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조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의
장남인 신라(新羅) 병부령 이금현(李金現)의 장남 이금서(李金書)는
신라(新羅)말 고려(高麗)초에 중원태수를 역임했고,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신라 경순왕(敬順王)과 고려 태조(太祖)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樂浪公主 王氏)사이의 딸인
신란궁부인 김씨(神鸞宮夫人 金氏)와 혼인하였으니,
이로써 경주 이씨 집안과 신라 왕실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후술하다시피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실의 선원(璿源)이 경주 이씨라고 하고 있으니,
이로써 경주 이씨가 신라(新羅)·고려(高麗)·조선(朝鮮) 왕실과 혈연적으로 통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배위가 고조선 마지막 군주이자
마한의 초대 군주인 기준(箕準)의 딸 태화공주 기씨(泰華公主 箕氏)이므로
고조선(古朝鮮)·마한(馬韓) 왕실과도 혈연 관계가 된다.
고려 전기·중기에는 이금서(李金書)의 장남인 이윤홍(李潤弘)이 병정을 지냈고,
이윤홍의 장남 이승훈(李承訓)의 장남 좌사간이주복(李周復)의 장남
증 문하시중 이칭(李稱)의 장남 이치련(李侈連)의 장남 이총섬(李寵暹)이 가문을 빛냈다.
988년(성종 7)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오인유(吳仁裕), 남궁원청(南宮元淸),
이윤관(李允寬) 등과 함께 사직(社稷), 오묘(五廟), 국자감(國子監) 등의 창건을 주청함으로써,
989년(성종 8) 태묘(太廟)를 짓기 시작하여 991년(성종 10) 처음으로 사직(社稷)을 세웠으며
992년(성종 11) 태묘(太廟)가 낙성되고 국자감(國子監)이 창립되었다.
이총섬의 장남 순흥부사 이춘정(李春貞)의 계보에서
경주 이씨 8대파및 판전공파가 분파되었다.
이승훈의 손자 이신우(李申佑)는 병부시랑을 거쳐, 목종 때 병부상서를 지냈다고 하고,
이신우의 장남 이작량(李作良)은 천호장 혹은 공부상서를 지냈다고 하며,
이작량의 장남인 이선경(李善景)은 천호장 혹은 사간을 지냈다고 한다.
이선경의 차남 이방렬(李芳烈)은 검교대장군을 지냈다고 하고,
이방렬의 6대손 이충요(李忠堯)는 병부시랑을 역임했다고 한다.
이충요의 장남인 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로부터 월성군파가 분파되었다.
이총섬의 차남 문하시랑이춘림(李春林)의 장남 이녹천(李錄千)은
1142년(인종 20) 공부상서 상장군을 지냈다. 이녹천의 손자인 이중화(李仲和)는
병부상서 응양군 상호군을 지냈다고 한다.
이중화의 장남인 이정핵(李廷翮)은
1229년(고종 16) 낭중을 거쳐 진양부사, 자문지유를 지냈다.
족보에서는 어사중승을 지냈다고 한다.
이정핵의 장남 이숙진(李淑眞)은 1270년(원종 11) 삼별초(三別抄)가 재물을 약탈하고
남하하자 중서사인으로서 낭장 윤길보(尹吉甫)와 함께 적을 쫓아 격퇴하였고,
1271년(원종 12) 안렴사로서 금주방어사 김훤(金晅) 등과 함께
밀성군(密城郡)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숙진의 증손인 이길상(李吉祥)의 네 아들로부터
직장공파, 석탄공파, 진사공파, 교감공파가 분파되었다.
이승훈의 3남 이주좌(李周佐, ?~1040)는 1016년(현종 7) 감찰사헌,
1023년(현종 14) 시어사, 1027년(현종 18) 기거사인,
1030년(현종 21) 어사중승,1033년(덕종 2) 우간의대부,
1037년(덕종 3) 국자좨주 좌간의대부, 1036년(정종 2) 우산기상시를 지냈고,
이후 형부상서 판어사대사에 이르렀으며, 1040년(정종 6)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자 왕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여 사공 상서우복야에 추증하였다.
다만, 중시조 9세 이총섬과 중시조 6세 이주좌의 기록이 일견 연대상 모순으로 보여 연구가 필요하다.
이윤홍의 차남 이승겸(李承謙)은 판예부사, 시중]을 지냈다고 한다.
이후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경주 이씨의 세계(世系)는 8파로 대별(大別)되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 파로 분파(分派)된다. 8대파에는 평리공파(評理公派)[103], 이암공파(怡庵公派),
익재공파(益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가 있으며, 이외에 판전공파(判典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 석탄공파(石灘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교감공파(校勘公派),
월성군파(月城君派)가 버금간다.
원 간섭기에 이총섬(李寵暹)의 장남 이춘정(李春貞)의 5대손 문하평리
증 상서좌복야 열헌공(悅軒公) 이핵(李翮)의 집안이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자손들로부터 경주 이씨 8대파가 나왔다.
이핵의 장남 성암공(誠菴公) 이인정(李仁挺)은 평리성암공파(評理誠菴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인정의 장남 이부(李榑)는 1283년(충렬왕 9) 국자감시에 장원하였고,
1286년(충렬왕 12) 문과에서도 장원하였다. 1314년( 충숙왕 1) 우사보가 되었고,
이후 내서사인을 역임했다.
이인정의 차남 이규(李樛)는 1287년(충렬왕 13) 국자감시에 장원하였다.
1314년(충숙왕 1) 우헌납으로 있을 때, 조계종(曹溪宗) 승려 경린(景麟)과 경총(景聰)이
상왕(上王,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궁중[禁闥]에 출입하면서 대선사(大禪師)를 제수받았는데,
간관(諫官)으로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아 상왕과 갈등을 빚었고
유배되었다 다시 소환되어 파직되었다.
# 이핵의 차남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은 1264년(원종 5) 국자감시에 장원하였고,
1297년(충렬왕 23) 우사의대부, 1303년(충렬왕 29) 전법판서
1307년(충렬왕 33) 밀직부사, 정당문학, 1308년(충선왕 1) 시독학사,
사림학사 우산기상시, 좌승지 비서윤 지병조사 사림학사,
1314년(충숙왕 1) 상의회의도감사, 검교첨의정승을 역임했다.
이진의 장남 이관(李琯)은 이암공파(怡庵公派)의 파조로 1295년(충렬왕 21) 국자감시에서 장원하였고,
이후 가락군(駕落君)에 봉해졌다. 이관의 장남 이수득(李壽得)은
밀직사에서 일했고, 시중에 추증되었다.
이수득의 장남 이성림(李成林, ?~1388)은 1363년(공민왕 12) 감찰집의로 있으면서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 1등(1363)에 책록되었고,
1365년(공민왕14) 서해도 순문사, 군부판서,
1367년(공민왕 16) 동북면 도순문사, 1368년(공민왕 17) 양광도 도순문사,
1373년(공민왕 22) 서해도 도순찰사를 지냈다. 1384년(우왕 10) 수문하시중을 지냈고,
1386년(우왕 12) 숙녕옹주(肅寧翁主)가 헌비(憲妃)로 봉해지고 숙녕부(肅寧府)가 설치되자
우시중으로서 백관을 인솔하여 헌비의 궁궐에 하례를 드렸다.
1387년(우왕 13) 좌시중이 되었고, 1388년(우왕 14) 우시중으로 있던 중
염흥방(廉興邦), 임견미(林堅味)의 일파로 몰려 하옥된 후 죽임을 당했다
이관의 차남 이복득(李福得)은 민부상서를 지냈다고 한다.
이복득의 차남 이중실(李仲實)은 판서를 지냈다고 한다.
이진의 차남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로서 1301년(충렬왕 27) 15세의 나이로 국자감시에 장원하고,
동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314년(충숙왕 1)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고,
이 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염(姚燧閻), 조맹부(趙孟頫)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23년(충숙왕 10) 류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의 권신(權臣)들이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行省)으로 편입시키고 심왕(瀋王) 왕고(王暠)의 통치를 받게 하려고
획책한 제2차 입성책동(立省策動)이 발생했으나 이제현(李齊賢)과 왕관(王觀)의 상서(上書)로 무산됐다.
제30대 충정왕이 폐위된 후 원나라에서 귀국길에 오른 제31대 공민왕은
그 사이의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1351년(공민왕 즉위년) 신진사대부들의
수장격인 이제현을 섭정승권단정동성사에 임명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반란이 진압된 후 우정승에 임명되어 정국을 수습하였고,
1354년(공민왕 3) 다시 우정승을 거쳐, 1356년(공민왕 5)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고려가요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익재난고, 고려시대 3대 비평문학서인 역옹패설을 저술하였다.
이들은 각각 보물 제1892호, 제1893. 또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346년(충목왕 2) 본조편년강목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만년에는 국사(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 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다.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1320),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1325),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1351),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1352) 등 4차례 공신(功臣)에 책록되었고,
사후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제현 묘지명을 찬한 목은(牧隱) 이색은 도덕지수 문장지종(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평했다.
이제현의 장남 이서종(李瑞種)은 봉상대부 종부시부령을 지냈고,
문하시랑에 추증되었다.
이서종의 장남 이보림(李寶林, ?~1385)은 공민왕 때 우사간, 안렴을 지냈고,
우왕 초 판안동부사를 거쳐, 1375년(우왕 1) 사헌부 대사헌를 지냈다.
이후 밀직부사, 정당문학을 지냈다.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제현의 차남 이달존(李達尊, 1313~1340)은 보문각 직제학, 전리총랑을 역임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8) 부친 이제현과 함께 충숙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1340년(충숙왕 복위9) 귀국하는 길에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이달존의 장남 이덕림(李德林, 1330~?)은 판서를 지냈고,
1390년(공양왕 2) 회군공신(回軍功臣)(1390)에 책록되었다.
이달존의 차남 이수림(李壽林, 1332~1369)은 1354년(공민왕 3) 군부판서,
1356년(공민왕 5) 이부판서를 지냈고, 1363년(공민왕 12)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동지밀직사사로서 원나라에 가서 공민왕을
옹호하는 백관기로서(百官耆老書)를 제출하였다.
1369년(공민왕 18) 막북(漠北)에서 북원(北元)의 조서를 받들고 황주(黃州)에 도착한 노은(盧訔)을
국문할 때 그가 허위로 자복하기를 "전 감찰대부 왕중귀(王重貴), 추밀원사 이수림(李壽林) 및
이명(李明) 등과 함께 첩자 일을 모의하였습니다."라고 하였기에,
그 일파로 몰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고, 화의옹주 기씨(和義翁主 奇氏)
또한 북원(北元)과 통모했다고 몰려 비구니가 되어야 했으니,
이들은 모두 기황후(奇皇后)의 일족이었기 때문에 화를 입은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들에게 죄가 없다고 불쌍히 여겼다.
이제현의 3남 이창로(李彰路)는 봉익대부 개성부윤을 역임하였다.
이제현의 5녀 혜비 이씨(惠妃 李氏)는
1359년(공민왕 8) 공민왕의 제2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으나 후사가 없없고,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이 시해된 직후 출궁하여 정업원(淨業院)의 비구니가 되었다.
이진의 3남 이지정(李之正)은 호군공파(護軍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핵의 3남 이세기(李世基)는 밀직부사, 보문각 대제학 검교정승을 역임했다.
이세기의 장남 이천(李蒨)은 국당공파(菊堂公派)의 파조로 1299년(충렬왕 25) 국자감시에 장원하였다.
우사보등을 지낸 후, 1343년(충혜왕 복위 4) 첨의평리상의,
1344년(충혜왕 복위 5) 동지공거를 지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6월 48명의 서연관에 선발되었다.
당시 이천의 사촌 판삼사 이제현(李齊賢), 판밀직사사 이천(李蒨) 본인,
이천의 아들 전리정랑이달충(李達衷) 등 일문(一門)에서 3명이나 선발되었다.
동년 10월 정당문학, 1345년(충목왕 1) 첨의참리를 지냈다.
이후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책록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이세기의 차남 이매(李邁)는 부정공파(副正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세기의 3남인 이과(李薖)는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파조로 상서를 지냈다고 한다.
이세기의 4남인 이조(李蓨)는 사인공파(舍人公派)의 파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