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속 피고인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동거하던 여자로부터 사업자금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아 사기죄로 고소된 피의자를 선임하였는데 피의자는 고소인이 다른 남자가 생겨 헤어지자고 하는데 자기가 동의하지 않으니 헤어지기 위하여 고소를 한 것이고 자기는 그녀와 사귀고 동거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헤어진다면 빌린 돈을 변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빌려쓴 돈이 약 5,000만원 정도라서 피의자가 동거과정에서 사용한 돈중 입증이 가능한 부분에 대한 증거를 최대한 제출하고 검사에게 읍소한 결과 불구속 구공판 되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편취범의를 부인하고 자신이 사용한 돈에 대한 증거를 추가로 제출하면서 시간을 끌어줄테니 피해자를 달래서 합의를 보라고 조언을 하였는데 피고인은 피해자가 다른 남자가 생겨 아무리 달래도 합의가 안되고 피해금에 이자까지 더해서 달라고 한다면서 합의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사이동으로 판사가 바뀌어 그동안 남자판사가 진행하던 재판을 여자재판장이 와서 하는데 제비족 남자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있는 듯 법정에서 피고인을 사정없이 나무라며 피해금액을 변제하지 아니하면 구속하겠다는 취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변호인의 증거신청을 모두 기각한 후 합의를 위하여 1기일만 속행하고 다음기일에 결심하겠다고 했습니다.
피고인에게는 어떡하든 다음기일까지 피해자와 합의를 보고 합의가 불가능하면 돈이 되는대로 공탁이라도 하고 재판장의 선처를 받아보자고 권유했는데 여자들 때문에 이나라에서 살고싶지 않다고 푸념하였습니다.
결심재판을 하는 날 법정에서 피고인을 기다리는데 보이지 않더니 개정시간이 다 되어 피고인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어디냐? 왜 빨리 안오느냐? 고 힐난하듯 물었는데 피고인이 “저 안나가요. 여기 태국이에요. 변호사님 기다릴까봐 전화드리는 것입니다. 맘대로 하라고 하세요”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요즘에는 불구속피고인에 대한 출국금지가 잘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마도 불구속 구공판 재판의 초창기여서 수사기관에서 출국금지에 대한 생각이 미치지 않았거나 연장이 제대로 안되어 구멍이 생겼던 듯 합니다.
피고인을 호명하여 변론석에 나가 피고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사정을 설명하고 출석이 불가하니 궐석재판으로 진행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재판장은 변호인을 공격하며 변호인이 책임지고 피고인을 데리고 나와야지 무책임하게 출국하는 것을 방치하고 있었느냐고 호되게 야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변호인의 지위에서 사임하겠노라고 구두로 선언하고 사임계를 제출하였는데 피고인은 결국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6월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후 5-6년후 갑자기 그 피고인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태국에서 불법체류로 추방되어 인천공항에 도착한 후 체포되어 구치소로 가고 있으니 접견을 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치소에서 접견을 해보니 태국에서 아는 한국인 친구가 돌봐준다고 하여 재판을 안나오고 버텼는데 그 친구로부터 배신당하고 가지고 간 돈을 모두 털린 후 갖은 고생을 다하며 살아오다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면서 궐석재판에 대하여 항소하여 형을 좀 줄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사무실을 이전하느라 기존의 기록들을 모두 폐기하여 그 피고인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고 내게 상의도 없이 해외로 도주하여 재판장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은 기억이 남아 있어 맡고 싶지 않았으므로 재판중 피고인을 도주시킨 것으로 알려진 내가 하는 것 보다 다른 변호사가 맡아서 하는 것이 후임재판부에 주는 인상이 더 좋을 것이라고 조언하고 선임을 거절하였습니다.
불구속 재판이 늘어나다 보니 이와 유사한 경우가 많이 증가할 것인데 재판을 하시는 분들은 법정에서 불구속 피고인들을 너무 닦달하여 재판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