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맞서 항일투쟁의 선봉에 우뚝 선 내수인
- 자랑스런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자 -
내수초등학교 교정에는 「내수초등학교 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003년 제17회 내수초등학교 총동문체육대회를 주관한 제51회 동창회에서 성금을 모아 이듬해인 2004년 5월 2일 총동문체육대회날에 제막한 비석이다. 여기에는 1919년 3․1운동 때 한봉수 의병장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던 내수보통학교 학생들의 민족혼과, 내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로 진학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동조하여 1930년 청주 학생연합시위를 주도하였던 청주고보생 이인찬 등의 활동 및 1931년 내수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투쟁 등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내수가 배출한 독립운동가로는 손병희와 한봉수가 대표적이다. 손병희는 북이면 금암리 출생으로 최시형을 이어 동학혁명을 이끈 북접의 대표로서 한국근대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천도교주를 지냈고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을 이끌었다. 한봉수는 세교리 출생으로 1907년 봉기하여 1910년까지 활동한 인물로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의병장이었다. 사형까지 선고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3․1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의병에서 3․1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독립운동의 맥락을 실증하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한편 신안리 출생으로 한봉수와 함께 항쟁한 정춘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의병이다. 그는 일제에 붙잡혀 끝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는데, 고향 신안에 있던 그의 묘는 비행장이 들어서며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의 묘는 후손이 없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연고 묘로 분류되어 있다가 2018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내수 지역사회에서 조차 내수 출신인지 모르고 잊혔던 훌륭한 독립운동가였다(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올해 들어 내수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이 뒤늦게나마 빛을 보고 있어 다행스럽다. 이번 지면에서는 2020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이인찬과 류필열의 독립운동 공적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청주학생 연합시위를 주도한 이인찬
이인찬(李仁粲)은 1909년 은곡리에서 태어나 내수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1925년 청주공립보통학교 5학년으로 전학하였다. 1927년 청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하던 도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광주에서 시작한 학생독립운동의 물결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청주에도 밀려왔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1930년 1월 20일 청주고보 학생들 사이에 운동의 움직임이 있자 일본 경찰들이 ‘특히 엄밀한 사찰’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주고보 학생들의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조 시위의 주역은 평소 민족의식이 강했던 이인찬이었다.
1930년 1월 21일 오전 9시 반경, 청주고보 4학년과 5학년생을 제외한 전교생 277명이 일제히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교사와 경찰이 제지하였으나 학생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사전 연락을 취해 두었던 청주농업학교 학생 231명도 조회를 마치자마자 교문을 나와 합류하여 500여명의 학생들이 무심천으로 행진하였다. 이날 일본인 학교인 청주고녀에 다니던 조선인 여학생 30여명도 동맹휴학으로 동참하였고, 상인들도 철시를 단행하여 학생들의 연합시위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경에 의해 진로가 막힌 학생들은 무심천 일대에서 수천 매의 격문을 살포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격문은 전날 이인찬 등이 청주농업학교 학생 대표들과 만나 밤을 새워 등사한 것이었다. 청주농업학교 학생 대표 중 박노섭(朴魯燮)은 1908년 신기리 출생으로 내수보통학교를 다녔는데, 청주학생 연합시위는 내수보통학교 출신에 의해 주도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주학생 연합시위는 자료가 많지 않으나, 다행히 이인찬의 일기 형식 기록인 운경이인찬일대기에 잘 전해진다. 이 일기에 의하면 학생들이 등사한 격문의 내용은 ‘백의혼(白衣魂) 싸고도는 흑운(黑雲)을 격파하고 광명한 자유로운 길을 밟자’, ‘굳세게 싸워라. 용감히 저항하자’, ‘조선 민족은 자각하여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유를 찾자’ 등이었다.
이날의 학생 시위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이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청주고보에서 이인찬 등 6명과 청주농업학교에서 박노섭 등 11명은 경찰에서 고문과 심문을 당하고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다행히 학생 신분임이 감안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으나, 그는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당했다(1959년 명예졸업 증서 수여). 이후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이인찬은 2020년 3․1절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어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어린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한 류필열
류필열(柳必烈)은 1905년 도원리에서 출생하여 1924년 내수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면서기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잠시 북이면사무소에 근무하였으나, 곧 퇴직하고 1925년 충청북도공립사범학교 특과에 입학하였다. 그가 안정된 직장을 그만둔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으나, 식민통치 말단기구에서 일제의 하수인 노릇하는데 회의를 느끼고 교사가 되어 교육구국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한 것으로 이해된다.
1928년 삼승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교편생활을 시작한 그는, 1932년 낭성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전근하였다. 삼승공보에 재직할 당시 동료 훈도였던 박인섭(朴仁燮)의 권유로 신흥교육이란 잡지를 읽고 신사상을 접하였으며, 낭성공보로 전근한 이후에도 그와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10월 초 박인섭과 함께 ‘치안유지법위반’ 죄명으로 일제의 수사를 받게 되었다. 10월 9일 일경은 낭성면 이목리에 있던 그의 거주지를 가택 수색하여 생도들의 문예작품을 모은 작문집을 압수하였고, 10일 충청북도경찰부로 끌고 가서 심문하였다. 이어 13일 경기도경찰부로 유치 당했으나, 다행히 신병으로 불기소 처분되어 곧 풀려났다. 그러나 10월 21일 ‘문관징계령’에 의거, 면직처분 당하고 말았다.
낭성공보에 재직 당시 그는 조선어를 담당하며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과제로 내주고, 이 작품들을 모아 학생들에게 등사해 나눠주었다. 그런데 학생들의 글짓기 내용 가운데 일제와 지주의 자본주의적 착취를 비판하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류필열이 좌경사상을 지니고 학생들에게 계급사상을 주입시킨 결과라고 몰아간 것이다.
이후 도원리로 귀향한 그는 태평리강습소를 세워 1935년까지 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아동들을 대상으로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이인찬과 함께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여 독립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1936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준비과정에서 이인찬 등 고향 동지들이 군자금을 거둬 주었다. 목단강 지역에 중학과정의 학교를 세우고 동포 자제를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듬해인 1937년 3월,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독살의 징후가 있었다고 하며 만주 동포사회를 충격과 비탄에 빠지게 하였다.
류필열은 2020년 광복절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어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만시지탄이 있으나, 다행스런 일이다. 그런데 커다란 아쉬움이 남는다. 1932년 면직 이후의 활동, 특히 만주 망명과 활동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전혀 없어 독립유공자 심사 때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본고를 맺으며 제안을 하고자 한다. 금년에 이인찬․류필영 두 분의 서훈을 계기로 내수 지역사회에서 일제강점기 내수의 독립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좋겠다. 내수의 상징적 공간에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만들고 이들의 업적을 기록해 두자. 그리고 이 분들의 독립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여 조명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내수초등학교에 선배들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모은 작은 전시관이라도 만들어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을 만들도록 하자. 자랑스런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기념해야 또 다른 자랑거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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