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역 : 서울 중구 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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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도 :약도가 없습니다.
<간단한 소개글>
복잡한 국도에서 버리는 시간이 아까운 사람이라면 서울안에서 가볼 만한 곳을 찾아 다녀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필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남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골짜기로 근처에 대한극장이 있다. 충무로역에서 하차한 후 밖으로 나오면 대한극장에서 오른편으로 조금 들어간 골목길에 전통 한옥형태의 대문이 두개가 나와 있다. 하나는 한국의 집이라 써있고 나머지 하나는 한옥마을이라고 쓰여져 있는 간판이 보인다. 이 두곳은 모두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라는 곳에서 운영하는 한국의 전통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이 중에서 한옥마을이란 곳을 들어가보자.
남산이 바라다 보이는 넓은 터에 중앙의 마당을 빙 둘러 다섯채의 전통한옥이 만들어져 있다. 이 다섯채의 전통한옥은 조선시대 유명한 사대부의 집에서부터 일반 평민의 집까지 조화롭게 옮겨져 있다.
한옥마을 구경은 입구에서 남산쪽을 볼 때 시계 방향으로 구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선 들를 곳이 한옥마을. 순정효황후 윤씨친가,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오위장 김춘영 가옥, 도편수 이승업 가옥 등 전통한옥이 모여 있는 이 곳은 집의 규모와 살았던 사람의 신분에 걸맞는 가구들을 예스럽게 배치하여 선조들의 생활모습을 보고 알 수 있는 명소로 꾸며져 있다.
이밖에도 들러볼 곳은 전통공예관이다. 공예 전시관에서는 민화, 침선, 나전칠기, 전통매듭 등을 만드 는 방법을 재연하고 각종 공예품도 전시 판매한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기념상품을 성설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한옥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위에는 타임캡슐광장이 있다. 남산골 제모습 찾기사업의 일환으로 남산골 한옥마을의 가장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타임캡슐광장은 서울 시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600개의 품목을 선정, 지하 15m에 수 장해 놓은 곳이다. 이것은 400년후인 2,394년에 개봉하게 된다.
타임캡슐광장을 따라 내려오며 펼쳐지는 전통정원은 남산의 산세를 살려 구릉지와 계곡을 완만하게 조성하고 소나무 등 향토수종을 식재하였으며, 간간이 설치된 누각과 함께 멀리 펼쳐지는 시내 전경이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중 건물 이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은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만 새 자재를 사용해 복원하고 나머지는 모두 건물을 하나하나 뜯어내 이전 했으며, 재활용이 불가능한 목재는 설악산의 자생육송으로 대체 하였다.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에서는 서당, 서화, 사군자 그리기 등의 시민교실이,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에서는 예절교실, 차 문화교실, 대화교실 등이 열린다.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은 희망자를 받아 전통혼례 장소로 사용될 예정이고, 오위장 김춘영 가옥에서는 전통공예 기능을 전승 보급하는 무형문화재 교실이 열린다. 도편수 이승업 가옥은 전통찻집으로 운영한다.
마을공동 광장에서는 전통혼례식 등의 이벤트를 열고, 다목적마당에서는 탈춤 등의 공연과 명절맞이 행사등을 할 예정이다.
<전통한옥>
오위장 김춘영 가옥(구 김홍기 가) 조선조 말기 오위장(군대 하급장교)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으로,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옮겨다 놓았다.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서민주택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안방의 뒤쪽벽, 즉 길가 부분에 화방벽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이 특이하다.
도편수 이승업 가옥(구 조흥은행 관리)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될 때 도편수(조선말 당시 목수의 우두머리) 이승업이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에 있던 것을 이전했다.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있으며, 안채는 정자형, 사랑채는 ㄴ자형이다.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구 정구엽 가)
순종의 장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 윤비가 동궁계비에 책봉되어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은 집이다. 제기동에 있던 것을 이전하였으며, 가옥전체 분위기는 살림집이라기 보다는 재실용도에 걸맞게 되어있다.
부마도위(임금의 사위) 박영효 가옥(구 이진승 가)
서울 팔대가중의 하나로 전해지는 이 가옥은 조선조 제25대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 소생인 영혜옹주의 부군 박영효가 살던 집으로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것이다. 개성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 형으로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주택형태이다. 기단, 가구, 6칸 크기의 부억 등에서 대가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구 서용택 가)
조선조 제27대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열세살 나이로 동궁계비에 책봉될 때가지 살았던 집이다. 윤비가라고도 하는 이 집은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데 집이 너무 낡아 옮기지 못하고 건축 양식 그대로 복원했다. 장대석 기단, 정자살창, 화방벽이 설치된 점 등으로 보아 최상류층의 저택임을 알 수 있다.
여기도 가보자!
남산과 명동, 충무로로 바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근처의 영화관에 영화를 예매한 후 시간이 빈다면 찾아오는 것이 좋다.
가는 길
· 버스
3, 6, 20, 56, 76, 77, 81, 81-1, 139, 361번 일반버스 이용, 극동빌딩앞(퇴계로3가)에서 하차
· 지하철
지하철 3,4호선 이용, 충무로역 하차. 3번 중대부속병원 출구로 나와 20m 정도 걸으면 바로 정문이 보임.
· 주차시설
자체 주차장이 없어 자가운전자들의 이용 불가능하므로 가능한 대중교통 이용 적극 권장 단,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은 주변의 한국의 집 주차장 이용가능
관련 정보
서울시 문화재과 전화(02)3707-9431~6 팩스 (02)3707-9449
한옥마을 관리사무소 전화 (02)264-4412~4
문화재보호재단 전화 (02)566-7036~7
입장료 : 없음
매주화요일 휴관
주차 않됨
<<<북촌한옥마을>>>
우주선이 하늘을 날고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 너무나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에 살면서 가슴이 저려올 때가 있다. 우리가 잃어 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다. 이중 삼중 안전장치가 된 철문이 아니라 삐꺼덕 소리가 나는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그마한 공간에는 아기자기 꽃밭이 있는 곳 말이다. 지붕위로는 햇살이 비춰 봄이면 작은 풀들이, 여름이면 박넝쿨이, 가을이면 빨간 고추가 널려있고 겨울이면 흰눈이 쌓인 정겨운 풍경 말이다. 초가집도 좋고, 기와집도 좋다. '엄마 어렸을 적에~'라는 인형작품전이 인기이듯 세기가 바뀌는 요즘 지나간 날들이 더 그리워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한옥마을
한양의 사대문 안에 옛 한옥이 그대로 모여있는 한옥마을이 있다. 남산골에 있는 '남산골 한옥마을'이 정부의 계획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한옥마을이라면 이곳 북촌한옥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살던 그대로의 자연적인 형성이다. 북촌은 사대문안에서 북으로 북한산 자락, 남으로 종로통을 사이로, 동서로는 경복궁과 창덕궁사이의 가회동, 계동, 재동, 안국동, 원서동, 사간동 같은 유서 깊은 동네를 통칭하는 말이다. 인사동도 크게 보면 북촌의 한 부분이다. 궁과 궁 사이라는 긍지를 지닌 동네들, 서울의 명당 동네들이며 600년 전통인 서울의 마지막 유산으로 현재 1천56동의 한옥이 있다. 이곳 북촌 일대는 1984년에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었었다. 지원 없는 규제라는 민원에 밀려 91년 한옥보존지구는 해제되었고 서울시는 나서서 북촌의 도로를 동서남북으로 넓히기도 했다. 그래서 북촌한옥마을이라고는 해도 큰 도로 근처는 개축을 해 이층 삼층의 양옥이 되고 현대화된 건물이 들어서 있다. 골목골목을 따라 들어가야만 한옥이 있는데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일수록 한옥이 그대로 있다. 정독 도서관을 타고 삼청 공원으로 따라가는 길, 삼청 공원의 오솔길을 따라가다가 보이는 아래쪽 그리고 성대 후문 가는 도로 끝까지 가서 명륜동으로 내려가는 곳, 즉 차가 안 닿는 이 쪽의 한옥 보존 상태가 용이하다.
북촌 한옥마을 가꾸기
한옥마을을 다니다 정독 도서관쯤에 이르면 정겨운 우리네 60년대의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하는 풍경이 나타난다. '하숙'이란 간판이 걸려있고, 드르륵 미닫이문이 달린 오래된 만화방이 있으며 연탄난로에 언 손을 녹이는 과일가게가 있다. 어찌 보면 촌스럽지만 가슴 뭉클하게 하고 지나간 어린 시절이 갑자기 그리워지게 하는 낯익은 풍경에 눈물이 왈칵 솟아질 듯도 하다. 그런 한옥마을이 현행건축법 즉, 도로폭 규정, 대지경계로부터 띄는 거리, 주차장 설치 규정, 건폐율 규정 등에 의해 불법 건물로 규정되어 있다니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전통동네에 맞는 건축특례로 한옥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004년부터 연차적으로 19만5천 평에 달하는 북촌한옥마을을 가꾸기 사업을 한다고 하니 서울에 남은 유일한 한옥마을, 조선의 자존심 북촌이 그 '맥'을 제대로 이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제동, 삼청동
전철: 3호선 안국역에서하차
버스: 84번-안국동하차, 704번-가회동하차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제동, 삼청동
<<<<서대문 형무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는 대한제국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감옥이 지어져 80여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우리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인 탄압기관이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하고, 이 땅을 발판 삼아 대륙으로 침략하려는 야욕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항거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투옥시키기 위한 감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시대에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건립한 독립문 근처에 1907년부터 대규모로 감옥을 지었다.
이 감옥은 일본인의 설계로 그때 화폐 약 5만원을 들여 지었고, 4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 정도의 부속시설로 수용인원은 500여명 정도였다. 그때 전국 8개 감옥 총 수용인원이 300여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대규모의 감옥이었다. 1908년 10월 21일에 경성감옥 (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에게 우리의 국권이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는 민족독립운동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일제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 투옥시켰다. 수용인원이 증가하자 그들은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지었고, 이 때문에 1912년 9월 3일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3년 5월 5일에 서대문형무소로 그 이름이 다시 바뀌어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으며 처형되거나 옥사(獄死)당했던 악명높은 곳이다. 1945년 11월 21일에 서울형무소로 그 이름이 바뀌고, 1961년 12월 23일에 서울교도소로, 1967년 7월 7일에 서울구치소로 바뀐 뒤 1987년 11월 15일에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기까지 이름의 변화만큼이나 많은 민족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채 1992년 8월 15일에「서대문 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87년에 경기도 의왕시로 옮길 때 옥사(獄舍)는 모두 15개동이었으나, 현재는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생각해 7개 동만을 원형대로 보존하였다. 그 중에서 옥사 3개동(제 10·11·12옥사)과 사형장은 1988년 2월 20일에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서대문구에서는 1955년부터 서대문 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조국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고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여 「서대문 형무소역사관(西大門刑務所歷史館)」으로 개관하였다.
모든 것이 허물어져도 변치 않는 민족독립의 정신
1987년에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갈 때 옥사는 15개동이었으나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하여 제 9·10·11·12·13옥사·중앙사 ·나병사를 보존하였고, 그 중 옥사 3개동(제10·11·12옥사)과 사형장은 1988년 2월 20일에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의 통감부는 앞으로 그들에게 항거하는 우리의 애국지사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1907년 일본에서 전옥(지금의 교도소장)을 지낸 일본인의 설계로 탁지부 건축소에서 감옥을 신축하였다. 옥사는 목조건물로 'T자형'으로 지었으며 옥사 중앙에서 사방 전체를 감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곳은 낮에도 햇빛이 차단되어 매우 어둡고 침침했으며, 감방은 가운데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하였다. 제10·11·12옥사 건물은 1915년에 지었고, 제13옥사·보안과 청사·사형장은 1923년에, 제9옥사는 1929년에 지었다. 제13옥사(공작사)는 애국지사와 투옥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일을 시켰던 곳으로 형무소·군부대·관공서에서 사용하는 관용물품을 만들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는 군수용품 생산 작업을 모든 형무작업의 최우선적인 일로 삼아 강제로 동원하였다.
목숨은 이슬처럼 사라져 갔으나 그 뜻은 살아있어
이 건물은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후 사형이 집행된 장소이다. 일제의 침략과 만행에 항거하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조국 자주독립의 한을 품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애국선열들의 넋이 서려있는 이곳은 사적 제 324호로 지정되었다. 사형자의 둘레는 높이 5m의 붉은 돌담이 쌓여 있고, 면적은 50㎡이며, 내부에는 개폐식 마루판 위에 사형수가 앉는 의자가 있으며, 그때에 사용한 굵은 동아줄이 내려져 있다. 앞면은 사형을 집행할 때 배석자들이 사용한 긴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배석자들이 사용한 긴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형자 입구의 삼거리에 하늘 높이 외롭게 자라고 있는 한 그루의 미루나무는 사형장으로 들어가는 사형수들이 붙들고 잠시 통곡했다고 하며, 이 미루나무는 사형수들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형장의 바로 옆에는 사형을 집행한 시신을 형무소 밖 공동묘지까지 몰래 버리기 위해 일제가 뚫어 놓은 비밀통로가 있다. 일제가 그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폐쇄했으나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입구에서 40m를 복원하였다.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막기에는 너무 낮은 담장
투옥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했던 담장과 망루의 일부를 원형대로 보존하였다. 1907년에 담장을 설치할 때 나무기둥에 함석을 붙였으나, 현재의 붉은 돌담은 1923년에 설치하였다. 담장의 높이는 4.5m, 길이는 1.161m였으나, 현재는 앞면에 79m, 뒷면에 208m만 남아 있다. 망루는 6개소 중 2개소만 원형대로 보존하였는데, 8면에 감시창이 설치되어 있고 높이는 10m이다. 정문의 망루는 1923년에 설치하였으며, 뒷쪽의 망루는 1930년에 설치한 것이다.
위 치 : 서대문독립공원내
지하철 :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 서대문독립공원 방향 출구를 이용
시내버스 : 현저동 또는 독립문정류장에서 내려 서대문독립공원 이용
좌석 / 72, 72-2, 158, 158-4, 757, 907, 912, 922
일반 / 2, 74, 146, 147, 150, 151, 152, 152-1, 153, 154, 155, 156, 157, 158-2, 158-3
문의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관리사무실
주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TEL : (02) 363-9750~1
FAX : (02) 363-9752
시설구분
시설명
용 도
층 수
비 고
수형시설
1~6옥사
9옥사
10~12옥사
13옥사
지하옥사
미결수 수용
수형자(남)수용
수형자(남)수용
공작사
수형자(여)수용
(취조, 고문)
2층
2층
2층
2층
1층
철거
보존
보존
보존
복원
관리시설
나병사
보안과청사
중앙사
환자격리수용
고문 및 취조
수감사 감시
1층
지하1,지상2
2층
보존
보존
보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