나 더 많은 세련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마침내 결혼한 건 흐뭇한 일이지만, 사실 그들은 클럽에서 처음 만나 바로 그 밤에 ‘이층집’을 지은 사이다. 속된 말로 ‘날라리’쯤 되는 세련이 엄마와 인연을 끊겠다고 하면서까지 억척을 부려 대범과 기어이 부부가 된 건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환상적이다.
억지는 또 있다. 영국과 단단이 겪는 우여곡절 속에 아이들이 ‘특공대’로 활동하고 있는 점이다. 문제투성이이던 아이 셋이 가정교사 단단을 통해 착하게 변신해가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너무 어른스러운 역할 극대화는 좀 아니지 싶다. ‘어린이날’도 아닌데,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게 그려진 핀트가 노년 캐릭터 폄하와 뚜렷하게 대조된다.
사라의 임신도 뜬금없어 보인다. 영국이 애라며 사기친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사라가 임신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애초에 벌어지지 않아서다. 18회를 보면 사라가 차건과 함께 모텔에 들어간 건 맞다. 그런데 사라는 침대에서 자고, 차건이 그 옆 의자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게 전부다. 이층집을 지은 건지 아닌지 애매한 묘사였다.
15세 시청가에 온 가족이 보는 주말극이란 점을 의식해 그리했는지 몰라도 이런 리얼리티 결여는 막장 전개와 별개로 심각한 문제다. 남녀가 키스만 해도 임신하는 건 아니지 않나? ‘키스만 해도 임신한다’는 호도가 우려되기까지 한다. 키스만 해도 임신하는 따위, 이런 리얼리티 결여의 묘사는 모든 드라마에서 없어져야 한다.
리얼리티 결여는 시간이나 일에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 자유로움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대기업 운전기사이면서도 상구가 사라 앞에 나타날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등장하는 차건이 그렇다. 그런 사랑을 한 차건인지라 아이가 유산되자 사라와 헤어지고, 외국으로 떠나는 걸 지켜만 보는 게 의아하다. 사라를 사랑한 건 순전 뱃속 아기 때문인가?
2회 연장까지 했는데, 그걸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안타까움도 자리한다. 단단의 프로포즈 받는 상상이라든가 딱밤 때리기, 결혼식 하객들까지 놀이공원 가서 각종 놀이기구를 타며 즐기는 장면 따위 등 변죽이 심하더니 정작 넣어야 할 걸 빼먹었는지 종영후 ‘에필로그’를 따로 공개해서다. 글쎄, 이런 드라마 결말은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에필로그’ 내용도 영국의 세련이 지분 돌려주기 빼곤 꼭 필요한 장면들인지 의문이 생긴다. 결말에서 영국의 세련이 지분 돌려주기가 없어 내심 아쉽게 생각해서다. 영국 부부의 쌍둥이 낳기와 애나킴의 차연실(오현경)에게 남긴 100억 유산도 그렇지만, 특히 차건이 2호점 개업과 함께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장면은 불필요해 보인다.
최고 시청률 38.2%(48회)를 찍은 ‘신사와 아가씨’도 발음상 오류를 피해가지 못한 건 유감이다. “저게 무슨 비시(빛이→비치)야”(15회), “꼬시(꽃이→꼬치) 너무 예쁘네요”(23회), “지하 창꼬(고)에다 가둬요”(29ㆍ30회), “너니까 특별히 가리켜(가르쳐) 주는 거야”(50회) 등이다. 여러 배우의 발음상 오류라 대본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여러 이야길 했지만, ‘신사와 아가씨’가 높은 인기를 끈 건 무엇보다도 시청자들을 웃겼다 울리는 전개였지 싶다. ‘욕하면서도 본다는 막장’대본도 무시할 수 없겠는데, 연기자들이 그 중심에 있음은 물론이다. 가령 500대 1의 경쟁을 뚫고 박단단 역에 낙점됐다는 이세희는 처음 보는 배우지만, 열일을 해냈다.
다만, 지현우와 키 차이가 너무 커 시청자들을 웃겼다 울리는 이세희의 열연과 상관없이 포옹이라든가 나란히 걷기 등 좀 어색한 그림이 되지 않았나 싶다. 드라마에서 꾸준히 활동해온 미스코리아(진, 1989) 출신 오현경의 단단을 키워준 계모 역도 스펙트럼을 넓히는 연기로 이세희 못지않게 웃음과 함께 콧등을 시큰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