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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암(月明庵)에 올라 김형주의 부안이야기-변산과 사찰문화(寺刹文化)<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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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암에서 본 변산의 아침ⓒ부안21
월명암의 시문(詩文)들
산상암자(山上庵子)인 월명암이 자리 잡은 법왕봉(法王峰) 일대는 풍광(風光)이 빼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변산의 빼어난 경관(景觀) 여덟 곳을 변산팔경이라 하는데 그중 「월명운애(月明雲靄)」와 「서해낙조(西海落照)」의 두 경관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변산의 산신격(山神格)인 두 신선(神仙)이 깃들어 있다는 쌍선봉(雙仙峰)을 왼쪽으로 하고 법왕봉(法王峰)의 낙조대(落照臺)를 등뒤로 그 중턱에 자리한 월명은 동남으로 멀리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연봉을 바라보며 변산의 만악(萬嶽)을 발아래 굽어보는 해발 450여m 산상에 위치하는데 그 등 뒤로는 지포선경(止浦仙景)에 이르며 바로 어 칠산(七山) 의 서해바다다.
월명(月明)이란 말은 정말로 부설거사(浮雪居士)의 딸 월명각씨에서 유래된 이름일까? 아니면 낙조대에 해 떨어지자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산상에 휘영청 달이 밝아 월명이라 한 것일까? 대승적(大乘的) 불심(佛心)으로 성도(成道)한 월명각씨의 거룩함과 티 없이 맑은 산상의 밝은 달이 견성(見性)의 불도임을 뜻한다 하여 월명이라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먼 옛날부터 수많은 학자, 작가,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월명에 올랐으며, 올라서는 보고 느끼고 감탄하여 이를 기행의 글로 또는 시가(詩歌)로 남겨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공감하고 있음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월명을 중심으로 남겨진 문학적(文學的)인 작품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첫째는 《부설전(浮雪傳)》을 들 수 있다. 《부설전》은 승전설화(僧傳說話)의 하나로서 월명암의 창건과 관련한 부설거사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3,4백여 년 전에 어느 승려가 문자화(文字化)하여 놓은 이야기책으로 일종의 불교소설류(佛敎小說類)라 할 수 있다. 그 원본이 월명암에 소장되어 있으며, 지방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되었고 번역 간행되어 널리 분포되어 있다.
다음은 조선조 중기 부안출신의 기녀시인(妓女詩人) 이매창(李梅窓:1573~1610)의 시가 있다. 그가 언제쯤 월명암에 올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월명의 정취를 노래한 시 한 수가 <등월명(登月明매)>이란 시제로 창집(梅窓集)에 실려 있다.
월명암(月明庵)에 올라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 올라온 듯
황정경을 읽고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라.
卜築蘭若倚半空
一聲淸磬撤蒼穹
客心怳若登兜率
讀罷黃庭禮赤松
매창(梅窓)은 기생이었다. 부안에서 태어나 부안에서 살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 기류시인(妓流詩人)인데 한시(漢詩)에 능했으며, 지금 한시 57편과 시조 한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초기에는 천민출신인 예학자(禮學者)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과 정을 나누며 사귀었고, 말년에는 교산(蛟山) 허균(許筠)과 문우(文友)로 사귀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아 도교(道敎)에 심취하였는데, 위의 <등월명(登月明)>의 시에서도 황정경을 읽고 적송자를 찾아간다는 등의 도교적인 내용이 짙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이 작품은 매창이 1600년 초 이후 교산의 영향을 받은 그의 말기쯤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조선조 후기에 유명한 문인화가(文人畵家)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변산을 유람하고 두 편의 기행문(紀行文)을 남겼는데 하나는 <유격포기(遊格浦記)>요 다른 하나는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다. <유우금암기>는 그가 변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실상사(實相寺)에서 하루 밤을 자고 월명암을 오른 기록으로 월명을 오르내리면서 본 정경을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둘러보다가 월명암이 좋다는 말을 듣고 견여(肩輿:좁은 길을 지날 때 임시로 만들어 쓰는 어깨에 메는 의자 비슷한 승교)를 재촉하여 타고 절 뒤 높은 봉우리를 오르니 봉우리 모습은 벽처럼 서 있고 돌길은 실낱같아 발붙일 곳이 없었다. 급경사를 오르기 한 오리쯤에 절정에 이르러 남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돛단배가 왕래하며 한 개 작은 섬이 보이는데 그곳이 흥덕(興德) 땅이라고 한다. 북쪽으로 꺾어 산허리를 타고 가니 녹다 남은 눈이 아직도 깊이 쌓여 정강이가 묻혔고, 그 곁으로 난 길은 매우 위태로워 천길 낭떠러지 벼랑이어서 만약 한 발만 헛디디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
가마 맨 중은 큰 소리를 지르며 빨리 내닫고 가마채가 소나무에 부딪치기도 하고 중의 발이 깊은 눈에 빠지고 얼음 깔린 경사 길에 넘어지려 하기 두어 번, 여러 차례 가마 맨 중을 경계하였으나 천천히 걸을 수는 없어 때로는 가마에서 내려 걸으니 진흙도 만나고 깊게 쌓인 눈도 만나 그 간난(艱難)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월명암에 도착하니 지세는 가장 높아 큰 산을 굽어 볼 수 있어 물결치고 구름이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산 밖은 바다 빛이 희미하고 아득하여 때마침 구름도 끼었기에 똑똑히 다 볼 수는 없어 가던 길로 바로 되돌아 와 실상사(實相寺)의 오른쪽으로 돌아 용추(龍湫)로 향했다.…」
이 기행문의 내용으로 보아 그가 58세인 1771년의 이른 봄에 월명에 오른 것 같다. 이때 강표암(姜豹菴)의 둘째 아들 강흔(姜俒)이 부안현감으로 있을 때다. 강흔은 1770년 8월에 부임하여 1772년 1월에 파직(罷職)되었다. 강표암은 예조판서까지 지낸 분이며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였는데 특히 묵난죽(墨蘭竹)을 잘 그렸다.
위의 기행문을 보면 부안읍성(扶安邑城)의 서문(西門)을 나서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지나 개암사(開岩寺)에 이르고, 개암사 우금암(禹金岩)을 지나 실상사(實相寺)에서 묵었으며, 여기에서 월명에 올랐다. 고을 원님의 아버지 위세가 있어서인지 월명을 오르는데 견여(肩輿)를 타고 올랐으며, 우금암 굴의 앞에 옥천암(玉泉庵)이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옥천암은 원효방(元曉房) 자리에 뒷날 세워졌던 암자였던 것 같다.
/김형주
김형주선생님은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속신어와 실아 온 민초들의 이야기'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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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월명암은 몇번 가보았지만 아주 좋은 자리에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