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을 위한 철학 카페] 실존적 상황과 주체적 고민
-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결과 아닌 과정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없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어떤 일이라도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속담을 사용하는 경우는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에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라는 정도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이런저런 핑계가 있더라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할 때 쓰인다.
물론 이러한 속담이 적절하게 사용되려면 행동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 꾸지람을 받는 사람이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다면 그것은 꾸지람이 아니라 그저 잔소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객관적인 기준이란 것이 그렇게 분명한 공동체가 얼마나 될까?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일차적인 관계, 혹은 그저 막연하게 인간 대 인간이라는 매우 보편적인 관계에서는 그와 같은 기준이 있을법하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부모가 자식을 꾸지람한다거나 혹은 매우 비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누구라도 혀를 찰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객관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상사가 부하직원을 꾸짖는 것도 사내 규칙이라는 상호 협의한 기준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아주 기초적인 관계이거나 혹은 매우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과연 우리 사회에 모두가 누군가에게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그런 것이 과연 있을까?
앞서 말한 관계들이 아니라면 누군가의 선택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들 나름대로 입장과 고민이 충분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은 상호 발전적인 모습을 꾀하려는 의도가 있을 때 공동체 내에서의 효용가치가 있을 뿐이다.
이제 그와 같은 관계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잘못했다'는 객관적 판단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그만의 입장과 나름의 핑계'이다. 이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 바로 실존주의이다. 이들이 강조하려 했던 것은 객관적 진리보다는 주체적 가치의 존중이다. 어떤 행동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그가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의도로 그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됐는가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실존주의의 핵심은 주체성 확보에 있다. 이들은 보편적 진리를 강조하기보다는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아무 의식 없이 부유(浮游)하지 말고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체적 판단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도드라지게 필요해진다. 이제 구체적 개인들은 끊임없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번민하는 개체들이다. 실존주의는 아무런 고민 없이 주어진 '정답'대로 선택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진정한 인간다움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에 착안한다. 수동적 삶은 절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실존주의적 사고의 출발이다.
역으로 적극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이를 자율적으로 규제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처한 상황은 매우 중요한 삶의 이유이자 근거, 즉 훌륭한 '핑계'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직접적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사람의 행위에 따른 결과에 대해 비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과정이나 태도에 대해서 비난할 자격은 어디에도 없다. 실존적 상황과 주체적 고민에 대한 배려와 이해만이 남을 뿐이다.
이제 곧 스승의 날이다. 하지만 이게 참 우습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제일 첫 번째 혁신의 대상이 바로 교육이요, 교사란다. 누구라도 아무 생각 없이 돌 던지는 상대가 공교육이 돼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물론 교사의 입장에서 정말로 안타까운 일들이 현장에 전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교사들이 어떤 상황 속에 어떤 실존적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사들에 관한 비난을 마구잡이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올해는 조금이나마 '스승의 날'다웠으면 좋겠다. 단언컨대 이 땅 대부분의 교사들은 스스로 교직을 업(業)으로 선택했으며 하루하루를 교실에서, 또 교무실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하루하루를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스승의 권위가 무덤에 들어가 버린 듯한 요즘, 울며 겨자 먹기로 부르는 '스승의 은혜'보다는 우리 스승들의 실존적 상황과 주체적 선택이라는 '핑계'를 한번 귀담아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은 어떨까?
조선일보 2009.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