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jhj35kr.do?Redirect=Log&logNo=8607614 http://211.47.66.86/%7Ehowphoto/curator_04.htm http://myhome.thrunet.com/%7Ecanon/lesson2.htm http://blog.naver.com/yunee0722.do?Redirect=Log&logNo=20008307641 http://news.nate.com/Service/natenews/ShellView.asp?LinkID=1&ArticleID=2002103115435702275
1. 사진작가 한정식씨가 지난 9월부터 대구예술대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첫 학기에는 '현대사진 연구'를 강의한다. 사진과의 석좌교수는 전국에서 한 교수가 처음이다. 본인은 "석좌교수라는 자리는 과분하다"며 고사하기도 했지만 사실 사진계를 통틀어 한 교수만큼 유명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그가 써낸 '사진예술 개론'이나 '사진의 변모' 같은 이론서들은 사진 전공자들의 필독서로 꼽히고, 나무.발.풍경 시리즈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들은 한국 사진계의 상대적 취약지라 할 조형사진의 큰 흐름을 대표하는것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서적의 번역판 정도가 고작이던 80년대, 독보적인 이론으로 무장한 그의 책은 미술의 아류로 인식되던 사진예술이 이론적 틀을 갖추고 어엿한 학문의 하나로 인정받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사진은 사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사진을 회화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서 미술을 흉내내는데, 그건 화가가 사진기를 들고 그림을 그린 것일 뿐 진짜 사진은 아니죠. 형식적으로 해석하려 하지말고 내용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기존 미학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회화의 콤플렉스를 넘어서야, 사진은 창조성을 갖춘 온전한 장르가 될 수 있습니다."서울대 사대 국문과를 나와(1959년) 국어교사로 근무했던 그는 서른이넘어 뒤늦게 취미삼아 사진을 시작했다. "첫 월급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중고 카메라를 샀고 혼자서 예술사진을 한답시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자기 이론 없이 아마추어로 활동하던 그가 제대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한 교수와 함께 우리나라 2세대 사진작가 그룹의 핵심으로 손꼽히는 홍순태씨를 만나면서부터. 1969년과 1970년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잇달아 입상한그는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노모와 아이 셋을 아내에게 맡기고 일본대학 예술학부 예술연구소로 본격적인 사진공부를 위해 떠났다. 니콘 살롱과 스즈키야 화랑 등에서 가진 일본에서의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귀국한 그는 국내에서 '나무전'(1978년), '발(足)전'(1992년), '풍경론'(1997년), '고요'(2002년) 등의 전시를 잇달아 가졌다. '나무'(1990년), '발'(1992년) '풍경론'(1997년) 등의 작품집과 '사진예술개론'(1996) '사진의 변모'(1996년) '사진-시간의 아름다운 풍경'(1999년) '예술로서의 사진'(1988년) 등의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는 70년대 이후 세계적 조류인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사진 원리를 자기나름으로 소화했던 대표적인 작가로 설명된다. 그의 작품은 어떤 스토리가있어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라 피사체를 좀 더 의미심장하고 세련된 눈으로 묘사하는 형식적인 맛이 강하다. 렌즈의 기계적 특성을 통해 포착한사물의 이미지를 고도의 은유와 상징으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90년대 후반들면서 그는 즉물적 형태미에서 조금 떨어져 서정성을 강조한 풍경을 렌즈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한 작업선상에서 최근 그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고요'다. 존재의 고요함 속에서 그는 '인간의 삶'과 '시간과 사진'이라는 화두를 풀어나가고 있다.
"고요라는 제목은 대상의 근원의 경지를 말한 것이지만 실은 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내 이름이 고요하고(靜) 물이 맑다(湜)는 뜻이니까요. 이름도 팔자인지 이름에 묶여 이름 근처에 주저 앉고 만 셈이지요. 어쩌면 이제 비로소 내 사진이 제 자리를 찾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대구는 사진의 수도라 할 만큼 사진인구도 많고 동호회 조직도 체계적이고 튼튼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부럽다"는 그는 "여건이 갖춰진 대구에서 사진을주제로 하는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적인 행사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지금 그의 코앞에 닥친 두가지 큰 목표는 대구 전시회와 새로운 이론서를 내는 것이다. 대구전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잡혀 있지 않지만 그는새롭게 인연을 맺은 대구에서 전시회를 갖고 싶은 소망이 있다. 또 내년2월쯤 선을 보일 저서에서는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아래 현대 사진에 대한 이해와 미래 사진에 대한 전망을 담을 예정이다. 이은경기자 기자 2002년 10월 31일(목) 오후 3:43 [영남일보] http://news.nate.com/Service/natenews/ShellView.asp?LinkID=1&ArticleID=2002103115435702275
2. 서점에 들려서 사진 관련 책을 찾아 보다가 이거다 싶어서 사온 뒤 밤에 잠들때까지 읽는다는게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다. 사진 찍기를 좋아한지는 꽤 오래됐는데, 그냥 싸이월드에 올리는 수준의 사진만 찍다보니 사진을 찍는 눈도 형편없고 보는 눈도 수준 이하라 아는 만큼 보인다는 생각이로 읽어본 것이다.
이 책은 사진 전문 출판사이 '눈빛'에서 발간하는 '눈빛시각예술선서'의 7권중 6번째 책이다. 지은이 '한정식'이란 분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일본대 예술학부에서 사진을 배우고 중앙대 사진학과에서 교수를 지내신 분인데 국문과 출신이라서 그런지 글이 매우 매끄럽고 읽기 편했으며, 예술가 치고는 상당히 자기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이 논리적이었다. 그분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사진은 회화나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달리 사진이라야만 발휘할 수 있는 독특한 특성이 있으므로 그러한 특성을 잘 살린 사진을 찍어야 그것에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특히 회화와의 비교를 통해 사진의 특유한 부분을 설명해 나갔는데, 무엇을 찍어야 할지에 대한 작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사진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찾아서 찍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은 '발견의 예술'이라 하였는데, 사물 속에 숨은 의미를 작가 나름으로 찾아내는 의미의 발견,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 참된 의미의 발견이라 하였다. 또한 사진의 소재는 관념적이거나 문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진이라야만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소재를 택하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관념적 주제는 문학예술에 맡기고 사진은 사진의 고유한 영역을 찾아가라는 말인 것이다. 요즘 한참 읽고 있는 분석 심리학에 대해 사진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찍어야 할까? 고뇌하는 사람의 표정?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 무엇을 찍어도 사진은 한장의 정지된 화면이므로 관념을 표현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거꾸로 한장의 사진속에 작가의 세상에 대한 애정이나 생각을 담을 줄 아는 능력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주제에는 작가의 사상이나 생각이 들어갈 수 있지만, 소재까지 관념적인 것을 찾아내려는 억지는 부릴필요가 없다. 그래서 지은이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지 않은 것, 곧 구체적이고 시작적이어서 보면 금방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사진의 주제로는 가장 알맞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은이의 이러한 주장은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마음을 상당히 편하게 해주는 면이 많다. 사진이 예술적인 경지에 이르려면 무언가 관념적이거나 오묘하고 언뜻 봐서 알기 힘든 모습을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내용이니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회화적인 소재나 주제가 아니라 사진만이 잡아낼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찍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므로 더욱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가지 더 위안이 되는 것은 사진가가 굳이 현상 인화를 스스로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프랑스의 천재적인 사진작가인 '카르티에-브레송'은 자기 손으로 현상 인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의 화상 형성의 '자동성'때문에 사진 영상은 결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사진가는 사진 찍는 것에 대욱 신경을 쓰면 될 것이라는 말이다. '파이닝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셔터를 누르기 이전 단계에서만 카메라맨은 접근을 생각하고, 도구를 고르고, 아이디어나 감정을 사진 형식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기술을 선택하여, 최종적으로 폼을 조절할 수가 있다. 한번 셔터를 누르고 나면 그 사진의 특질은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은 능숙한 제자가 있으면 그에게 맡겨 버려도 좋은 것이다.'
물론 현상,인화 자체에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작가도 분명히 있으며, 자신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책임진다는 작가 정신이 있기도 하겠지만, 나 같은 사람에는 굉장히 눈앞이 트이는 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은이는 디지털 카메라의 눈부신 발전에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위와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어차피 찍은 후에는 기계적 과학적으로 현상,인화 되는 것이므로 디지털로 찍어서 보여주는 것에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디지털 사진은 거창한 암실을 집에 꾸며 놓지 않더라도 컴퓨터 작업으로 작가가 원하는 사진을 현상할 수 있으므로 영상 제작을 작가 스스로 하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진가들의 암실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표현했다. 요즘에 벌써 아마추어 작가들 중에서는 CD롬으로 작품집을 만들고 있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어서 장래에 디지털 사진은 사진계 전체로 확산되어 모든 사진을 대신할 것이라는 예상도 내놓았다.
어쨌는, 나이들어서도 계속 가꾸어나갈 취미로서의 사진을 좀더 제대로 알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된 독서였다.
잡설로, 요즘 DSLR 을 구입하고 싶어서 미치겠다. 집에 캐논EOS5 와 렌즈 두개가 있으므로 바디만 구하면 되는 것인데... 음... -_-;;; 그리고 어제 나도 피지가서 찍은 사진을 전자앨범으로 제작해서 시리로 구운 다음 피지사진 zzixx 에서 인화해 만든 앨범 속에 삽입해 두었다. 신기한 것이 그 시디만 있으면 어느 컴퓨터에서든 슬라이드 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므로 세상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다.
우짰든 사진은 참 재미있는 취미이다. http://blog.naver.com/yunee0722/20008307641
전시기획에 즈음하여
"미명의 새벽" 그 열정과 진실의 푸르름
초기작품은 말하자면 한 작가의 홈페이지와 같다. 초기, 뒤돌아보면 그 아득한 미명의 새벽이 아직도 가슴 설레게 한다. 실체도 확실히 모르면서 무작정 반해 덤벼든 첫 사랑의 시작무렵이다. 한 작가의 초기작품들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 설레던 첫 사랑의 결과물이다. 그것을 보면 그 작가의 첫 사랑의 실체를 확인 할 수 있다.
강운구, <주명덕 초기사진들> 서문중에서
스티글리츠는 사진은 나의 열정이며 진실은 나의 강박관념이라고 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 세상에 다가서는 의지였다. 사진은 그렇게 한 인간에게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존재의 근원이었고, 진실은 시대를 보듬은 삶의 잣대가 되었다.
여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니 여전히 풍미하고 있는 강운구, 김기찬, 육명심, 주명덕, 한정식, 황규태, 홍순태 이상 일곱 명의 사진대가들의 초기사진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강운구의 말처럼 초기사진은 '실체도 모르면서 달겨든 첫 사랑의 결과물'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작가에게 있어 초기사진은 사진가로서의 본능과 사진의 열정을 따르기 때문에 오히려 서투름 만큼이나 순수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본능과 열정은 애착에서 생기는 것, 사진에 대한 끈끈한 애착과 생의 의지를 북돋우는 '진실'의 절대성은 비록 맹목적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는다.
<미명의 새벽전>은 한국 현대사진의 주춧돌이 되었던 언급한 일곱 분의 첫 사랑 같은 6-70년대 초기사진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이다. 이들의 사진을 보면 그 시대 영화가 보여주었던 '순정(純情)'과는 다르게, 50년대 그 파괴적인 충격을 채 떨쳐버리지 못한 사회적 모습과 그로 인해 발버둥쳤던 개발시대와 한국적 민주주의 어두운 이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들의 시각이 대학을 갖 졸업한 젊고 의식있는 지식인의 눈을 가져서라기 보다는 실제 현실이 한없이 고통스럽고 암담했는지 모른다. 그들이 차고 메마른 거리에 서 있었음을 사진에서 본다.
강운구(1941-)의 사진은 우울하다. 시대의 암담함과 현실의 아득함이 절망으로 가슴저리게 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고, 그 속도만큼 우리를 한쪽으로 내몰았던 그 시대 그의 초기사진은 휴머니즘의 진한 향기를 전면에 뿌린다. 그것은 일상적 삶에서 늘 뜨겁게 달구었던 진실 그 투명한 20대 젊은 사진가의 외침이라고 본다. 그의 사진이 훗날까지 올곧게 한 목소리로 이어졌던 것도 오직 그만의 진실성과 투명성이 가능케 했을 것이다.
김기찬(1938-)의 사진은 아름답다. 사진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진이 머금은 그 삶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삶의 전면(前面)은 힘들고 고달퍼도 이면은 따뜻한 인정으로 충만하다는 달동네의 삶의 자취를 투사하는 그의 초기사진은 절망이 짓눌어도 세상이 행복할 수 있다는 그들의 꿈을 보듬어 안는다. 한 젊은 사진가의 차분하고 따뜻한 세상보는 눈을 통해서 긴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그립고 정겨운 풍경을 깨닫게 만든다.
육명심(1933-)의 사진은 엄숙하다. 경직되고 획일화되었던 사회, 한국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잠복했던 그 시대, 그의 초기사진은 시대의 아이러니를 타고 넘는다. 빛나는 태양만큼 짙은 권력의 그림자는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엄숙함에 전율하며, 소시민들의 짙은 소외에서 시대의 아픔을 느낀다. 경쾌한 구도와 해학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깨어있는 사진가의 이지적 시선에 메시지는 고독하기 그지없다.
주명덕(1940-)의 사진은 고요하다. 아니 침묵한다. 보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으려는 한 걸음 물러섬이다. 전후의 궁핍함이 개발지상주의로 연결되었던 그 시대, 그의 초기사진은 궁핍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희망을 가지려는 소시민들의 자기의지적 건강함을 보여준다. 그의 사진이 그 시대 독보적이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진실의 눈, 강건한 메시지 못지않게 뛰어난 사진의 세련미에 있었음을 사진들이 말해준다.
한정식(1937-)의 사진은 뜨겁다. 한·일국교정상화가 이후에도 여전히 숨쉬는 뜨거운 민족정신이 느껴진다. 정치와 경제논리에 무력했던 그 시절, 일제에 대한 치욕의 미열이 남아있는 지식인의 뜨거운 의식이 사진에 나타난다. 그의 초기사진은 강토를 점령당했던 쓰라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그들의 발자국이 찍여지고, 그들의 깃발이 꼿힌 우리 산하에 대한 시대의 메니페스토이자, 여전히 아로 새겨야할 민족혼에 대한 외침이다.
황규태(1938-)의 사진은 애처롭다. 삶의 모든 것들이 힘들고 불안했던 그 시절, 끼니를 이어간다는 것이 삼백육십오일 근심으로 자리했던 그 시대, 그의 초기사진은 오로지 먹고사는 것이 전부였던 가슴아픈 시대적 정황들을 보여준다. 생존의 냄새가 화면 가득한 사진에서 지금 우리는 시대의 연민에 애처러워 한다. 한 젊은 사진가에게 감지된 삶의 체취는 이렇게 처절한 것이었다. 카메라가 리얼리즘보다 앞서 나갔음을 사진이 말하고 있다.
홍순태(1934-)의 사진은 서늘하다. 화려함 만큼 건조했던 그 시대, 경제개발이 최고의 선이었던 그 시절 사회적 풍경을 보여준다. 그의 초기사진은 시대의 이중성, 삶의 양면성을 헤집으면서 그로 인한 사회적 아노미, 실존적 부조리를 스트레이트하게 드러낸다. 균형 잡힌 프레임 워크, 즉각적인 메시지, 그리고 현실감 넘치는 사진의 힘에서 삶의 앞뒤를 횡단하는 한 젊은 사진가의 냉철한 시대의 눈을 읽는다.
미명의 새벽전>은 어떤 사람의 말처럼 "일곱 분을 한 자리에 모신 것만으로도 뉴스가 되고 사건이 되는" 전시이다. 참여한 일곱 명 모두가 한국 현대사진의 주춧돌로서 한국사진이 오늘 이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있게 했던 장본인이자 리더들이었다. 한국 현대사진에 대한 시기규정이나, 주도적 인물들을 판단하는 문제는 엄격해야 하겠지만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 일곱 분을 배제하고는 한 걸음도 내달을 수 없다고 본다.
한국 현대사진이 80년대 들어 성숙하고, 90년대 들어 만개했던 것도 바로 사진의 형식과 내용, 이론과 논리에 해박하고 분명했으며, 사진에 있어서는 확실한 자기세계를 구축했던 이들 일곱 명의 사진적 발자취와 그 영향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들이 훗날 후학들로부터 자신들의 사진의 방향성과 그 이론적 당위성에 대해 도전 받았던 것도 그들이 자신들의 확고한 자기세계와 자기만의 시대를 보는 분명한 눈을 갖고 잇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강운구와 주명덕의 작업세계는 지난 25년 동안 젊은 세대들의 우상이 되고, 넘어야 할 큰 벽으로 다가왔던 태산이었으며, 황규태의 작업세계는 시대적 메시지를 결코 잃지 않으면서도 늘 자유로운 형식미를 구사했던 현대성 자체였으며, 김기찬의 작업세계는 외부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사진이야말로 사라져가는 현실과의 '아름다운 싸움'임을 오랫동안 실천했던 전형이었다. 또한 육명심, 한정식, 홍순태는 자기세계가 분명한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이들이 한국사진교육에 미친 영향력은 너무도 지대하여 후학들 중에서 이들의 그림자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들 일곱 명은 거의 동시에 6-70년대 혼미했던 사회, 오리무중이었던 사진 속으로 들어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주명덕, 강운구, 황규태는 대학을 졸업하여신문기자된 언론인 출신이었고 김기찬은 오랫동안 방송계에 몸담은 방송인이었다. 또한 주명덕과 황규태는 현대사진연구회(1962-68)출신이었으며, 주명덕과 강운구는 대학시절부터 사진으로 이름을 털쳐 서로 알고 있었던 아마추어 사진가였다. 그런가 하면 홍순태, 육명심, 한정식은 전원 대학을 졸업하자 학교 선생이 된 고교교사 출신이었으며, 또한 이들은 김기찬과 더불어 동아사진콘테스트 출신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그 시대 사진의 길은 두 가지 밖에 었었던 같다. 언론계통으로 나아가면 포토 저널리스트로서 프로가 되고, 동아콘테스트에 참가하여 의식있는 사진가로서 예술적 프로가 되는 길이었다. 이에 따라 사진의 방향도, 생각도 , 의지도 달랐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애정이 누가 더 깊으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그들의 초기사진에서 그들을 확인한다. 어떤 사람은 유사한 길, 또 어떤 사람의 다른 길을 걸어왓지만 최소한 사진에 대한 시대적 인식과 애정 만큼은 이들의 칫수는 같다고 본다.
이번 전시에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었다. 전시를 도와주고 서문까지 맡아준 백제예대 정주화 교수, 도록을 맡아준 '눈빛출판사' 이규상 사장, 사진제작에 도움을 준 '못과 망치'의 김상림 사장께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고마움을 드려야 할 사람은 이번 전시에 기꺼히 응해주신 작가들이다. 초기사진들이 라 찾기도 어렵고, 상태 역시 완벽하지 못할 텐데도 심혈을 기울여 주신데 대해서 간사할 따름이다. 2001.3.28~4.10 하우아트갤러리
진동선(전시기획자, 사진평론) http://211.47.66.86/%7Ehowphoto/curator_0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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