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이 해시티비 공지에 올리신 글입니다. 교수님 편지 안 읽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보고 글솜씨에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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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이른 벚꽃이 피더니,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마른 공기의 틈을 타고 전남 순천에서 충북 제천, 서울 인왕산에 이르기까지 화마가 번졌습니다. 다행히 비가 내려 잠시 불길을 재운 듯했지만, 다시 강릉에 큰 불이 났죠. 강원도지사 김진태는 산불이 나던 날 갔던 건 골프장이 아닌 '연습장'이었다며 KBS 기자를 고소했고, 충청북도지사 김영환은 "술이 아니라 물을 마셨다"고 하다가 이제는 "본질은 과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라 둘러댑니다. 듣는 이의 지적 능력을 폄훼하는 자들의 말같지 않은 말. 불길에 타버려야 하는 건 그들의 천박한 혀끝이지 산들이 애써 키워낸 나무가 아닌데 말이죠. 대통령이 언론을 우습게 알고, 국민을 업수이 여기니 천지분간을 못하는 자들이 넘쳐 납니다. 우스운 짓을 한 언론과, 업수이 여길 짓을 한 손가락들은 따로 있는데, 정작 모욕을 당하는 건 그나마 제 정신을 가진 이들이라는 이 비참한 현실.
TV에만 장르 파괴형 막장 드라마가 있는 게 아닙니다. 로맨틱 블랙코미디 공포 드라마 <도쿄의 주인, 서울의 하인, 워싱턴의 연인> 쪽대본이 유출됐는데, 내용이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도 제작진은 '한미동맹을 뒤흔드려는 악의적 허위'라고 되려 성을 내네요. 민망해진 대일본 '대승적 결단'을, 미국 국빈 방문에서 펼칠 영어 연설과 G7 만찬에서 쳐들 샴페인 잔으로 어떻게든 분칠을 하려고 했는데, 그 형님이 우리를 도청했다니,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그래서 아예 '있지도 않았던' 일로 바꿔내려 하나 봅니다. 날이 갈수록 더욱 진득해지는 이 탈진실의 향연 앞에, '어처구니 없음'을 진지하게 분석해야 하는 연구자로서 자괴감이 드네요.
지난 주 금요일엔 서울 부암동에 있는 석파정에 갔습니다. 봄이 오면 종종 생각나는 곳인데, 마침 대학원 시절 동학들이 부암동 점심 번개를 친 김에 잠시 시간을 냈죠. 다행히 미세먼지가 조금은 잦아들고, 차가워진 공기만큼 선명해진 하늘. 흥선대원군의 이 집엔 그의 아들 고종도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국의 대원군에게는 꽤 잘 어울리는 멋진 정원이지만, 망국의 황제(가 될 이)에게는 좁고 누추한 사저였을 터. 그 작은 방 안에 앉아 창밖으로 내려다 본 북악산의 뒷모습, 그 어깨에 놓인 성벽은 그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요?
동명의 한정식집과는 다른 '진본' 석파정은 '서울미술관'을 통과해야만 다다를 수 있습니다. 민간 미술관인지라 입장료가 꽤 세긴 합니다만, 의외로 전시 작품의 질이 꽤 괜찮고, 학예사들이 공들여 선별한 특별전이 볼 만합니다. 평소 시력이 나쁘지는 않은데, 피곤할 때엔 가까운 곳이 흐릿해보이는 증상이 심해져서, 그날도 작품을 세밀히 살펴보거나, 작가의 이력이 궁금해서 설명문을 볼라 치면 여지없이 안경을 꺼내 써야 하니 참 불편했습니다. 어르신들이 '눈이 침침하다'고 말씀하셨던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저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시야가 흐릿해질수록 나이듦의 체감은 더 선명해지는 이 역설. 미술 전시관은 어두컴컴한 게 매력인데, 그곳의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없을만큼 침침해진 이 낡은 두 눈이 조금은 서글펐습니다. 그래도, 그만큼 더 넓고 더 깊어진 심안(心眼)으로 보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애써 자신을 위로해봅니다.
그날 제 눈에 띄었던 건 스페인 일러스트레이터 이르마 그루엔홀츠의 작품이었습니다. 조각가인 그가 만든 입체 조형물을 다시 평면 사진으로 바꾸어 전시한 거였죠.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사진으로 올린 <슬픔 Sorrows>이 그렇듯, 그의 작품 자체는 매우 비유적이면서도 또 직관적입니다. 대학생 때, 이 사진과 유사한 제 자신의 이미지를 노트에 그린 적이 있어서 더 울림 있게 다가왔던 듯합니다.
여러분도 아실 법한 호주 조형미술가 샘 징크스의 작품도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여러 질료를 사용해서 대상의 모습과 질감을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재현해내는 그의 작품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서 생경하면서도 친숙한' 복합적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사진으로 올린 <여인과 아이>는 생경함보다는 친근함이 더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흔히 표현할만한 '젊은 엄마와 아기'가 아니라 '할머니와 아기'를 피조물로 선택한 이유, 그리고 그걸 다시 <여인과 아이 Woman and Child>로 중립화시킨 의도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봤습니다. 작자의 해설이나 제 해석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화두만 던지는 걸로 하죠. 여러 작품이 전시된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몇 개 층을 오른 뒤, 바깥으로 나왔더니, 상쾌한 공기를 머금은 새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순금보다는 18금에 좀 더 가까운 빛깔을 지닌 햇살이 달려왔습니다. 가끔 찾는 곳이지만 늘 새로운 이 느낌. 주로 향기가 약한 꽃들이 피는 초봄을 지나, 먼 곳에서도 자신의 향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진한 꽃들의 계절이 되었구나 싶었습니다. 내려다 보이는 장독 안에 잘 익어가고 있을 그것들과는 영 결이 다른 내음과 색깔을 지닌 라일락은 역시 사람의 마음을 낙낙하게 해주더군요. 또 새파란 하늘과 멋진 대구를 이뤄낸 불그레한 '아그배나무 꽃' 혹은 '꽃사과 꽃' (쓰고 보니 꽤 중언부언하는 이름들이네요) 들이 제 금요일 오후를 꽤 멋들어지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만약 조만간 이곳에 와보실 요량이시면, 관람료가 조금 아깝더라도, 또 교양있는 이들이 해서는 안될 것 같은 일일지라도, 빠른 걸음으로 전시관 복도를 지나 이 나무와 꽃들과 바위들을 만나러 오셔도 좋을 법합니다. 더 과감하신 분들은 그냥 처음부터 엘리베이터를 타시고 수직진하셔도 무방.
회원 여러분께 '주말즈음' 편지를 띄운 것도 벌써 열 번째 쯤은 되는 것 같네요. 처음에는 '공지'로 시작했는데, 차츰차츰 진짜 '편지'가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학생 때는 혼자 노트에 수필도 많이 썼고, 피시통신이 흥하던 시절에는 '대화명'을 걸고 꽤 자주 긴 에세이도 남겼더랬죠. 유학 떠나온 뒤 가중된 '모국어에 대한 갈증'으로, 작은 온라인 동인지를 만들었던 기억. 그러다가 싸이월드에 사진 에세이를 올리던 나날도 있었습니다. 해시티비를 만들고 나서 얼마 뒤에 어떤 분이 저더러 '싸이월드 갬성'이라고 하시던데, 그 시절에도 그렇게까지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나고 자라고 훈련받기를 '사회과학적'으로 해온 터라, 제가 가장 '인문적'이 되는 순간에도 그 아래에는 '사회'와 '과학'의 진득한 그림자가 달라붙어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양'의 일단은 그렇습니다. 지식과 감성, 이성과 감정, 상상과 체험,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려는 자세. 삐죽하게 삐져 나오는 지적 허영이 그리 밉살스럽지 않게 만들어주는 본질적 소박함과 솔직. 무엇보다 '말하기'만큼이나 '듣기'가 즐겁고, 그로써 대화하는 게 참 보람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이런 것들은 못난 우리조차 꽤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오늘 밤 9시에 만나지요.
2023년 4월 13일 새벽에
정준희 드림
첫댓글 라이브에서 만나요^^
교수님 편지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봤는데 감동 받지 않을 사람 없다... 완전 초극공감합니다..!
사람세상님 감사합니다 ^^
못하시는 게 뭘까요…
사람세상 님, 고맙습니다. 🥰
이렇게 교수님 따라 한번 또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기네요^^ 서울미술관~ 석파정과 연결되어 있다 좋더라 얘기만 들었거든요~ 꼭 가보려구요 ㅎ (이렇게 교수님 따라 다니는 거에 "정주닝"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저혼자~~^^v)
아름다운 사진과 꽃들~ 더불어 늘어나는 구독자수까지!! 좋네요 이 분위기~~ ㅎㅎ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볼매...볼수록 매력' 이라는 단어는 갓준희를 두고 나온 단어인듯 하네요~
연애편지 받은것 같은 설레임이 너무나 좋아요.
백토 1000회특집 설레임의 여운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무한반복 정독하게 되는 교수님의 글 너무 좋습니다!💜
갓준희 시선따라 응시해 봅니다 라일락 그리고 작품들 사과꽃 자연이 가장 아름다운 이유 거기에 있다
멋진글~!!
멋진 글 퍼날 사람세상님 감삽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세상님 덕분에 읽을 수 있게 됐어요. ^__^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제 맘을 담은 편지를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네요. 교수님 같은 갬성으로.ㅋㅋ 글 감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