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 2003년의 달력을 향한 기대 형 문 창
갓 결혼한 신랑이 책에만 빠져 지내자 신부가 지루함을 참다못해 “차라리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이 “아니, 그보다는 달력이 더 나을 게요.” 했다. 그러고는 아내가 이유를 묻자 “해마다 새로 바뀔 테니까 말이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름에는 부채로, 겨울에는 달력으로 생색을 낸다.”는 말도 생각이 난다. 하찮은 것으로 선심을 쓴다는 뜻일 수도 있겠고, 때에 맞는 선물로 인사를 닦는다는 해석도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해마다 바뀌는 것이 달력이고 금년에도 벌써 시중에는 2003년 달력이 나돌고 있다. 달력과 관련, 근래에 와서 눈에 띄는 현상은 이른바 예술달력의 등장이다.
옛날에는 달력 한 장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일년 열두 달을 한 면에 인쇄한 한장짜리 달력이 주종을 이루고, 그런 달력일수록 정치지망생이나 국회의원 사진과 함께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가 곁들어 있게 마련이어서 한때 ‘달력 국회의원’이라는 말도 있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금석지감이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IMF 직전이던가, 달력이 과잉 생산 공급되던 때도 있었다. 그때에도 달력은 흔히 ‘달력 그림’으로 일컬어지는 극히 상투적인 그림이나 여체를 상품화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반라의 사진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유명 출판사들이 달력 시장에 뛰어들고, 이름 있는 예술가들이 가세하고, 전문 제작업체들이 생기면서 <캘린더는 문화다>는 책제목을 실감케 하고 있다. 생산되는 달력도 아주 다양하다. 열두 장의 크기가 제각각 다른 것이 있는가 하면 날짜마다 글자체가 다른 것도 있고, 달력을 넘기면서 오려내어 그대로 엽서로 쓸 수 있는 우편엽서 달력, 토정비결이나 역학을 응용한 운세 달력, 판화?사진?그림 등을 이용한 예술 달력에, 아예 가족사진?가족기념일 등을 넣어 만든 맞춤 달력까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독창적인 것이 많다. 그러다보니 가격도 만원 내외에서부터 10만 원대에 이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달력은 공짜’라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문화상품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셈이다. 가정이든 사무실이든 벽면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 역시 건축이나 인테리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미적 욕구에서 출발한 예술적 행위에 속한다. 판에 박은 달력보다 개성을 살린 달력이 정서적 측면에서나 문화적 측면에서나 더없이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주변의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과소비에 흐를 염려는 없을까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는 있겠다. 더불어 새 달력을 보면서, 달력이 달라지는 형식이나 내용 못지않게 삶도 변화가 있기를 빌어본다.
제발, 2003년은 우리들의 삶의 질도 좀 달라졌으면 한다.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하는 정치가 아니라 믿음과 희망을 주는 멋진 정치, 불법과 탈세의 온상을 연상케 하는 재벌이 아니라 분배와 환원을 소신으로 여기는 경제, 돈을 주고 논문을 사서 학위를 따지 않고도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파출소에 들어가 경찰을 해치고 권총을 탈취해 가는 일도 없고, 총기오발로 인명이 상하는 일도 없는 사회, 기아에 허덕이는 640만 북한 주민이 적어도 배고픈 설움은 면할 수 있고, 핵무기를 둘러싸고 진실과 억측과 불안이 뒤범벅이 될 염려도 없고, 망국적인 지역감정도 더 이상 발을 뻗을 수 없는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새 달력을 잘 만들어야 한다. 밑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뜻이다. 12월 대선에서부터, 무관심 속에 방치하지 말고, 정실에 흐르지 말고, 떳떳하고 올바르게 주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2002.12.전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