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긴 폭설이었나 보다. 12월 말 찾아간 담양 고서면 주산리는 온통 흰 설원 속에 몇몇 집들만 옹기옹기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주산리는 1, 2, 3, 4, 5구까지 거느린 큰 마을, 노인회관에서는 성질 급한 어르신들이 이미 "낙양성 십리하에/높고 낮은 저 무덤은~" 하면서 풍악을 울리고 있었다.
*뿌리가 깊으면 가지도 넓다고 했던가. 오랜 세월 농사짓고 살아온 마을 공동체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산리에서 뜻밖의 알곡들이 많이 나왔다. 국악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하기 어려운 수준급 판소리가 두 대목에 상여소리까지 나왔다. 방송용 wireless 마이크를 대고는 노래하는 것 같지가 않다는 최차순 할머니(80)는 마을회관에서 이장님이 방송할 때 쓰는 마이크를 뽑아들었다. "퇴끼 화상을 그려라/퇴끼 화상을 그려라/퇴끼 화상을 그릴 적/갱기(경개; 景槪)보던 눈 기리고(그리고)/난초 지초 왼갖 향초 꽃따먹은 입 기리고/두견이 처처 울음울 적/만화방창 화림중 팔팔 뛰는 발 기리고..." 판소리 수궁가 가운데 <토끼화상>이다. 필경 예로부터 소리를 배우지 않고서는 내놓기 어려운 명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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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체질' 최차순 할머니(80)가 내놓는 수궁가중 '토끼화상'
*"함평천지 늙은 몸이/광주 고향을 보랴 허고/제주 어선 빌려타고/ 해남으로 건너갈 제/태인하신 우리 성군 예악을 장흥허니..." 고재선 어르신(77)이 부르는 <호남가>가 성에 차지 않았던지, 앞니가 하나밖에 안 남은 정병태(80) 어르신이 썩 나선다. "황후가 된 심청이가 아버지를 그리며 편지쓰는 디 한번 불러볼랑마." 판소리 명창들이 <심청가> 가운데 가장 애창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인 '추월만정(秋月滿庭)'이다. 황후가 된 심청이 가을달 아래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고 있어 '심황후 사친가(思親歌)라고도 불리는 대목. 처연하고도 절절한 가을의 서정이 진양조 장단에 유장하게 풍겨나는 대목. 일제시대 이화중선이 즐겨불러 유명해진 바로 그 '추월만정'이 담양 주산리 촌로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추월은 만정허여/발(=주렴) 안으로 비쳤으니/청천으 뜬 기러기야/도화동을 가거들랑/부모님 전에 편지 일장을 전해다오/심황후 주저앉어/한 자 쓰고 한숨쉬고/두 자 쓰고 눈물지니/글자마다 수묵(水墨)이라/한손을 높이 들고/창문 열고 바라보니/청천으 뜬 기러기 간 곳 없고/문 밖에 별과 달만 또렷이 비쳐있네" 3분 가까이 막힘없이 불러내는 정병태 어르신의 절창에 "명창이네" "잘하요" 소리가 쏟아진다. 알고보니 이 분은 근동에서 초상날 때면 으레 불려다녔던 '상여소리' 선소리꾼이시란다. 곧바로, 지금은 불릴 일이 없어진 주산리의 상여소리가 나온다. "관암~보~살 관암~ 보~살/오늘은 여기서 놀고/내일은 북망산천으로/나는 가고 여영 가네/관암~보~살 관암~보~살"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27.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okTD%26fldid%3DHAnJ%26dataid%3D55%26fileid%3D2%26regdt%3D20060105204720%26disk%3D36%26grpcode%3Dsineulsikoo%26dncnt%3DN%26.JPG)
*판소리 심청가중 '추월만정'을 술술술 부르는 정병태 어르신(80)
*이런 분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전통음악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어찌되었든 일단 돌아가시기 전에 '기록'은 된 것 아닌가. 동네를 다닐 때마다 "목 좋은 양반들이 참 많았는데 다 돌아가셔 부렀어" 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입맛 까다로운 도시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콘텐츠일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고제(古制) 소리들을 어디 가서 만날 수 있으랴. 그런 기예능을 갖고 계신 분들에게 카메라와 장구, 그리고 TV가 '내 생애 단 하나뿐일 특별한 날들'을 올 한해도 많이많이 만들어 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