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
김정옥
음색이 청아하다. 땅속 깊은 곳에서 암반수가 터진 것처럼 시원하다. 경연 가수들의 음색은 가히 ‘천상의 소리’라고 불려도 될 듯했다. 적어도 내 귀에는 그랬다.
종합편성 채널에서 ‘미스트롯2’ 경연 프로그램을 막 마쳤다. 현란한 무대의상이며 온몸을 불사르는 퍼포먼스와 눈을 홀리는 무대 배경 영상에 점점 빨려들었다. 라운드마다 합격의 기쁨과 탈락의 고배를 마시며 희비가 교차한다. 구경꾼도 그들과 함께 웃고 즐기다가 탈락자의 눈물바람에 덩달아 눈가가 촉촉해진다. 석 달 동안 자웅을 겨루는 노래 경연 덕에 내 귀가 호강했다.
내가 응원하는 참가자는 두 아이의 엄마였다. 효녀 가수가 되고 싶어서 나왔단다. 21살 때 아버지께 신장 한 쪽을 이식해드리는 바람에 배에 힘을 줄 수 없어 소리 공부를 접었단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곁에 없었던 나는 아버지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그녀에게 더욱 마음이 쏠렸다. 그녀는 ‘아버지와 딸’을 본인의 이야기하듯 불렀다. 단시간에 올 하트♡가 터지며 예심을 시원하게 통과하였다.
그녀는 탁월한 가창력과 탄탄한 노래 실력으로 당당히 두 번의 라운드를 성큼 올라갔다. 하지만 준결승 문턱을 코앞에 두고 결국 아쉽게 탈락을 하고 말았다. 나는 허탈한 마음에 방송이 끝났는데도 쉽사리 자리를 뜨질 못했다.
그녀가 이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지는 바람에 다시 기회가 왔다. 사람이 살다 보면 게임처럼 모든 것이 하루 사이에도 엎치락뒤치락한다. 준결승 진출자 한 사람이 학교 폭력 사건이 불거지면서 자진해서 사퇴하여 결원이 생긴 것이다. 그 자리를 메우려 아이들 돌보다가 무망중에 올라와 당황스러운 그녀의 낯빛은 온통 걱정으로 가득 차 보였다. 준결승 무대를 준비할 시간이 잠자는 시간을 포함하여 20시간밖에 없었다. 구경꾼도 같이 몸이 달았다.
시간을 쪼개서 연습한 끝에 그녀가 3위로 결승에 올라갔다. 구경꾼들은 결승에 진출한 것이 20시간의 기적이라 했다. 준결승전에서 언택트 관객 평가단에게 점수를 많이 얻은 것은 언더독underdog 효과라고 했다. 나도 밤잠 안 자고 연습했을 그녀가 내 딸처럼 안쓰러웠다. 주먹을 꼭 쥐고 노래하는 모습이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잘해라’하고 외쳤다. 언택트 구경꾼의 우레와 같은 함성에 방송국이 흔들흔들했다.
이변이 일어났다. 그녀가 결승에서 1위를 한 것이다. 결승전에서는 구경꾼에게 심사하는 특권을 주었다. 생방송 중 실시간으로 마음에 든 출연자 이름을 적어 문자를 보내는 것이다. 그녀가 나의 ‘원픽’이니 내 표는 당연하지만 옆지기를 꼬드겨 한 표를 보탰다. 구경꾼들은 엄청난 표 세례를 폭포수처럼 그녀에게 내리쏟았다. 반전에 반전이다. 오디션장의 마스터들도 놀라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노래는 절창이었다. 어디 한군데 나무랄 데가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석 달 동안 경연을 하고 최종 결승에 올라온 7명의 경연자 중 어느 누가 그만 못할까. 노래에 문외한인 나 같은 구경꾼의 눈에는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기가 막히게 잘 불렀다.
스포츠 경기 구경꾼은 대부분 약자를 응원한다. 역부족으로 경기에 패색이 짙다가 기적적으로 역전했을 때 손뼉을 치며 환호한다. 내가 응원했던 그녀도 탈락했다가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그녀가 짧은 시간에 준비한 피나는 노력과 힘든 여정을 응원하는 구경꾼의 애틋한 마음이 컸을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녀의 효심이 세상 사람의 눈에 콩깍지를 씌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께 효를 다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항상 부족하고 후회가 되는 것이 자식 된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게다. 그래서 본인이 못한 효도를 한 그녀가 가상하고 신통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살을 떼어준 효심에 구경꾼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여 그녀에게 진眞의 왕관을 씌우고 영광스러운 왕좌에 오르게 했다. 그녀가 이번 경연에 우승한 것은 구경꾼의 심사 덕이었다.
구경꾼은 원래 구경만 하지 않는다. 때로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었다가 무조건 고운 눈으로 보는 어머니가 된다. 또 날카로운 눈으로 재능을 알아보는 연출자가 되기도 하고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흥에 취하면 경연 참가자의 노랫가락에 맞춰 어깨를 들썩들썩 한다. 강 건너 불 보듯 구경만 하지 못하고 판관이라도 되는 양 어쩌고저쩌고하며 거침없이 자기의 저울을 들이대는 것이 구경꾼의 심리다.
내 삶이 오디션장이라면, 힘을 줄 때 주고 뺄 때 빼며 빠름과 느림을 조절하면서 밸런스를 맞춰 노래를 부르리라. 온 힘을 다해 끝까지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하리라. 비록 세월의 때가 끼어 텁텁하고 쉬지근한 목소리지만 음 이탈이나 안 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구경꾼의 양팔 저울의 추가 채송화 씨만큼이라도 내 쪽으로 기울었으면 좋겠다. 오디션장의 마스터처럼 ‘이런저런 것을 이렇게 고쳤으면 어떨까.’ 하며 솔직하게 지적도 해주었으면. 게다가 한 사람의 구경꾼이라도 이만하면 잘했다고 어깨를 토닥토닥해주면 참 고맙겠다.
중용 14장에 ‘정기이불구어인正己而不求於人이면 즉무원則無怨이니 자기의 처신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 바라는 것이 없으면 누구를 원망할 일도 없다.’고 한다. 내가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면 스치는 바람결에도 흔들리는 추와 매의 눈 같은 구경꾼의 심판이 무에 두려우랴. 한목소리를 내는 군중의 심사가 무슨 대수이랴. 엄한 구경꾼인 신의 화禍인들 뭐가 겁나랴.
( 2021. 3 )
첫댓글 채송화씨 하나 보탭니다. 토닥토닥! ㅎ
국장님 열정이면 탑이지요. 군더덕이 없이 깔끔한 삶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명희샘, 토닥토닥 고마워요.~~^^
잘 읽었습니다. 온 국민들이 보는 트롯을 저는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 공감하지 못 했는데, 구경꾼을 읽고 감동이었겠구나! 하는 영상이 그려집니다.
부럽습니다.
미스트롯을 안 봤어도 글을 읽고 감동이었겠구나 하고 그려졌다니 참 다행이군~~^^
저도 이 경연을 가끔 보았습니다만, 그새 작품 하나를 만들어내신 선생님의 열정이 감동입니다.
글이 감동이 아니고 내 열정에 ~~^^
@김정옥 요즘 제가 글을 못 쓰니까 부러워서 그러지요. 선생님 글이야 워낙 탄탄하시니까요.
@강현자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읽어줘서 고마워요.
트로피를 향한 사람은 트로피가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날이 곧 다가올 것이며 낙마한 사람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될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
받은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각자 나름의 가치는 반드시 있을 겁니다. 다만 청춘에 열정을 바쳐본 일이 없는 저는 지금이 청춘으로 알고 살고 있네요~어이없긴 하지만~~ㅎㅎ
삶을 되돌아 보게 하는 글 잘 감상하였습니다. 선생님, 오는 봄 뽀샤시하게 즐기시길요^^
답글에 철학이~~
심도 있는 답글을 달아주신 아영샘 무지하게 고마워요.
윗부분 똑 따다가 글 속에 붙여 넣었으면 좋겠는 걸 ㅎ
한동안 나 역시 미스트롯에 빠져 구경꾼이 되었어요.
첫 머리부터 대상 수상을 한 가수는 가슴에 자리를 잡았어요.
글이든 노래든 표현방식은 다르지만 사람의 감정을 좌우하는 건 같겠지요.
구경꾼의 마음을 잘 풀어낸 좋은 글이네요.
회장님도 저와 같은 마음이셨군요.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 삶이 오디션장이라면, --
(너무 멋있는 말 )
내 삶의 자세를 다시 짚어보게 하는 좋은 글 잘 읽었네요.
그리고 겸손한 열정에
우선 채송화씨 대신 봉숭아씨를 한웅쿰 보내고요.~~^^
양팔 저울의 추가 채송화 씨만큼이라도 내 쪽으로 기울었으면 좋겠다.
요 말에 이미 기울었습니다. ^^
추를 기울여 줘서 고마워요~~^^
'선생님의 삶이 아름다운 노래로구나! '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텁텁하고 쉬지근한 목소리라니요.) '채송화 씨만큼'이란 표현은 딱 선생님이 하실 만한 표현입니다. 마음속에 오래 두고 생각날 예쁜 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 삶이 아름다운 노래라니 최고의 칭찬이군.~~^^
좋은 글로 봐줘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