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더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입니다”
“나도 때로는 미운 생각이 납니다.
오온개공인 것을 잠깐 잊어버린 때거든요.
미운 생각나는 자체가 굉장히 괴로워요. 그때는 오온개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미운 생각이 사라지고 정말로 즐겁습니다.”
스승을 찾아가는 목적도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이죠.
혜능 대사가 말하기를, “선지식아,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불교는 이 ‘마하반야바라밀법’에 다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야심경」을 외웁니다.
이 경이 267자라 하는데 핵심 되는 말이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오온이 모두 공한 줄 알면 우리 마음 속에 마하반야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육조단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뿐입니다.
육조스님이 이렇게 저렇게 달리해서 설명해도 내용은 ‘오온개공’입니다.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마하반야’를 개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그 자체가 마하반야바라밀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그걸 못 느끼고 행위도 못하느냐.
이게 문제인데 우리는 ‘내가 있다’는 착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도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행위 할 때는 당신도 괴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깨닫고 난 후에
자기가 없다는 무아, 오온개공에서 행복하게 사는 바라밀법이 나왔습니다.
무아를 안 지혜로 세상을 보면서 생활하니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본문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라’ 할 때 ‘깨끗하다’의 반대가 ‘더럽다’이니,
더러운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렇게 이해하지요.
이것은 일반 상식의 이해라면
불교에서 말하는 깨끗함은 ‘깨끗하다-더럽다’는
그 양변을 초월한 깨끗함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하면
벌써 마하반야바라밀법이 우리 마음속에 성취되어 있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면 ‘더럽다-깨끗하다’,
‘나다-너다’, ‘좋다-나쁘다’를 초월한 그 자체가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또한 이것이 ‘오온개공’과도 같은 말입니다.
대사는 말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한참 침묵하시다가 이에 말하되, “선지식아, 조용하게 들어라.”
혜능스님이 “깨끗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이렇게 말하고 당신도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여기에 깨끗하다도 앞의 설명과 같습니다.
우리가 법회에서 법문 듣기 전에 잠깐 입정하면서 죽비를 치지요.
바로 그 죽비 치는 것과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침묵하는 것과 같습니다.
침묵할 때 내 마음 속에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하는 분별심을 비우라는 거지요.
그게 죽비 친 뜻입니다. 비우고 이 강의를 듣게 되면
훨씬 공부가 잘 되고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죽비 치는 그 자체가 깨달음으로 가게 하는 한 방법입니다.
무슨 의례나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아, 조용하게 들어라” 할 때 이 조용한 것도,
시끄럽다에 상대되는 고요함이 아니고 ‘시끄럽다-조용하다’는
양변을 초월해서 마음을 그 상태로 만드는 겁니다.
이 「단경」은 깨달은 분이 법문을 하시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가 전부 의미가 깊습니다.
‘선지식(善知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공부 많이 해서 도통한 스님을 선지식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법문 들으러 온 분들께 선지식이라 했습니다.
왜 선지식이라 했느냐? 우리 존재원리가 마하반야바라밀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지식아’ 한 겁니다. 격려하는 차원도 있지만, 도인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다 도인입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예요. 전부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부처님은 견해가 다르다고 외도들이 와서 공격하고 욕하고
심지어 부처님 얼굴에 침까지 뱉는 모욕을 주어도 화를 안 냅니다.
화 안 내는 이유는 그 사람도 존재원리가 부처님이다,
본래 부처인데 착각해서
부처님 행위를 못 하고 상대편을 비난하고 불이익을 주고 있다, 착각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움이 안 일어나고 오히려 연민하기 시작합니다.
깔보는 게 아니라 동등하게 부처라는 것을 알고 그 선상에서 연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 안내는 제일 좋은 방법이 이 길입니다. 한번 해 보세요.
우리가 깨끗하다, 조용하다, 또 오온개공(五蘊皆空), 응무소주(應無所住)
이걸 알면, 이 마음의 존재원리를 이해하면
인간관계나 모든 문제가 안 풀리는 게 없습니다.
나는 부처님이 발견한 세계,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세계가 도깨비 방망이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이 사회나 남북관계나 모든 문제가 안 풀리는 게 없어요.
정치문제도 다 풀립니다. 차츰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활화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의식의 변화가 와야 합니다. 그것을 실천하고 싶은 생각이 나고,
실천해 보면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중에는 안 하면 더 괴로워요.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나도 때로는 미운 생각이 납니다. 오온개공인 것을 잠깐 잊어버린 때거든요.
미운 생각나는 자체가 굉장히 괴로워요. 그때는 오온개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미운 생각이 사라지고 정말로 즐겁습니다.
혜능의 아버지는 본관이 범양이다. 좌천해서 영남의 신주로 옮겨 살다가
범양은 지금 북경 부근인데 범양 노씨가 우리로 말하면 명문 집안이었답니다.
그런데, 좌천되어 지금 홍콩 가까운 광주 부근에 유배되어
현지 소수 민족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지금 전해지는 육조스님 진신상을 보면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어요.
그래서 육조스님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혜능이 어려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노모와 외로운 아들은 남해로 옮겨와 가난해서 시장에 나무를 팔고 살았다.
혜능스님은 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다는 겁니다.
가난했으니 교육도 못 받았습니다.
당시는 유교사회니까 효가 삶의 최고 덕목이었는데,
효행은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나무해서 시장에 팔아 어머니 방 따뜻하게 해드리고
생활도 최선을 다해서 어머니를 모셨겠지요.
어느 날 한 손님이 나무를 사니 혜능이 숙소까지 나무를 날라다 주고
돈을 받아 나오려다가 「금강경」 읽는 것을 보고
혜능이 한번 들음에 문득 마음이 밝아지고 깨달아
여기에 깨달았다는 것은 확철대오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우연히 한 손님이 「금강경」 읽는 것을 듣고는 깨달았다고 하는데,
「덕이본 육조단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듣고 깨달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깨달음은 확철대오가 아닙니다.
그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는데 이 경전을 읽고 계십니까?”
손님이 답하기를 “내가 기주 황매현 동쪽 빙무산의 오조 홍인스님에게 예배하니
지금 그곳에는 문인이 천여 명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 대사가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을 가지고 읽으면
바로 견성하여 부처가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듣고 보았다.”
지금도 황매현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한 10㎞ 정도 올라가면 5조스님이 계셨던 오조사가 있어요.
그 산을 빙무산이라 하고 동쪽에 오조사가 있고,
서쪽에 정각사라는 절이 4조 도신스님이 주석한 절이죠.
그 황매현 빙무산 오조사에 오조 홍인스님이 주석하셨습니다.
오조스님께서 「금강경」을 굉장히 권했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조 도신스님까지는 달마로부터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전해 왔는데
오조스님부터 금강경으로 바뀝니다.
「금강경」은 내가 경 중에 제일 좋아해서 강의도 하고 열심히 봤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이 발견한 그 존재원리나
이 「육조단경」이나 「백일법문」도 모두 중도연기 하나로 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모두 ‘오온개공’이라 표현하는 것은 거의 같습니다.
혜능이 그 말을 듣고 전생의 업연이 있어 곧 어머니와 인사하고
황매현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스님에게 예배하였다.
당신이 확철대오는 못 해도
‘내가 이 공부에 대한 인연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낀 겁니다.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출가합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보면 육조스님이 살아온 내용이나
도인이 되고 나서 고향에 국은사를 세우고
어머니, 아버지를 합장해서 묘를 모셨어요. 지금도 있습니다.
이런 지극한 효성으로 보면, 만일 「금강경」을 안 듣고 못 깨달았으면
목에 칼을 대고 너 출가해라 해도 절대 안 갈 분입니다.
「금강경」을 듣고 의식에 상당한 변화가 생긴 겁니다.
어머니에게 세속적인 효만이 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각이 바뀝니다. 이것이 우리가 유심히 볼 대목입니다.
흔히 불교 공부를 고행하는 걸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부처님도 고행이 아니라고 했어요.
시각이 조금씩 바뀌면 바뀐 만큼 마음이 밝아지거든요.
밝아지는 것만큼 우리 마음도 행복감도 더 느끼고 즐거움도 더 느낍니다.
불교 수행은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앉아 있는 것도 억지로 앉아 있으면 다리도 아프고 고행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스스로 뭔가 육조스님과 같이 느끼고
부처님이 발견한 그 세계에 대한 가치를 느끼면서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싶어서 앉아 있으면
절대 그게 고통으로 안 느껴집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그걸 어떻게 해, 그 어려운 거 어떻게 해,
그렇게 하면 내가 손해 보는데 이런 생각도 바뀌게 됩니다.
시각만 바뀌면 즐거움으로 공부하면서 생활도 그렇게 하게 됩니다.
2006. 07. 04
고우 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