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덧배기춤 명수 문장원 옹 |
타고난 한량끼로 공부 뒷전 기방 출입 |
나이 관계없이 교분터고 소리·춤 배워 |
2004/11/09 030면 11:14:07 프린터 출력 |
내년이면 미수(88세)이신 부산의 대표적인 춤꾼 문장원 선생과의 첫 만남은 91년 5월 부산민속예술보존회의 동래들놀음 정기공연때였다.
못내 몸이 불편하여 원양반(큰양반)역을 제자에게 맡기시고 안스러운 마음으로 놀이마당을 지켜보고 계시던 선생의 애잔한 눈빛을 마음아파한 것도 그때부터이다.
당시 나는 '서울놀이마당'을 거의 주말마다 오르내리며 전국의 무형문화재가 연회되는 모습을 채록도 하고 드로잉하고 있었으므로 민속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을 때였다.
그러므로 이즈음엔 부산의 수영과 동래 민속들이 여느 곳의 민속 못지않게 꼴이 훌륭하고 그 예술성이 빼어남을 어슴프레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런 한편 들놀음 양반과장의 어려운 대사 의미와 동래 특유의 장단과 춤태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때부터 이들이 벌이는 민속마당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겠다고 다짐하던 터였다.
문장원선생. 며칠을 앓아눕더라도 일단 원양반 탈을 썼다하면 멋진 춤판을 벌이던 문선생은 동래에서만 26대째 살아온 문익점공의 26대손이다.
증조부때부터 큰 포목상을 하여 부러울 것 없이 큰소리깨나 치던 토반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유학까지 보내려던 외아들이 공부는 뒷전이라서 동래고보 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을 하고도 얄궂은(?) 천석꾼 사촌 또래들과 어울려 기방출입부터 하니 집안 어른들은 초비상이 걸렸단다.
그시절 기방의 출입은 돈 있다고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어서 먼저 풍류와 멋을 알아야만 했다.
기생들의 기예수업도 높아서 악가무(樂歌舞)는 물론이고 시서화(詩書畵)에도 높은 경지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소년 문장원이 이때 만난 분들이 김기옥(말뚝이춤,아버지 친구),김귀조(양반춤),이규태(말뚝이),신재근(양반춤) 제씨들이었다니 그저 소리가 좋고 춤이 좋아 나이와 관계없이 교분을 터고 멋진 춤을 배웠던 것이다.
강창범(가야금,아쟁,북),강태홍(가야금),최창술(판소리)씨 등 당시 부산 국악계의 쟁쟁한 교방 기악선생들의 반주로 추는 춤은 신바람이 났으리라. 이 시대 최고로 꼽히는 선생의 허튼춤 덧배기춤은 이 시절 최소학씨한테서 배운다.
자지러지다가 숨을 멎고 다시 잇는 동래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오른팔과 다리가 번쩍 치켜들리면서 왼손이 등허리에 닿았다가 배기면 멋진 덧배기춤이 엮어진다.
나는 이런 춤태를 풀어내는 선생의 모습을 서울과 부산 등의 따로 마련된 홑춤무대에서 지켜보아 왔다.
타고난 한량끼로 동래음악연구회도 꾸며서 남도지방을 휩쓸고 다닌 선생은 여러 공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덧배기춤 한판의 신바람을 잊을 수가 없었고 고민 끝에 만사 제쳐두고 동래민속연구회(보존회의 전신)를 창단하여 동래들놀음을 복원하고 후진양성에 신명을 쏟아 부었다.
일제때 중단된 동래들놀음의 복원은 문장원선생 일생일대의 업적이었다. 동래학춤과 동래지신밟기도 재현하여 시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금강공원안에 버젓한 전수관과 놀이마당도 갖추었다.
요즈음에 이르러 동래한량춤 공연때에 제자들의 부액을 받아 잠깐이나마 그 특유의 덧배기춤을 추어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정작 보존회 식구들 중 그 누구도 선생의 춤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이가 없어보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러다간 한때 장안에서 소문난 문장원 독무의 덧배기춤 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저어되는 것은 지나친 걱정일까.
부산일보에서 옮김..... |
첫댓글 잘 보존하면 좋을텐데 사라저가면 어쩌나 안타까워서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