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종말에 대하여 특별히 예민한 종파로 제 7일 예수 재림 교회라는 곳이 있다. 그들의 신앙은 종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 예수가 언제 올 것인가 하면서 시계만 보고 산다. 그래도 종말론에 매몰되어 있는 다른 교파와는 달리 좋은 점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늘 종말에 징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좋은 것만 먹고 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안식일 교회 사람들이 만드는 식품은 신용이 좋다.
안식일 교회는 유독 한국에서만 이단으로 취급을 받고 있지만 그렇게 된 것에는 본인들 자신의 책임도 크다. 왜냐하면 처음에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했을 때 안식일 교회 중에서도 극단적인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먼저 온 선교사들을 향하여 “제들은 다 틀렸어요.”라고 하는 비타협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승자박이었던 셈이다.
이런 유형의 신앙의 부작용은 몰역사적이라는 것이다. 한참 이 장림의 종말론으로 시끄러울 때 대학 교수 친구가 “야! 예수가 휴가 온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물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고의적으로 무관심한 그의 귀에 ‘휴거‘가 ’휴가’로 들린 모양이다. 하기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 한자도 아니고 한글로 ‘휴거‘라고 쓴 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턱이 있겠는가?
비록 나도 1970년대 조용기 목사의 영향으로 철석 같이 휴거를 믿어 친구들의 핀잔을 들었던 부끄러운 때도 있었지만. 하여간에 예수가 재림해서 실신한(신실이 아니라) 신자들이 휴거가 된다면(사실은 휴거가 아니고 철거겠지만) 빈 집이 많아져서 이 좁은 지구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확실하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니 이 어찌 아니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으랴?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휴거 개념은 인간 세상의 고통과 재난을 회피하기 좋아하는 비겁한 사람들을 위한 편리한 도피구일 뿐이다. 북한처럼 가난한 국가까지 핵으로 무장을 하고 환경파괴 등등의 지구적 재앙이 속속 밀려오는 이 때에 팔을 걷어 부치고 같이 힘을 합쳐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골치 아픈 문제를 피해서 저들만 먼저 살 길을 찾아 나서겠다는 휴거 신봉주의자들이야말로 우주적 얌체가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이 황당 그 자체인 휴거 개념은 초대 교회에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고 19 세기 영국의 설교가인 John Darby에 의해서 일반화된 개념일 뿐이다.
미국에 사는 여동생이 전화를 해서 “누구의 소개로 안식일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건달기가 있는 매제가 교회가 나가는 것만 해도 반가워서 “좋은 교회이니 열심히 다녀라.”고 해주었다. 동생이 안식일 날 교회에 가서 “일요일 교회(안식일 교회에서 일반교회를 부르는 말) 목사인 오빠가 안식일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했다고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 후 미국에 가서 토요일에 동생을 따라서 안식일 교회를 갔더니 자기들을 칭찬한 목사라고 환영을 해주었다. 동생의 집에 있는 동안 안식일 교회를 몇 번 나갔더니 부탁을 해서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설교에 생명을 거는 일요일 교회의 목사의 설교와 단순조립 공장 제품 같은 안식일 교회 목사의 설교가 품질면에서 비교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선전 선동용 노래만 듣던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대중가요를 들어본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하겠다. 평소에 항상 무미건조한 안식일 교회 설교만 듣던 안식일 교인들이 다채롭고 기름진 일요일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고 재미를 느꼈는지 그 후 여기 저기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러 다녔다.
한 번은 가까운 안식일 교회 교인들과 몇 일 동안 놀러 가서 매일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아무 준비 없이 때 마다 다른 설교를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놀라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프로와 아마튜어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일요일 교회 목사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설교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곤란한 것은 안식일 교회에서는 설교를 해도 사례비를 주지 않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안식일 교회 목사들은 교단에서 월급을 받기 때문에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해도 자기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손님이 왔다고 해서 강사비를 주는 습관이 없고 기성 교단 목사가 와서 설교를 해 본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매하게 먼 길을 간 내가 피해(?)를 보는 셈이었다.
20 여 년전 워싱턴에 사는 교인들로부터 안식일 교회와 기성 교회의 중간 형태의 교회를 세워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안식일 교회 목사가 되어야 했다. 어차피 나에게는 교단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순순히 귀순(?)을 하기로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그 쪽에서 미리 연락해준데로 삼육신학 대학의 학장인 신계륜 박사를 만났다. 그랬더니 신 박사는 안식일 교인 특유의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로 안식일 교회 목사가 되기 위해서 3 년씩이나 삼육신학 대학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시건방진 제안을 해서 그만 코웃음 치고 말았다. 기성 교단에서 안수 받은 목사가 교단을 옮기면 1년 정도 공부를 하는데 큰 동네에서 작은 동네로 옮기는데 3년이라니 '도대체 세상 물정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리 미국이 좋아도 나는 3년을 삼육신학 유치원에 앉아서 초간단 단순한 교리를 참을 수 있을 정도로 인내심이 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시드니의 안식일 교회에서 미국에서 유명한 청년 부흥사가 왔다기에 가보았다. 강사가 28살 먹은 청년이었는데 8살 때 미국으로 가서 자라 마약 중독 깽생활을 하다가 개과천선해서 지금은 훌륭한 전도자가 되었다는 진부한 스토리였다. 그러나 순진한 안식일 교인들은 그의 설교에 감동을 해서 천사처럼 흠모를 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안식일 교회에서 떠 오르는 스타처럼 전 세계의 한인 안식일 교회를 순회 하면서 설교를 하고 다녔다. 그래서 청년을 호주 백인들 교회에 데리고 와서 간증을 시켰다. 청년은 백인들 앞에서 완전한 미국식 영어로 열정적으로 간증을 했다. 그러나 호주 교인들의 반응은 무덤덤을 넘어 “제가 왜 자기의 사생활을 저렇게 공개하나?”하는 표정이었다. 가장 호의적인 반응이라면 예배가 끝난 후 어느 노인이 다가오더니 청년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좋은 경험을 했구나” 하는 정도였다. 나는 청년에게 ‘복음은 그런 멜로드라마가 아니다.’라는 교훈을 주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초청을 했었다.
미국에 가면 어느 도시를 가든 반드시 흑인들이 살고 있는 빈민가를 방문한다. 1993년도, 아마 오바마가 커뮤니티 조직가로 활동하고 있었을 시기에 시카고 빈민가를 방문했다. 시카고에서 안식일 교회 목사가 흑인 슬럼에서 음식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교인에게 갖다 줄 물건이 있다고 해서 같이 나선 것이다.
흑인 거리로 들어서면서 권 목사가 옆에 있는 차를 쳐다보거나 손가락질을 하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고 주의를 주었다. 혹시라도 흑인들하고 시선이 마주쳤을 때는 억지로라도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 시선을 돌려야지 그냥 무표정하게 얼굴을 돌렸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은 표정이 굳어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흑인들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심가로 들어갈수록 동네 전체가 폭격을 맞은 것처럼 불에 타 있었고 창문마다 유리가 깨져 있든지 아니면 나무나 벽돌로 막혀 있어 마치 막 전투가 끝난 지역 같았다. 흑인들이 하나 둘 동네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백인들은 빠져나가고 빈집에 흑인들이 들어가 살다가 집이 폐허가 되어 버리든지 아니면 아예 흑인들이 들어와 살지 못하도록 벽돌로 막아 놓기 때문이었다. 흑인 거리로 들어가면서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도 성한 모습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는 유리가 깨어져 비닐을 붙이고 다니는 차도 있었다. 거리에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없는 흑인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굶주린 짐승들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들은 무언가 조그만 사건만 생겨도 금방 파리떼처럼 달려들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만일 문제가 생겨서 교도소에 들어간들 동료들과 따듯한 잠자리와 음식이 제공되니 집보다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흑인들은 교도소에 가는 것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낮에도 경찰차도 한 대로는 다니지를 못하고 두 대가 같이 다녔다. 사건이 터져서 신고를 해도 경찰은 일부러 상황이 끝난 다음에야 나타난다고 했다.
'더 좋은 삶의 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초라한 집의 문을 두드리자 뚱뚱한 흑인 할머니가 문을 빼쭉 열어 권 목사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문을 열어줬다. 권 목사와 나는 차의 트렁크를 열고 미리 준비한 헌 옷들과 통조림들을 재빨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둘러서 운반을 하다가 그만 봉지 하나가 밑바닥이 뜯어져서 깡통들이 길거리에 모두 쏟아지고 말았다. 주변의 흑인들을 의식해서 마음이 급해서 통조림들을 다시 주워담으면서 둘러 보니 벌써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흑인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쫓기듯 서둘러 물건을 가지고 들어가려는데 할머니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흑인들이 언제 습격할지 모르기 때문에 기르고 있는 무섭게 생긴 개들을 방에 가두어 놓고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송아지만 한 개 한 마리가 나타나서 덥석 앞에 선 권 목사에게 달려들었다. 할머니는 웃으면서 그 개는 물지 않는 개라며 괜찮다고 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나타난 것이 반갑다고 자꾸 앞발을 들고 달려들며 핥아대려는 통에 영 성가셨다. 방에 갇혀 있는 개들도 사람 냄새를 맡고 컹컹대면서 문짝을 발로 긁어댔다. 나오면서 문이 닫힌 다음 보니까 현관문에 '오늘은 나누어줄 음식이 없으니 문을 두드리지 마시오'라고 쓰여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권 목사에게 "집안에 물건을 잔뜩 쌓아놓고 왜 저런 것을 써 붙여 놓았을까?"라고 물었더니 "매주 화요일에 음식을 나누어 주는데도 배고픈 흑인들이 아무 때나 와서 문을 두드리기 때문에 그렇게 써 놓았답니다."라고 했다.
본디 교리가 간단할수록 생활이 율법적이 되게 마련이다. 안식일 교회, 여호와 증인이나 몰몬교처럼 미국산 신흥종교는 교리가 단순하기 때문에 훌륭한 신자가 되기도 쉬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