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방산 하산길에 들러본 이승복 생가.
* 낙엽송 울창한 눈길따라.. 잠시 내려오면.
* 이승복 생가가 보인다.
이승복기념관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에 위치한, 이승복 소년의 반공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기념관. 이승복 소년의 반공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유적을 단지화한 연건평 548평의 기념관으로, 분단의 아픔을 증언해주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1968년 12월 9일 이승복 일가가 참변을 당한 후 1975년 10월 14일 이승복 반공관을 대관령에 세웠으며 1982년 10월 26일 이승복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여섯 개의 전시실에 승복군의 생애를 기록한 유화 13점과 살인만행을 저지르던 북한 공산군 장비 106점, 유품 33점이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다. 추모작품 전시실(Memorial Hall)에는 이승복 추모 전국 초·중·고등학교학생의 통일 문예활동 공모전에 입상된 작품을 비롯하여 이승복 관련 출판 간행물 등 약 800여 점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6·25전쟁 참전 전시장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전투장비(M4A3 전차와 90㎜ 대공포, 헬리콥터 및 정찰기 등)가 전시되어 있다. 유품실은 이승복군과 가족이 사용했던 물품을 전시하는 장소이고 영사실에서는 이승복 일대기 영화를 상영한다. 또한 이승복군이 살던 집(기념관으로부터 4.6km 동북쪽 산기슭에 있었음) 모형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자연학습자료 전시장과 이승복 장학목장, 이승복장학사업 송어양식장 등의 시설이 있다. 자연학습자료 전시장(Natural Learning Exhibit)은, 1991년 제17회 세계 잼버리대회에 참가한 133개국의 3만여 청소년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것을 옮겨 놓은 곳으로 천연기념물·야생동물·나비류 등 약 700점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982년 11월 대통령 하사금으로 시작한 이승복 장학목장(Scholarship Ranch)은 7.5㏊의 초지에서 한우를 사육하고 있으며, 그 수익금으로 이승복장학금과 연구비를 매년 지급하고 있다. 2,975㎡의 송어양식장(Scholaship Fish Farm)은 1989년 5월 23일 장학사업을 위해 건립되었다. 기념관 관람시간은 하절기 오전 9시~오후 6시, 동절기 오전 9시~오후 5시이다.
이승복
* 이승복 (1959년 12월 9일 ~ 1968년 12월 9일)은 북조선 무장간첩의 희생자이다. 이승복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지금의 용평면) 도사리에서 태어나 1967년 3월 2일에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에 입학했다. 1968년 11월 2일 삼척시의 바닷가를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무단 침입한 북조선의 무장간첩에 의해서 12월 9일 밤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해당했고 그의 형과 아버지는 크게 다쳤다.
12월 11일 조선일보는 3면에 이 사건을 〈“共産黨(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抗拒(항거) 입 찢어〉라는 제목의 기사로 다뤘다. 이 기사는 현장을 목격한 이승복의 형의 증언을 인용하며, 무장공비가 이승복에게 북조선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고 묻자 이승복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하여 공비가 그의 입을 칼로 찢어 죽였다고 보도했다. 12월 13일에 제작된 대한뉴스 제705호 〈남침공비를 무찌른다 - 제3신〉 편에서는 이 사건을 “공산당이 싫다고 해서 어린 젖먹이를 돌로 때리고 입을 찢어죽인 이들의 만행”이라고 보도하면서 일가족의 시신을 공개했다.
이후 이 사건이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리고, 국민학교마다 이승복의 동상이 세워지는 등 반공정신의 상징처럼 되었다. 교과서에서는 이 내용이 제6차 교육 과정에서부터 빠졌다.
* 의혹 제기 : 계간 저널리즘 1992년 가을호에 당시 미디어오늘의 편집국장 김종배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라는 기사에서,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가 허위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승복의 형의 이름을 잘못 기록했다는 점, 후에 이승복의 형이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밝힌 점을 지적했고, 이승복 시신의 입이 찢어져 있지 않았다는 주민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조선일보의 기사를 “작문”이라고 비판했다.
1998년 당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인 김주언은 서울과 부산에서 ‘오보 전시회’를 열어 김종배의 기사를 전시했고, 이후 10월에는 미디어오늘과 월간 말을 통해 더 많은 근거를 들어 오보 내지는 작문이라는 주장을 했다.
1998년 11월 조선일보는 김주언 김종배 두 명을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했다. 1999년 7월 서울지방검찰청은 두 명을 불구속 기소했고, 2002년 형사 1심에서 두 명에게 각각 징역 6월과 10월을 선고했다.
2004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있었던 항소심에서는 김주언 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김종배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조선일보의 기사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거기에 대한 의혹보도 역시 충분한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언론의 자유에서 용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2006년 11월 24일 대법원에서 원심을 유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승복 사건의 진실 |
◇68년 12월 13일 제작된 대한뉴스 ‘남침공비를 무찌른다-제3신’에 실린 이승복군의 시신 사진.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가 있고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자 형태의 상처 2개가 뚜렷하다. 68년 12월 10일 오전 9시쯤 찍힌 이 사진은 현장에 대한 최초 기록이다./대한뉴스 자료사진
◇北공비에 살해당한 이승복군 일가족 강원도 평창군‘이승복 기념관’에 전시된 일가족 시신 사진.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된 이승복(당시 9세), 남동생 승수(당시 7세), 여동생 승자(당시 4세), 어머니 주대하(당시 33세?사진 위쪽부터)씨 시신이 나란히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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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 '공산당이 싫어요'는 진실" |
1968년 12월 9일 밤 이승복군 가족 4명이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은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군의 발언이 발단이 됐으며, 이 사실은 조선일보 기자들의 현장 취재를 통한 특종보도로 세상에 알려졌음이 법원의 형사 항소심 재판에서 재확인됐다.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이승복군 가족의 기사가 실린 1968년 12월 11일자 본지 사회면. 법원은 28일 이승복군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의 최초 보도는 역사적인 진실이며, ‘이승복 사건 조작설’은 명백한 허위라고 재확인했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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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 왜곡12년 유족은 피멍 |
◇29일 전북 무주에서 만난 이승복의 형 이학관씨는 “당시 상황이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된 지난 12년 동안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용수기자 hejsue@chosun.com
◇29일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에 있는 이승복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당시 자료사진 앞에서 기념관 황태병 장학사의 설명에 귀기울이고 있다. / 최순호기자 choish@chosun.com
◇29일 이승복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이승복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최순호기자 chois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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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승복의 진실, 세상에 다시 알려져야 서울중앙지법은 1968년 무장공비들에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가 참혹하게 살해된 이승복군 사건이 역사적 진실임을 인정했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 보도가 ‘조작’이라고 주장한 김주언 전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에서는 법률 해석과 적용의 타당성만 판단하므로 이승복 사건의 진실에 대한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내려진 셈이다.
지난 10여년 간 이승복군과 가족들의 명예는 이승복 사건에 ‘반공 조작극’이라는 색깔을 칠해온 좌파들의 선전선동에 무참하게 짓밟혀왔다.
언론개혁이라는 위장간판을 걸고 정권의 비호를 받아온 좌파세력들은 재판과정에서 당시 현장취재로 진실을 전했던 조선일보 기사가 “기자가 현장에 가지도 않고 쓴 소설”이라며 진실을 덮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해왔다.
법원의 판결로 이들의 거짓과 부도덕과 이념적 정체는 드러났으나 이들이 35년이나 지난 옛일을 거짓말로 재구성해 진실을 뒤엎고 이승복군을 두 번 죽여 쟁취하려던 목적은 사실상 달성됐다. 이번 판결을 받아든 가슴이 떨리면서도 답답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이 10년 넘게 퍼뜨려온 거짓말은 상당수 국민, 특히 젊은 세대를 세뇌시키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흔드는 데 톡톡히 한몫을 해낸 것이다. 이념 앞엔 진실과 허위도 가리지 않는 그들로서는 ‘할 일은 다 했다’고 할는지 모른다.
실제로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승복 사건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는 군사정권에 의해 조작됐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는 학생도 적지 않고, 이승복군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인물이라고 믿기도 한다. 이승복군이 “콩사탕이 싫어요”라고 했다가 죽었다는 듣기 참담한 말까지 지어낸 세력들의 꾸준한 공작의 결과다.
좌파세력들은 거둘 수 있는 선전·세뇌 효과는 다 거두고, 이승복의 진실은 잔해처럼 흩어져 땅바닥에 버려진 게 6년 재판의 결과다. 이제 그 어린 나이에 비명에 간 이승복군의 넋은 누가 무엇으로 달래고 거짓이 진실을 몰아세웠던 조작의 역사는 어떻게 되돌려 놓을 것인가.
장본인들은 1심 판결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반성과 사과의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좌파의 인민재판식 공세 속에서 10년 만에 진실을 되찾은 이승복 사건의 역사는 이 정권이 온 힘으로 매달리고 있는 과거사 뒤집기의 의도와 전개과정을 예고해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
2010. 호젓한오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