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지

[김재학 소설가]

                도래지 

                                                      김재학

그녀가 몸서리치도록 그리울 때면 추억이 깃든 에덴공원 솔바람 음악다방에 들러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다.

몇 번이고 준호 선배를 찾아가 그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억지로 누르고 있는 선배의 자책감을 깨우지는 않을까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철새들이 또다시 몇 번을 오가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사람들은 IMF를 옛날 일로 기억했고, 내 추억의 전부였던, 움푹 팬 보조개에 수줍음을 담고 다니던 그녀의 색채도 엷어졌다.

세월이라는 페인트가 아픈 사랑을 추억으로 덧칠하는 사이 나는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모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가끔 찾는 을숙도는 하루하루 얼굴을 바꾸었고, 다대포 역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면서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낙동강 하구언의 철새를 놓고 환경단체와 개발단체 사이의 논쟁이 연일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었고, 하단의 밤거리는 칙칙함과 촌스러움을 벗고 붉은 립스틱과 미니스커트로 갈아입었다.

립스틱을 쫓는 돈들이 하단으로 몰리면서 연일 해넘이가 끝나면 하단 일대는 완전히 허물을 벗은 매미처럼 불야성을 이루었다.

낙동대교는 연일 교통체증으로 운전자의 불만을 가져왔고 녹산공단 조성, 명지신도시 건설, 신항만 등으로 시급한 교량 건설이 탄력을 받았다.

환경단체와 개발단체의 타협 속에 교량이 건설되고 을숙도의 에코센터, 노을정의 해넘이, 다대포의 낙조 분수, 감천문화마을 등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치르며 철새처럼 관광객을 불러 모았다.

세월은 KTX처럼 흘러갔고 낙동강 하구언을 찾는 고니는 굴착기가 땅을 파든지 말든지 철이 되면 날아들었다.

승학산에 칡넝쿨이 억새 대신 싹을 내밀고 을숙도의 잔디 사이로 쑥이 고개를 내미는 봄이었다.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수도를 지나던 세월호가 기울어진 상태로 텔레비전 화면에 잡혔다.

모두가 승선한 승객 전원이 무사히 구출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가슴을 조였다.

세월호는 세월의 무게에 지쳤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객들을 태운 채 천천히 가라앉았다.

세월호가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그 순간에도 방송국 취재진은 취재를 했고, 해경은 세월호 주위에서 대기를 했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했다.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되었다.

그날 이후 습관처럼 누군가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연구실 벽걸이 TV를 켜놓았다.

그날도 TV 화면은 세월호에 관련된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TV 화면에는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의 초췌한 모습과 그 앞에서 자장면과 피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욕지기를 느낀 나는 서둘러 리모컨을 찾아 TV 전원을 끄고 메스꺼운 속을 달래며 주어진 강의를 위해 강의실로 향했다.

“교수님, 이게 정상적인 나라입니까?”

강의를 시작하려는데 한 학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 오직 나이 먹은 어른으로서 학생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학생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하고 강의를 포기한 채 강의실을 나왔다.

어른으로서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뒤집어쓴 채 천천히 복도를 걷는데 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전화를 받으라며 엉덩이를 두드렸다.

휴대폰 화면에 찍힌 낯선 번호가 눈을 껌벅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화면에 드러난 번호는 전화를 받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를 찾고 있었다.

“저 실례지만 강종민 교수님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나의 대답에 상대방의 반응이 침묵했다.

나는 실없는 사람이라 여기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때 다시 점잖은 목소리가 통화를 이어갔다.

“저, 정준호입니다.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순간, 누군가를 떠올리려 기억을 더듬었다.

준호 선배의 얼굴보다 먼저 그녀의 얼굴이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네, 선배님……”

선배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친근감이 간극을 두고 이어졌다.

선배의 목소리가 다시 반가움과 어색함을 동반한 채 전화기 속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된다면 저녁에 잠시 만나고 싶은데…….”

선배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머릿속으로 남은 스케줄을 재빨리 점검했다.

“네 가능합니다.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시면 저가 찾아가겠습니다.”

준호 선배는 문자로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움인지 원망인지 애증의 양가감정에 빠진 나의 손이 습관처럼 호주머니를 더듬으며 담배를 찾았다.

호주머니에 담배는 없었다.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담배 끊은 기념으로 아내가 선물한 작은 대바구니 안의 사탕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사탕이 다소 흐트러진 마음을 진정시켰다.

준호 선배가 보낸 문자에 적혀 있는 장소까지의 소요 시간을 계산하며 연구실을 나섰다. 선배는 나를 배려해 내가 근무하는 승학캠퍼스와 가까운 하단 일식집으로 약속 장소를 정해두었다.

선배가 약속한 일식집은 동료 교수들과도 자주 들리곤 했던 곳이었다.

캠퍼스의 비탈길을 내려와 대로변을 걸으면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에덴공원을 바라봤다.

세월을 먹고 버티어온 아름드리 소나무가 추억을 숨긴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슴 한 곳이 대못에 찔린 것처럼 아려왔다.

하단 오거리 교차로는 늘 사람과 차로 붐볐다.

약속한 교차로 근처의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반갑게 맞이하는 종업원에게 준호선배의 이름을 이야기하자 선배가 기다리는 룸으로 안내했다.

준호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느낌표와 물음표를 가득 담아 선배가 내민 손을 잡았다.

선배는 술을 마시는 내내 시선을 테이블 위에 두고 저자세를 유지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건조한 분위기였다.

긴 부재의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 꽤 많은 술잔을 비웠는데도 이영의 대한 빈 그리움 때문인지 여전히 머리는 맑고 가슴은 허전했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긴 시간 삭혀두었던 이영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야 선배는 나의 눈을 바라봤다.

선배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의 술이 일렁이며 넘쳤다.

나는 말 없이 휴지를 뽑아 선배 앞으로 내밀었다.

선배는 수전증 환자처럼 손을 떨며 휴지를 받았다.

애잔하게 바라보는 선배의 눈은 노을정에서 바라보는 해넘이처럼 충혈되어있었다.

선배는 흔들리는 술잔을 비우고 붉어진 시선을 비워진 잔 위에 걸쳐둔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강 교수, 너무 놀라지 말게. 이영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네.…….”

선배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술잔을 비웠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마른 침 대신 내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비웠다.

답답한 심정에 해묵은 감정을 섞었다.

“선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영이 죽다니요. 좋은 곳에 시집가 잘 사는 사람이 왜 갑자기 죽었다는 것입니까?”

긴 시간 그리움으로 삭여왔던 묵은 감정이 애증으로 바뀌면서 나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선배는 다시 비워진 잔에 술을 채우고 힘들게 말을 이었다.

“동생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죽은 후에야 알았네. 인당수에 팔려가는 심청의 심정으로 시집간 동생은 결혼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네. 광태라는 친구는 동생을 결혼에 대한 환상으로 선택했고, 동생은 광태를 은혜로 선택했으니……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이었네. 두 사람 사이에 아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인데…… 당일에도 부부는 이혼문제로 크게 다투었다네. 그렇게 말다툼하고 집을 나간 동생은 다음날 통도사를 지나 백운암으로 가는 길가에서 차와 함께 발견이 되었다네. 동생의 장래가 끝난 후 더는 동생과 엮이는 것이 싫다며 광태는 나와의 관계도 멀리했네. 그런데 얼마 전 동생의 친구 애란이 사무실로 찾아왔네. 애란은 동생이 죽은 후에 받은 택배라며 유서처럼 남긴 편지 한 통과 잘 포장된 나무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네. 아마도 동생은 애란에게 택배를 보내면서 죽음을 마음에 두었던 것 같네. 배달된 상자에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가 들어있었네. 동생이 유서처럼 남긴 편지에는 두 사람이 함께했던 장소에서 이 편지를 태워주었으면 하는 부탁이 있었네.”

힘들게 말을 마친 선배의 눈가에 머물고 있던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말 없이 빈 잔에 술을 채우고 비웠다.

아무리 잔을 비워도 이영에 대한 애증의 소용돌이가 멈추지 않았다.

말 없이 상자에 얹어두고 있던 선배의 시선이 나의 눈을 찾았다.

선배는 나의 눈에 간절히 부탁했다.

“염치없지만 자네가 이 일을 맡아주었으면 해서 가지고 왔네.”

나는 선배가 내민 편지와 작은 나무상자를 건네받고 30년 전 이영을 조용히 불러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이영을 만나기 위해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길가의 버드나무에도 미안할 정도였다.

약속 장소인 나그네 주점에는 그녀 말고도 몇 쌍의 커플이 텃새처럼 밀어를 나누고 있었다.

사진 속 그녀는 볼록렌즈가 되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풍금 옆 둥근 나무 탁자 위에 턱을 받친 채 얼기설기 엮은 갈댓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을 만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종민입니다.”

설렘을 감당하지 못하는 떨림이 들킬까 봐 나는 일부러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실내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정이영입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답하는 그녀의 움푹 팬 보조개에 수줍음이 한 움큼 담겼다.

“……”

그녀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준비한 수많은 낱말이 거짓말처럼 하얗게 지워졌다.

순간, 준호 선배의 협박성 당부도 잊은 채 침묵을 대신할 수 있는 술과 안주를 서둘러 주문했다.

상대방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문하는 나를 멀뚱히 바라보던 그녀가 뭔가를 확인하겠다는 톤으로 나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종민씨, 오빠가 저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

그녀는 본인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앞에 놓인 잔을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마셔버렸다.

나는 잔을 든 채 금방 비워진 그녀의 빈 잔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해요. 잔이 비었는데 빨리 채우지 않고!”

술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그때야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하면서 술은 절대 먹이지 말라고 했던 준호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선배는 본인의 말을 듣지 않고 술을 먹였다간 그에 상응한 낭패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덤으로 했었다.

나그네 주점을 나왔을 때까지 아니 주점을 나와 갈대밭에 들어섰을 때까지 분명 그녀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녀는 갈대와 교감이라도 나눌 것처럼 갈대밭으로 성큼 발을 내딛뎠다.

그녀가 몇 발자국이나 옮겼을까? 갈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영 씨.”

나뭇등걸처럼 쓰러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영 씨,……”

취기를 좇는 놀람과 함께 갈대숲 여기저기 연인들이 만들어놓은 미로 속 붉은 속삭임이 귀속을 간지럽혔지만, 반응 없는 그녀의 모습에 은근히 끓어올랐던 정염이 나 살려라 뒷걸음질하고 그 자리를 선배의 경고가 잽싸게 치고 들어왔다.

혹 술 알레르기라도 있는가 싶어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그녀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녀의 모습은 엄마의 젖을 배부르게 먹고 잠든 아이 같이 편안해 보였다.

호흡이 조금 거칠 뿐 알레르기 같은 질병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세상모르고 잠든 그녀 옆에 바투 누워 구름을 갖고 장난질하는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취기를 느끼는 눈 속으로 금방이라도 구름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누워있었을까? 홍시 같이 농익은 그녀의 얼굴을 붉은 노을이 덧칠했다.

붉게 덧칠된 그녀의 잠든 모습은 정염을 부르는 성녀 같았다.

나는 느린 동작으로 일어나 사위를 살폈다.

버릇없이 잘난 체 남의 얼굴을 붉게 덧칠한 노을은 뭐가 그리 바빴는지 금세 서쪽 하늘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사위를 삼키자 살을 비비며 내는 갈댓잎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터질 듯 방망이질을 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 곁에 다시 누웠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우군처럼 몰려온 별들이 달뜬 가슴에 용기를 내보라며 응원했다.

응원에 힘입은 나의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려 할 때였다.

“와! 저 별들 정말 예쁘다. 나 언제부터 여기에 누워있었어요?”

하필 그 타임에 그녀가 눈을 뜨며 물었다.

나는 어색한 동작을 취한 상태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오빠가 나 술 먹으면 아무 곳에서나 잔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아! 그 말이 그 말이었군요.”

“알았으면서 왜 술을 먹였어요?”

“저는 정말 몰랐어요. 선배가 장난으로 그러는 줄 알았죠.”

“혹시 저 잠든 사이 나쁜 짓 하지 않았어요?”

“아아 뇨”

나는 흔들리며 피어났던 욕정이 들킨 것 같아 손사래를 치며 과한 동작을 했다.

“농담했는데 왜 그렇게 정색을 해요? 정말 수상한데.”

“……”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곧바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제발 멈추었으면 하는 갈댓잎 살 비비는 소리는 달뜬 나의 귓속으로 계속 파고들었다.

끓어 넘칠 것 같은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그렇게 누운 채 별을 세며 첫 만남의 여운을 남겼다.

밤새워 정성스럽게 쓴 손편지를 준호 선배 편으로 그녀에게 보냈다.

편지를 받아든 준호 선배는 배달료로 술을 사라고 했다.

나는 답장을 받은 후에 사겠다고 했다.

나의 손편지가 그녀의 손에 닿아 그녀의 마음을 받아오는 데 정확히 일주일이 걸렸다.

수업시간마다 내가 내민 손을 무심히 못 본척하던 준호 선배가 일주일이 되던 날 먼저 나의 손에 작은 꽃잎이 그려진 손편지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종민씨…… 그럼 그날 그곳에서 그 시간에 뵙겠습니다.’

편지를 읽는 순간부터 그녀와 만나기로 한 그 날이 기다려졌다.

주체할 수 없이 들뜨는 마음을 다독이며 준호 선배에게 약속한 술을 샀다.

준호 선배는 같은 학교 예비역 복학생이었다.

선배는 법학과였고 나는 사학과였다.

과가 다른 우리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교양으로 수강한 사회학 조별 과제물 때문이었다.

같은 조가 된 우린 수업이 끝나면 교내 벤치에 앉아 주어진 과제물 및 다양한 사회현안을 두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토론이 절정으로 치달으면 자연스럽게 학교 앞 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토론을 이어갔다.

누가 봐도 선배와 나의 관계가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여겨질 즈음, 선배가 지갑에서 사진 하나를 끄집어내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긴 생머리와 주먹만 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오는 여학생이 움푹 팬 보조개에 웃음을 담고 있었다.

“정말 청초하네요. 풀잎에 맺힌 이슬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정말 맑아 보여요.”

나는 사진을 본 느낌을 가감 없이 말했다.

나의 말을 듣고 있던 선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표현 한 번 거창하게 한다. 정말 그렇게 맑아 보여?”

“네, 계속 보고 있으면 보는 사람의 영혼마저 맑아질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너 사귈래?”

“선배도 참, 선배 애인을 저가 어떻게 사귑니까?”

“누가 내 애인이래? 자식, 넘겨짚기는, 내 여동생이야.”

“네, 정말요. 저 소개해주세요.”

“앞으로 너 하는 거 봐서.”

그날 이후 나는 선배의 가장 협조적인 후배가 되었고, 선배는 약속대로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첫 만남에서의 아쉬움을 달래며 얼마나 기다렸든가! 나는 혹시라도 약속 시각에 늦을까 봐 넉넉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집을 나섰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그녀의 양 볼에 움푹 팬 웃음꽃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천삼백 리 멀고 먼 길을 외롭게 달려온 낙동강 물을 연인처럼 양팔 벌려 포근히 감싸는 다대포의 넓은 바다가 시원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바닷물에 안겨 몰운대를 휘도는 낙동강 물을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짙은 청바지에 연보라색 재킷을 입고 긴 생머리를 갈대꽃처럼 날리며 버스에서 내려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이 두 눈을 꽉 채웠다.

나는 크게 용기를 내어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잡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조금은 어색하게 손을 잡은 우린 다대포와 낙동강이 만나 깊은 사랑을 하고 낳은 백사장을 다정한 고니처럼 걸었다.

그녀와 내가 솜사탕 같은 시간을 먹으며 많이 가까워 졌을 때였다.

갑자기 백사장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탄성을 지르는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서쪽 하늘에서 황톳빛 도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흘러내린 도포자락이 바다에 닿자 승천을 기다리던 용이 불을 뿜으며 용트림을 시작했다.

서쪽 하늘 끝에서 바다까지 용의 길을 터주기 위해 황톳빛 도포로 만든 하늘길이 열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해넘이의 장관에 완전히 매료된 그녀의 붉게 물든 눈동자에 황톳빛 도포가 너울처럼 춤을 추며 승천하는 용을 배웅했다.

모두가 숨죽이며 용의 승천을 지켜보는 사이 먼바다에서 찾아온 파도가 재빨리 먹빛 비단이불을 끌어와 붉은 용이 승천하고 떠난 바다를 덮었다.

해넘이의 장관 속에 푹 빠져 있던 그녀가 그때서야 나를 바라봤다.

나는 상기된 그녀의 입술을 고니가 물고기를 채듯 훔쳤다.

그녀의 움푹 팬 볼에 붉은 수줍음이 담겼다.

파도가 끌어와 덮어준 먹빛 비단이불은 다대포를 찾은 많은 연인에게 예쁘게 포장된 용기를 선물했다.

우린 무리를 벗어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바라봤다.

서쪽 하늘이 출산한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팔베개를 하고 있는 그녀의 숨소리가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나는 별을 세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을 얼굴로 가렸다.

어미 고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듯 붉은 고깃덩이를 그녀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눈을 꼭 감은 그녀는 새끼 고니처럼 입으로 들어온 먹이를 혀로써 받았다.

우리의 깊고 달콤한 입맞춤을 지켜보고 있던 별들이 부끄러운 듯 눈을 깜빡였다.

다대포의 입맞춤이 있고부터 우리는 남들처럼 공식 연인이 되었다.

그날 이후부터 우린 을숙도 갈대밭에서 입을 맞추고, 에덴공원 솔바람 음악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마음이 동하면 주점 나그네에서 술을 마셨다.

취기가 사랑의 묘약이 될 때즈음 우린 에덴공원 입구 여관에서 사랑을 했다.

그렇게 철새가 왔다 가고 또 오가는 사이 우리의 사랑도 뜨거워졌다.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뜨거워, 하루라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절정의 순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서 입영통지서를 물고 왔다.

우린 입영통지서를 솔바람 음악다방 커피잔 옆에 두고 말 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입영통지서를 눈앞에 둔 우리의 몸짓은 상처 입은 고니의 무거운 날갯짓처럼 애절했다.

입영 일자를 며칠 앞둔 토요일 오후, 나는 그녀를 데리고 통도사로 갔다.

계곡을 끼고 걷는 통도사의 소나무 길은 우리의 사랑처럼 푸르고 짙었다.

소나무가 내뿜는 파란 공기가 입영통지서에 짓눌린 마음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주었다. 통도사의 금강계단 앞에 당도한 우린 불상 없는 대웅전에 들러 봉안된 부처님의 불사리를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소원을 빈 우린 서둘러 백운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준호 선배가 고시 공부를 위해 백운암에 머물고 있었다.

우린 주지 스님의 허락으로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산사에서 보내는 하룻밤은 그 어느 날보다 특별했다.

준호 선배는 나의 안전한 병영을 기원했고, 그녀와 나는 산사의 밤하늘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입대를 앞둔 시간은 낙동강 변을 달리는 열차처럼 빠르게 달려갔다.

친구들과 나그네 주점에서 꽤 늦은 시간까지 입영 전야 송별식을 했다.

송별식을 마치고 친구들과 헤어진 나는 그녀를 데리고 동래역 주위에 있는 여관으로 갔다.

눈치 없는 알람시계가 울 때까지 우린 이별을 아쉬워하며 밤을 하얗게 태웠다.

동래역에는 철 따라 이동하는 철새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무리를 지어 둥지의 텃새들과 이별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길게 입맞춤을 했다.

움직이는 열차를 애잔하게 바라보는 텃새들의 슬픈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철새 되어 낯선 곳으로 날아갔다.

내가 날아가 도착한 곳은 외부와 철저히 고립된 커다란 새장이었다.

새장에서의 생활은 슬프면서도 거칠었다.

텃새의 군기에 주눅 든 철새들은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텃새가 되기 위해 개인적 자유와 자존감을 포기해야 했다.

4주간의 훈련을 마친 철새는 새로운 둥지를 찾아 또다시 이동했다.

사단본부, 철새를 맞아주는 텃새의 텃세는 매정하고 거칠었다.

사단 본부 수색대에 둥지를 튼 나는 가장 먼저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그리 만만치 않았다.

선임들의 눈을 피해가며 틈틈이 그녀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데 정확히 일주일이 걸렸다. 완성된 편지를 행정실에 건네준 날로부터 행정병이 보일 때마다 나의 시선은 그의 손에 가 있었다.

내가 행정병에게 편지를 보낸 지 2주가 지난 뒤 그녀가 보낸 편지가 행정병의 손을 통해 나에게 도착했다.

편지를 읽는 내내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뛰었다.

텔레비전 리모컨에서 출발하여 내무반 바닥을 닦고 군화를 닦는 닦새가 될 때까지 몇 번이고 그녀에게 면회를 오라고 썼다가 지웠다.

이등병은 면회를 와도 외출만 허용될 뿐 부모가 아닌 이상 외박이 허용되지 않았다.

긴 푸념과 함께 일병이 될 때까지 남쪽 하늘에 걸려 있는 별을 바라보며 그녀를 생각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일병의 계급장을 가슴에 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에게 면회 오라는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은 그녀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면회를 왔다.

풀잎처럼 바람에 나부끼던 긴 생머리를 올림머리로 하고 갈색 뿔테안경을 쓰고 나타난 그녀에게서 성숙한 여인의 향이 났다.

그녀는 평소 내가 좋아했던 닭강정과 내무반 전우들에게 줄 송편을 준비해왔다.

내무반에 송편을 전달하고 행정반에서 외박증을 발급받아 전우들의 부러운 눈총을 뒤로하고 부대 정문을 나섰다.

정문을 벗어난 나는 서둘러 면회객이 타고 온 택시를 타고 부대와 가장 가까운 금촌으로 갔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선임자들로부터 습득한 정보를 이용해 금촌에서 가장 분위기 좋다는 여관으로 곧바로 향했다.

참아왔던 그리움이 거대한 밀물처럼 밀려와 바위에 부딪혔다.

다음 날 새벽닭이 울고 해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침대를 반이나 점령했을 때까지 을숙도의 갈대처럼 우린 서로의 살을 비볐다.

염치없는 배꼽시계의 울부짖음이 없었다면 우린 그렇게 계속 있었을 것이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여관을 나온 우린 가까운 식당으로 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금촌역 앞에 있는 역전 다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뿔테안경 속에 있는 그녀의 검의 눈동자에 둥지를 튼 나는 오후 세 시가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부대 정문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그녀를 달래 열차에 태워 보내고 천천히 부대로 복귀했다.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 옆에 배꽃같이 흰 그녀의 속살이 추수가 끝난 빈 논 가장자리에 쌓아둔 짚가리 위에 아른거렸다.

그녀가 두 번 더 면회를 오고 내가 세 번의 휴가를 갔다 온 늦가을이었다.

월동준비를 위해 부대 뒷산으로 사리 나무 작업을 나간 훈련소 동기, 박 상병이 행방불명이 되면서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

부대원들은 단순히 박 상병이 고무신 거꾸로 신은 애인 때문에 비관해 탈영한 것으로 생각했다.

수색대에 의해 발견된 박 상병은 사리 나무 작업을 나간 골짜기 바위 사이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을 검시한 군의관은 약물로 인한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휴가 동안 변신한 애인을 찾아 설득에 실패한 박 상병이 죽음을 생각하고 복귀하면서 약을 준비한 것 같았다.

박 상병의 쓸쓸한 죽음은 부대원들의 마음을 을씨년스럽게 만들었고 부대에서는 한동안 애인의 변심에 대응하기 위한 특별교육이 주어졌다.

박 상병의 죽음으로 우울증에 빠진 부대 연병장 위로 찬바람과 함께 첫눈이 내렸다.

부대에서는 억지로 우울증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혹한기훈련을 서둘렀다.

나는 병영 마지막이 될 혹한기 훈련 동안 소대원들과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나의 바람과는 반대로 훈련 초반에 발목이 접질리면서 본격적인 혹한기훈련에는 제대로 참여도 못 하고 분침호 경계근무만 서게 되었다.

외롭게 추위를 털어내며 모두가 훈련나간 분침호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데 본부에 우편물 수령 갔던 행정병이 편지를 들고 왔다.

그녀가 보낸 편지는 접질린 발목의 통증을 충분히 잊고도 남을 만큼의 충격을 가지고 왔다.

그녀의 편지는 순식간에 나의 마음을 겨울 산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는 큰 지진 후 여진처럼 병영을 마치는 그날까지 지속되었다. 나는 제대하는 날까지 이별 통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대답 없는 편지를 보내고 또 보냈다.

예비군 마크를 가슴에 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축 처진 어깨를 앞세우고 패잔병처럼 복학했다.

복학하여 친구들한테서 듣는 소식은 끔찍했다.

군 복무기간 찾아온 IMF 외환위기는 군에서 텔레비전 화면으로 접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입대 전 유학 갔던 정수는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공부를 그만두고 돌아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창동은 아버지는 평생직장으로 알고 다니던 회사에서 명퇴당하는 바람에 복학을 못 해 한해 더 휴학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사업이 잘되어 늘 엄마에게 밥을 사주던 엄마의 절친인 영숙 아줌마는 채권자들의 행패에 못 이겨 우울증에 시달리다 아파트에서 투신을 했다.

엄마는 밥 먹다가도 영숙 아줌마를 그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라 경제를 외환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슬로건으로 당선된 대통령은 당선과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었던 결혼반지는 물론이고 탄생의 기념인 돌 반지까지 강당의 매대 위로 끌어냈다.

가는 곳마다 IMF의 우울한 그림자뿐이었지만, 나는 애써 눈에 보이는 현실을 외면하고 소식이 끊긴, 꼭꼭 숨어버린 그녀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그녀와 같은 과 친구였던 애란이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애란은 가끔 우리의 만남에 꼽사리 껴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한 친구였다.

나는 그녀의 학과사무실로 찾아가 메모를 남기고 학교 앞 주점에서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애란은 해 질 녘의 어스름을 배경으로 주점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대하는 애란의 표정에는 테이블 거리만큼이나 낯섦이 존재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이영과 관련된 IMF는 삼류 소설 같았다.

그녀는 이영에 대해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야기 중간중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슬픈 표정을 짓기도 하고 나에 대한 이영의 갈등 부분에서는 줄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이영의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최종 부도처리 되고 이영의 부모가 잠시 몸을 피한 사이 채권자들이 이영의 학교로 찾아와 아버지의 행방을 대라며 행패를 부렸다.

이영에게서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한 채권자들은 암자로 찾아가 준호 오빠에게 똑 같은 행동을 했다.

주지 스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준호는 암자를 떠났다.

준호가 암자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이영의 아버지는 곧바로 자수를 선택했다.

돈이 될 만한 모든 가재도구에 붉은 딱지가 붙은 후 이영의 가족은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외삼촌 집으로 몸을 피했다.

이영은 대학원을 그만두고 외삼촌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준호는 매일 아침 인력시장으로 나가 일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외삼촌 집에서 힘들게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이영 앞에 광태라는 준호의 친구가 나타났다. 광태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이 기술을 배워 자수성가한 준호의 초등학교 친구였다.

광태는 어머니와 이영을 책임지겠다며 준호에게 고시 공부를 권했고 자기회사 고문 변호사를 앞세워 신속하게 뒷수습을 마무리했다.

광태가 집안일을 책임지고부터 이영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광태는 이영에게 대학원을 계속 다니라고 했지만, 이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구치소에서 나온 이영의 아버지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이 늙어 있었다.

광태가 뒷수습을 마무리하는 동안 삶에 지친 어머니는 광태와 이영의 결혼을 서둘렀다. 아버지의 부도에 충격이 남달랐던 이영도 광태에 대한 은혜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준호는 다시 암자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애란으로부터 드라마 같은 이영의 가족사를 듣고 나자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냈던 편지의 내용이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언젠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꼭 당신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 곁을 떠나야 하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상자와 함께 돌아온 이영을 위해 외출준비를 했다.

처음 이영을 만났을 때의 추억이 온전히 슬픔으로 다가왔다.

주점 나그네는 물론이고 주위에 함께했던 그 어떤 술집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풋풋한 사랑을 숨겨 주었던 갈대밭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쩔 수 없이 에덴공원 솔바람 음악다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월에 빛바랜 솔바람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멋졌게 우릴 맞았다.

우리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처럼 나는 이영을 앞에 앉히고 커피를 마시며 노래를 들었다.

때마침 그때 함께 들었던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맑은 눈길이 느껴졌다.

더 앉아 있으면 주책없이 눈물이 날 것 같아 조용히 솔바람을 나와 에덴공원 꼭대기로 향했다.

체육시설이 주인 행사를 하는 정상에 올라 을숙도가 잘 보이는 곳에서 나무상자를 열었다.

한 통의 편지를 펼쳐 천천히 읽었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을 이영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용히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끄집어내어 읽은 편지를 태웠다.

바람에 날리는 재를 바라볼 이영이 몸서리치도록 그리웠다.

에덴공원에서 내려와 우리의 첫 입맞춤을 가졌던 다대포로 차를 몰았다.

상전벽해가 되어버린 다대포 해변공원을 거닐며 해넘이를 바라보았다.

붉은 이영의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

또 한 통의 편지를 끄집어내어 태웠다.

어둠이 내려와 다대포 해변공원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이영이 어둠과 함께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낙조 분수 쇼 시작할 시간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낙조 분수 쇼를 보는 내내 이영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함께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상자를 이영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안고 우리가 사람이 함께했던 곳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추억을 공유했다.

토요일 오후, 상자를 안고 억새 자리를 칡넝쿨에 빼앗긴 승학산을 향해 올랐다.

내 옆에서 이영이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그 많던 억새는 어디 가고 칡넝쿨만 보이느냐며 실망의 눈빛으로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널브러진 칡넝쿨을 바라보며 웃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승학산 억새는 해마다 줄어들었다.

승학산 억새를 보기 위해 가을을 기다렸던 사람들 역시 줄어든 억새만큼이나 줄어들었다.

지자체에서는 매년 공공근로라는 이름으로 억새를 살려보려 노력했지만, 인간의 욕심에 배신당한 자연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우매함을 탓하며 상자를 안고 승학산 정상에 도달했다.

발아래로 펼쳐진 낙동강은 나와는 아무런 사연도 없다고 시침하며 흘렀다.

말없이 낙동강을 바라보는 사이 붉은 기운이 낙동강을 에워싸며 서쪽 하늘에 황톳빛 도포로 하늘 길을 열었다.

이영이 남긴 마지막 편지를 상자에서 끄집어내어 천천히 읽는 사이 다대포에서 불어온 먹빛 바람이 별이 된 그녀를 불러왔다.

나의 볼 위로 뜨거운 별들이 쏟아졌다. 

[김재학 소설가]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이별을 이끄는 배경으로 작가의 제 2고향인 사하의 주요 관광지 홍보성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