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영광 39코스 제2부
영광대교-백제불교최초도래지-법성포
20230222
1.법성포의 화려했던 옛 영광을 어떻게 회복할까?
서해랑길 39코스 영광대교까지는 백수해안도로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에 도취하는 탐방길이다. 39코스 영광대교 이후 탐방은 영광지역의 고통의 역사와 천년의 빛 화려한 법성포의 역사와 문화가 중심을 이루는 탐방길이다. 그 고통의 현장은 홍농읍 칠곡리와 볍성면 진내리를 잇는 전남방조제에 있다.
가와사키(川崎芳太郎)는 일본 고베 출신으로 1917년 6월에 '전남농장'을 설립하여 법성포에서 간척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 지역민들은 '전남농장'을 일반적으로 '천기농장(川崎農場)'이라 불렀다고 한다. 천기농장은 1924년 6월부터 목넹기방조제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 7월에 완료하여 바닷물 유입을 차단하였고 간척공사는 1931년 1월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이 방조제 축조공사 당시 공사에 참여한 농민들은 싸구려 임금을 받아가며 새벽밥을 먹고 생명까지 빼앗기는 위태한 공사장에 나가 온갖 학대를 받아가면서 일을 하였다고 한다. 특히, 밀물 때를 이유로 감독자는 오후 3시에야 점심을 먹였다고 하니, 그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니 그 정도는 괜찮다고 넘어가도 될까? 1925년 6월에는 방조제수문을 갑자기 열어 50여명이 타고가던 나룻배가 침몰해 30여명이 죽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때 아이를 업은 부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참혹한 역사를 지닌, 이제는 전남방조제라고 불리는 목넹기방조제 유수지 농로를 따라간다. 이곳은 바닷물이 흘러들어 전북 고창군 공음면 지역으로 올라간 모양이다. 드넓은 모래등 들판과 갈대군락지가 형성된 이곳의 지난 모습을 상상해 본다. 목맥나루에서 그리고 자갈금나루에서 북쪽 고창 지역으로 오가는 배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활 모양의 커다란 그물로 어린고기를 잡는 고깃배인 활배(弓船)들이 고기잡이하는 풍경도 그려진다. 활배어업은 물때 따라 물목에 그물을 바쳐 고기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물목이 가장 좋은 곳을 상목, 가장 나쁜 구역을 하목, 기타 구역을 중목이라 하였는데, 목넹기방조제 아래가 장수천, 구암천, 와탄천이 합류하고, 물 흐림이 빨라 고기를 가장 많이 잡는 상목 지역이었다고 한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기념성역, 대체적으로 마라난타사라고 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백제불교최초도래지라고 확증할 수는 없다. 영광군에서는, 불갑사와 관련지어 인도의 마라난타 존자가 대통재 아래 법성포 좌우두 지역으로 들어와 백제에 불교를 최초로 전파하였을 것이라 추정하여, 이곳을 백제불교최초도래지라고 명명하고 마라난타 존자를 성역화하였다. 그 건축물과 시설물은 모두 마라난타를 기념하여 인도 간다라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종교적 신앙심이 없는 길손은 호기심으로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관람할 마음이 생겼겠지만 시간에 쫓겨 그냥 지나쳐간다. 기념 광장에 아소카 왕 석주가 우뚝하고, 주두에 사자상이 사면대불을 향하여 있다. 이 모습에 길손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평화를 갈망하는 아소카 왕의 염원이 법성포 좌우두에 우뚝 솟아서 평화의 뜻을 펼치고 있다. 평화, 그런데도 인종과 종교와 이념과 지역의 갈등과 전쟁이 끊임없다. 이 땅과 인류의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며 대통재둘레길을 따라 숲쟁이꽃동산을 통과한다.
화려했던 지난 시절을 간직한 법성포가 내려다 보인다. 조선시대 법성면은 영광군에서 분리되어 독진(獨鎭)으로서 106년 동안(1789~1895)이나 법성진 첨사가 독자적으로 행정을 펼쳤던 고을이다. 올해가 법성진이 독진으로 승격, 독자행정권역이 된 지 234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오늘의 법성포는 어떤가? 허물어진 법성진성, 그 자락에 자리한 숲쟁이, 진성마을에 자리한 유물과 유적지를 관광지로 조성하였고, 인공섬을 조성하여 뉴타운을 건설하였다. 법성포의 화려했던 시절을 회복하기에는 한참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해 바다의 융기로 칠산바다가 수심이 낮아지면서 법성포구는 배가 자유로이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칠산어장을 가득 메운 조기잡이 배들의 불빛을 볼 수 있을까? 법성포의 파시(波市)에 대하여, 옛 기록을 보면 "조기는 영광군의 서쪽 파시평(波市坪)에서 산출된다. 봄과 가을이 교차하는 시기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여기에 모여 그물로 이를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징수하여 국용(國用)에 쓴다.", "파시전(波市田)은 영광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조기를 산출한다. 매년 봄에 경외(京外)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이를 잡아 판매하는데 왁자지껄하기가 서울 저자(京市)와 같다. 그 어선들은 모두 세금을 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파시의 풍경, 법성포의 파시풍(波市風)을 이 지역 출신 미천당(美泉堂) 김진보(金鎭輔, 1784~1859) 선생은 이렇게 읊었다. "한쪽에 있는 큰 포구 명승지로 알려졌으니/ 산세도 감아 돌고 바다는 길게 둘렀구나/ 크고 작은 고깃배들 해변에 매여 있고/ 여러 고을 백성들은 세금 내러 오는구나/ 저잣거리 가게에는 가히 없는 물건이 없고/ 집들의 화려함은 악양루와 같구나/ 이 바다를 보고 그저 물이라고 할 수 없기에/ 매년 파시 철에 와서 한차례씩 노닐다 간다네."(김진보(金鎭輔)의 '계춘유법포운(季春遊法浦韻)' 번역문)
법성포 앞 바다는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밀고 들어와 마치 호수와 같다 하여 대서호(大西湖)라 이르고, 중국의 동정호에 버금가는 풍광으로 일명 '소동정(小洞庭)'으로 예찬된 곳이었다고 한다. 일명 서산(西山)이라고도 이르는 대통재(大通峙)에서 아름다운 서해의 낙조(落照)를 조망할 기회가 있을까? '통치낙조(通峙落照)'는 법성포 12경에 속한다고 한다. 지금은 한낮, 낙조는 감상할 수 없고 대통재에 올라갈 시간도 없다. 대통재둘레길에서 법성포의 낙조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안고 바삐 달아나는 일행을 좇아간다. 낙조는 삶의 종말, 그 종말은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한다. 그 마지막에 피를 쏟아내며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이 지역 출신 초정 조의현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넘어가면 고히 넘어가지/ 왜 저리 부글대며 허위적이며/ 생피까지 바다 우에/ 뿜어 뿌린단 말가/ 아니, 무릇 무엇이든/ 마즈막때란 저럴테지"(조의현(1907~1985)의 '서산(西山)에 지는 해', 1929년)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7.39km 중 4.69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46분 중 1시간 48분
서해랑길은 칠산바다 해안으로 내려간다. 앞쪽은 홍농읍 칠곡리 목맥교차로이다.
영광대교가 칠산바다 목냉기를 가로지른다. 오른쪽에 야간 항행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위험지역 해로표시등인 등간(燈竿)이 있다. 건너편 왼쪽은 대신리 모래미해안, 중앙 뒤쪽은 대신항, 오른쪽 뒤의 섬은 돔배섬(도소음도), 바로 앞 오른쪽의 목냉기 해안을 돌아가면 소항월마을이 나올 것이다.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기념 성역이 왼쪽 산 대통재 아래 법성포 좌우두에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은 백수읍 구수리 해안이다.
건너편 마을이 홍농읍 칠곡리 목맥마을이다. 오른쪽 방조제는 목넹기방조제, 현재는 전남방조제라고 이른다.
"목맥마을은 법성면 진내리 자갈금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홍농 칠곡리 목맥마을이다. 조선 효종 즉위년(1649년)에 김왕 무장 현감이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에 있는 전선의 정박처가 수심이 낮아 이곳 목맥으로 옮겨 달라고 상소한 점으로 미루어 효종 때부터 무장현 전선들이 정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 법성문화진흥원
1925년에 전남농장에 의해 조성된 방조제이다. 목넹기방조제라고 불렸는데, 현재는 전남방조제라고 이른다.
건너편은 법성면 진내리 자갈금 해안이며, 왼쪽 마을은 자갈금마을이다. 중앙에 솟은 산 대통재(大通峙) 오른쪽 아래는 백제불교최초도래지 기념성역이 있는 좌우두 지역이다.
소항월-목맥마을-자갈름, 지명을 확인시켜 준다. 서해랑길은 건너편 전남방조제 유수지 농로를 따라 이어진다.
위쪽 제방길은 칠곡로, 전남방조제(목넹기방조제) 유수지 농로를 따라 자갈금으로 이어간다.
전남방조제 유수지에 갈대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다. 정면 뒤에 보이는 산은 법성면 법성리 인의산, 그 자락에 자리한 마을이 검산마을이고, 오른쪽 앞에 자리한 마을은 자갈금마을이다.
"진내(鎭內)3리 자갈금마을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전남농장에서 목넹기 방조제 공사를 시작하면서 취락이 생긴 곳이다. 자갈게미는 돌(石)을 뜻하는 우리말 자갈과 만(灣)을 뜻하는 우리말 구미에서 유래하였는데, 지금은 소리음인 자갈금이라 부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진내리로 편입한 이 마을은 1934년에는 서진내리로 속했다가, 1964년에 진내3리에 속하였다. 법성면 법성7리 검산마을은 지금부터 230년 전에 생긴 마을이다. 조선 정조 때 발간된 [호구총수, 1789년]에 단속할 검(撿)자와 메 산(山)자를 조합한 검산(撿山)으로 수록되어 있다. 우리말 금메와 같은 뜻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법성리로 통합하였고, 1964년에 법성3리가 신설되어 안앙금메와 함께 법성3리가 되었다가, 1994년에 법성7리로 바꾸었다. 2009년에 준공한 법성·홍농하수종말처리장이 이곳 안앙금메에 있다." - 영광군청
전남방조제 유수지 모래등에 갈대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다. 정면 앞에 홍농읍 상하리 문산, 그 오른쪽에 문산마을, 그 왼쪽에 신흥마을이 있으며, 맨 뒤의 산봉은 봉대산, 그리고 오른쪽 뒤는 홍농읍 상하리 읍소재지이다.
"상하(上下)4里 문산(文山)마을은 김해 김씨(金海金氏) 김일혁(金一爀)이 법성면에서 임진왜란 당시 이거하여 원래 광산(光山)이었으나 1910년 농산(農山)이라 고쳐 부르다가 1914년에 문산(文山)이라 칭하였다. 상하(上下)4里 신흥(新興)마을은 밀양 박씨(密陽朴氏) 朴文一이 1869년 함평에서 이거하여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혼인 입주(入住)하였고, 밧싹게라 불러오다 다시 안싹게로 불렀으며 1914년 김종국(金鍾國)이 신흥(新興)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 영광군청
앞에 홍농읍 칠곡리 목맥마을이 있고, 오른쪽 뒤에 금정산이 솟아 있다.
"칠곡(七谷)3리 목맥(木麥)마을은 바다 건너 법성포가 우(牛)형인데 법성면 진내리 3구가 우두형(牛頭形)으로 소머리가 향하여 있는 곳이라 하여 여물고지(매몰고지)라 칭하다가 목맥(木麥)으로 칭했다 한다." - 영광군청
맨 왼쪽은 홍농읍 상하리 문산마을, 중앙에 월봉마을, 맨 오른쪽 인의산 자락에 법성리 검산마을이 자리하고, 맨 뒤에 아파트 건물들이 보이는 곳이 홍농읍 상하리 읍소재지라고 가늠한다.
"홍농읍 상하(上下)4里 월봉(月峰)마을은 장수 황씨(長水黃氏) 황재일(黃在日)이 1860년경 고창군 무장면에서 입향하여 입주하였으며 미역섬이라 불러오다 박도섬 등으로 칭하였다. 1940년 마을 형태가 반달 같다 하여 월봉(月峰)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영광군청
왼쪽은 숲쟁이 꽃동산, 오른쪽은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좌우두관광지로 가는 길이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칠곡로 오른쪽 아래 구암천 유수지 농로를 따라오다가 배수갑문 있는 곳에서 제방길로 올라왔다.
법성면 진내리 941-2 지역,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0.6km, 39코스 종점 3.5km 지점이다. 영광대교가 칠산바다 목넹기를 가른다.
뎈길을 따라가다가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정문주차장으로 가서 설명안내판을 보고서 서해랑길을 이어간다.
영광 법성포(法聖浦)는 인도 간다라 지방 출신의 고승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법(佛法)을 전하기 위해 서기 384년(침류왕 원년) 중국 동진에서 배를 타고 처음 들어온 곳이다. 법성포의 백제시대 지명은 '아무포(阿無浦)'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머물면서 설법을 하는 부처인 '아미타불'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마라난타 존자(尊者)가 대승불교 중에서도 아미타불이 머무는 서방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정토신앙을 전래한 데서 연유한다. '존자'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부처의 제자를 이르는 말이다. 아무포는 그 뒤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성스러운 포구' 라는 뜻을 가진 법성포(法聖浦)가 되었다. 마라난타는 법성포에 당도한 후 가까운 모악산(불갑산)에 처음 절을 세웠다. '불법의 사원', '으뜸이 되는 절' 이라는 뜻을 간직한 불갑사(佛甲寺)이다. 오랜 불연(佛緣)을 가진 법성포는 한국 불교문화사나 정신문명사에서 매우 뜻깊은 곳이다.
불교최초도래지 기념 성역 안내
중생들의 마음을 밝혀 행복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이역만리 인도 간다라에서 미지의 백제까지 험난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불법(佛法)을 전해준 마라난타 존자(尊者). 그의 숭고한 행적을 알리고, 불교문화적 의미와 역사성을 구체화하여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법성포 좌우두 일원에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기념 성역을 조성했다. 기념 조형물은 간다라 불교문화의 원류를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제작했다. 마라난타 존자가 대승불교 문화의 발원지인 간다라 지방 출신임을 고려해 간다라 불교조각과 건축 양식을 투영해 만들었다.
전남방조제(목넹기방조제) 오른쪽 끝에 구암천 배수갑문이 있는 곳이 자갈금, 자갈금 해안 뎈길을 따라 올라왔다.구암천 유수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맨 왼쪽에 금정산, 오른쪽 뒤에 봉대산이 확인된다. 자갈금 해안 콘크리트 시설물이 있는 해변이 '모래찜 바탕'이라 불린 곳인데, 한여름에 주로 부녀자들이 모래찜을 즐겼던 곳으로 금남(禁男)의 지역이었다고 한다. 모래찜바탕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법성포에서 가마미까지 차도 개설로 가마미해수욕장이 개장되고, 세월이 지나 뻘판이 늘어나 모래판이 좁아지면서 이용객이 점차 줄었다. 광복 후에도 한동안 그 명성이 여전했던 모래찜바탕은 2000년대에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좌우두관광지' 진입로가 개설되어 지금은 잊혀진 곳이 되었다. - 법성문화진흥원 참조
홍농읍 칠곡리 목맥에서 오른쪽 법성면 진내리 자갈금으로 전남방조제가 이어져 있다. 목맥마을과 중앙에 금정산이 화인된다.
"당시의 언론 매체들은 사업주체인 '전남농장'을 '천기농장(川崎農場)'이라 하였고, 법성포 사람들도 '가와사키 농장'을 한자 음운대로 '천기농장'이라 하였습니다. 가와사키(川崎芳太郎)는 일본 고베 출신으로 1915년 3월에 법성리 602번지 일대를 매축하여 6천여 평의 택지(현 농장마을)를 조성하였고, 1917년 6월에 '전남농장'을 설립하여 법성포에서 간척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22년 1월에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도 '가와사키(川崎)농장'을 설립하여, '영남수리조합'을 창립한 사람입니다.
가와사키의 간척사업이 시행되기 전, 이곳은 조선시대 '법성진성' 후사 면인 '후포(後浦)'(뒷개)에서 홍농 칠곡리 '매물고지', '상봉', '하봉'을 이어주는 나룻길이 있었고, '샘목나루(乙津)'와 '무장진(茂長鎭)'의 선착장이 있었던 공음면 '석교(石橋)나루'를 왕래했던 '뱃길'이 있었으며, 법성리 검산마을 앞까지 조기떼가 몰려다녔었습니다. 지금의 전남방조제는 1924년 6월부터 공사[320間, 약 580m]가 시작되고, 1년여 만인 이듬해 7월에 완료되어 바닷물의 유입이 차단되었습니다. 그리고 간척공사는 착공 6년 6개월여 만인 1931년 1월에 준공되어 250여만 평이 논(190여만 평), 밭(만 5천여 평), 대지(천여 평), 잡종지(12만여 평), 유지(3만 4청여 평), 못(8만 7천여 평), 도로(2만 7천여 평), 구거, 제방, 하천, 임야 등으로 형질이 바뀌고 이 농경지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전북 고창 공음에 두암저수지와 홍농 칠곡에 칠곡 저수지, 법성 뒤개(후포)에 검산저수지가 생겼으며, 두암저수지를 만들면서 공음면 두암마을이 수몰되어 이곳 사람들이 법성 화천리로 이주하여 신두암마을이 생겼습니다." - 법성문화진흥원
왼쪽 백수읍 구수리 목단과 오른쪽 홍농읍 칠곡리 목맥을 잇는 영광대교가 목넹기를 가른다. 영광대교 아래쪽이 상목이다.
건너편은 백수읍 구수리 구미마을일 것이라 가늠한다. 중앙에 보이는 산이 구수산일 것이다.
"백수읍(白岫邑) 구수리(九岫里) 구미(九尾)마을은 구수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목단리 동북쪽, 구수산 밑이 되며. 영광 삼두 구미(三頭九尾)의 하나로서 구시미 복판에서는 3일, 8일 장이 섰을 정도로 융성하였던 시절도 있었다. 민장치부책에 의하면 천안 전씨(天安全氏)가 이 마을에 제일 먼저 입촌(入村)하였고 경주 정씨(慶州鄭氏) 운영(雲永)이 1800년도 초기에 정착해 살다가 이사하고, 1900년경에 경주 최씨(慶州崔氏)가 이 마을에 입촌(入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구수리에서 으뜸되는 구미마을은 목단 동북쪽 구수산(九岫山) 밑에 자리하여서 지역의 꼬리라는 뜻을 빌어 구시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 영광군청
구수산 자락 해안에 구시미나루가 있었다 하니 건너편 해안 오른쪽이 구시미나루터일 것이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 기념성역의 일주문 역할을 하는 기념물로서 간다라 양식의 건축 양식의 건축 개념을 도입하여 건립된 불교도래지 상징적 이미지를 입구에서 느낄 수 있도록 세워져 있다.
영광원자력발전소 안전성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 대피 경로를 안내하고 있다. 무언가 두려움이 느껴진다.
맨 꼭대기에 만불전과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모신 간다라 양식의 사면대불이 높게 서 있고, 그 아래 불당이 있는 건물인 부용루가 있다. 광장에는 아소카 왕 석주가 있으며, 석주 머리에 사자상이 사면대불을 향해 있다. "Asoka王石柱는 아소카 왕이 각지의 불교 성지에 세운 기념 석주로, 높이는 10~13미터이며 주두에는 사자, 소 따위가 새겨져 있다. 네팔 국경 근처에 있는 석주가 원형대로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30개 정도가 남아 있다."(다음사전)
백제불교최초도래지 기념성역은 백제 침류왕 1년(384년)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 존자가 불법을 전하러 법성포에 발을 내디딘 것을 기념하는 곳이다. 이곳을 마라난타를 기념하는 절로서 마라난타사라고 이르는 것 같다. 왼쪽은 마라난타사의 일주문인 간다라 양식의 상징문, 오른쪽은 기념품 판매점인 불연각(佛緣閣)이다.
칠산바다가 법성포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와탄천과 만난다. 이곳이 법성포 좌우두 지역이며, 건너편 구수리를 왕래하는 구시미나루터가 양쪽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진내2리 좌우두 지역은 조아머리, 조암머리 등으로 불렸던 곳이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좌우두로, 고지도에는 좌우촌(左右村)으로 나타나 있는 마을이다. 좌우두는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이 칠산해역에서 항월(項越)(목넹기)을 지나 이곳에 이르렀을 때 왼쪽으로 가면 무장진에 이르고, 오른쪽으로 가면 법성진에 이르는 길머리(頭)라는 의미의 지명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진내리로 편입된 마을이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전쟁에 광분하던 일제는 우리 전통문화를 말살하는 것은 물론, 무기를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쇠로 된 물건은 모두 싹쓸이했다. 이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마을의 농악기만은 강탈해 가지 못했다. 풍수지리상 우리 고을의 지세는 소가 누워있는 모양인데, 소의 목에 매단 풍경에서 방울소리가 나듯 소머리 왼쪽에 해당하는 이 마을에서 농악소리가 멈추면 우리 고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 진내2리로 편제된 이 마을은 2000년 초에 '좌우두관광지조성사업'부지로 선정되어 폐촌되었지만 '백제불교최초도래기념 조형물' 등을 건설하여 지금은 영광군 대표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 영광군청
간다라 풍의 향로, 아소카 왕 석주, 뒤쪽에 존자정이 있다. 바다 건너 솟은 산은 구수산일 것이다.
간다라유물관에는 대승불교 문화의 본고장인 간다라의 2C~5C경의 불전도 부조 및 불상 등 진품유물을 전시하여 간다라 불교문화예술의 특징적 요소를 직접 관람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건축 양식도 간다라 건축 양식을 담아내도록 하였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는 일반적으로 마라난타 존자를 모시는 마라난타사라고 이르는 것 같다. 맨 위에 만불전과 사면대불, 그 아래 부용루, 아래에 만다라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설명안내판의 글을 옮겨 놓는다.
1.사면대불 :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관음세음보살을 좌우 보처로, 그리고 마라난타 존자가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고 계신 모습을 다른 한면에 배치한 사면불로서, 약식 석굴사원 양식을 띤 독특한 형태의 간다라 양식 사면대불로 조성되어 있다.
2.부용루 : 부용루는 참배 및 서해 조망용 누각으로서 1층 석벽에는 간다라 양식의 불전도 부조 조각이 23면에 걸쳐 부처님의 전생 인연담과 일대기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3.만다라광장 :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중심광장으로 만다라 도형을 상징화하여 조성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는 보리수나무를 식재하여 불교최초 도래지의 의미에 부합하도록 하였고 주변에는 연지가 시설되어 있다.
화장실도 간다라 양식 건축이다. 설법도를 거쳐 맨 위쪽에 조성된 탑원으로 올라간다.
간다라 지역 사원유구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탁트히비히 사원의 주탑원을 본떠서 조성한 탑원으로서, 마라난타 존자의 출신지인 간다라 사원 양식의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연화좌 위에 앉은 설법 자세의 불좌상을 중심으로 양 옆에 보살입상이 배치된 삼존상 형식으로 화려하게 장엄된 누각에 모셔져 있는 모습으로 그 주위에 많은 보살들이 다양한 자세로 앉아 경탄하기도 하고 꽃을 뿌리기도 하고 생각에 잠겨 있기도 하다.
탑원은 불탑과 감실형 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감실형 불당은 불상과 소탑을 봉안하는 감실이다. 파키스탄 탁트히비히 사원의 탑원을 본떠 만들었다는 탑원은 불상을 모신 감실이 불탑을 삼면으로 감싸고 있는데 감실마다 각기 다른 불상을 봉안해 놓았다.
칠산바다 법성포 좌우두 해안과 건너편 구수리 해안과는 양쪽으로 구시미나루가 있었을 것이다. 건너편 오른쪽 뒤에 솟은 산은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이 아홉제자와 수행한 구수산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39코스 종점까지 2.6km가 남았다. 대통재둘레길을 따라 왼쪽 숲쟁이 꽃동산 방향으로 이어간다.
아래는 법성면 진내리 법성포 현장마을이다. 중앙 뒤에 대덕산이 솟아 있다.
"진내2리 현장 지역은 조선시대에 상리와 하리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오는 거리 지명은 '서문(西門)거리'가 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창문(倉門), 외치리(外峙里), 토병리(土兵里)로 나타나며, 1800년대 순조 때에 이 마을들은 각각 상리와 하리로 재편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진내리로 통합되었고, 1934년에 진내리가 동서로 나뉘어 서진내리가 되었다. 또, 이 해에 옛 서부 농협 4거리에서 이곳 일대인 월랑대 앞 해변을 따라 목넹기를 경유하여 가마미로 이어지는 차도가 개설되고, 1938년에 영광어업조합이 위도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여 위판장을 개점하면서 월랑대 앞 해변 일대가 '다랑가지'로 불리며 영광군 최대 수산시장으로 발전하였다. 1940년에 이르러 법성면에서 이 일대를 택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매립공사를 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이때 많은 젊은이들이 공사현장에서 일하였고, 이때부터 이 일대를 '현장'이라 불리며, 마을세도 매우커졌다. 1964년에 운영리인 진내2리가 되었고, 마을 이름을 현장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법성창이 자리하고, 조운선의 선착장이 있었던 곳이며, 1970년대 초까지는 법성포에서 백미(白眉)로 손꼽던 정자인 제월정(霽月亭)이 있던 곳이다. 법성포단오제전수교육관이 이 마을에 자리를 잡고, 2019년 단오 때, 신축 및 개관하였다." - 영광군청
아래 현장마을 건너편은 인공섬을 조성하여 건설한 뉴타운이다. 왼쪽 언덕에 한옥펜션마을, 그 위 산봉에 법성진성이 있다.
사면대불 갈림길에서 대통재둘레길을 거쳐 숲쟁이꽃동산 출입구로 나왔다. 쟁이는 '성(城)', 숲쟁이는 '숲으로 된 성'을 뜻한다.
39코스 종점 2.2km 지점, 숲쟁이꽃동산 주차장이 4곳에 걸쳐 넓게 조성되어 있다. 앞의 길은 전남방조제(목넹기방조제) 앞 자갈금에서 올라오는 백제문화로이다.
숲쟁이꽃동산 주차장 지역의 백제문화로를 가로질러 숲쟁이길을 따라 진행한다.
법성포 앞 진내리 현장마을 오른쪽에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승강기가 보인다. 뒤의 오른쪽 산이 구수산일 것이다.
왼쪽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사면대불 방향에서 대통재둘레길을 통하여 주차장으로 나왔다.
저 산을 '대통재'(待通峙, 大通峙)라고 이르는 것 같다. '대통재(待通峙)'는 이곳에서 중국으로 갔던 사신을 기다리는 고개라는 의미로, '대통재(大通峙)'는 중국의 사신들이 넘나들었던 고개라는 뜻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법성문화진흥원 참조)
서해랑길은 왼쪽 숲쟁이길을 따라 법성진성으로 올라간다.
법성포 법성진성 설명안내판 뒤에 있는 조형물은 조기잡이 배를 형상화한 것 같다.
현재 국가사적 지정 심의 중인 이 성은 전라남도 기념물 205호(2002년 11월 27일)인 도 지정 문화재이다. 이 성은 높이 8척 7촌(약 4m), 둘레 3062척(약 1.5km) 규모로 1514년(조선 중종 9년)에 법성진 관할 전라도 28개 수세 군현의 고을 백성들이 동원되어 쌓은 석성이다. 법성진성은 국바의 요새인 수군진과 국가 재정의 중추기관인 국내 최대 조창이 성내에 공존한 독자행정권역(독진)으로 조선시대 경제, 군사 및 행정제도 연구에 학술적 가치가 크고 시대성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법성진성 축성에 참여한 전라도 고을 주민들의 군, 현의 이름이 성돌에새겨져 있다.
숲쟁이꽃동산 주차장에서 숲쟁이길 한옥펜션마을 담장을 따라왔다. 벽화는 마라난타 존자일까?
왼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법성진성과 전망대에 이른다.
진성은 지방의 각 진영에 성벽을 쌓은 방어 시설이다. 영광 법성진성은 전라도 일대 세곡을 모았던 법성창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중종 9년인 1514년에 돌을 쌓아 만들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는 성벽의 둘레가 1688척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는 약 800m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460m이며, 북벽은 전 구간이, 서쪽과 동쪽은 일부 구간만 확인된다. 1872년 만들어진 <법성진 지도>를 볼 때, 성 내부에서는 동헌, 객사 등 관아 시설뿐만 아니라 세곡 수납과 관련된 창고 시설도 확인된다. 성벽에서는 축성에 동원된 전라도 관내의 군현명과 쌓은 길이, 축성 책임자, 재정 담당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법성진성의 축성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성 주변에서는 조선시대의 기와, 자기, 토기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법성진성 북벽 길을 따라 숲쟁이로 이어간다.
장성군 고을 백성들이 쌓은 성돌이다. 그 기록이 성돌에 새겨져 있다.
법성면 검산마을이 왼쪽에, 그 오른쪽에 검산저수지, 앞쪽에 구암천이 흐른다. 중앙 뒤에 금정산이 가늠된다.
"법성면 법성7리 검산마을은 지금부터 230년 전에 생긴 마을이다. 조선 정조 때 발간된 [호구총수, 1789년]에 단속할 '검(撿)' 자와 메 '산(山)' 자를 조합한 검산(撿山)으로 수록되어 있다. 우리말 금메와 같은 뜻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법성리로 통합하였고, 1964년에 법성3리가 신설되어 안앙금메와 함께 법성3리가 되었다가, 1994년에 법성7리로 바꾸었다. 2009년에 준공한 법성·홍농하수종말처리장이 이곳 안앙금메에 있다." - 영광군청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주종이며, 앞에 보이는 산은 인의산이다. 서해랑길은 숲쟁이를 내려가 오른쪽 진성마을로 향한다.
민속 그네타기는 추천이라고 하며 해마다 오월 단오절에 아낙들이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그네뛰기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유래가 있으며 예로부터 동해안에는 강릉단오제, 서해안은 법성포 단오제가 있어 가히 쌍벽의 세를 과시하여 왔던 깊은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 고장에서 대중적 단오제 행사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르고 난 인조 15년(1637년)으로 추정되며 단오제 행사는 숲쟁이 녹음방초 위에서 순차대로 씨름, 그네뛰기를 시작으로 각종 민속 행사, 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오고 있다.
그네란 느티나무가지를 이용하거나 큰 자연목을 이용하여 두 가닥의 줄을 매 높이 솟구치고 전후로 왕복하는 놀이로써 만인이 보는 가운데 역동적인 운동을 하는 것을 말하며 그네뛰기와 관련한 것으로는 고려 때 사람인 이규보(1168~1241)의 시 '단오날 그네 뛰기를 보고'가 아직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자료로 되고 있다. 송나라 책인 '사물 기원'에 북방종족들이 경쾌하게 높이 뛰어 오르는 모습을 익히기 위하여 해마다 한식이 되면 그네뛰기를 하였는데 훗날에 중국 여자들이 그것을 배웠다는 글이 있다. 여기서 북방종족이라고 한 것은 우리나라의 고대 종족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 조상들이 먼 옛날부터 그네뛰기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문헌상 그네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무신정권 시대다. 최춘헌이 단오날 백정동궁에 그녀를 매고 문무 4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들을 모두 모아 사흘 동안이나 그네 경기를 베푼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때 그네 경기는 화려하게 수놓은 장막과 긴 휘장을 둘러친 가운데 행해졌고 주변은 무늬 놓은 비단과 꽃으로 꾸몄으며 은동이에는 얼음을 담고 술을 부어놓았다. 또 술잔에는 이름난 꽃가지가 꽃혀 현란했으며 1,000여명의 기녀들이 풍악에 맞춰 춤을 추었고 이때 상금만도 몇만 금이나 됐다고 한다. 법성포에서 그네뛰기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르고 난 인조 15년(1637년)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법성포 숲쟁이 그네터에서 전국대회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영광 법성진은 법성진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해안가에 축조한 군사시설을 말하며, 숲쟁이는 법성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인공 숲이다. '쟁이'는 '성' 이란 뜻으로, '숲쟁이'는 곧 숲으로 된 성을 의미한다. 법성진숲쟁이는 조선 중종 9년(1514) 법성진성을 축조할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무들은 법성진성의 북벽과 연장해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데, 포구와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防風林) 역할을 함과 동시에 자연적인 아름다움도 더했다. 길이는 법성에서 홍농으로 넘어가는 산허리 능선을 따라 약 300m에 이르며, 종류는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다수를 차지한다. 법성진 숲쟁이는 수목, 법성진성, 법성포구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법성포 단오제 등 각종 민속 행사가 열리고 있어 역사·문화사적 가치 또한 매우 뛰어난 명승지이다.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주종이고, 이 숲쟁이에서 해마다 법성포 단오제가 열렸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숲쟁이길을 따라 오르다가 왼쪽으로 꺾어 숲쟁이길1길을 따라 내려간다.
서해 바다 굽어보여 법성포구 품에 안고 동으로 仁義山 芙蓉다리 건너서 城으로 둘러싸인 숲정이, 갈매기떼 훨훨 범선 따라 날아들고 만선깃발 드높이 뱃고동 울리며 황금빛 조기 잡아다 나라님께 진상하고 鎮城 높이 쌓아 水軍萬戶 자리한 곳, 전라도 二十七개 고을 官田稅 집하장 되어 즐변하게 들어서고 칠산바다 밝히는 魚火不夜城을 이루는 곳, 전설처럼 되어 버린 그 시절 그 영화 그 흔적 어디서 언제 다시 찾아들고. 그 脈 이어서 숲정이 端午祭 행사 열렸으니, 穀雨節 칠산바다 오사리 조기 먹고 곱게 자란 미모의 굴비아가씨 느티나무 그늘 아래 하늘이 좁아라 綠衣紅裳 펄렁이며 바람을 가르는 제비 아가씨, 억센 팔다리 걷어 부치고 無敵의 기상으로 한판 승부를 다짐하는 씨름선수들, 밤을 밝히는 팔도 명창들의 흥겨운 노래소리, 男女老少 모두가 하나되어 地軸이 무너져라 歡呼하던 소리, 칠산바다 파도 깊이 스며드나니. 숲정이 千年樹 古木 나고 지고 칠산바다 조기떼 씨알이 다할 때까지 숲정이 端午祭 永遠하리라. 1995年 2月 20日 靜隱 辛鍾權 지음
숲쟁이길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숲쟁이길1길로 내려간다.
이곳을 마당고개라 이른다고 한다. 앞에 마당고개경로회관이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이어진다.
마당고개 경로회관 뒤쪽으로 보이는 산이 인의산이다. 서해랑길은 법성진성 하동문터 방향으로 내려간다.
아래로 내려가 오른쪽으로 꺾어 비석거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정면에 보이는 산이 대덕산으로 와탄천 조망이 최고라고 한다.
법성진길에 법성포 역사문화 탐방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와탄천 물돌이 풍경 조망 최고의 대덕산이 왼쪽에 우뚝하다.
법성포(法聖浦)는 법성면의 진내리와 법성리에 잇닿아 있는 포구. 이곳이 지금은 말단 행정면의 일부로 전락하여 한적한 포구로 변했지만 조선시대 법성포는 영광군을 대표하는 지명이자 영광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던 고을로 국방의 요새였으며 국가재정의 중추 기관인 우리나라 최대 조창이 자리하여 전라도 28개 군·현의 세곡을 수납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여 척의 배들이 폭풍을 피하여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천혜의 항구였다.
106년 동안 영광군과 분계(分界)된 진량면의 치소. 정조13년(1789년)에 법성진이 독진(獨鎭)으로 승격되어 영광군에서 진량면(陳良面)(지금의 법성면)을 떼어내 법성진에 붙여 이곳은 법성면 진량면의 치소가 되어 이때부터 고종32년(1895년)까지 무려 106년 동안 법성첨사가 독자적으로 삼정(三政)을 펼쳤다. 더불어 전라도 12군·현과 법성진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양으로 운송하며 국방에 전념하였고, 수도 한양은 물론 중국과의 해로를 활짝 열어 서해안의 손꼽히는 물류 거점이자 교역항으로 발전한 서해안의 대표적인 항구가 되었다. 또 물산이 풍부하고, 전라도 명당 터 17곳 가운데 하나인 살기 좋은 고을로 손꼽혔으며, 옛날 옛적부터 굴비의 본산지로 명성이 자자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구의 경관도 빼어나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 산천 조에는 '소동정(小洞庭)'이라 예찬하였고,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도 그가 쓴 <택리지>에 "밀물이 들어오면 바닷물이 포구 앞을 돌아 차, 마치 호수와 같고, 주위 산이 감돌아 아름다우며, 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히 열을 지어 자리한 곳으로 사람들이 이곳을 중국의 동정호(洞庭湖)에 견주어 '작은 동정호(小洞庭湖)'란 별칭으로 부른다."고 극찬한 고을이다.
목포와 군산을 능가했던 고을. 대한제국시대에 이르러 법성포는 얼마 전까지 지금의 신안군청을 목포에 두었듯이, 신설된 지도군 청사를 이곳 법성포에 두려고 했을 정도로, 목포와 군산을 능가한, 전라도에서 제일가는 고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조기 파시와 '영광굴비'로 옛 영화를 이어가며 개화의 물결 따라 소위 '신작로'라 하였던 차도를 개설하여 외지와 육상교통망이 확충되었으며, 송정리에서 법성포까지 철도를 이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국의 허가까지 받았던 철도부설이 유림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목포와 군산의 발전과 비례하여 물류거점의 기능도 잃게 되어 점점 쇠락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법성포는 포구의 수심이 낮아 위도를 비롯한 인근 섬까지 운항한 정기여객선의 기점마저 법성포항을 포기하고 가마미로 옮길 정도로 기능이 쇠퇴하여, 100톤 규모의 선박이 선박이 자유로이 항행했던 포구가 썰물 때면 거룻배도 운행이 어려울 정도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굴비가공을 위한 조기반입으로 어항의 명맥을 근근이 이어가며 솥(鼎) 모양의 인공섬을 조성하는 등, 미래의 풍요를 위해 새롭게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진내리(鎭內里) 법성진길 왼쪽 높은 지붕이 있는 곳이 '법성포 노인회 노인당 터'와 '고경진 선생 생가 터'이며 그 앞에 공적비군(功積碑群)이 있다. 건너편 오른쪽에 구수산이 우뚝 솟아 있다.
"진내리는 조선시대 진량면 동내(洞內), 창문(倉門), 외치리(外峙里), 토병리(土兵里) 지역이다. 순조 7년(1807년) 대화재 후, 상리(上里), 중리(中里), 하리(下里), 내리(內里)로 재편하였고, 1916년에 좌우두(左右頭), 외리(外里) 일부를 이 마을들과 통합하여 법정리가 되었다. 조선시대 관아가 집중되어 있던 법성진성 내 마을이라 하여 법정리명을 '진내리'라 하였다. 1925년에 '목넹기방조제공사'가 시작되면서 '자갈게미'에 마을이 형성되어 편입하였고, 1934년에 이르러 해창거리를 경계로 동진내리와 서진내리로 구획하였고, 1964년에 운영리제가 시행되어 진성(鎭城) 지역을 진내1리로, 현장(現場) 지역과 좌우두지역을 진내2리로, 자갈금마을을 진내3리로 편제하였다. 2000년대 초에 좌우두 마을이 좌우두관광지조성사업부지에 편입되어 폐촌되었다." - 영광군청
조선시대 진량면(현 법성면)을 관장했던 고을 수령의 선정비 11기가 자리하고 있다.
진내리(鎭內里)는 조선시대 법성진과 국내 최대 조창인 법성창이 있었던 진량면(현 법성면)의 치소였다. 동헌, 작청, 장청 등, 주요 관아와 함께 동조정, 객사, 군기고, 선소, 해창, 전라도 12고을 세곡고, 남고, 사창 등이 모두 이곳에 있었던 행정중심지였고, 조선시대 진량면 29개 마을 가운데 가장 큰 마을이었다. 조선시대 사적 대부분이 이 지역에 있으며, 조선의 명산(名産)이자 영광군의 대표산 '영광굴비'의 본산지이다.
이곳이 법성면 진내1리 진성마을이다. 진내1리 마을회관은 아래 무안굴비상회 왼쪽 진굴비길에 있다.
"진내1리 진성마을은 조선시대 우리고을의 치소였던 마을이다. [호구총수]에는 동내(洞內)로 나타나 있고, 1800년 순조 연간에 내리와 중리였던 마을이다. 1916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진내리에 편입하였고, 1934년에 동진내리, 1964년에 운영리인 진내1리로 편제하였다. 이 마을은 청동기시대와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된 곳이며, 조선시대 우리 고을의 주요 관아가 모두 이 마을에 위치하였다. 개화기에는 보통학교가 영광군내 최초로 이 마을에서 개교하였고, 일제강점기 때 문맹퇴치와 신문화창달을 선도했던 법성포청년회관과 교회 등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1930년부터 우리 고을에서 의술을 펼치며 명의로 소문났던 박주원(朴周遠) 원장의 '영춘(迎春)의원'이 이 마을에 있었다. 주요문화재로는 법성포단오제의 산실인 국가지정 명승인 '숲쟁이'와 국가사적지정 심의중인 전라남도지정 '법성진성'이 있다. 1970년대까지 우리 고을의 중심어상권역으로 조선의 명산(名産)이자 영광군의 대표특산인 굴비가공의 맥을 이어온 굴비의 본산지이기도 하다. 주요 지명은 동헌터, 청년터, 선소마당, 궁구대 등이며, 거리 지명은 저자거리, 마당거리, 해창거리, 루문거리, 비각거리, 소금거리 등이 있다." - 영광군청
정조대왕 어필을 집자한 글씨로 표석을 세웠다. 왜 정조대왕 어필일까? 정조13년(1789년)에 법성진이 독진(獨鎭)으로 승격되어 영광군에서 진량면(陳良面)(지금의 법성면)을 떼어내 법성진(法聖鎭)에 붙여 이곳은 법성면 진량면의 치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조대왕의 글자를 모아 새겨서 표석을 세운 것 같다.
무안굴비상회 앞 진굴비길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진굴비길을 따라가다가 법성포로로 나간다. 조기 말린 것을 ‘굴비(屈非)’라고 하는데, 법성포는 조기와 굴비의 원산지이며, 영광굴비는 예로부터 임금님의 수랏상에 으뜸으로 오르는 법성포의 자랑이다. 그 유래를 보면 고려 16대 예종 때 이자겸(李資謙)이 영광으로 유배를 오게 되어 조기를 먹게 되었는데 그 맛이 너무 좋아 혼자 먹는 것이 임금님께 죄스럽게 생각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맛을 보전하여 먼 곳까지 임금님께 진상할 수 있을까 생각한 나머지 소금에 간해 바위에 말려서 진상하게 되었는데, 결코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고 뜻을 굴하지 않고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비굴’의 글자를 바꾸어 ‘굴비(屈非)’라 명명한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법성면 진내리에서 법성1교를 건너 법성리로 넘어간다. 다리 건너는 인공섬을 조성하여 뉴타운을 건설하였다.
갈매기가 법성포 해안을 날고 있다. 칠산바다 건너편은 백수읍 구수리 지역으로 오른쪽에 구수산이 솟아 있다.
법성면 법성리 인의산과 그 서쪽으로 법성진성과 숲쟁이가 있다. 왼쪽에 진내리 진성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에 조성한 솥 모양의 인공섬에 뉴타운이 건설된 법성리 지역을 바닷물이 에돌아 흐른다. 난간에 법성포 단오제 씨름 장면이 조형화되어 있다. 위쪽에 보이는 다리 법성2교 언저리부터 양쪽 모두 법성리에 속한다.
"법성리는 조선시대에 진량면 외리(外里)에 속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과 1915년에 택지를 조성하기 위해 마을 앞 갯가를 매립하여, 법성면사무소와 주요 관공서 그리고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인 농장과 상가 등이 들어서서 마을세가 크게 확장하였다. 1916년에 이르러 외리, 검산(檢山), 호장동(虎壯洞)과 내리(內里)와 화천동(化泉洞) 일부를 합쳐 그 지명을 법성리라 하였다. 1934년에는 면 청사 뒤에 있는 홍삭거리와 밤모실을 이어주는 마을길을 경계로 하여 북쪽지역을 외법성리(外法聖里)로, 남쪽지역을 내법성리(內法聖里)로 나눴다. 그 뒤 1964년에 운영리제로 재편되어 현재는 7개리로 구획되어 있다. 법성면 전체 인구 대비 45%가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으로, 2009년에는 포구 앞, 속칭 '걸레바탕'을 매립한 뒤 지역이름을 공모하여 뉴타운이라 하였다." - 영광군청
법성1교를 건너 인공섬 뉴타운을 거쳐 칠산바다 해안으로 나간다.
언덕에 법성진성과 전망대 정자가 보이며 그 아래 진성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법성1교를 건너 인공섬 뉴타운으로 들어왔다.
707미니호텔을 거쳐 그 뒤의 더원호텔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해안길을 이어간다.
왼쪽 언덕에 법성진성이 이어지고, 그 오른쪽 끝에 숲쟁이가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법성진성을 옹성(甕城)이라고 부른다.
더원호텔 옆에 서해랑길 종점 600m 지점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왼쪽 횡단보도를 건너 법성포로 해안길을 따라간다.
이 길 끝 언저리에 위치한 법성포 버스터미널 앞이 39코스 종점이다. 오른쪽에 솟은 산은 대덕산이다.
법성포로 해안에 영광 법성포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조형물 앞면에는 법성포에 관한 역사적 기록, 뒷면에는 아름다운 법성포 12경이 적혀 있다. 앞면의 기록을 옮겨 놓는다.
황금빛 조기들이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굴비로 새로운 변신을 거듭하는 법성포는 예로부터 참으로 아름다웠던 포구. 법성포는 해수와 조수가 포구의 앞을 돌고 호수와 산이 아름답고 동네가 열을 지어서 사람들이 소서호(小西湖)라고 부른다. 바다가 가까운 여러 읍은 모두 이곳에 창고를 두어 조정에 바치는 쌀을 마련하는 곳으로 삼았다 - 택리지(擇里志) 中
사방으로 산들이 둘러싼 곳에 별세계처럼 민가 천여 호가 마치 물고기비늘처럼 모여 있었다. 항구의 전면에는 배 젓는노가 모여 세워져 있는데 마치 갈대와 같았다. -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鋒) 中
법성포의 서쪽 바다에는 배를 댈 곳이 없고 이곳에 있는 칠뫼라는 작은 섬들이 위도에서 나주까지의 경계가 되는데 이곳을 통칭하여 칠산바다라고 한다. 서쪽 바다는 망망대해로서 해마다 고기가 많이 잡혀 팔도에서 수천 척의 배들이 이곳에 모여 고기를 사고 팔며 오고 가는 거래액은 가히 수십만냥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는 조기로 팔도에서 모두 먹을 수 있었다. -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刷錄)中
선진귀범(仙津歸帆) : 선진포 나루로 돌아가는 돛단배, 옥녀조운(玉女朝雲) : 옥녀봉을 감도는 아침구름
통치낙조(通峙落照) : 대통재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 구수청람(九岫晴嵐) : 구수산에 아른거리는 갠날의 아지랑이
선암모종(仙蓭暮鐘) : 은선암에서 들려오는 저녁종소리, 응암어적(應岩漁笛) : 매바위 아래서 고기를 낚던 노옹의 피리소리
동령추월(東嶺秋月) : 동짓재에 뜨는 둥근 가을달, 후산단풍(後山丹楓) : 뒷메(인의산)를 물들이는 단풍
정도낙안(鼎島落雁) : 소드랑섬에 떼지어 내려앉은 기러기 떼, 시랑모연(侍郞暮煙) : 시랑촌(한시랑)에 자욱한 저녁밥 짓는 연기
마촌초가(馬村樵歌) : 마촌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나무꾼의 노랫소리,
칠산어화(七山漁火) : 칠산어장을 가득 메운 조기잡이 배들의 불빛
와탄천이 칠산바다와 만나는 하구이다. 뒤쪽에 우뚝한 대덕산은 와탄천 물돌이 풍경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지라고 한다.
칠산바다가 깊숙하게 내륙으로 파고들어 와탄천과 만난다. 이곳에 조성한 인공섬에 뉴타운이 건설되어 있다.
인공섬 뉴타운의 법성포로 해안길에서 법성리의 인의산을 올려보았다.
법성포로 해안길 법성버스터미널 일대와 그 너머 언덕이 있는 지역은 법성6리 지역 독바우마을인 것 같다.
"법성6리 독바우는 1910년에 이곳 앞을 지나 법성포-영광 사이에 차도가 개통되고, 1934년에 망재 일원에서 금을 채굴하면서 한 집 두 집 터를 잡으며 마을이 생긴 곳이다. 지금 법성주유소 뒤에 있는 굴이 당시에 금을 채굴했던 현장이다. 마을 지명은 돌(독)과 바위(바우)를 조합한 것으로 뜻이 중복되어 있다. 한때는 한시랑을 오가는 독암진(獨岩津)나루터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독바우를 한문 표기로 독암(獨岩) 또는 석암(石岩)으로 쓰기도 했지만 사실과 달라 지금은 이 지명을 쓰지 않는다. 참고로 [조선지지자료, 1911년]에는 독암진이 '백수 한시랑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66년에 법성포우체국과 영광군 통신설비기계실이 이 일대에 신축되어 자리하고, 1970년대에 이르러 이 일대를 매립하여 버스터미널이 들어서 마을세가 크게 커졌다. 1994년에 법성5리 일부와 1970년대 매립지 약 5만평을 합하여 법성6리로 신설하였다." - 영광군청
법성버스터미널 앞에 서해랑길 영광 39·40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고, 가로등 기둥에 40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거리 16.3km, 소요 시간 6시간이 적혀 있다. 실제 탐방 거리는 17.39km, 식사 시간 포함하여 5시간 46분이 걸렸다.
가로등 기둥에 서해랑길 40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서해랑길 39코스를 마치며 서해랑길 40코스 시작점 표지와 함께 기념한다. 뒤쪽에 인의산이 보인다.
법성리 인공섬 뉴타운을 바닷물이 돌아간다. 앞의 법성2교 언저리부터 양쪽은 모두 법성리에 속한다. 오른쪽은 농장마을인 듯.
"법성5리 농장마을은 이곳은 원래 밀물 때는 바다였고, 썰물 때는 갯벌 천지였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전남농장에서 소위 해안통(海岸通)이라 불렀던 옛 법성중, 고등학교 운동장 앞 해안에 매립공사를 하여 조성한 약 6천 평의 택지에 사무실, 창고, 직원사택, 야적장, 경작지를 조성하여 일본인들이 특권을 누리고 살던 지역이다. 광복 후에 법성실업중학교 학교재단인 양영회(養英會)에서 사택을 제외한 나머지를 불하받아 창고는 교실과 강당으로, 야적장은 운동장으로, 경작지는 실습장으로 바꾸어 학교를 만들고 5년제로는 영광군에서 최초인 법성수산중학교를 개교하여 운영하였다. 이후 법성 중,고등학교가 대덕리 교정으로 이전하여 민간인들이 이곳에 있는 학교재산을 모두 불하받아 아파트와 상가 등을 건설했고, 이에 따라 마을이 탈바꿈하였다. 1916년에 법성리에 속한 이 지역은 1964년에 법성1리에 속했다가 1985년에 법성5리가 신설되어 이곳으로 편입하였고, 예전부터 농장이라 불렀기 때문에 마을이름을 그대로 농장이라 하였다. 2019년 현재 법성상수도 정수장과 법성포우체국, 굴비골신협이 이 마을에 있다." - 영광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