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향도 초지일관(天城向道 初志一貫)
김성태.김성미 가정
1. 나의 어린시절과 성장 배경 2. 원리와 사랑에 끌려 입교 3. 제5차 경남순회전도단 활동 4. 병역의무 수행과 참아버님 만남 5. 대학입학과 원리연구회 활동 6. 제5차 전국대학원리연구회 순회전도단 활동과 6000쌍 약혼 7. 주경야독 시작과 6000가정 축복 8. 아내의 입교와 임지동원 9. 직장과 신앙 10. 살아온 발자취 11. 앞으로의 삶
1. 나의 어린시절과 성장 배경
나는 1953년 10월 27일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1004번지에서 서흥김씨 김부생과 진양정씨 정옥점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나의 어린시절에 대해 말하려면 아버지 대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나의 아버지는 경남 밀양 사람인데 4형제 중의 3남으로 해방 전 10살 때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다. 형님들도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져서 아버지는 고아가 되었다. 잠시 외삼촌 댁에 의탁하기도 했으나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였다.
6.25가 나던 해에 아버지는 군대의 부사관이었다. 함양초등학교에 주둔한 부대에서 교관을 하던 중 함양 출신인 어머니와 중매결혼을 하고 그대로 터전을 잡으셔서 함양이 내 고향이 되었다.
군 시절 아버지는 북한 인민군과 전투 중 왼쪽 팔에 총상을 당해서 상이군인으로 제대하였으나 일정한 직업이 없어 술을 드시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는 작은 밭을 사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생계유지가 되지않아서 여러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농번기의 품팔이, 밥상 제작과 판매, 노전의 빵장사, 옷장사, 개장사, 재제소의 조수 일 등이다. 나중에는 초등학교의 소사도 하셨으나 생활은 늘 어려웠다.
그러다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인 1963년에 아버지는 집에서 얼마동안 독학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시더니 9급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합천군 봉산면을 시작으로 삼가면, 대양면, 용주면 등지에서 근무했고 이후 연고지인 함양으로 전보되어 함양읍과 군내 여러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셨다.
내가 유소년기를 보냈던 1950~60년대의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을 시작한 초기여서 전 세계 국가 중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의 하나였다. 식량이 모자라서 춘궁기가 되면 너 나할 것 없이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박정희 소장의 혁명공약도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의 배를 채우는 문제가 급했다.
1965년에 초등학교에서 집단 관람을 권했던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흑백영화에도 가난과 배고픔이 잘 나와있다. 이 영화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이윤복(李潤福) 어린이의 일기가 원작인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구에서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던 이윤복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움막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술과 노름에 찌들어 있고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가출해 버렸다. 동생들을 먹여살리려고 이윤복은 사과로 한끼를 때우고, 텃세를 하는 구두닦이들에게 뭇매를 맞는 등 갖은 고초를 겪어가며 구두닦이, 신문팔이, 껌팔이를 하면서 하루하루의 생활을 일기장에 적었다. 담임선생님이 그것을 책으로 펴냈는데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윤복을 돕는 온정의 손길이 쇄도했고, 아버지는 잘못을 뉘우치고 가출한 어머니도 돌아오게 되었다.”
가난한 생활이 서민의 일상이었기 때문에 가난은 수치스럽지도 창피한 일도 아니었다. 내 주위의 농촌 사람들도 대부분 가난했고, 깡통을 들고 구걸을 하거나 떼를지어 잔치집을 찾아다니는 거지들도 많았다.
우리집도 끼니를 잇기가 어려워서 배고프고 고생했던 기억이 많이 난다. 학교에 갈 때 양식이 떨어져서 어머니가 고구마를 깍두기 같이 잘게 썰어서 도시락에 싸주시던 일, 소풍갈 때 상한 고구마 두쪽을 싸주셔서 소풍지에서 먹던 일,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나누어 준 옥수수 죽과 빵을 가져와서 동생들과 나누어 먹던 일, 초등학교와 중학교 소풍날에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서 선생님이 주신 도시락을 귀가 길에 풀밭에 들어가 혼자 앉아서 먹던 일,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극장의 검표원 앞에 서서 “내가 파리로 변할 수 있다면 날아 들어갈 수 있을텐데..”하고 상상했던 일 등이 떠오르고,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을 갈 수 없었던 일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는 반장과 간부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부모님을 설득했으나 돈이 없어서 끝내 수학여행을 갈 수 없었다.
그 밖에도 밤에 전기가 없어서 희미한 호롱불 옆에 둘러앉아 어머니가 구멍난 양말을 몇 번씩 덧대서 기워주시고 나와 동생들의 윗옷을 벗겨 이와 서캐(머릿니)를 잡아주시던 일, 산에서 땔감으로 솔가지를 꾸려서 지고 출렁다리를 건너던 중 맞은 편 사람을 피하다가 추락했는데 다행히 물가의 넓적바위에 떨어져서 살아났던 일, 아버지가 전보 발령된 면의 장터에서 텃세를 하는 아이와 내가 싸웠을 때 그의 친척들이 모두 그쪽 편을 들었던 반면에 어머니는 나만 야단쳐서 억울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자존심이 센데다 가난하여 배고프고 도와줄 친척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내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하고, 나의 가정도 내가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물건은 무엇이든지 아껴쓰고, 잘 버리지를 못하고, 돈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만 쓴다. 스스로 납득이 잘 안되는 일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남을 잘 믿지 못하고, 정을 주고 받는데 서툴다. 그리고, 이웃에 봉사하는 일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위하여 살라”, “참사랑은 주고 또 주고 잊어버리는 것”이 평소 참부모님의 가르침이고, “고생을 하는 것은 마음을 크게 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은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는 것이 『뜻길』의 말씀이고 보면, 앞으로도 이웃과 나누고 봉사하기 위한 훈련을 많이 해야 할 것같다.
2. 원리와 사랑에 끌려 입교
1970년대 들어 통일벼가 나오던 무렵부터는 배고픈 일은 없어진 것 같다. 그러나, 가난에서 벗어나고 세상에 나가기 위해서는 대학교를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부모님이 말단 공무원의 박봉으로 5남매를 뒷바라지 하느라 늘 힘들어 하셔서, 언감생심(焉敢生心)으로 꿈을 꿀 수가 없었다. 내가 중학교 시절 세살 위의 형님이 “대학에 가고싶다”고 하니 아버지가 책을 찢어버리셨다. 나도 고등학교 때 “대학가고 싶어서 공부한다”고 하니 매우 야단을 치셨다. 결국, 형님은 고등학교 졸업 후 9급공무원으로 면사무소에 다니면서 2년동안 학비를 모아 동아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4년동안 악착같이 공부하여 전액장학금을 받아서 졸업했다.
나의 부모님은 특정 종교를 믿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도 종교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하는 친구를 따라 장로교회의 부흥회에 몇 번 참석했다. 그것을 계기로 어느 날 친구 집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을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들어오시더니, “뭘 그렇게 질문이 많으냐”면서 “무지껀(무조건) 대고 믿어야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2년 들어 중학생인 여동생과 그녀의 단짝 친구가 교회에 드나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하게 지냈다. 그당시 나는 대학에 가지못해 몹시 좌절해 있었다. 몸도 결핵에 결려서 수척하고, 심장이 두근거려서 집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날 젊은 여자 두사람이 마루에서 여동생과 같이 얘기를 나누더니, 동생을 통해 나와 대화를 좀 했으면 했다. 내가 마루로 나오니 약간 키가 크고 통통한 미인 형의 여인이 통일교회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 장 짜리 전단지를 가지고 신앙얘기를 꺼냈다. 나는 교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잠자코 얘기를 들어주었다. 필요하면 중간 중간에 질문도 했다. 이후, 그녀는 우리집을 몇 번 더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 한번 와서 강의를 들어보지 않겠느냐”면서 “교회는 읍내의 상동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겠다”고 하고, 저녁에 몇가지 질문을 준비해 가지고 찾아갔다. 그런데, 상동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통일교회가 어디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상림관 뒤에 누구네 집이 있는데, 거기도 교회한다고 하더라”고 했다. 그래서 갔더니, 막다른 골목 안쪽의 부엌이 딸린 단칸 방의 가정집이 있었다. 친구를 따라 몇 번 가본 경험에 의하면, 교회의 이미지는 대로변의 십자가가 달린 큰 건물이었다. 초라한 가정 집을 교회라고 하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만났던 그 여자 분과 호리호리한 중키의 젊은 남자 한분(777가정 임기선 교역장님)이 맞으러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남자 분이 남편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아무튼, 방에 들어가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후에 남자가 흑판에 판서를 하면서 『창조원리』 강의를 했다.
강의를 하던 중 이성성상에 대해 설명하였다. “인간을 비롯한 우주의 삼라만상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한다. 그것을 나누면 분자, 원자, 소립자가 되고, 나중에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된다. 그리고 그 근원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이신 하나님이다”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쪼갰는데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이 무척 신기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마음속에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 후, 그녀가 가끔 집에 찾아와서 종교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질 때도 종교 이야기로 골목길을 길게 왕복하다가 서로 바래다 주기도 했다. 나중에는 내가 심장이 뛰고, 소변이 탁하다는 것을 알고 수소문을 해서 “뽕나무 가지를 달여먹으면 좋다”는 민간요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꿈에 건강목걸이를 가지고 있는데 성태씨가 나타나서 달라고 했다”면서 목걸이를 전해 주기도 했다. 나는 내 어머니 외의 잘 모르는 여인이 나를 극진히 위해 주어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교회에 갔더니 교역장님이 입회원서를 쓰라고 설득을 하셨다. 나는 좀 버티다가 입회원서를 썼는데 그날이 1972년 8월 15일이다. 그 전도대원은 나의 믿음의 어머니가 되었고, 이름은 777가정 김소영씨다. 그 후, 대원들이 임지를 마치고 거창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그동안 정이 들어서 매우 섭섭했다. 송별예배 시간에 믿음의 어머니가 입교당시의 이야기와 전도대원으로서의 경험을 간증했다. 그녀는 “찾아진 여러분들은 참으로 귀한 존재”라고 했다. 나는 ‘내가 정말로 귀한 존재인가’ 하고 반문해 보았다.
그리하여, 전도대원들이 떠나고 설 명절이 지난 어느날 조금은 쓸쓸한 마음으로 교역장님과 연탄난로 가에 둘이 앉아서 마른 가래떡을 구워먹었다. 그리고, 교역장님의 사모님도 임지를 마치고 오셔서 어느날 교회의 전 식구가 솔숲으로 야외예배를 갔는데 막내여동생과 같이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교역장님도 다른 곳으로 인사이동이 되었다. 송별하던 날 입교당시에 꿈을 꾸셨다면서 칠판에 『천성향도 초지일관(天城向道 初志一貫)』이라 쓰시고 “천성으로 가는 신앙길을 초심을 변하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는 것이 그분의 좌우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후, 전국적으로 이백림 논산할머니의 조상해원 역사가 있어서 ‘함양에도 방문하실까’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오시지를 않아서 밤에 식구들이 교회에 모여서 두손을 모아 아래 위로 흔들면서 해원 의식을 했다. 그시절에도 가슴두근거리는 증세는 계속되어 논산할머니 집회가 전주에서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여자식구 한사람과 같이 전주교회를 방문하였지만 다른 지방에 순회를 가셔서 만나지를 못했다.
3. 제5차 경남순회전도단 활동
그 후로 친구들은 재수, 삼수를 해서 함양에서 가까운 진주교대와 경상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희망없이 계속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활로를 찾으려고 1974년 6월 10일 『제5차 경남순회전도단』에 입단했다. 부산의 교구본부에서 보름 정도 수련을 받았다. 순전단장님은 777가정 이병규씨였고 교구장님은 박규남(개명 전 박판남)씨였다. 이름이 기억나는 단원은 김응룡, 조덕환, 조근제, 오염택, 이영수, 이상록, 박광호, 장성수, 김제민, 최영선, 고종우, 음인순, 박수련, 허호자, 배갑점, 임정엽, 전영숙, 박복순, 오자윤, 고향숙, 이영선 씨와 나까지 22명이다.
수련을 마치고 임지에 동원될 무렵 국제축복가정인 에리까와 야스에(江利川 安榮) 여사의 『북송 일본인 처 자유왕래 촉구』 강연회가 있어서 단원들과 같이 참석했다.
제일교포 북송사업은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조총련과 북한당국의 선전에 속아 1959년 12월 14일부터 1984년 북송이 종료될 때까지 180여 차례에 걸쳐 총 9만 3천여 명의 제일교포와 배우자 및 피보호자 6천 8백여 명이 일본의 니가타 항에서 북한으로 보내진 사업이다.
그러나, 가서보니 실상은 “지상낙원”이 아니고 계급차별과 강제수용소 행 등 자유도 인권도 없고, 사람들은 모두 못먹어서 영양실조 상태인 “지상지옥” 행이었다. 그래서 그들 중 일본인 처의 모국 자유왕래를 촉구하는 내용의 강연회였다.
강연이 끝나고 나서 에리까와 씨의 싸인을 받았다. 그녀는 “불변의 심정, 1974년 6월 30일 江利川 安榮”이라고 써 주었다. 나는 “죽지만 말고 끝까지 남아지라”는 참부모님 말씀이 생각나고, “불변의 심정으로, 최후의 일각까지”를 신앙의 지침으로 삼는 식구들도 떠올랐다. 그래서, 그때부터 신앙의 지침을 천성향도 초지일관(天城向道 初志一貫)으로 정했다.
임지에서 단원들은 통일된 무늬의 맞춤 단복을 입고 “최 일선을 달리자! 최 선두를 달리자! 최 첨단을 달리자!”는 단장님의 구호를 따라 복창했다. 그리고 신나게 마을을 누비면서 전도를 했다. 밤이면 단장님의 원리강의에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면, 교구장님이 현장을 방문하여 특강도 해주시고, 품속에서 준비해 오신 격려금을 꺼내어 대원 한사람 한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기도 했다.
순전단 활동을 하니 신기하게도 가슴 뛰는 증상이 없어졌다. 양산, 김해, 창녕, 의령 등에서 4개월 정도 전도활동을 했다.
창녕에서는 처음 7일 금식을 했다. 금식 2~3일이 지나니 배가 너무 고팠다. 자리에 누워 교회 천정에 있는 석가래를 7개 정해놓고 하루하루 남은 개수를 세면서 금식이 끝날 날 만을 기다렸다. 전도를 마치고 돌아온 대원들(우리는 서로를 “형”,“오빠”,“누나”라고 불렀다)이 자기들의 금식 경험을 얘기하면서 위로를 해주었다.
금식을 마치는 날 사진관에 들러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사는 “이 사람의 몸이 어쩌다 이렇게 험(수척)하게 되었느냐”고 동료에게 물었다.
나는 단장님에게 복숭아 캔을 사달라고 미리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 밤 12시가 지나자 마자 캔과 죽을 먹었다. 그런데, 막상 굶었던 뱃속에 음식이 들어가니 욕심과는 다르게 받지를 않아서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며칠 동안은 아무리 밥을 먹어도 허기가 지고 어머니가 담가주시던 김치 생각도 났다. 그래서, 고향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려 보내주신 비상금으로 우동과 포도를 사먹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이었던 서울 중구 장충동 소재 국립극장에서 문세광(文世光)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만 단상에 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어 머리에 중상을 입고 별세하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창녕에서 활동을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단장님 이하 모든 단원들은 철야정성을 드리기 위해 성지 근처의 냇물에서 냉수목욕을 했다. 그리고, 단원들이 앉는 반석 주변에 사주경계를 세우고 철야를 하면서 하늘부모님이 우리나라의 안위를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창녕과 의령에서는 여자단원들이 어린이들을 모아서 주일학교를 운영했다. 그 프로그램의 하나로 연극공연이 있었다. 나는 총감독 역할을 맡는 한편 대본을 짜고, 무대배경을 직접 그렸다. 그리고 형, 누나들과 협력해서 기타로 효과음향를 만들어 녹음하고, 무대소품, 조명도 준비하고, 아이들과 같이 리허설을 했다. 결과는 마을 주민들이 만장한 가운데 대성황리에 공연이 끝나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4. 병역의무 수행과 참아버님 만남
순전단 활동 중에 군대 소집 영장이 나와서 함양읍 사무소에서 병무보조요원으로 14개월을 복무했다. 순전단 수료증은 1975년 1월 17일에 받았다.
병무보조요원으로 복무중 연말이 되면 마음맞는 청년식구들과 같이 불우이웃돕기 사업으로 『복조리』를 팔러 다녔다. 복조리는 밥을 지을 때 곡식에서 돌을 골라내는 조리를 축소하여 색깔을 넣고, 예쁘게 만든 조리다. “복조리 사세요, 복조리 사세요, 복조리를 부엌에 걸어놓으면 만복이 옵니다”하면서 시골 마을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팔았다. 그 이익금으로 밀가루를 포대로 샀다. 그것을 손수레에 싣고 기성교회 장로가 운영하는 고아원을 찾아가서 나눠주고 기념 사진도 찍었다. 이런 일을 두어 해 정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 교구본부에 참아버님이 순회를 오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와 조봉권 청년회장은 버스로 부산에 도착하여 초량의 교구본부를 찾아 갔다. 좁은 대문을 둘러싼 시멘트 담장 밖에는 많은 식구들이 모여서 아버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버님이 타신 승용차가 도착하자 삽시간에 식구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나도 이들 틈에서 처음으로 차에서 내리는 50대의 젊은 아버님과 박보희 선교사를 뵐 수 있었다. 아버님이 대문을 지나 교회 안으로 들어가시자 식구들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우성을 쳤다. 어찌어찌하여 나도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님은 칠판에 한자로 “釜山”이라고 크게 쓰시고 “부산은 불산이기 때문에 부산에서 부터 말씀의 불을 붙여 올라가야 된다”고 하셨다. 이날 “나는 드디어 오늘 진리 말씀의 실체이신 참아버님을 뵈었다” 하고 마음속에 새겼다.
1975년 6월 7일에 서울의 여의도 5.16광장에서 참부모님의 『구국세계대회』가 개최되었다. 세계 60개국 1천여명의 대표와 120만명이 운집하여 남침을 노리는 북한의 김일성을 규탄하고 자유대한과 전세계의 자유와 주권수호를 결의하는 자리였다.
함양에서는 김재덕 교역장님의 인솔 하에 버스 두대로 서울로 향했다. 나도 아는 선후배 두사람과 같이 탑승하여 난생 처음 서울에 가게 되었다. 과거에 시골의 신작로는 먼지가 많이나는 비포장 자갈길이었는데, 이때만 해도 편도 2차선의 포장된 국도와 경부 고속도로가 생겨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여의도 광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꽉 차 있었다, 맨 앞의 확성기에서 리틀엔젤스 단원들의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의 요들송이 들려왔다. 박종구 선교사의 음성도 들렸다. 대회가 무르익어 감에 따라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주제로 참아버님의 포효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님은 “한국이 처한 상황을 통해 세계는 민주세계가 승리하느냐, 아니면 공산세계가 승리하느냐 하는 두갈래 길에 서있다”고 하시면서 청중의 각성을 촉구하셨다.
연단 주위의 뒷쪽에는 허허로운 벌판에 우뚝 솟아있는 국회의사당이 보였다. 반대편에는 비슷하게 생긴 KBS 방송국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5. 대학입학과 원리연구회 활동
1976년부터는 국가유공자의 대학생 자녀에게도 등록금 감면혜택이 주어졌다. 나는 집에서 다시 입시를 준비했다. 그러다가 부산의 외국인 신발회사에 취직해 있는 형님의 도움으로 고시원에서 몇개월 숙식하면서 학원 강의도 듣고 공부했다.
1977년 고교졸업 6년 만에 서울 서대문 소재 야간대학인 국제대학 일어일문학과에 합격하여 드디어 대학 문턱을 밟게되었다.
입학 때가 되었다. 서울에 가야하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무조건 믿음의 어머니에게 연락하고 가방 하나만 챙겨서 올라왔다. 그랬더니, 경복궁 옆 팔판동에 위치한 서울교구 본부의 임도순 교구장님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두어 달 교구에 머물렀다. 그러나. 기거할 방이 없어서 교구장님 방에 임시로 있었고, 식구들이 교구장님을 방문하면 벌떡 일어서야 했다. 나중에는 잡동사니가 가득한 창고의 짐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거기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어느 날은 창고에서 머리칼을 다듬으려고 싸구려 드라이기를 사용하다가 합선이 되어서 손을 데인 적도 있다.
추운 겨울에 주일이 되면 성전의 연탄난로를 피워야 했다. 교구본부가 위치한 팔판동은 청와대가 가까워서 한길 쪽의 창문을 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창문을 꽁꽁 닫은 채로 난로 안에 장작과 번개탄을 올려놓고 불을 붙이는 것은 기술이 필요했다. 불은 안붙고 성전에 연기만 가득차서 많은 고생이 되었다.
주중 야간에는 교구장님이 심방을 가실 때 영사기를 들고 따라가서 참부모님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과 양키스타디움 집회, 그리고 워싱턴 모뉴먼트 집회의 기록영화를 상영했다. 주일날에는 대예배의 사회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학생은 원리연구회에 소속된다는 말을 듣고 낙원동에 있는 중앙회관을 찾아갔다. 이호열 과장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서강대학교 건너편의 철길 뒤 동도고등학교 옆 골목에 있는 서강학사를 연결시켜 주었다.
그당시 학사장은 김항제씨였다. 그래서, 학사장님의 보삼핌을 받고 손수 지어 주시는 밥을 먹기도 하면서 1학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국제대학은 야간대학으로 주로 직장인들이 다니는 곳이라 주간의 종합대학교로 옮기고 싶어서 편입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는 한편, 외롭기도 하고 전도도 하고싶고 해서 틈틈이 마음이 맞는 학우들과 교류를 했다. 전도하지는 못했지만 그때 사귀었던 고용환, 송순기, 신용묵씨 등의 생각이 많이 난다. 일문과 학생 중에 전주 출신인 은세창씨와는 아주 친하게 지냈다. 학사로 인도해서 1년 동안 숙식을 같이했다. 예배도 드리고 틈틈이 원리연구회 중앙회에서 주최하는 주말수련회에도 같이 참석했다. 여름방학 때는 전라도 변산반도에서 2주정도 실시되었던 대학생 원리세미나에도 동행했다. 언젠가는 전주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1학년 말이 되어서는 종로에 있는 편입학원인 공평학원에 등록했다. 강의도 듣고 학교도서실에서 하루종일 공부를 해서 편입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편입학시험 시기가 되니 여러 대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하였다. 그 중, 성균관대 국문과, 경희대 영문과, 건국대 영문과에 응시를 하였으나 모두 떨어졌다, 중앙대학교는 국어와 영어를 본다는 것을 알고 중앙대 신입생들이 배우는 『대학국어』와 『Freshman English』를 사가지고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신문방송학과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2학년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명수대학사로 옮기게 되었다. 은세창씨도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편입시험에 합격하여 동국대 학사로 옮겼는데 그 후로는 소식이 끊어졌다.
명수대 학사는 1800가정 사광기씨가 학사장이었고 중앙대 무역학과의 김장회씨, 숭전(숭실)대학생인 홍성복, 최억청, 그리고 숭전대에 편입한 김원근씨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중앙대 선배로는 최유신, 주장용, 이광익, 이한구씨 등이 있었는데 곧 졸업을 해버렸다. 그당시 중앙대 재학생으로 학사에서 숙식을 하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명수대 학사에서는 오랬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함양의 부모님 슬하에서 25년을 지내다가 낮설은 타향에 혼자있어서 그런지 많이 우울해졌다. 드디어, 제대로 된 주간대학에 들어왔다는 기쁨에 행복한 캠퍼스 생활이 되어야 하는데 만사를 팽개치고 집에 가서 쉬고만 싶어졌다. 2학년 겨울 방학 때 고향에 가서 아버지에게 당분간 휴학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크게 야단을 치셨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양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통일교회에서 중.고생에게 방학 중 무료영어 강좌를 개설한다”고 광고를 했더니 10여명의 학생들이 찾아왔다. 그들을 대상으로 『고교기본영어』 교재를 가지고 겨울방학 내내 강의를 했다. 3학년 겨울 방학 때도 두달 동안 강의를 했다.
중앙대학교 학생회관에 원리연구회 동아리 방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원리연구회 학생은 몇 명 되지않아서 우리는 교대로 방을 지켰다. 그리고 캠퍼스 왼쪽 언덕의 등나무 벤치 옆에 심령과학 전시회 판넬을 걸어놓고 박보희 총재의 『나는 자랑스런 한국인』 책자를 나눠주면서 학생들에게 원리를 소개했다.
어느 기독학생은 “개인은 가정을 위하여, 가정은 종족을 위하여, 종족은 민족을 위하여, 민족은 국가를 위하여, 국가는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라는 판넬의 구절에 대해 뭐라 말은 못하고 “문선명씨의 유치한 말장난”이라고 해서, 나는 적극적으로 해명을 했다.
탁명환씨가 참부모님을 비방하는 말을하고 신문에 광고를 내면, 우리는 학교 게시판에 반박문을 붙였다. 중앙대학교 축제의 가장행렬에는 학교의 상징인 청룡을 만들어서 원리연구회의 이름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시내의 타대학에서 도우러 온 원리연구회 학우들과 같이 배정된 부스에서 핫도그와 부침개를 구워서 팔았다. 그러면, 법학과의 박광서 지도교수와 이철순 총장님이 둘러보시고 격려를 해주셨다.
김봉태 중앙회장님을 초청하고 학생들을 모아서 『공산주의 이론비판』 강연회도 개최했다. 여름방학이 되면 지방에 내려가서 합숙 수련을 받았다. 수련이 끝나면 모내기를 하고 마을 길을 고르는 등 농촌봉사 활동을 했다.
그리고, 때로는 새문안교회에서 신도들이 만장한 가운데 개최된 통일교 비판 집회에 학사장님과 같이 참석하여 연세대 신학과 문상희 교수의 참아버님을 핍박하는 내용의 강연을 들었다. 국제승공연합 쪽의 부탁으로 터무니없이 교회를 헐뜯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신사훈 박사의 강연회에 녹음기를 숨기고 들어가서 녹취를 하기도 했다.
참부모님 미국 집회에는 『Sun Burst』라는 청년 뮤직 밴드가 있었다. 1978년 한국 원리연구회도 김봉태 부장님과 이호열 과장님의 지원아래 『Sun Burst』 밴드를 창립하였다. 서울대와 중앙대 학생으로 구성된 1st, 2nd, Base기타와 건반, 드럼, 보컬의 6인조 밴드였다. 나는 1st기타를 맡았다. 우리는 처음에 종로의 음악 학원에 등록하여 같이 음을 맞추다가 원리연구회 중앙회관, 시내 빌딩의 옥상, 어느 때는 청평의 호수가에 터를 잡고 연습을 했다. 우리는 비틀즈의 “Let it be”, “Obladi Oblada”, 죤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 그리고 베토벤의 “운명”을 연습하고 여름방학 캠프에서 학생들 앞에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원리연구회에는 주일마다 신문이 간행되었는데 나는 매회 『미스터 원』 이라는 네컷짜리 만화를 그려서 연재했다. 내용은 그때 그때 학원의 전도활동과 참부모님의 축복행사에 관한 것이었다.
대학시절에 틈틈이 철야, 한끼금식, 하루금식, 3일금식, 4일금식을 하였는데 졸업할 무렵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간의 신앙을 돌아보고 진로를 결정하기 위하여 7일 금식을 했다. 그래서, 학사모를 쓴 졸업식 사진을 보면 뺨이 홀쪽하게 찍혀있다.
6. 제5차 전국대학원리연구회 순회전도단 활동과 6000쌍 약혼
졸업 후에도 잠시 명수대학사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순전단원 모집이 있어 1981년 『제5차 전국대학원리연구회 순회전도단』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당시 단장은 1800가정 사광기씨였고 단원은 나, 조한규, 최운섭, 이찬호, 송용철(송용천), 전영칠, 김진춘, 한미경, 양동표, 조동호, 정강준씨 등이다.
우리는 낙원동의 중앙회관에서 합숙을 했다. 오전 중에는 단장님의 원리강의(안)을 본으로 하여 서로 학습과 토론을 하고, 오후에는 서울 시내의 각 대학캠퍼스를 누비면서 벤치에 앉아 있는 학생들과 대화하고 전도를 했다. 한여름의 더운 때는 한동안 청평 호수 가의 별장에서 수련을 받았다. 쉬는 시간에는 수영도 하고 낚시도 즐겼다.
어느 날은 참아버님이 서린호텔로 우리를 부르셨다. 도착하니까 단원 한사람 한사람의 자기 소개를 들으시고 “전도는 게릴라 작전으로 해야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점심으로 뷔페 음식을 사주셨다. 1981년 11 월4일에는 아버님이 전도일선에서 수고하는 순전단원들을 위하여 원리연구회 행사 팜프렛에 싸인을 하셔서 김봉태 부장님을 통하여 나눠주시기도 했다.
1981년 11월 10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109개국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0회 국제과학통일회의(ICUS)』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참부모님은 「인터내셔널 하이웨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일해저터널」 건설을 주창하셨다. 우리는 회의가 열린 롯데호텔의 로비에서 팜플렛을 나눠주면서 회의장을 구경했다. 회의가 끝난 후 아버님의 좌석에 놓였던 유리컾을 들고는 득템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팜플렛에는 해저터널의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후일 캠퍼스 평화대사가 되어 일본 규슈 사가현 가라쓰시에 위치한 한일해저터널 공사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갑자기 6천쌍 약혼이 있다고 해서 모두들 수택리 중앙수련소로 갔다. 아버님이 남녀 후보자를 구분해서 양쪽으로 세우신 후 “순전단 출신 나오라”고 하셨다. 쭉 나가서 섰더니 앞에 서있던 최운섭, 양동표 씨의 짝을 맺어주셨다.
내 차례가 되어 나의 얼굴을 쓱 한번 훑어보시더니 여자 쪽에서 한 사람을 택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 둘이는 참 부모님께 절을 올리고 나왔다. 출구에서 축복요원이 명찰을 회수했는데 그것으로 우리의 운명은 결정되어졌다.
얼떨떨한 가운데 상대가 정해지긴 했는데 나는 대상(아내)이 내가 막연하게 상상하던 미인형의 얼굴이 아니어서 며칠간 고민을 했다. 그래서, 사광기 단장님께 상의드렸더니 “성태씨! 축복을 안받으려고 그러느냐”면서 야단을 치셨다. 후일에 대상도 ‘나같이 키가 작은 남자를 만날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대상의 어머니는 나의 사진을 보고 “눈이 독하게 생겼다”면서 “이 사람과 안하면 안되느냐”고 하셨다고 한다. 장인어른도 나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 않으셨던 것 같다. 나중에 고향의 부모님에게 대상의 사진을 보여드렸는데 부모님도 며느리 감이 “이름도 잘 모르는 신학교의 학생”이라고 탐탁지 않아 하셨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참부모님이 맺어주신 귀한 축복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부모님에게 대상과 그 가정에 대해 좋게 이야기 하고 변호를 해야 했다. 대상도 마찬가지로 자기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날 대상의 자택에서 양가부모님의 참석 하에 약혼식을 올렸다.
7. 주경야독 시작과 6000가정 축복
대학순회전도단 활동이 끝나고 나서는 나의 전공이 신문방송학이라 원리연구회 중앙회관에서 신문을 만들고 배포하는 책임자로 활동했다. 매회 4컷짜리 만화 『미스터 원』도 계속 그려넣어서 재미있고 유익하게 꾸미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진로를 모색했는데 동료들도 학사장으로 목회 발령을 받기도 하고 외국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나는 목회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학업을 더 하기로 하고 1982년 3월에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국민윤리교육전공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회사에 입사 원서를 제출하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연세대학교 교직원 모집 광고를 보고 응시했다. 그러고는 잊어먹고 있었는데 나중에 합격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하여 1982년 3월 29일에 연세대학교 학생처 장학복지과에 첫 발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근무하던 중 1982년 10월 14일 잠실농구장에서 6000가정 축복을 받았다
8. 아내의 입교와 임지동원
축복 후 부인들은 곧 임지동원이 되었는데 아래 “ ” 부분은 아내의 입교와 동원기간에 있었던 이야기다.
“나 김성미는 1957년 1월 1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200번지에서 순천 김씨 김기연과 진주 하씨 하복순의 1녀 2남 중 장녀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날 국제기동대원인 핀란드의 요르마 씨와 통역자 오진곤 씨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 일을 계기로 영어를 배울 욕심으로 영등포 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임도순 목사님으로부터 재림론 강의를 들었다. 그당시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등을 읽으면서 인생과 역사에 대해서 생각이 많았다. 그러던 중 재림론을 들으니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원리에 등장하는 숫자풀이가 재미있었다.
통일교회의 부흥회에 나간다고 하니까 나와 친한 『Seven Club』 의 친구들이 “이단교회”라고 말렸다. 나의 동생은 “따먹는 교회” 라면서 적극 반대를 했다. 그럴 때 마다, 교회에 가서 소문에 대해 물어보고 해명을 들었다.
그래서, 1978년 12월에 오진곤씨를 믿음의 아버지로 하여 입회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그는 한양대 ROTC 학생으로 영등포 교회의 학생부장이었다. 그 외에도 청년부장 반재구씨와 최창국, 김양원씨 등 청년들이 5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과 어울려 덕수궁과 행주산성에도 가는 등 노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는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 그때 학생이었던 김경호씨는 현재 영등포 교회의 중심식구이고, 초등학생이었던 김소영씨는 가정부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틈틈이 원리를 접하고 성경을 보았다. 예수님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울기도 했다. 7일 수련과 21일 수련도 받았는데 신앙에 부족함을 느껴 1981년 3월에 통일신학교 유아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당시 교장은 이요한 목사님이었고 전임은 최정창 교수님이었다. 3월~5월에 수택리 수련소에서 유아교육 관련 강의를 들었다. 때로는 인근의 통일동산에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평소에 이요한 목사님은 “밥이 맛있듯이 신앙도 맛있게 해야 지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유아교육이 적성에 맞는지 대학생활이 재미있었다.
1학기 재학 중 어느날 축복이 다가와서 새옷과 구두를 사입고 수택리에서 약혼을 했다. 약혼 후 1981년 6월에 아름다운 경치와 맑고 수량이 많은 개울, 저수지 뚝방, 그리고 A타입 성전이 인상적인 전라북도 장수 통일교회로 임지동원이 되었다.
나는 장비옥, 김말자, 이옥순 4명 1개조의 조장으로 6개월간 전도 활동을 했다. 유아교육 전공을 살려 유치원과 주일학교 학생 지도도 했다. 우리는 새벽기도를 하고 밥을 짓고 텃밭도 가꾸었다. 장수 뿐만 아니라 무주와 진안도 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행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어느날은 한 농가의 청년을 전도하려고 살갑게 대하고 농사일도 거들어 주고 하니까 그의 할아버지가 자기 밭의 총각무우를 뽑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조원들이 손수레를 가지고 가서 한고랑을 다뽑아 간 일이 있어서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전도할 욕심에 노인들의 뒤를 밟으면 놀라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주체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 주었는데, 생활비를 못보내주는 대원이 있으면 다른 대원들의 비용을 공동으로 쓰기도 했다.
그 후에는 서울 필동의 동국대학교 근처 중구교회 내 총원 40~50명 정도의 사업팀에 소속되었다. 중구교회는 120가정 김원종 목사님이 시무하셨다. 사모님은 어려운 교회살림을 열심히 꾸려나가셨다.
우리는 중구교회에 적을 두고 본부 방침에 따라 시내 『장미슈퍼』 옆의 커다란 창고 건물에서 생활했다. 거기에는 전국 각 교회에서 합류한 사업팀 수백명이 모여 있었다. 방마다 3층 침대를 놓고 합숙을 하면서 수련도 받고 사업을 했다.
낮에는 온종일 수세미, 주방세제, 화장품, 잠옷 등을 떼어다 팔았다. 저녁에는 남자 사업대장 앞에서 발표도 하고 실적보고를 했다. 사업 중 점심 때가 되었는데 돈이 없으면 음식점 주인의 양해를 얻어 짜장면 값 등을 수세미로 지불하기도 했다. 대원 중에는 사업실적이 뛰어난 이가 있었는데 나중에 사회로 나갔다고 한다. 주말이 되어 주체들이 맛있는 간식거리를 사오면 모두가 즐겁게 나눠먹었다.
때로는 유정옥씨가 책임자로 있는 용산 지역과 김우종씨가 책임자로 있는 동대문 지역에서도 사업을 했다. 김우종씨는 가끔 대원들과 같이 도봉산 등산을 했다. 때때로 우리는 충청도, 대구, 광주 등 전국을 무대로 사업을 하러 다녔다. 때로는 승공행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때 마주친 어느 아주머니는 나에게 “팔자에 있는 액땜을 하러 다니고 있네”하고 말했다. 당시 이재석 협회장님과 강정원 사모님이 대원들에게 관심을 많이 쏟으시고 격려해 주셨다.
임지기간은 21개월이었는데 중간에 30개월로 연장이 되었다. 나중에, 나머지 9개월을 다 채우고 마쳤다.”
9. 직장과 신앙
그 이후 서울시내 필동에 있는 『한국의 집』에서 교회의 축복행사와는 별도로 양가의 부모님과 친척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통 혼례를 올리고 2박3일 동안 제주도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직장이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근무하면서 야간에 학업을 병행하여 1984년 8월 『김일성 주체사상에 대한 기능분석』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재학 중 북한연구소 북한학회에도 가입하여 통일사상연구원 이상헌 원장님의 논조를 참조하여 『북한』지에 「남북 총선거 대비방안」 등의 글을 기고하고, 『통일사상』지에 「김일성 주체사상 비판」을 싣기도 했다. 남북총선거 대비방안의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김일성은 무력통일이 어려우니까 88올림픽을 전후하여 남북한 총선거를 제안해 올 수 있다. 남한의 역대 정부는 평화통일을 주장해 왔으므로 제안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고 UN감시하의 총선이 실시되면 미군도 철수해야 할 것이다.
남북총선거를 대비하여 북한은 행정구역을 개편, 양강도와 자강도를 신설하고 황해도를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로 분할하여 도를 기존의 6개에서 9개 도로 만들고, 노동자구를 신설하여 남한보다 선거구를 많게 조정해 놓았다. 대통령 후보도 북한은 공산당의 단일 후보인데 남한은 여러 당에서 반미,반체제 후보가 난립할 것이 예상된다.
북한의 후보와 2천만 주민은 주체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데, 남한은 좌경세력과 북한의 지하요원들이 날뛰고 있고, 해외의 유권자들도 반체제 인사가 많다. 북한은 이미 사상무장과 조직편성이 되어있으므로 단시일 내에 선거를 마치자고 할 수있다. 총선의 승리를 위해 북한은 혈연, 인연, 돈, 관직, 요인암살, 테러, 폭동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남북한 총선거 때는 남한도 통합정당의 단일 대통령 후보를 내야한다. 그리고, 미리 국민교육을 통한 사상무장을 해야한다.
북한의 비포장도로를 다니기 위해 미리 찦차를 사두는 것도 총선 대비방안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찦차에다 선물을 가득싣고 헐벗은 북한의 친척들을 찾아가 나눠주면서 남한 국민들의 따뜻한 동포애를 보여주고, 올 때는 그들을 태우고 남한 일주를 시켜주면서 한국의 발전된 실상을 보여주고 교육해야 한다.”
그 당시 나도 총선대비 겸용 찦차를 한 대 구입 운행하면서 철원의 휴전선 근처 전방을 한번 둘러보기도 했다.
그리고, 1984년 국민윤리전공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국교육·윤리연구회를 창립하여 『교육과 윤리』라는 학술지를 만들고 「한국통일을 위한 북방정책의 진로」 등 매년 1편씩 4~5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연세대학교는 기독교 이념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재직하는 동안 내가 통일교인이라고 표시를 내거나 전도를 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직장의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롭고 가족적이었다. 오히려 지독한 기독교인인 나의 형수가 평소에 내가 통일교인 인 것을 못마땅해 하고 극렬히 핍박했다.
어느 날은 학교의 총무처 인사팀에서 불러서 총무처장을 만났다. 당시 총무처장은 개인적으로 나를 불교의 석가모니와 비슷하게 “성태모니”라고 부르면서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 이유는 평소에 내가 직접 전도를 하지는 않지만 언행에 종교인의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여하간에, 그는 “기독교 학교에서 어떻게 통일교인이 일하게 놔두느냐”는 내용의 투서를 내 형수가 넣었다고 넌지시 귀띔을 해주었다
그당시, 나는 오랫동안 학교의 외국어학당에 다니고 해서 내가 원했던 국제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투서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곧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이 되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근무를 했는데 정년퇴직이 얼마남지 않았던 2012년 5월 4일 “또 (형수로부터) 투서가 들어왔다”면서 “교목실에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갔더니 교목실장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약서를 쓰라고 했다.
“1. 학교에서 통일교회 전도를 하지 않는다.
2. 다른 이단 종교의 전도도 막는다.
3. 그러면, 김성태가 통일교 신자라는 사실을 임의로 전파하지 않고, 정년퇴직 때까지 인사상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이 내용을 2장 써서 각자 1장씩 보관하기로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형수님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아내와 나는 “우리 집안이 넘어가야 할 탕감의 하나일 수도 있으니 종족적 메시아인 우리가 정성을 드려서 고이 넘어가자”고 생각하고 축복 후부터 지금까지 형님가정의 복귀와 축복을 위해 정성드리고 기도해 주고있다.
학생처와 첫 인연을 맺은 이래 나는 32년 동안 법과대학, 기획실, 국제학대학원, 대외협력처, 교무처, 학부대학, 국제교육교류원, 생활관, 교무처학적과, 박물관, 국제처, 학술정보원 등의 기관과 부서 업무를 두루 경험하고 2014년 2월 말에 부장으로 정년퇴직하였다. 퇴직할 때 총장 명의의 공로패와 교육부장관의 표창장을 받았다.
10. 살아온 발자취
나의 전도로 막내 여동생은 1988년에 6,500가정 축복을 받았다. 부모님은 1992년 3만 기성가정 축복을 해드렸다. 그리고 외할머니도 1992년에 492가정 독신축복을 해드렸고, 외숙모는 2010년에 청평에서 영육계 축복을 해드렸다. 처가로는 둘째 처남은 아내의 전도로 1988년에 6,500가정 축복을 받았다. 장인장모님은 2010년에 천주축복을 해드렸다.
자식은 아들, 딸, 아들의 3남매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2급 지적장애인으로 2017년 천력7월17일(양력 9월 7일) 축복을 해 주었다. 딸은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의 방송관련 전문대학에 유학하여 도쿄방송국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현재 프리랜스로 방송제작 일을 하고있다. 둘째아들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토익강사로 일하고 있다.
청평에는 지적장애인인 큰 아들을 낫게하려고 1995년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1999년부터 종적인 7대조상 축복이 시작되어 조상 해원과 축복이 있을 때마다 수련에 참석하여 7대씩 꼬박꼬박 단계를 밟아서 “조상축복 1~430대 부부 8줄기를 완료(제2019-5012호)했다. 틈나는 대로 방계혈족의 해원과 축복도 같이 해드렸다.
횡적 축복은 과거 160가정 축복완료(제3732호)한 가정 수에다가 나머지 가정을 축복하여서 430가정 축복을 완료(완료번호 20-1441호)했다. 그래서 참부모님의 천보패(KR00480)를 받고 천보가정이 되었다.
축복활동은 160가정 축복 때는 아내가 마음맞는 집사님들과 2~3명씩 짝을지어 마을의 유지들을 방문하여 교류를 트거나 『근우회』 등 큰 여성 단체를 뚫었다. 그 후에 그 들을 회관에 초청하여 식사도 대접하고 선풍기 같은 선물도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완료하였다.
430가정 축복은 기존 160가정에다 부족한 숫자를 맞추기 위해 믹스커피 등 선물과 전단지를 들고 주변의 경로당을 여러차례 방문하였다. 회장과 총무님들에게 축복의 취지를 설명하고, 긍정적인 회원들을 승합차로 교회에 모셔서 축복시키는 방법으로 마칠 수있었다.
이 후 참어머님의 대회가 있을 때는 노인회장을 통해 이분들을 관광버스로 행사장으로 모시고, 행사 후에는 다시 탑승장소까지 모셔드렸다.
참아버님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는 430권을 보급하여 참 아버님의 친필로 싸인을 받고, 참부모님 표창장(제1926호)도 받았다. 그리고, 그간의 활동에 대한 상으로 참부모님의 ‘천일국 기원절 천운영새 인침(NO.세가세본-0075)’을 받았다.
참어머님의 자서전 『평화의 어머니』 는 77권을 보급하였다. 친척과 지인들에게 우편으로 보내거나, 마을의 작은 도서관들을 찾아가서 1~2권씩 기증했다. 또, 동네 주변의 상가를 돌거나, 길거리와 공원에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개조한 유모차에 자서전 표지를 칼라로 크게 복사하여 붙이고 자서전을 실은 후 홍보하고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반도 휴전선 내 유엔사무국 유치』 캠페인에 참여하여 국회의사당 주변 윤중로와 영등포 역전 등에서 행인을 대상으로 서명을 받았다. 2021년 코로나 펜데믹 때는 교구장님을 비롯한 식구들과 같이 당산동 주변 상가와 지하철역의 방역활동에 앞장섰다. 영등포구청의 후원을 받아 마을자치센터에서 주관하는 『이웃만들기』 사업에도 참여하여 「영등포 문화유적탐방」 프로그램을 실천하기도 했다.
11. 앞으로의 삶
지나놓고 보니 짧은 삶이었데 그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본다.
나는 고향에서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살다가 어느날 전도자의 사랑과 원리 말씀에 감동하여 입회원서를 냈다. 그리고, 참부모님이 짝지어 주신 아내와 축복을 받고 지금까지 뜻길 속에서 살려고 노력해왔다. 나를 전도하신 믿음의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의 근원은 오직 하늘부모님과 일체를 이루신 참부모님이셨다. 지금까지 내 영혼과 가정을 인도하시는 분도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이시다.
그 참부모님은 우리가 그 앞에 해바라기가 되고, 자석이 되고, 순금이 되라고 하신다. 영계에 가기 전에 죄의 그림자를 없애고 정오정착의 삶을 살아서, 수정같이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되라고 하신다. 그리고, 천일국의 백성을 많이 만들어서 같이 살자고 하신다. 그 앞에 늘 부족함을 금할 수 없다.
나는 성격상 혼자있는 것이 편하다. 끈기가 있고 지독하다. 그리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서툴다. 반면에 아내를 쳐다보면 눈이 선하다. 사람들 속에 있기를 좋아해서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많다. 아내는 교회의 홈장, 부인회장, 성가대후원회장, 여성연합구역장, UPF지부장 등의 봉사를 즐겁게 한다. 그리고 교회와 청평에 헌금도 잘한다. 어려운 교회를 오랫동안 돕기도 한다. 나는 아내가 있는 집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나는 항상 몸이 차가와서 물도 데워서 마시는데, 아내는 너무 더워서 한겨울에도 얇은 이불을 덮고 여름에는 혀가 갈라진다. 이러한 정반대의 아내를 반려자로 택해 주셔서 서로 보완하고 화합하여 살게해 주신 참 부모님에게 늘 감사하다.
우리 부부의 소원은 자식들과 친지들이 모두 축복을 받아서 4대심정권과 3대왕권 그리고 황족권을 이루는 것이다. 장남은 지적장애인이기는 하지만 2017년에 축복을 받아서 짝이 있다. 그러나, 둘째인 딸과 막내아들이 아직 미혼이라 새벽 4시 반에 우리 부부와 장남이 하는 가정훈독회의 기도는 늘 딸과 아들의 축복이 우선이다.
그다음은 아직 축복을 받지 못한 양가의 나머지 형제들과 몇 안되는 친척들의 축복, 그리고 횡적 430가정 축복자를 중심으로 43가정 실세화를 이루어 지상과 영계의 천일국에서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을 모시고 천보의 한 가정과 백성으로서 위하여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천성으로 향하는 길이 힘들어도 오늘도 초지일관하여 걸어간다.
첫댓글 손기문님 댓글
그동안 업무때문에 자서전 강의를 듣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김성태 형제님의 초지일관 걸어오셨던 삶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나 몸이 아픈가운데 기동전도단 활동을 하셨고 뒤늦게 출발한 대학생활 이었지만 열정과 정성으로 활동하셨던 모습은 모든이에 귀감이 되셨습니다. 예능면에 재주가 많으셔서 기타도 잘치시고 삽화도 잘 그려내신 모습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자녀의 축복을 위하여 새벽4시에 정성을 드린다는 이야기에 점점 나이가 먹어가는 두아들을 둔 부모로서 동병상련의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다시한번 귀한내용 감동있게 잘 들었다고 말씀 드리며 온가족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
이명희님 댓글
자서전 강의 들으면서 감동적인 내용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순심님 댓글
김성태 장로님 김성미 권사님 오늘 자서전 에 너무너무 감동이었습니다
역시 우리 영등포 교회 욱천가정 화이팅 입니다
감사함니다
편안한밤 되세요
김성태님 답글
세월이 지나고 보니 하늘앞에 내세울 만한 실적도 없고... 부끄럽습니다.
자식들 축복시키는 것이 거의 마지막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