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기]/수필·감상문·기타
2008-12-17 12:11:23
4공 대장 ‘항선달’에 대한 소고
2008. 12. 17. / 밉상 강요이
우리 [30산우회]에는 참으로 인재가 많다. 송파의 산행모임으로 출발한 조그마한 모임이 재경 동기회 소속으로 위상이 바뀌면서
개성 강한 인재들이 대거 입성한다. 다른 많은 인재들이 있지만 우선적으로 처음에는 ‘총무’라는 마당쇠로 시작했고, 지금은 ‘회장’으로 불리는 각 공화국 대장들을 좀 훑어보자. (희한하게도 2005년 1월 혹한기 번개산행에 처음으로 나타난 4명의 경기/분당지역 산우들 중에 3명이 2~4공으로 그 대장직을 수행했다.)
‘밉상’인 나야 산우회에서 첫 번째 ‘마당쇠’(자칭 ‘총무’ 또는 ‘연락책’)라는 타이틀로 ‘1공 대장’이라 불리며 별로 한 일도 없이 대접을 좀 받고 있는 셈이고, 비록 임기를 꽉 채우지는 못했지만 추진력 있는 진행으로 산우회의 면모를 일신한 2공 대장 불도저 ‘조아산’ 김총, 외유내강 허허실실 전법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산우회를 이끌어준 3공 대장 ‘산지기’ 서샘을 거쳐, 산우회 4공 대장(회장)을 맡아 그 동안 온갖 희생을 감당해온 ‘항선달’이 이제 그 바톤을 넘겨주고 정작 자신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 항선달의 가장 최근 사진 : 불암산 정상에서 공중부양 한 건가?
항선달?
그의 본명은 황문수다. 그는 별명도 참으로 기이하게 지어졌다. 우선 ‘선달’이라는 별호는 누구나 아는 것처럼, ‘봉이 김 선달’에서 따온 것인데, 김 선달이 조선시대 온 천지를 주유했던 것처럼, 항선달 역시 4륜 구동 짚차를 몰고 비포장 산골짜기는 안 다녀본 데가 없을 정도로 강원, 경북, 등 산간지방을 유람하듯 넘나든다.
더불어 ‘황’이 ‘항’으로 바뀐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으니, 언젠가 펭귄 천인식 군이 산행기를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 산행기에 등장한 항선달에 대한 인물평을 토씨, 띄워 쓰기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겨보면
항문수 : 선달님으로 통하며 장비하나는 끈내줌 ( 산에대한 자부심 강하고 같이 산행하면 즐거워짐)
라고 적었겠다. 이를 본 모든 산우들이 배를 움켜쥐고 뒤로 자빠졌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황문수’는 ‘항문수’로 불리게 되고,
‘황’이 ‘항’으로 바뀌어 발음되면서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고, ‘장비하나는’ 이라는 말에서 또 한번 뒤집어지고 말았다.
항선달은 산우회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낚시나 팔도유람을 워낙 좋아하였기로 방방곡곡 안 다녀본 곳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산행 스타일 또한 아프리카의 무쏘를 닮았는지 앞서가는 이의 발목을 툭툭 차며, 속도에 있어서는 남의 추종을 불허하여 거리낄 게 없이 다니는 스타일인 데다, 산행장비 또한 고급품으로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구비해 놓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런 마당에 ‘장비하나는’ 이란 말에서 펭귄의 속마음 의도를 궁금해 하며 모두들 뒤집어질 수 밖에……
만남
세월을 좀 거슬러 올라가면 항선달은 나와 초등학교도 동기동창이다. 4학년 때인가 전학을 왔는데, 5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과묵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시절 기억나는 스토리 하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데 항선달은 공을 갖고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편 나누기를 할 때, 주장 됨직한 친구 둘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 명씩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항선달은 거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경우가 몇 번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때도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골키퍼를 자원하기도 했지만, 골키퍼를 다른 친구가 맡게 되었을 땐 단독 드리블로 달려가는 그의 돌파력은 대단했다.
시간이 흘러흘러, 고교를 졸업하고 난 후 그의 소식은 기억 속에서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나이 40 중반에 다다랐을까? <후라30>을 통해 전해 들은 바로는 그가 수원에서 슈퍼마켓을 경영하고 있다는 얘기였지만 직접 연락은 서로가 못하고 있는 터였다.
송파의 ‘산행모임’이 그 저변을 확대하고 있을 즈음, 2005년 1월 초 혹한기라 정기산행을 오래 쉬고 있자니 도처에서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결국 번개산행(결국 정기산행으로 둔갑)으로 영장산(맹산)을 다녀오기로 했는데, 그때 분당의 3명과 함께 항선달이 나타났다. 적당한 키에 떡 벌어진 가슴팍에 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는 아마도 장군감이었을 것 같다. 게다가 완만한 능선을 치고 오르는 폼세가 남다르게 보이고, 걸음걸이 또한 거침이 없다.
그는 누구인가?
항선달님, 그가 수원에서 살림을 차린 지가 25년 정도 되었을 터! 학교공부를 마치고 들어간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껴 남들보다 먼저 사업가로 변신했다. 작년인가 자신이 경영하는 슈퍼마켓 주변에서 재개발 바람이 불었다. 공사기간에는 벌이도 시원찮을 거라 판단하고 내친 김에 자신의 빌딩도 재개발하겠다고 나서며, 살고 있던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엄청난 일을 벌였다. 덕분에 광교산 산행을 마치고 집날이(?), 집들이까지 두 번씩이나 자신의 집에서 뒤풀이를 하게 되었고, 우리에게 많은 에피소드를 남겨주기도 했다.
작년 이맘때쯤 4기 회장을 뽑아야 하는 산우회 총회를 겸한 송년회 때도, 자신은 여러 차례 고사했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을 모아 그를 회장으로 추대했고, 당시 자신의 주변상황이 녹녹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1년 동안 그 직을 수락했다. 이처럼 그는 자신 개인의 입장보다는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보다 큰 모임이나 조직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제 올해의 얘기로 그 범위를 좀 좁혀보자. 누구보다 정이 많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큰 선달님, 지금까지 50회의 정기산행에서 46번을 참석하였다. 92%의 참석률, 과연 이런 숫자가 가능이나 한 일일까? 게다가 원거리 산행을 갈라치면 우리는 당연한 듯 선달님의 차를 기다리게 되고, 선달님이 불참할 때가 돼야만 우리가 운전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인데, 아마도 선달님이 우리 쫄들의 버릇을 잘못 들인 결과일 게다.
매 정기산행의 산행지 결정이 어려운 거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게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산행지를 결정하고 나면, 혹여 중간에 어려운 구간이 있을 세라, 혹서기, 혹한기임에도 불구하고 평일에 홀로 답사를 다녀오는 그런 정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어떤 특별한 장비가 눈에 띄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할 거라며 미리 챙겨주는 그런 센스는 아무한테서나 나오는 것이 아니란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항선달을 닮아서
어떤 모임이나 단체의 성격도 그 수장 되는 사람을 그대로 닮아가나 보다. 올 한 해 우리는 많은 기록을 쌓아가며 원거리 산행도 많이 했다. 첫 산행지로 100산을 채운 것도 그렇고, 지리의 칠선계곡이 개방되자마자 첫 탐방팀으로 다녀온 것도 그렇다. 계곡산행으로 아침가리골을 다녀오고, 설악에서는 14명의 대군을 이끌고 탕수동계곡과 서북능선을 다녀오기도 했다. 영남권의 국립공원 가야산과 올라오는 길에 제비봉을 산행한 것도 한 번 산행에 독립적인 두 개의 산을 오른 기록일 거다.
또 200차 기념산행으로 가칠봉 휴양림에서 비록 야영을 못했지만 대신 캠프파이어로 만족하기도 했고, 동기회 가을소풍행사의 일환으로 경부합동 치악산 종주를 완성하기도 했다. 감악산을 다녀오며 북한의 마지막 경기5악 송악산만 남겨두기도 했다. 천안의 명산 광덕산에서 괴물 재일의 안내를, 금수산에서는 느림보의 안내를 받기도 했다.
물론 정기산행은 아니지만, 여행님은 지리를 단독으로 왕복종주를 감행해냈고, 12월에는 북한산 14성문 종주에 도전했다가 12성문을 찍고 왔다. 물처럼님은 울릉도와 독도를 다녀오기도 했고, 웅사님은 충청의 명산을 두루 다니며 옥순봉, 구담봉과 경기도의 명산 도일봉까지 섭렵하고 오기도 했다. 만사님은 펭귄의 도움을 받아 관악에서 6~8봉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2008년의 새로운 기록들일 게다.
또 다른 면에서, 산행기 작성 인재들이 훨씬 많아졌다는 것도 기록할 만하다. 작년까지 산행기 작성 1~2위 합의 비율이 50%를 상회하다 올해 23% 정도로 안정되었다는 게 그걸 입증한다. 예봉산 시산제 산행기에서 도다리의 등장은 모두들 그의 글맛에 취하게 했고, 특유의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종교간의 담을 허물어버린 여행님의 정신세계에 감동하기도 하며, 특히 그는 복음서, 심우도, 반야심경을 자유자제로 주무르는 능력을 가졌다. 웅사님의 톡톡 튀는 산행기는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또한 산행기의 형식에 있어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문답식 산행기도 등장하고, 사진을 중심으로 한 산행기도 나타나고, 참석지도 못한 산행에 대해 사진을 보고 추측해서 쓰기도 했는데 그 상황이 너무도 실제와 비슷했다. 금지된 곳을 다녀와서는 꿈속의 산행기를 올리기도 하면서, 그 산행기의 장르는 다큐멘타리 기록물에서 심금을 울리는 감상문까지 무궁무진하게 사람 심성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하겠다.
특히나 일년 52주에 정기산행만 52번 시행이라! 물론 3공의 산지기 시절에도 51번의 정기산행을 감행한 바 있긴 하지만, 이것은 항선달 집권기의 [30산우회] 가는 길에 우리의 최대 명절인 설도, 추석도 잠시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켜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 그동안 선달님의 지나간 편린들을 모아본다.
그를 위하여
이런 모든 기록들은 우리 모든 산우들이 항선달의 돌파력, 남을 배려하는 마음, 산행기가 올라올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은근과 끈기와 같은 정신적 에너지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기에 가능했을 거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화려한 전력의 4공 뒤를 이어 5공을 맡는다는 것, 누가 맡더라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누가 5공 대장을 맡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5공 출범을 눈앞에 둔 오늘까지 우리 모두가 보여준 저력과 잠재력을 감안해 볼 때 5공 대장을 잘 보필하여 더욱더 발전하는 5공이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좀 더 나아가 6공, 7공, 아니 밀레니엄 1000차 산행을 이룰 때까지 우리 [30산우회]의 산행은 끝없이 이어지리라 믿는다.
앞으로 남은 몇 주의 임기 중, 그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모두가 협조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최근 거의 미치다시피 푹 빠져있는 당구와 바둑 실력이 일취월장하기를 바래본다. 아직 비어있는 수원의 미산빌딩에 3~4층에 당구장과 기원이 들어서기를 기도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부산의 기팔이처럼 당구장, 기원, 훌라가 함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안될까?
항성달님, 수고했습니다. 모레 12월 19일 금요일, 2008년 [30산우회] 송년회를 하는 날, 4공을 잘 이끌어 주신 항대장님의 노고에 우리 모든 산우가 감사의 큰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나 또한 진심을 담아 박수를 보태며 항대장님의 앞날에 길이 영광과 축복이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