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합본] 독도의 진실 - 19, 20, 21 합본
[해설] 독도의 진실 - 19
<독도의 진실>이 책으로 출판될 것 같습니다. 8.15 광복절에 맞추려면 최대한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인세 수입이나 다른 조건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 한 분이라도 더 많은 분이 독도의 진실을 바로 알고, 독도를 지키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그저께는 전체를 정리하느라 좀 바빠 계속해서 <독도의 진실>을 쓰지 못했는데 그 동안 <독도의 진실-18> 등에서 우려했던 일이 실지로 발생하고 있는 듯한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국내에 잠복해 있던 '일본의 반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2006년 고이즈미가 일본 의회에서 특별 승인받아 집행한 자금의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국민의 표를 먹고 사는 일부 정치권이야 원래가 표리부동(?)하여 언제라도 말만 바꾸면 되니까 좀 덜하겠지만, 관계와 학계의 반격이 보통 수준이 아닐 것입니다.
우선 독도 영토수호 문제에 누구도 딴지를 걸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160톤급 '독도 관리선'의 톤수를 늘린다는 것에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독도 영토수호와 큰 관련없는 이런 배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160톤이든 16톤이든 1600톤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떠 다니는 선박 한 척으로는 독도 영토 수호에 아무런 영향도 미지치 않습니다.
독도에 내국인의 자유 왕래가 가능해지고, 해양관광호텔이 들어서게 되면 독도를 왕래하는 선박은 소형, 대형 가릴 것 없이 늘어 날 것이고 그 때쯤이면 이른바 '독도 관리선'이 과연 뭐 때문에 필요한지 의문이 들 것입니다. 한 마디로 화려한 립서비스라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각종 대책들의 말미에 독도 서도에 콘크리트 계단을 정비한다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서부터 반대하는 논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예 : 조선일보 2008.07.21 A4면 기사) 여기에 "이 계획들은 일본의 대응 수위에 따라 추진 속도를 조절한다는 방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부당국자의 말을 인용하여....
어느 '정부 당국자'가 이런 정신 나간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로 "일본의 대응 수위에 따라 추진 속도를 조절한다는 방침"이라고 발언했다면 이건 기절초풍 할 일입니다. 이번 조치를 시행하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안 하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일본의 대응 수위가 높아지면" <안 하겠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차라리 일본 당국자에게 "자, 지금부터 대응 수위를 높여 달라. 그러면 없던 일로 뭉개버릴테니...." 하고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외교에서 이런 속 보이는 발언을 한 정부 당국자는 즉시 해고해야 합니다.
그 뒤를 이어"해양호텔은 현실성이 떨이진다.", "구조물 설치는 일본이 가장 민감해 하는 부분인 만큼 상당 수준의 외교적 마찰이 예상되는데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 "이번 조치는 당연한 조치이지만...."으로 시작해 놓고는 "한편으로는 일본 내 극우파의 발언권을 강화시키는 효과도 있어 일본의 대응 수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학자까지 있습니다.
필자가 이미 이틀 전에 미리 이런 반격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해 놓았지만,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할 것입니다.
2006년 4월 27일, 노무현 대통령까지 임석한 가운데 독도와 신한일어업협정에 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박OO라는 학자가 참석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나라 학자 중 유일하게 UN 해양법재판소의 재판관이 된 사람이었는데, 이 중요한 회의에서 그는 신한일어업협정과 독도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소위 학계의 권위자라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내질러 버리면 대통령도 넘어가게 됩니다. 실지로 그 회의는 열지 않은 것만도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박OO 재판관은 우리나라 신한일어업협정 체결 당시 외교부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사람인 것 같은데, 자.... 냉정히 따져 봅시다. 이 박모 재판관은 일본 서남대 교수를 겸직 중인 것으로 뒤늦게 밝혀 지기도 했는데, 한.일 양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협정 체결에 쟁쟁한 국내의 해양법, 국제법 전문 학자들을 배제시키고 구태여 일본과 개인적인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을 외교부 자문으로 선정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누가 선정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분명한 관계와 학계의 유착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필자는 이런 희한한 우연이 앞으로도 숱하게 발생할 것을 감히 예견합니다. 그것도 독도와 공동어로수역 문제에 집중해서 발생할 것입니다.
또한 감히 장담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제시하지 않으면서면서 그냥 "떠들면 안된다. 국제 분쟁 지역화 된다.", "조용히 아가리(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논리도 엄청나게 퍼져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과 신종 친일매국 세력이 퍼트린 대표적인 유언비어임에도 말입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독도 관리선 같은 이야기는 집어 치웁시다. 한 마디로 독도에 방파제를 설치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는 모두 헛소리나 다름 없습니다. 방파제가 없어 배를 못 대는데, 무슨 정주마을이고, 무슨 호텔이며, 무슨 독도 사랑 체험장입니까. 1년에 고작 3~40일만 접안 가능한 곳에 저런 시설들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사람이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는데 저런 시설 지으면 뭐합니까. 소중한 국가 돈, 바다에 내 버릴 일 있습니까?
지금 독도에는 1997년 11월, 172억원을 들여 만든 선착장이 하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접안시설이 망망대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풍랑이 조금만 일어도 접안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당연히 선착장을 보호할 방파제는 필수조건인데 일본의 방해와 항의로 방파제를 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도 방파제를 짓겠다고 했을 때, 일본의 항의와 방해가 얼마나 심했습니까. 그 때도 결국 말 잔치로 끝났지요.
이런 섬에 들어가 살라구요? 1년에 적어도 300일은 접안이 가능해야 사람이 살 수 있는데, 지금 상태로라면 일반 국민은 들어 가 살지 말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맹장염이라도 걸리면 그대로 죽어야 합니다. 1년에 고작 3~40일, 바다가 잔잔한 날이 아니면 나올 수도 없고, 들어 갈 수도 없는 섬으로 방치하고 있는 셈입니다.
방파제 짓는 것이 뭐가 힘든 일이냐구요? 그러나 이게 가장 힘든 일입니다.
지금 독도 서도西島에 계단이 무너져내려도 그 동안 보수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구요? 돈이 없어서요? 고작 6억 5천만 원이 없어서요? 이 문제를 솔직히 말씀하시는 정치인, 관료 나으리가 하나도 없는 것은 왜 그럴까요?
독도에 배가 안심하고 접안 할 수 있는 방파제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은 지금 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벌써 오래 전부터 나온 이야깁니다. 그런데 방파제 이야기만 나오면 일본이 파르르르 떠는 것입니다. 완천히 알레르기 반응이죠. 일본이 파르르 떠는 이유는 단 하나 입니다.
독도에 안정적인 방파제가 만들어지면 한국인들의 내왕이 증가할 것이고, 당연히 정주 인구도 늘어 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일본의 독도 침탈 계획에 엄청난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독도에 방파제가 만들어져야 호텔도 지을 수 있습니다. 손님없는 호텔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독도 해양 관광호텔이 지어지면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무시로 방문할 것입니다. 독도 해양 관광호텔은 독도를 배경으로 열심히 홍보할 것이고,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대사관, 영사관, 관광공사, 무역진흥공사, 우리 관광회사의 해외지점에 독도 해양 관광호텔 팜플릿만 배치해도 그 홍보 효과가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 땅....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인식은 자연스럽게 국제적으로 용인받게 됩니다. 왜 일본이 방파제 이야기만 나오면 파르르 알러지 반응을 나타내는지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구조물 설치는 일본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라서 안된다? 무슨 이런 망발이 있습니까. (이 사람, 한국 사람 맞습니까?) 우리 땅에 우리 건물, 구조물 짓는다는데, 누가 이런 한 여름 장마에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 내부에서 이런 논리가 나오면 일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봐라, 한국 사람들도 우리 일본 땅에서 구조물 만드는 것에 대해서 반대가 심하지 않느냐...." 할 것 아닙니까? 제발 이런 정신 나간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내 극우파의 발언권을 강화시킬 것이다...는 논리에 대해서 한 마디 하겠습니다. 일본의 우경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고, 하라고 해서 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됩니다. 상대할 가치 없는 일에 상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진짜 분쟁 지역이 되는 것은 아니냐, 전쟁이라도 터지는 것은 아니냐....고 걱정하실 분이 계시겠군요.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지만, 그럴 일은 전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내부만 안정되면 절대로 국제 분쟁지역화 되지도 않을 것이고,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일본은 상대가 약할 때 치고, 상대가 강하면 고개를 숙이는 민족입니다.
우리의 영토 수호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일본은 약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07.22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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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독도의 진실 - 20
대한민국 영토 독도를 수호하는 것이 정부의 일인 것처럼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 독도를 지킨 분들은 정부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저 같은 국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 이런 분들의 후예입니다. 이분들이 바로 1953년부터 독도 방파제를 만들자고 주장한 바로 그 분들입니다.
홍순칠. 6.25 참전 용사. 육군 특무상사 출신.
제대 후, 민간인 신분으로 독도 의용수비대 대장을 자임.
1966년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은 홍손칠 독도 의용수비대 대장에게 공로훈장을 수여하고, 대원들에게는 방위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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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독도는 비어 있었다.
군인도 경찰도 독도에는 한 명도 없었다.
일본 어부들이 무시로 출입하면서 어로 행위를 하고, 독도에 일본령이라는 글자까지 새겼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가 세운 독도 어민 위령패도 파 내어 없애버렸다.
울릉도 주민들은 생존의 터전이자 황금어장인 독도를 일본에 내어 줄 수 없었다. 당시 정부는 독도가 한국 땅이라은 것만 공표했지, 그 험한 독도를 방위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때였다. 울릉도 주민 스스로 어장을 지키기 위하여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조국이 위기에 빠질 때,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나라를 지켜 온 우리의 역사는 되풀이 되었다.
홍순칠이 등장한 것은 이 때였다. 그는 스스로 독도 의용수비대를 조직하고 사람들을 모았다. 독도 사수를 위해 피 끓는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건강부터 체크했다.
- 맹장 수술은 했나.
- 바빠서 못했소.
- 그럼 당장 병원에 가서 맹장부터 짜르고 온나. 독도에서 맹장염 걸리면 치료할 방법이 없다. 그대로 죽는다.
유원식, 정원도, 김병열, 양봉준, 이규현, 이필영, 김영호, 서기종 등 6.25참전 경험이 있는 총 45명의 청년들이 홍순칠 휘하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독도에 가기 전에 맹장 수술부터 받았다. 3명을 제외한 전원이 6.25 참전 용사라는 것은 기록에 나오는 사실史實이다.
- 돈 좀 보태 주시오.
- 뭐하는데 쓰시게?
- 보트도 사야 되고, 박격포, 직사포, 기관총, M1 소총, 실탄도 사야 됩니다.
- 니, 6.25도 끝났는데, 전쟁치러 가나.
- 독도를 지켜야 됩니다. 왜놈들이 독도에서 회를 치고 있소. 독도는 우리 땅이오.
- 군인, 경찰은 뭐하고?
- 그 사람들 정신없소. 빨갱이하고 싸워야 될 것 아니오. 독도는 우리가 지키고.....
배를 소유한 선주들은 독도의 중요성을 잘 안다.
독도에서 어로활동을 하는 경북 지방 어민들과 울릉도의 선주들은 왜놈들에게 황금어장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한 푼, 두 푼.... 독립운동 자금처럼 돈이 모였다.
그래도 부족한 것이 돈.... 대원들이 각자 무기를 준비했다. 미군부대에서 빼기도 하고, 정부와 군부대에 설명하고 돈 주고 사기도 했다.
45명의 인원을 두 개의 2개 전투분대와 보급대, 수송대, 후반지원대 등으로 편성하고 2분대가 한 달씩 교대로 근무하기로 했다. 0.5t 보트 한 척, 박격포, 직사포, 경기관총 각 1정, M1 소총 20정과 실탄 2만 4천발로 무장했다고 당시 기록은 전한다. 단, 이 무기들이 처음부터 완비된 것은 아니었다.
6.25만해도 지긋지긋한데 또 다신 전쟁터로 떠나는 사람들.... 비장감이 들수 밖에 없었고, 일제 치하에서 그 잔혹함을 경험한 사람들의 대일對日 공포증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홍순칠은 심리전에도 능했다. 우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줄 필요도 있었다. 장수는 여유를 보일 줄 알아야 하는 법.
- 니 뭐 믿고 이래 설치노.
- 이래봐도 내 끗발이 갑오(9)요. 최고의 끗발이지.
실지로 홍순칠의 군번을 끗빨로 따지면 갑오, 숫자로 9가 된다.
그는 6.25 전쟁에서도 전상을 입었을 뿐, 살아 남았다. 요즘 말로 상이용사였다. 그는 늘 농담처럼 말했다.
- 내 번호가 갑오여. 절대 죽지 않지. 6.25 때, 총알, 폭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져도 난 살았어.
- 나만 따라 다녀. 절대 죽지 않아.
때로는 농담 한 마디가 분위기를 바꾸는 법. 오로지 자신만을 의지하여 독도에 갈 독도 의용수비대원에게 대장 홍순칠은 웃으면서 용기를 불어 넣을 줄도 알았다. 그의 군번 끗발이 갑오(9)라는 것과 그가 이런 농담을 가끔 했다는 것도 기록에 나온다. 그들은 1953년 6월 독도에 상륙하여 독도 수호 임무에 임하기 시작했다.
애로사항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당장 마실 물이 부족했다.
파도가 조금만 높아도 독도 상륙은 쉽지 않았다. 지원하러 온 쪽배가 일렁이는 파도와 싸우다 돌아갔다. 동지들은 눈으로만 인사하고 돌아갔다. 며칠 후면 다시 오겠지. 빗물을 받아 마시면서 버텼다. 비가 오지 않으면 그대로 목을 태웠다.
식량이 떨어지면 미역이나 해초를 뜯어 먹었다. 땔감도 비에 젖어 쓸 수가 없었다. 파도가 심하여 해초도 뜯어 먹을 수 없는 날은 그대로 굶으며 오들 오들 떨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여름이면 깔따구라는 곤충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옷을 뚫고 그대로 물어 뜯었다. 깔따구의 영향력은 뼈속까지 파고 들었다.
뼈가 쑤씨고 벌겋게 부어 오르면서 며칠이고 사람을 괴롭힌다.
1953년 6월 25일. 미군 표식을 단 일본기가 독도 상공을 순회했다.
- 비행기다. 미군기를 달았다.
- 미군이 여기에 올 리 없었다. 일본기다. 속지마라. 전투준비! 고사포!, 고사포!.....
홍순칠은 속지 않았다. 이런 걸 보면 그는 대단한 판단력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울릉도에서 실어 온 통나무에 검은 칠을 한 가짜 대포로 비행기를 겨냥하고는 조준을 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돌려댔다. 일부 대원은 M1 소총을 들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쏘았다. 총구에서 실탄이 발사되고 연기가 피어 올랐다.
위장 미군기인 일본기는 의용수비대가 위장용으로 가져다 놓은 대포가 진짜 고사포인 줄 알고 물러 갔다. 만세 소리가 독도에서 터져나와 동해로 울려 퍼졌다.
일본기가 미군기로 위장하고 독도를 침범한 것은 1953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3차례. 독도 의용수비대가 활동 개시 한 바로 그 달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다.
- 교전국도 아닌데 정찰기에 총질을 하고 고사포를 겨냥할 수 있소?
한국 정부는 저것들이 왜 저러지? 남의 땅에 와서....하고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그런데 왜놈들이 거긴 왜 갔지?'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한 마음 한 뜻, 한 몸이었다.
이 글은 픽션, 즉 허구가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재구성한 "사실史實" 즉, 논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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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왔습니다. 나가 봐야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07.22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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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독도의 진실 - 21
모 행정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독도의 진실 시리즈를 연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단 한 분이라도 더 독도의 진실을 아셔야 한다는 생각에 무조건 승락했습니다. 주로 관공서의 공무원, 금융기관과 읍, 면, 동, 통, 반장님들과 이장님들까지 읽으신다고 하니 더욱 잘 된 일입니다. 주간으로 발행하기 때문에 이번 월말 쯤 1회분이 게재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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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지킨다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외교전이지만 1960년대에는 달랐습니다.
전쟁 상황과 한 치의 다름도 없었습니다. 실탄이 장전되고 발사되고 포탄이 날아 다녔습니다.
독도는 우리 국민들이, 선배님들이 피를 흘리며 지켜 낸 우리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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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칠 대장이 이끄는 독도 의용수비대는 곧 바로 교전상태에 돌입했다.
독도에 접근한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돌려 보낸 후 며칠도 지나지 않은 7월 12일, 일본은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PS9 함을 독도에 급파했다.
일본 순시선이 독도에 상륙할 기미가 보이자, 독도 의용 수비대는 보유한 경기관총으로 일본 순시선을 집중 사격했다. 일본 순시선은 물러갔다. 이 전투가 독도 의용 수비대 최초의 전투였다.
홍순칠 대장은 첫 전투에서 장비의 보충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소총으로 순시선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홍 대장은 다시 육지로 나가 어렵게 M2 2정과 박격포 한 문을 구입했다.
그리고 8월 5일, 동도(東島) 바위 벽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글자를 크게 새겨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지금도 독도에 가면 홍순칠 대장이 새긴 이 '韓國領(한국령)'이라는 석 자를 볼 수 있다.
1954년 8월 23일,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순시선과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격렬한 총격전 끝에 일본 순시선은 물러갔다. 그러나 일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해 11월 21, 이번에는 1,000t급 일본 순시선 3척 및 항공기 1대가 합동 작전으로 독도를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박격포가 위력을 발휘했다. 박격포탄 하나가 일본 순시선 갑판 위를 때려 버린 것이다. 일본 측의 피해는 컸다. 무려 16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일본 해, 공군은 물러갔다.
대한민국 정부가 6.25의 상흔을 씻고 정신을 추스렸다. 독도 수비를 경찰이 맡기로 한 것이다. 우리의 국토 방위를 언제까지나 의용 수비대가 맡을 수는 없는 일..... 홍순칠 대장과 독도 의용 수비대원 33명은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하고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갔다.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독도 의용 수비대원 33인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
고성달, 구용복, 김경호, 김병렬, 김수봉, 김영복, 김영호, 김용근, 김인갑, 김장호, 김재두, 김현수, 박영희, 서기종, 안학률, 양봉준, 오일환, 유원식, 이규현, 이상국, 이필영, 이형우, 정원도, 정이관, 정재적, 정현권, 조상달, 최부업, 하자진, 한상용, 허신도, 홍순칠, 황영문....
이 자랑스러운 이름들은 우리는 한 번 소리내어 읽고, 이미 돌아 가신 분들에게는 예를 갖추어 초혼, 명복을 빌어드려야 합니다. 이 분들 중 열 다섯 분은 2005년까지 생존해 계셨다고 합니다.
독도 의용 수비대의 활동 요약
1952.01.18 이승만 대통령 독도 동쪽으로 '평화선' 선포
1952.08.10 일본측 불법 영토비 제거
1953.04.20 독도 의용수비대장 조직 경비개시(수비대장 홍순칠)
1953.06.24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 귀향 조치
1953.07.12 일본 해상 보안청 순시선 발포, 격퇴
1953.08.05 대한민국 영토비 (한국령) 건립
1954.08.05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발포, 격퇴
1955.11.21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3척, 항공기1대 발포,격퇴
1956.04.08 국립경찰에 무기와 임무 인계
이 분들은 피로 독도를 지켜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독도를 지킬까요.
우리는 정부의 의지와 약속 이행을 감시하고 일본이 심어 놓은 세력들이 준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외국에 나가시는 분들은 민간 외교관으로써 이 모든 진실을 알고 일본의 간계한 장난을 막아내야 합니다. 특히 지도 분야와 관광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앞장 서야 합니다.
<독도는 우리 땅>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하여 독도에 방파제를 만들고, 독도 해양 관광호텔이 건립되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독도에 방파제를 만들어 달라는 것은 1953년 홍순칠 대장의 호소로부터 시작된 독도의 숙원사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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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픽션, 즉 허구가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재구성한 "사실史實" 즉, 논픽션입니다.
독도를 지키기 위하여 한국 경찰이 독도에 상륙한 후, 경찰 역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였습니다.
독도에 상주하게 된 경찰은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평화선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 어선은 보이는대로 모조리 나포해 버렸습니다.
이승만 라인, 일명 평화선은 우리나라 어업을 구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어선을 모두 더한 총톤수는 10만 t. 그나마 대부분이 무동력선이었을 때,
일본은 총톤수 200만 t에다 그 중 상당수가 한국 경찰선보다 빠른 ‘첨단’ 선박 이었습니다.
맥아더 라인이 사라지면 한국의 어업이 침몰할 것은 뻔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어민들에게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라고 하자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나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어민이 숨지기도 했습니다. 1961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은 300척이 넘고 억류된 일본인은 4000명에 가까왔습니다.
그렇다고 평화선이 어업의 보호만을 노린 건 아닙니다.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킨 것이 절묘했습니다. 강화조약의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독도를 넣어 달라는 요구가 거부되자 선수를 친 것입니다. 다급해진 일본은 열흘 뒤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며 ‘독도 문제’를 쟁점화했으나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뒤였습니다.
항일 투사 이승만의 쾌거인 평화선이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 조인(1965년 6월 22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우리 국민은 울분을 토했습니다.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다.”...... (동아일보 2006-01-18 에서 일부 인용)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07.22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