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부타령 듣기
김옥심명창 창부타령 2곡(3초:33초) - http://youtu.be/vUx6M9pxQXk
전태용명창 창부타령 4곡(6분:35초) - http://youtu.be/5cDcE2ckr4U
이희완 명창 창부타령 2곡 (3분:54초) - http://youtu.be/u1q_nKSeTvY
김옥심 명창 (3:32)
※아니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1. 한 송이 피었던 꽃이 낙화(落花)가 진다고 설워를 마라
한 번 피었다 떨어지는 줄을 나도 번연히 알건마는
모진손으로 꺽어다가 시들기 전에 내버리니
버림도 쓰라리거늘 무심코들 짖밟고 가니 근들 아니 슬플 소냐
숙명적(宿命的)인 운명(運命)이라면 너무도 아파서 못 살겠네
※얼씨구나 좋구나 내사랑이지 사랑 사랑 참사랑아
-간주-
※아니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2. 추강월색(秋江月色) 달 밝은 밤에 벗 없는 이내 몸이
어둠침침(沈沈) 빈 방(房) 안에 외로이도 홀로 누워
밤은 적적(寂寂) 야심(夜深) 토록 침불안석(寢不安席)에 잠 못 자고
몸부림에 시달리어 꼬꾜 닭은 울었구나
오날도 뜬눈으로 새벽맞이를 하였구나
※얼씨구나 지화자 좋네 인생백년은 꿈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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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용 명창 (6:35)
※아-니-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1. 지척동방 천리되어 바라보기가 막연쿠나.
은하작교가 쾅 무너 졌으니 건너 갈 길이 막연쿠나.
인적이 끊기었으니 차라리 잊을거나 아름다운 자태거동 이목에 매양 있어,
잊으리라 맹세 해도 꿈에도 못 잊어 걱정일세
눈 감아서 보여진다면 소경이라도 되어질거나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간주-
2. 만리창공은 하운이 흩어지고 무상 십이봉은 월색도 유정 터라.
임이라면 다 다정하며 이별이라고 다 슬플소냐.
이별마자 지은 맹세를 태산 같이 믿었더니
태산이 허망히 무너질줄 어느 가인이 알아 줄거나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간주-
※아-니-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3. 공도라니 백발이로구나 면치 못할 건 죽엄이로다
천황 지황 인황시며 실로 황제의 복희씨라
말 잘하는 소진 장의도 육국제황을 다 달랬으되
염라대왕을 못 달래어 한번 죽엄을 못 면하고
그러한 영웅들이야 죽어 사적이라도 있건만은
초로같은 우리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다시 오기가 어려워
일후에 남이 되고 보면 후회막급이 있으리로다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간주-
4. 서산에 해기울고 황혼이 짙었는데
안오는 님을 기다리며 마음을 조일 적에
동산에 달이 돋아 왼 천하를 비쳐 있고,
외기러기 홀로떠서 짝을 불러 슬피우니
원망스런 우리 님을 한 없이 기다릴적에
일경 이경 삼사 오경 어느듯이 새벽일세.
추야장 긴 긴 밤을 전전불매 잠못 들제
상사일념 애타는 줄 그대는 아시는지
둘데없는 이내심사를 어디다가 붙여 볼거냐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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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완 명창(3:53)
※아~~디리리~ 어야 아니노진 못하리라
1. 공도라니 백발이요 면치 못 할 건 죽엄이로다
천황지황 인황씨며 요순우탕 문무주공
성덕이 없어 봉했으며 말 잘 하는 소진장이도
육국제왕을 다 달랬으나 염라대왕을 못 달래고
한번 죽엄을 못 면했으나 그러하신 영웅들은 죽은 사정이라도 있건마는
초로같은 우리인생 한번 아차 죽어지면 움이 나나 싹이 나나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 잎진다 서러워마라
명년삼월 봄이 오면은 너는 다시 피건마는
우리 인생은 한 번 늙으면 다시 젊기는 어렵구나
※오호 한평생 허무하구나 인생 백 년이 꿈이로다
2. 우연히 길을 갈적에 이상한 새가 울음을 운다
무슨새가 울려마는 석벽화전에 부운이라
하야구구(何也鳩鳩) 진토(鎭土)를 보고 설리(슬프게) 통곡을 하는 모양
사람의 인정 치고는 차마 어찌 가이없구나
일후에 님 만나 보면 후회막급이 잊어 질거나
※얼씨구나 절씨구 지화자자 좋아 아니 노진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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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명창-전태용
1922년~1991
경기도 영종에서 태어났고요
주로 해금과 피리 악사로 활동을 하셨지만, “경기민요 소리꾼”으로도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전태용 선생을 ‘전천후 음악가’.. 혹은 ‘민속악의 달인’..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주로 해금을 연주하셨지만,피리잽이가 없으면 피리를 불고
대금쟁이가 없으면 대금을 잡기도 하면서....
어떤 장르의 음악도 소화를 해 냈고요
특히 이용우, 이충선 등과 경기 시나위를 연주할 때는 징을 잡아서...
“시나위 징”의 매력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전태용 선생은 해금과 피리를 육촌형인 전상현한테 배웠다고 하고요
민요의 경우는.... 무속의 악사로 활동을 하면서.. 자득을 했다고 합니다
1960년대에서 80년대에는 민속음악 악사로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요
이 때 함께 활동을 한 명인들로는 지갑성, 지영희, 김광식, 이충선, 성금연 등이었습니다
전태용 명인의 따님인 전숙희씨의 증언에 따르면....
선생은 <창부타령>과 <노래가락>을 즐겨 부르셨다고 하고요
장단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소리를 하셨으며...그래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판에 박힌 경기민요에 비해 자연미가 있는 소리를 선보였습니다
[출처] 명인명창-전태용|작성자 국악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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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명창-김옥심
1925년~1988년
서울에서 태어났고요
1950년대부터.. 최고의 경기 명창으로 활동을 했으며
이은주, 묵계월 명창과 함께 트리오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김옥심 명창은 경서도 소리의 대가였던 주수봉 선생에게 소리를 배웠고요
이창배 선생에게 '산타령' 을 배우기도 했는데요
특히 정선아리랑, 한오백년을잘 불렀다고 하지요
그래서 이 노래들은 ‘김옥심이 불러야 제 맛이 난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는데요
이 중 '정선아리랑' 은 정선의 엮음 아리랑을 김옥심이 바꿔 부르면서
점차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김옥심 명창의 목소리를 경기 소리를 위해 “하늘이 내린 천성”.. 이라 말하곤 합니다
또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듯 윤기가 넘치는 소리.. 라고도 하고요
김옥심 명창은 경기 소리의 특징을 가장 완벽하게 소화해냈기 때문에“100년에 하나 나오기 어려운 명창”이라고
극찬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김옥심 명창의 인기는 1960년대에 절정을 이룹니다
그래서 선생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몇 달 전에 예약을 해야만 했다는데요
하지만 선생은 1969년에 갑자기 쓰러지고요 그 뒤,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경기민요의 보유자에서 탈락을 하는 쓰라림을 겪게 되고요
1988년에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출처] 명인명창-김옥심|작성자 국악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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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완 명창
시각장애인에 80순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는
"이희완"은 여자명창이 유독히 많은 경기소리계에서 몇 안되는 남자명창이다.
특히 그의 목구성은 학계에서도 인정하듯 애틋하고 구슬픈 성음으로
전통음반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희완의 생애와 예술세계
이희완은 1938년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어천리 태생으로, 강춘이라는 예명이 있다.
부친 이중식은 국악을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누대(累代)로부터
국악을 한 집안답게 녹녹치 않은 재주를 지녔다고 하며, 모친 차씨는 무업에 종사한 이다.
이희완의 조부 봉운은 천하의 으뜸가는 줄타기꾼이었고,
조모 이춘삼은 창부타령 명창 김부전의 친정어머니인 곽명월의 조카이고, 이정업은 희완의 재당숙이다.
이렇듯 이희완은 부계 모계에서 물려받은 소중한 음악적 소양을 지니게 되었는데,
당시만 하여도 국악 하는 이들을 업신여기는 사회적인 풍토가 만연하여 음악을 도무지 배울 맘이 없었다.
그러나 대대로 물려온 음악적인 끼는 숨기지 못하는 법이어서 뒤늦게 소리를 배우게 되는데
희완의 첫 선생은 가곡, 가사, 서도소리를 잘한 권번 출신의 이였고,
또 다른 선생은 김연화로 화성권번 팔 기생 출신의 김연화로,
소리속이 옹골찬 이였지만 그만 중병으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그 후 당시 한창 이름을 드날리고 있는 김옥심을 찾아가 배우기를 청하기도 했으나,
김옥심은 "몸도 아프거니와 내가 지금은 바빠서 가르쳐 주지 못하고
내 동무를 소개해 줄 터이니 그 사람한테 배워라"하는 말을 듣고 김정희를 만나서 소리를 배웠다.
김정희는 평양 태생으로 개성에서 살다가 서울로 와 활동을 한 이며
목구성이 좋기로 그 세계에서는 알려진 숨은 명창이었다고 한다.
마침 소개를 받은 이희완은 여기에서 십이잡가와 경기민요, 서도소리를 배울 수 있었다.
이처럼 이희완의 학습은 여러 선생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들 스승한테 배운 것은 다름 아닌 옛 가사라고 볼 수가 있다.
지금은 노랫가락이나 창부타령의 옛 가사가 거의 없으며
있다해도 가사만 알았지 부를 줄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희완은 비록 조명이 난 스승들은 아니지만
인생역전 만큼이나 고달픈 삶을 살았던 스승들에게서 소리를 배웠기에
다 닳은 숫돌처럼 옹골찬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글·이자균(한국민속연구소 상임위원)
[출처] 이희완 1집 <노랫가락>-국악_경기민요|작성자 꼬레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