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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도 [五馬島] - 무인도를 간척으로 유인도로 만든 섬
요약 전라남도 고흥군 도덕면 오마리에 위치하고 무인도를 간척으로 유인도로 만든 섬으로 명소로는 오마도 한센인 추모공원이 있다. ‘오마도(五馬島)’는 해안을 낀 다섯 개의 섬 모양이 말(馬)의 형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치
오마도는 전남 고흥군 도덕면에 있는 섬이었지만 50년 전인 1962년부터 1965년도까지 간척공사를 통하여 육지가 되었다.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한 모양으로 잘 정리된 330만평의 농경지는 예전에 바다라는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기다란 둑으로 바다를 막아서 경계를 만들어 생긴 땅이다.
도양에서 오마도 방향으로 길을 잡아 가면 오마삼거리가 나오고 ‘오마길’로 들어가면 오마도와 연결된다. 왼쪽 들판을 낀 도로를 타고 북동쪽으로 가면 사거리가 나온다. 이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오마안길’이다. 이 입구에 마을표지석이 있다. 마을표지석 뒤에 별도의 비석이 있는데 오마도에 대한 내력이 실려 있다. 그 맞은편으로 버스정류소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유래비는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을유래와 리(里)형성유래 그리고 무인도가 유인도로 된 내력이 새겨져 있다.
오마리 표지석
‘오마도(五馬島)’는 해안을 낀 다섯 개의 섬(고발도, 분매도, 오마도, 오동도, 벼루섬) 모양이 말(馬)의 형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오마리’는 모두 네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오마도라는 명칭은 옛 ‘오질마도’가 바뀐 것이다. 이곳은 오마리의 주된 섬으로써 섬의 모양이 봉과 같아 일명 ‘봉도’라고도 부른다. 이에 비해 산 너머 오마의 남쪽에 있는 마을인 ‘은전마을’은 움밭굼이라 부르다가 같은 뜻의 음점과 은전으로 바뀌었다.
사거리에서 마을로 가는 길목 왼쪽에 오마리 게이트볼경기장이 있고 이 옆으로 경로당이 위치하며 경로당 옆으로 학교 가는 길이 있다. ‘오마안길 11-7’에 오마분교가 들어서 있다. 역시 지금은 폐교 상태다. 잡초로 무성한 운동장 옆으로 교실로 가는 길이 있다. 오른쪽은 파밭이고 중간에 교훈을 새긴 표지석이 있다. 이 주위로 학교에서만 볼 수 있는 조형물이 보인다. 이어 안으로 더 들어가면 입구 쪽에 이승복 동상이 있고 그 뒤로 학교 교사가 있다. 그렇게 크지 않은 아담한 건물이다. 1995년에 폐교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폐교
경로당 앞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가면 들판으로 이어진다. 오마도의 동쪽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간척되기 전에는 바다였을 지점이다.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 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들판을 끼고 분매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이 바로 ‘오마안길’의 연장이다. ‘분매’는 옛날 물이 없어 불모도라 부르다가 불무섬으로 바뀐 섬이었다. 파밭을 사이로 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마을에 접한다. 오른쪽으로 마을로 가는 조그마한 골목길이 몇 개 있다.
오마도 마을 전경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으로는 산으로 가는 길로 이어진다. 여기서 오른쪽에 있는 골목길을 택한다. 밭을 낀 도로변이라 낡은 집들이 몇 채 있다. 그리고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면 마을 중심지다. 오마리사무소와 건강관리실 등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2층으로 된 오마리 어촌계사무실이 있다. 포구는 오마도 남쪽마을인 은전마을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두 개의 재실이 있다. 이 동네에서는 잘 만들어진 한옥들이다. 동쪽 산 아래에 위치한 것은 아무 표시가 없어 어느 집안의 것인지 모르겠지만, 남쪽 산 아래에 위치한 것은 김해김씨 재실이다. 여기서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섬이 신흥마을이다. ‘신흥’(고발도, 괴발섬)은 본래 묘도라 하였으며, 고양이를 괴라고 하였으므로 괴발섬이라고 부르다가 괴발도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흥이라 한다. 오마도에는 ‘오마길’과 ‘오마안길’ 등 두 개의 길이 있다. 오마도에 들어가는 입구에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음악소리와 함께 제법 규모를 갖추고 만들어 놓은 곳이다. 여기에 한센인들이 오마도를 간척했던 역사적인 사건과 기록물 등을 전시하여 놓았다.
오마도 간척사업은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손에 의해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이뤄졌다. 이 간척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군의관 출신인 조창원 소록도병원장이었다. 음성 나환자들이 사회로 복귀하여 자활정착을 돕기 위한 거대한 국책사업의 일환이었다. 그것은 자기들의 독립적인 정착촌을 만들어 보겠다는 집념으로, 풍양반도와 봉암반도의 한가운데 바다에 떠있는 유인도 오마도를 육지에 연결하는 대작업이었다. 풍양면에서 오동도까지 385m, 오동도에서 오마도 남쪽까지 338m, 그리고 그 오마도에서 서쪽으로 도양읍 봉암반도까지 1,560m의 바다를 메웠다. 이렇게 만들어진 3개 방조제 안쪽바다가 소록도 2배인 330만 평의 농토로 조성된 것이다. 이 거대한 평야에서 5만석 정도의 양곡을 생산해 음성 나환자 치유자들의 생활 터전을 마련, 일반 영세농가들과 각각 1,500여 세대씩 입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오마도 바다 건너 풍양면 매곡으로 가는 둑길
간척사업을 했던 당시의 소록도 주민들은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연로한 상태지만 아직도 그 당시 작업 현장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창원 소록도 병원장이 어느 날 바다를 간척하여 음성환자촌을 만들자고 하여 모두들 찬성하였다. 먼저 소록도를 탈출하고 싶었고, 우리만의 집과 땅을 가지고 사람답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음성 환자 약 2,000명 정도가 2개 조로 나누어 1개 조가 한 달씩 일하며 교대하였다. 소록도 주민 5,000명 중에서 음성 나환자는 3,300명 정도였다. 작업을 할 수 있는 인원은 약 2,000명 정도였다는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셈이다. 지금처럼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트럭은 물론 경운기조차 구경할 수 없었던 때다. 원시적인 방법인 괭이와 삽, 손수레가 그들이 가진 것 전부였다. 만조 때는 8m 정도에 이르는 갯벌에다 섬에서 가져간 돌을 쏟아 부었지만 썰물에 휩쓸리면 다시 쌓기를 반복하며 1,000m 넘는 둑을 쌓아갔다. 간만의 차이가 심한 바다를 막아 거대한 농토를 만든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작업 도중 2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리와 허리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한겨울이 되면 가장 힘들었으나 오직 하나의 희망, 즉 내 땅을 갖는다는 일념으로 모든 것을 인내하며 일을 했다.
하지만 3년간의 대역사를 벌여 만든 방조제는 1,500미터 정도였다. 방조제 투석작업은 80% 정도, 갑문공사는 90% 정도가 완성될 무렵에 제6대 총선이 다가왔다. 이 때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닥쳐왔다. 땀의 결실은 환자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오마도 섬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한센병 음성 환자들에게 이 땅을 내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당시 수많은 육지 주민들은 한센환자들이 소록도에서 이곳으로 나오는 것을 결사반대했고, 당시 총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한 나머지 군사정부는 주민들의 민원을 들어주는 형식을 갖추고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간척된 땅에서 살 수 없다는 주민들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당시 한센병 환자에 대한 흉흉한 소문과 뿌리 깊은 불신 풍조 때문이었다. 한센병 환자들을 몰아낸 다음 사업주체는 전라남도 관할 아래 있는 한국정착사업개발흥업회가 맡았고, 소록도의 오마도 개척단은 해체하게 되었다. 토지 분배권은 전라남도가 갖게 되었고, 한센병 환자들은 간척 공사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잃어버렸다. 공사 후반에 체불된 임금도 사라지고 말았다. 공화당 고흥지구당 위원장에게 탄원서를 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한센병 음성 환자들의 꿈과 희망과 피나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고스란히 육지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이 일을 주도한 조 전 원장도 1964년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조 원장은 1961년 5 · 16 군사쿠데타 후에 국립소록도병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반세기 정도의 오랜 세월 동안 한센병 환자 및 음성한센병자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살아왔다. 이러한 각별한 이력 때문에 이청준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모델로 한 이청준 작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신동아’에 연재되었으며, 197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이 소설은 2003년에 100쇄가 넘는 기록을 세웠다. 국내 순수문학 중에 100쇄를 넘는 작품은 최인훈의 ‘광장’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후 세 번째이다. 정부는 “그 당시 한센병력자들이 건설했던 방조제는 모두 소실됐고, 현재 남아있는 간척지는 모두 정부가 처음부터 새로 만들었다”며 음성환자들에 대한 보상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 전 원장의 생각은 달랐다. “85% 완공 단계인 간척 공사를 정부가 빼앗지만 않았어도 간척 공사는 무사히 완공했을 것”이라며 “당시 완공된 방조제에 대해서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들은 “한센병의 전염력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병흔이 좀 남아 있는 ‘피부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조 원장은 “대부분 사람들이 한센병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오해와 편견의 굴레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이런 무지에서 깨어나면 오마도 사건, 비토도 등 수많은 한센병자들이 겪어온 편견과 오해와 시련의 역사도 사라질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 속에 나타난 나병은 ‘천형’으로 표현되는데 수천년 동안 내려온 이런 차별도 이제는 끝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71년 8월에 일어난 ‘실미도 사건’은 역사 속에 파묻혀 버린 대표적 인권유린 사건이었다. 이 사건과 ‘오마도 사건’의 진상 규명이 2004년 8월에 시작되었다. 국가가 한센병자들에게 행한 극심한 차별, 비인도적인 만행, 야만적인 처사들이 공개되었고 2009년부터 실시한 진상조사를 발표하였다. 조사 결과 정부가 개입해 한센인들을 돌보기는커녕 폭행, 감금, 강제노역, 낙태, 총살까지 하였다. 피해자는 무려 6,462명에 달하고 그 중에 1754명은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내용이다. 진상위원회는 한센인 격리, 폭행 사건, 84인 학살 사건, 오마도 간척사업 사건, 사천 비토리 사건 외에 14건을 정부가 개입하여 한센인들의 인권을 침해한 사건으로 추가 확정했다. 국민 의식수준의 향상과 정부 및 수많은 단체들의 노력으로 이들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센인들은 일반 사람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엄청난 차별을 당하였다. 그래서 격리 수용되어 유배생활을 하면서 가족들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며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야 했다. 한센병은 유전병도, 타인에게 전염되는 불치병도 아니며 결핵과 똑같은 감염병이다. 오히려 결핵에 비해 전염성이 100배 약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한센인들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으며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아직도 수많은 한센인들은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리며 정착촌에서 모여 산다. 아직은 일반인들이 대하는 모습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이 늦었지만 사회의 편견과 무지로 인하여 억울한 피해를 당한 이 분들에 대한 명예와 보상이 이루어져 다행한 일이다. 일본도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한센인들 격리에 대해서 사과하고 800~1,400만엔씩 보상했다. 대만도 2008년도에 정부에서 반성과 사과를 하였다. 우리나라도 2009년에야 한승수 당시 국무총리가 소록도를 찾아와서 정부를 대표해 한센인들에게 사과했다. 뒤늦게 고흥군에서는 방조제 끝지점인 오마도삼거리 언덕 위에 오마도를 간척한 한센인 추모공원을 세웠다. 당시의 한센인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보고자 그분들의 소망과 염원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추모 공원이다. 가슴 아픈 사연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지, 어떤 환경 아래 살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또 어떤 차별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며 오마도를 떠난다.
한센인들의 한이 서린 오마도 한센인 추모공원
‘오마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는 고흥 가는 길이고 왼쪽은 오마리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 중심에 추모공원이 있다. 바로 ‘오마도 한센인 추모공원’이다. 고흥군에서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인 오마도삼거리 언덕 위에 당시의 한센인들이 이루지 못한 꿈과 그분들의 소망과 염원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추모 공원이다. 정문을 통과하면 감지기가 작동하면서 모형바위 속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오르막길은 시멘트로 박석효과를 낸 경사길이고, 시멘트포장길은 공원에 들어서면 이내 푸른색의 카펫길이 된다.
오마도 한센인 추모공원
오른쪽으로 가다 먼저 만나는 곳이 현장체험장이다. 당시의 작업도구와 방법으로 한센병 환자들의 힘겨웠던 공사현장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다시 올라가면 계단길이 이어지고 왼쪽 아래로 포토존이 있다. 그것을 뒤로하고 계단을 타고 오르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여기서 앞을 보면 좌우로 오마도간척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위령탑을 만나게 된다. 위령탑 주위로 시비가 병풍처럼 둘러있다. 이곳에는 한하운 ‘보리피리’ 시비와 개척단 부단장의 글이 새겨져 있다. 김형주 부단장의 글은 1964년 개척 완료 뒤 5천 명의 원생을 대신하여 쓴 애곡으로 ‘아으 슬프도다’라는 글이다.
한센인 한하운 시인 모형
한센인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개척단 김형주 부단장의 시
아으 슬프도다
개척단 부단장 김형주
오호 통재라!
오천 원생은 곡하노라!
우리의 비원의 숙원사업이었던 오마도 간척공사를
1962년 7월 10일에 착공하였으나
세계적인 대기만극으로 1964년 5월 25일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기에
여기에 그 유래를 새겨 만천하에 고하노라
1964년 5월 25일 국립소록도병원 오천원생 일동 애곡(哀哭)
여기서 1964년에 간척사업이 완공(대단원의 막)되었다고 표현했으나 방조제에 세워진 안내문에 의하면 사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사업은 진행되었다. 즉 방조제사업만 마쳤을 뿐이다. 이때 56.7%의 공정을 마친 상태에서 사업주체가 보사부에서 전라남도로 이관되어 계속 진행된 것이다. 결국 방조제사업은 완공을 보지 못하고 한센인들이 철수되었다. 이후 방조제사업은 전라남도에서 완공하였고 간척지 조성사업은 1988년에 완공을 보았다.
방조제 조성 공사 안내문
위령탑은 원형의 호수 위에 S자형의 경사진 땅을 파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땅을 파내고 운반하고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음성 환자 2,000명이 2개 작업대를 만들어 1개 작업대가 한 달씩 교대로 일했다. 소록도 주민 5,000명 중 음성 환자는 3,300명이었고, 작업이 가능한 인원이 2,000명이었으니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가 참여한 셈이다.
한센인들의 작업 모습 모형도
한센인들의 작업 모습 모형도
오마도 간척사업 과정 중에 일어난 것이 ‘오마도 사건’이다. 1962년 전남 고흥군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이 소록도 근처 오마도 앞 바다를 메워 자신들의 생활터전(농토)을 마련하려 했으나 완공 직전 군사정부의 개입으로 간척지에서 쫓겨난 사건으로 이 사건은 소설가 이청준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위령탑 아래로 ‘테마관’이 있다. 원형 돔 형식으로 된 테마관에는 옛날 사진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추모사진이다. 그 앞으로는 5개의 말 형상들이 세워져 있다. 다섯 마리의 말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발돋움하고 있다. 말이 마치 힘차게 뛰며 활동할 수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오마도 마을 유래에 대한 상징물이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쉼터가 있다. 벤치 두 개가 있으며 그 뒤로 난간 위에 한센인들이 휴식을 취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오마 간척지 테마공원 종합안내도
한센병에 대한 오해와 차별로 인한 비극의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있었던 일을 오늘날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구성원들이 가진 꿈과 희망을 어떻게 관리하여 긍정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현장이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만의 천국을 만들고 있지는 아니한지 곱씹어보면서 성찰의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출처:(한국의 섬 - 강진군·고흥군·보성군·장흥군, 2021. 04. 30., 이재언)
2023-09-02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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