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악평론클럽에 보내는 글 1: 지월록>
1. 등로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산악계 일단의 고뇌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등로 개척도 가치있겠지만 메스너가 14개 봉우리를 오른 것도 또 다른 가치가 있다고 본다. 가치는 다면적인 것이어서 천천히 자라며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 아닐까? 만일 14좌 등반이 그렇게 용도 폐기된 것이라면 파사반은 왜 경쟁을 하느라 애썼다는 것인지, 메스너는 왜 여성최초라는 사람을 만나 축하를 해 주었다는 것인지? ... 한국산악평론클럽이 메스너의 가치관 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인가? 혹 가치를 독점한 일단의 그룹이 자국의 동료 산악인만을 죽도록 헐뜯는 독단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2. 등로주의를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 겸손하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 자신이 이룬 것 조차도 미미한 것이어서 산과 자연앞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 생각하노라고... 소위 산악인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한국산악평론클럽이 그렇게도 세계에서 알아주는 모임이어서 다른 가치는 마구 폄훼하여도 될 정도인 것인가? 그렇다면 스페인에 가서 파사반에게도 가르침을 주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내국인에만 그렇게 모질게 하지 말고... 또 스스로의 주장대로 등산용구회사의 도움없이 자금을 마련하여 등로를 개척함으로써 스스로 모범을 보인 산악인이야 말로 격상업주의치등로가치를 논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닐까?
3. 세상의 모든 산에는 이름이 없다. 사람들이 만들어 붙였을 뿐...모든 산에는 가치도 따로 없다. 사람들이 최초라는 가치를 역시 만들어 가져다 붙였을 뿐… 메스너가 겸손한가? 산에는 겸손과 오만이 따로 없다. 그 봉우리에는 그 자신 보다도 훨씬 전에 새가 먼저 올라 앉았을 지 모를 일이요, 천만 년을 최고봉에 앉아 있는 저 눈도 그렇게 아무런 말이 없다. 최초라고? 그 최초라는 것은 그 생각을 만들어낸 사람 이외 지구 만물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4. 에베레스트가 에베레스트인가? 그도 스스로 고봉이 된 것이 아니라 판과 판이 만나면서 땅이 들어 올려준 것이다. 지금도 조금씩 더 높아지고 있으니 힐러리가 과연 가장 높이 오른 사람인가? 그 산도 영겁의 시간이 지나면 또 스러지겠고… “세계적이라는 칭송을 받으려면 8천미터 14좌가 아니라 6천미터급의 고산 고벽을 등반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그 가치는 누가 만든 것인가? 산악평론모임에도 최초가 중요하고 세계적이라는 칭송이 역시 중요 한가? 가치? 가치는 무슨 가치? 한산평의 그 가치라는 말에는 속물적 속성이 포함되지 않은 것인가?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또 누구를 위한 가치인가?
5. 등로주의 가치 이후에는 또 무슨 가치가 올 것인가? 그리고 산이 그런다고 뭐 지구인 몇 수십 수백 수천의 등반을 대수라고 여기겠는가? 그 등로 말고도 수많은 다른 등로가 가능한 것을… 새등로? 새 등로에는 볼트 안 박고 가는가? 인간이 가치를 추구할 수록 자연 훼손은 오히려 점점 더 많아진다. 그리고 산은 이 모든 소위 등반가라는 성가신 존재를 거부할 지도 모른다. 가치라는 말에 대하여 너무 자신을 가지지 말라. 그것은 인간의 편협한 기준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모진 평가를 한다면 과연 이 시대에 알맞고 공정한 사람의 말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 나는 이 시대의 평범한 사람이니까...>
6. 모든 시대는 각기 그만큼의 현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현실을 비난 할수록 그것은 등로개척의 영웅이 지금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겠다. 이에 대해 한국 산악계는 권위가 있을 수도, 그렇다고 책임이 없을 수도 없다는 것을 함께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발로 과거 우리의 현실을 밟고 왔고, 그 과정 중에 우리를 대신해 줄 다른 나라는 없었다. 10대0으로 패한 우리 축구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 산악인 중 먼저 산에 묻힌 고인들을 욕되이 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가 지금 밟고 가는 미래의 길에 헌신한 사람들일 수 있다.
7. 가치도 없는 일에 공명심으로 경쟁하다 간 사람들이라고 쉽게도 이야기 말라. 그 사람들 모든 개인 개인에게는 자신이 만든 고유의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8천미터 등정주의 가치는 끝났다고? 누가 그렇게 선언하는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그룹에서는 그 생각을 소중히 키우되, 다른 이에게 같은 생각을 강요하지 말라. 황금 피켈상을 받은 사람도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고령으로 오르는 사람은 그 가치를 창조하여 스스로 독려할 수도 있을 것이며, 최연소로 오르는 사람도 그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여 자신의 신념에 충실할 수 있다. 또 여성 최고령과 여성 최연소는 어떠한가? 그 모든 가치가 각 개인에게는 적어도 등가이다.
8. 나는 순수산악인, 정통순수산악인이라는 단어 모두 순수치 못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개의 눈에게도 자연은 자신을 보여주고, 닭의 눈에게도 자연은 자신을 보여준다. 산은 스스로 차별하지 않으니 사람도 자기가 본 세계만 세계라고 주장하지 말라. 내 보기에 순수를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순수에서 거리가 멀 수 있다고 본다. 자신의 가치를 남의 가치와 차별하려고 애쓰기 때문일 것이다. 어쩐지 그들의 주장을 들을 때 자연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 같게도 느껴진다. 산은 모든 동식물과 무생물에 가치적으로 중립이기 때문에…
9. 이 세상은 만물에 차별 없이 물과 공기와 햇볕을 나누어 준다. 설령 그것이 필요 없을 지 모르는 돌멩이 하나에도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줄 터이니 생명을 꽃피우려면 피워 보라고… 바위를 깨서 모래로 만들고 싶으면 만들어 보라고… 누구에게만 주고 누구에게는 안주는 것은 진정한 평등이 아니라고 믿는다. 자연이 순수산악인의 생각을 더 고귀하게 여길까? 8킬로 높이에 한번 도달해 보려고 네팔까지 8천 킬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은 그렇게 순수하고 생산적인 행동인가? 순수? 뭐가 그렇게 순수한가? 인간이라는 생명체에게 가치는 공기와 햇볕, 물과 같이 평등하게 소유되어야 할 평범하고 보편적인 그 무엇이라고 믿는다.
10. 왜? 왜 그 가치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겠는가? 누구나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이 움직여야 나의 가슴이 공명하고 내 가슴이 공명해야 내 신체가 마음을 따라 줄 것이 아닌가? 다른 이는 물이 필요 없을 것 같은가? 정통순수산악인만 물이 필요하고...? 남의 가치를 죽이는 것은 남의 물을 빼앗는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11. 목마른 사람이 있다면 물을 나눈다. 산악인…
12. 의문점이 하나 있다. 순수를 주장하는 사람, 이제 14봉은 가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8천급과 7천급 몇 개를 다녀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전문가는 대체 왜 그렇게 가치 없는 일을 몇 개씩이나 하고 온 것일까? 그 스스로는 순수산악인이라 믿고 있는 듯 한데… 그 외 여러 전문산악인 소리를 듣는 사람들도 그 말을 듣기까지 역시 고산등반의 경험이 남보다는 많았던 것 아닐까? 그들은 그렇게 가치 없는 여러 개 봉우리를 하면서 몇 억대의 돈을 사용하기 보다는 스스로 가치 있다고 말하는 새 등로를 그 동안 단 하나라도 개척 하는 데 사용한 것이 훨씬 값지지 않았을까? <그들이 남을 평가하듯 내가 그들도 평가하자면 말이다.>
13. 마라톤에 세계 최고기록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 있겠지만, 그러한 대기록은 자주 나오는 것이 아니며 그러는 사이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마라톤을 한다. 손기정 옹의 기록도 지금 보니 우습게 보이는가? 그들 모두는 자신을 한계를 뛰어 넘을 꿈의 가치,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다양한 가치는 생명의 특권이다. 누가 가치를 단언하는가? 끝났다고… 14봉은 여성으로서는 최초라는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여성은 독자의 범위를 차지하면 안 되는가? 수영도, 육상도, 축구도, 배구도 모두 남녀 따로 경기를 하는 데… 등반은 스포츠와 다르다고? 그렇다면 등반에 대하여 평하는 자칭 스포츠평론가들이 앞으로는 더 조용할 일이다.
14. 십육봉을 오르려 했던 이는 그 가치를 14봉이 아닌 16봉에서 찾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14봉을 오른 여성은 그것을 여성이 처음 했다는 데서 찾으려 한 것으로 보이고… 적어도 내 눈에는 그들이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려 한 것이 잘못되어 보이지 않는다. 산악사에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고? 남의 가치를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 겸손 없는 독선은 더 위험할 수 있다. 내 보기에 그러한 평가의 경솔함은 메스너 이후에 14봉을 오르는-산평이 말하는 소위 쓸데 없는-행위 보다 더 훨씬 더 쓸데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상업주의의 병폐를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면 산악인답게 행동으로 보여줄 일이다.
15. 새 등로를 개척한 후 자신의 깨달음을 행동으로 시험해볼 기회도 될 것이고… 격상업주의 !
16. 무산소, 단독, 알파인, 노멀루트외 등로, 최단시간, 장애인최초, 원푸쉬, 캡슐, 직지봉 명명, 아시아최초, 한국최초: 고상돈, 김병준, 부산대륙산악회, 허영호, 동국대산악회, 박혁상, 엄홍길, 성균관대학교, 울산합동대 등등… 이러한 개개의 가치는 당시에 한 사람/팀의 혼을 불사르는데 사용된 가치이다. 지금 보니 우스운가?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그 사람을 움직인 불꽃이었다. 그러한 가치가 상업성과 연관 되었다거나 또 다른 변질의 사유에 연관은 있을지언정 가치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가치는 가치의 눈으로 보되 그 외 다른 기준으로 보지 말라. 가치를 오염시키는 일이다. 지나친 경쟁이라면 경쟁을 비판하고, 지나친 상업성이라면 그것을 비판하라.
17. 전문산악인이 보는 눈에 우리 산악계의 초점이 빗나갔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새 사람이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어야지 그가 그의 가치로 알고 있는 자일을 끊어버리는 것에 있지는 않다고 본다. 지금 산평에서 하는 방식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수 있다. 순수한 열정은 놀랍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누가 어느 당을 지지한다는 등의 수 많은 가치외적인 글은 쓰지 않는 것이 큰 도량이겠다. 산악이 정치는 아니지 않은가? 이런 온갖 방식으로 산평의 순수한 의도를 본의 아니게 오염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18. 영웅으로 알고 있던 이를 뛰어 넘는 것이 더 큰 영웅 아닌가? 지금 영웅이 진짜 영웅인지 아닌지는 조바심 내지 말라. 모든 것은 훗날 산악의 역사가 평가한다. 지금 당장 바닥으로 다시 끌어 내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또한 생각 같이 잘 되지도 않을 것 같다. 문제는 “가치”를 내어 놓으라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가치는 공기와 같은 것인데 … 이런 터무니 없는 요구를 당사자에 하는 한 이해와 함께 해결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난 후 모두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 가능한 것이다. 후대의 평가가 더 공정할 수도 있는 것이고… 상업 산악인이라도 쉽게 승복하겠는가? 자신의 생존의 근거인데 …
19. 산악을 산악 이외의 다른 일로 비난 하는 것은 가치 고발에 대한 공소유지의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 과정이 인신공격으로 보이며, 그 방법 또한 남 깎아 내리기로 비추어 진다. 지금 한 여성 산악인의 14봉 등정에 관하여 홀리 여사도 이미 꼬리표를 달지 않았는가? “disputed”라고… 이 꼬리표는 정상등정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평생 붙어 다니는 것이다.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없어지지는 않을 꼬리표 인데 충분하지 않은가? 휘슬이 불렸으면 일단 승복하고 바로 자신의 경기에 충실한 것이 스포츠맨십 아니겠는가? 지금 당장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떼를 쓰는 것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20. 다른 목적이 있지 않는 한… 당장 해결해 내라고 추궁하는 것은 산악인의 훌륭한 자세가 아니다.
21.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균형감을 갖고 기다리면 노르웨이의 욘 강달 같은 사람도 나온다. 이제까지 우리 여성의 14봉 등정이 의심받는 가장 큰 이유는 정상부근에 바위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연맹의 산악 6인도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강달의 사진은 아주 깨끗이 그들 모두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정상 7-8 미터 아래에 명백한 바위를 보여주지 않나? 가장 최근에 올랐다는 파사반도 바위 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 하였다. 명백한 오류로 내게는 보인다. 우리 여성은 일관되게 5-10미터 아래서 찍었다고 하였다. 상업성을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등반은 등반이므로 이와는 분리함이 마땅하다. 물론 강달의 바위가 그 바위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
22. 나는 순수라는 열정으로 행하는 사실의 왜곡이 그냥 용인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여성 14봉 등정이 그렇게 가치 없다면 왜 전 세계의 주요 산악 홈페이지에 소개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것은 순수산악인의 가치 만 가치가 아니라는 반증이거나, 순수산악인의 가치도 여러 가치 중의 하나일 뿐, 지배 가치는 아니라는 것일 것이다 (Stewart's Climbing Blog by Stewart Green, Climbing Guide: http://climbing.about.com/b/2010/09/02/korean-alpine-federation-rules-that-oh-eun-sun-did-not-climb-kangchenjunga.htm 참조). 가치는 창조되는 것이고, 독점할 수 없는 것일 뿐더러 스스로 다양성을 향해 자라가는 것이므로…
23. 타임전직기자 홀리여사는 우리 등정자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자신 앞에서 처음 말한 사실과 합치할 뿐 만 아니라 면담 초기부터 일관되게 주장한 것이라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오른 것이 맞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만큼의 반대 증거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천히 결국 밝혀 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게임에는 룰이 있고, 심판도 있다. 당장 못 올랐다고 기록하라고?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은 히말라야 데이터 베이스에 남게 된 아픈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24. 과거 동계 초오유를 등반하던 삼천포 산악회가 벨기에 등반팀에 폭력을 행사하던 조급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홀리여사는 이 기록을 히말라얀데이터베이스에 분명히 남겨 두었고, 한국으로서는 가슴 아픈 기록으로 남아 있다. 우리 기록은 벨기에 팀이 자신들의 루트를 허가 없이 등반했다는 이유로 한국대의 고정로프를 절단, 회수함으로써 야기된 사건으로 정리하고 이를 국제산악연맹이 벨기에만 편파 지지 한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웹에는 “A Bloody Confrontation” 라는 제목으로 국제매너와 의사소통에 익숙치 않은 한국인의 비신사적 행동을 떠올리게 하는 필치로 기록하고 있다 (www.himalayandatabase.com 참조).
25.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옳은 방안일 수 있다.
26. 전문산악인에 지원금만 주면 14봉 누구라도 할 수 있겠다고 함은 지원금이 없어서 안 한 것 뿐이라는 뜻으로 들리니 그들 역시 산에는 돈이 든다는 것만은 인정하는 것이겠다. 당연히 새 등로를 개척하려고 해도 개인의 돈이든 후원이든 필요는 할 것이다. 만일 새 등로를 개척할 때 지원금 없이 할 생각이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그것이 또 우리 산악계를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데 이의가 전혀 없다. 부디 성공하기 바라며, 그러한 점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잊지 말라. 우리 모두는 완벽치 않아 어느 한군데는 부족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27. 순수 산악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비난하는 이른바 그 파렴치한 산악인이라는 사람들이 영웅이 된 것처럼 큰소리 치고 다녔다는데 나 같은 일반 국민은 실제 보지를 못하였고, 매체에서 보기에는 늘 겸손하였다. 혹 사실은 그들도 약하고 힘든 개인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 바란다. 비난에 아파하고, 산이라면 좋아 하는… 산을 오르는 동안 꼭 성공해서 후원 업체 과대포장하라고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파렴치? 혹 순수파들도 과거 어디에선가 후원 받은 경우는 없었을까? 그 후원자는 지금 이렇게 말하는 순수파들을 어떻게 느낄까? 혹시 파렴치하다는 생각은 없을까?
28. 깨끗한 것이 자랑스러운가? 후원도 안받고 산에도 안 오르면 깨끗할 것이나 그 점에 대하여는 우리 일반인 모두도 대단히 깨끗하다는 점을 장담한다. 비난의 말도 많다. 누구는 무리하게 등정하다가 동료를 죽인 것이니 정상을 남겨 두고라도 위험하면 즉각 철수했어야 한다는 자칭 순수전문가의 말도 있고… 아무튼 고산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이해한다. 최근 14봉을 오른 여성 등반가에게 이렇게 묻는 모 스포츠평론가도 있었다. 조롱을 담아 “그런 절대적인 무서움에서 살아 돌아온 당신은 거기서 무엇을 보았나요?” … 무엇을 보았느냐고? 시적인 말을 듣고 싶은가? 시인은 그 반의 반만 올라도 완등자 보다 멋진 소감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29. 그 고봉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30. 설령 뭔가 보았어도 당신만큼 멋지게 표현할 수는 없을 지 모른다. 실망하지 말라. 하지만 말로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더욱 값진 것일 수도 있다. 사과 맛을 생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말로 그 맛을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그냥 달다고? 배는 안 단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말해줄 필요가 없겠으니 그가 당신 보다 더 뛰어난 경험을 가졌을 수 있다. 고미영 산악인처럼 추락하다가 신의 손길로 살게 된 그런 맛을 말로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을 지 모르겠다. 오래 전 기념비 적인 바둑을 끝낸 조치훈에게 소감을 요구한 미디어가 있었다. 그 영웅은 그냥 한마디, “자고 싶다”고 하였다.
31. 앞으로 새 등로를 개척할 사람들에게도 행운을 빌며, 지금 그 가치가 지금 세대의 일반인에 다만 조금 앞선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든 겸손한 산악인들에도 행운을 빈다. 등로 개척과 함께 따뜻한 산악인에 동료애의 눈길과 사랑도 산에 많이 뿌려주고 오시기를... 그리고, 일개인이 곧 산은 아니므로 그 손가락을 사람 개인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것을 그만 접으라. 그것은 산악인이 할 일이 아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산을 직접 가리켜 주되, 주위 사람에게도 이 손가락을 보지 말고 저 산 자체를 바르게 볼 수 있도록 일깨워 주는 자비로움도 함께 나누라. 서로 싸우는 동안 태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잃지는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지월록”의 참뜻을 안다면…
<끝>
산악인 아닌 한국의 남자가
산악인 아닌 평범한 사람의 시각으로
산평의 열정을 아끼는 마음과 함께 쓴 글이니
넓은 아량으로 읽어 주시면 고맙겠다.
혹
암벽 등반하는 사람외에는 쓸 자격 없다
판단하시면 가차 없이 폐기하여 주시고...
정말로 그래도 상관 없겠다.
2010. 9. 8.
필부
첫댓글 공감가는 부분도 일부 있지만 상당부분은 궤변에 가깝네요. 궤변을 지적하자면 31개 항목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여야 하나 일단은 시간적 능력이 안되어 미루고.. "자국 산악인만을 죽도록 헐뜯는 독단"이라는 표현 자체가 "자국산악인에 대한 심각한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표현입니다. 윗 글에서는 가치의 다양성을 설파하려 하지만, 사실 순수 산악인이건 상업 산악인이건 산악인의 가치는 진실과 양심의 문제를 떠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금의 현실과 문제점을 토로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한국의 산악관련그룹이 존재한다면 멋진 일이겠지만 한국산악평론클럽 이외에는 아직 없네요
궤변은 부서지기 쉬운 요설이니 정론으로 깨십시오. 산평의 발전을 위하여...
정론으로 깨려 했는데 아래의 댓글의 댓글들을 보니 ksks 님에게 시간 투자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응을 한다는 것은 상대도 비슷한 수준으로 이해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죄송하게도 님에게서는 아직 그런 모습들이 안보입니다. 이 곳의 의식있는 분들이 왜 대응을 안하는가 저는 이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에 링크된 Stewart's 웹의 여러 댓글들은 우리가 배울 점 아닌가 합니다. 주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근거에 의거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교환합니다. 생산적인 방식이지요. 산평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자리잡으면 한층 좋을 것입니다.
산평의 글 중 상당수는 외부 언론의 기사나 대담 등을 가져다가 남을 조롱하는데 사용합니다. 산평은 적어도 그러한 포스팅이 알맞지 않다고 봅니다. 순수산악전문클럽에서 나온 건전한 의견이 오히려 언론 쪽으로 흘러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탁한 물이 흘러 들어와 산평의 자부심을 어지럽히는 형국으로 뵙니다. 이제는 포스팅의 내용도 원론적인 비난에서 벗어나 성숙한 의논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전반적으로 궤변이네요, 저도 시간도 없지만 일일이 답변할 가치가 없군요.
다만 님에게 하나 말씀드릴것은 공통의 가치, 최고의 이상 입니다.
지금 축구부 청소년은 국가대표가 되는 이상, 대표가 되면 세계 리그에 나가는 이상, 성장한 그는 조국의 국가대표감독이 되는 이상, 감독이 되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것,
이 이상에 대하여 축구계도 사회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공통의 보편타당함이 있습니다.
산악인의 궁극적인 이상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히말라야 14개봉을 오르는거?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이게 산악인 공통의 보편타당한 이상이 아닙니다.
14좌는 10여년전 중앙일보 김기자가 가공한 것에 불과한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다고 하여도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님은 히말라야를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표현이 조금 자극적이었나요? 산평이 남을 평할 때는 훨씬 더한것도 많았습니다만... 물은 H2O일뿐 더러운 물, 깨끗한 물이 따로 없습니다. 더러운 물은 더러운 다른 것이 섞인 것 뿐 이지요. 한국 산악평론클럽의 존재에 경의를 표하는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표현이 자극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표현을 쓰려면 출발부터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님의 의견에 전반적으로는 동의 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할 자유는 님에게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히말라얀데이터베이스는 냉정하게 숫자와 사실을 다룹니다. 출발부터 다른 개념이라는 종류의 이물은 올랐는지 안올랐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답을 줄수가 없지 않을까요?
시대를 관통하여 고정된 산악인의 공평 타당한 이상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요?
하나더 추가 하자면 UIAA(국제산악협회, 한국은 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 2단체가 회원단체로 가입됨 )에서는 등반의 공인을 하지 않습니다. 등반은 룰도 조건도 심판도 없지만 개인의 삶 내면을 향하는것이기에...몇 분 몇초를 가지고 순위를 결정하는 스포츠와는 다른 것. 스포츠를 등반에 무리하게 적용하여 세계최초를 남발하는것이 현재 욕얻어 먹는것입니다. 세계적 산악인 파사반 운운...전문산악인들은 파사반이든 오은선이든 "경쟁관계의 세계적 산악인" 이라고 인정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사람들은 언론과 장비업체가 날조한 세계적인 산악인이죠.
만약 그녀들이 6천급 창가방이나 7천미터급 촐라체 북벽을 오르면 인정할수도..
홀리도 타임지 기자였을 뿐 이지요...인정합니다.
홀리가 산악인도 아니고.. 공신력이 있는것도 아니고 단지 기록자일뿐입니다. 오은선 동행 한국언론이 마치 홀리가 공인자라고 부추겨서 기사를 쓴것입니다. 위에 언급한대로 산은 공인 인정 자체가 없기에 홀리를 끌어 들이거나 인용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오은선 세계최초 자체가 이미 산악계에서는 공신력도 없는것입니다. 그래서 산악계에서는 14좌를 용도 폐기라고 합니다. 물론 오은선 개인이나 블랙약케서는 대 영광이고 축복인데, 이런거라면 저도 오은선에게 축하 해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은선이 세계산악사를 새로 쓰고...세계 산악사의 위대한 기록이고,,,엄홍길이나 블랙야크가 언론에 대고 떠드는게 문젭니다.
홀리가 기록자일 뿐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Himalayan database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다룰 뿐입니다.
필부ksks님. 옳은 말씀을 하신것 같습니다. 저는 산사람이아니라 전문적으로 따지지는 못하지만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은 항상해왔는데 ksks님이 제 마음을 대신해준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산악평론도 첫출발부터 오은선을 깍아내리기위해 탄생한것같습니다. 글을 읽어보면 오은선이나 이곳에서 말하는 상업산악인들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글말고 뭐가 있는지요...물론 이곳분들은 산악인의 순수한 영혼을 더럽힌다는(?)상업산악인들에대한 반감은 이해가 갑니다만 그 대응방식이 너무 치졸하고 유치해보였읍니다.
상업주의의 폐해를 경고하는 것은 좋습니다. 해야지요. 그러나 이제는 이미 명백히 전달되어 산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 조차 충분하고 자명하게 된 단순 멧시지를 계속 반복하는 것은 primitive한 감정의 구호적인 표출 이외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미운 땅만 손가락질 하는 동안 산악정신을 오히려 피폐하게 하는 면은 없을까요? 산을 바라 보며 산에 가서 예술을 추구할 산평의 지성이 등산화 가게만 보고 있으면… 그렇게 할 동안이면 오히려 산 기운 가득한 양질의 생각을 바람직하게 서로 교환함으로써 산으로 발길을 다시 향하고 산평의 가치도 더 높이는 것이 한층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일성이 기세좋은 “궤변”이라 한동안 주목하였습니다. 자신이 뱉은 말을 책임질 수 있는 진국인가 판단하기 위해서지요. 자기 집 앞마당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Didn’t come back, because no-time’s been there.”라 말하는 George Herbert Leigh Mallory와 Andrew Irvine을 패러디로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자신의 시는 쓰는 바 없이 남의 시나 열심히 복사해 퍼 나르는 자칭 시인과, 제 밥도 남의 쌀로 열심히 지어 먹는 자칭 농부 모두도 말하며 먹고 살 권리는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이분 들 거칠 것 없는 말투를 잠시 흉내 낸다면 사기꾼 산악인, 사기꾼 시인, 사기꾼 농부가 되겠지만…
개념이 없네~~~~~말만 많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