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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이 되었다. 일월 부터 12월까지 세상에는 수 많은 뉴스들이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었다. 다 기억하기도 힘든 사건과 사건의 연결고리가 뒤엉켜 버리기도 했으리라. 누군가 아마도 역사를 공부하던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잠언 같은 역사에 대한 기록을 되뇌어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물이라고! 그럴까? 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의 기록이 진실일까? 적자생존의 사회적 진화론의 결정론적 사유에 물든 자들에게는 그럴 수 있겠다. 혹자는 재미있는 비유를 든 적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라는 무대에서 가정법을 갖다 대는 무모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니컬한 입담의 살롱에서는 흔히 듣던 말이었으리라. 서양사의 관점에서 흔히 회자되던 말이었기에 말이다.
어떻든 1월부터 12월까지의 1954년의 시간을 ~주 욱~ 파노라마의 장면처럼 관상해 보자.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탄생들과 죽음들이 그 시간표에도 기록되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인공지능의 역할을 하는 기록물들의 생성으로 저절로 아니 컴퓨터의 빅데이터에 의해 끊임없는 사람들의 움직임. 사건과 기록 그 모든 문화활동들이 저장되고 있다.
사람. 사고. 사건. 출발 그리고 종료. 특정한 지정학적 환경이 그 무렵에는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인터넷 세상이 아니었으니.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는 오직 편지와 전신 전화 등의 아날로그 방식의 배달이 전부였으니. 한국 한반도 그 중심을 찾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한 번 열거해 본다. 오늘의 방식에서 기록물이 만들어내는 대중적 기록물이 드러내는 것들.
수없이 스쳐지나는 강물처럼 흐른다. 움직이고 저장되는 데이터의 흐름, 인터넷 공간에는 생물이 되고 있다. 그 물결 속으로 움직임 안으로 파고 들어가 본다. 대한민국의 한글로 올려진 위키피디아의 자료집을 휘둘러 살펴본다. 계사년, 금요일로 시작된 1월의 첫 날은 그해 12월 31일 금요일에 막을 내린다. 6.25 전쟁이 휴전이 되고 6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휴전협정 이후의 남북간의 실향민 문제가 시대적 화두가 되는 시점이었다. 한반도의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되는 순간 베트남에서는 1954년 3월 13일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점화가 되는 디엔비헨푸 전투가 시작된다.
전쟁을 끝내는 것이 목표였던 시절. 그러나 휴전으로 남과 북은 어정쩡한 상황에 마주친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었다.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되었으나 종전으로 이어지는 평화조약의 체결은 기약이 없었다. 전쟁 포로들, 난민들, 실향민들….각각의 휴전선 아래에서는 각자의 삶을 위한 치열한 움직임이 펼쳐지게 된 시점이다. 당연히 그 무렵에 떠오르는 단어들은 호흡하는 공기처럼 사람들 몸 안과 밖에서 떠 다니고 있었다. 제네바 회담, 매카시즘, 독도 의용 수비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변영태 외무장관, 미도파 백화점, 헌법 개헌안 부결과 사사오입 개헌,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부산 용두산 대화재, 알제리 전쟁 등등의 뉴스가 뒤엉켜 가는 중에 자유부인 논쟁이 흘러든다. 월드컵에 참가하여 스위스와 헝가리에 대패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참혹한 기록과 더불어 인구에 회자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자유부인이었다. 정비석의 소설을 황산덕 서울 법대학장이 비판한 논쟁! 이러한 논란 거리는 쉽게 사회 속으로 발화되어 인간세의 공간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씻어 보아도 삼삼한 이야기의 단초를 찾을 수 없었다. 한글 위키피디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미국의 1954년 위키피디아 영문으로 클릭을 했다. 미국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1954년은 한반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삼삼한 이야기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숫자 계산하는 방식이 눈에 띈다. 그레고리언 달력임을 명시하고 로마자(MCMLIV)로 표기했으며 두 번째 밀레니엄의 954번째 해이고, 20세기에서 54번째 해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 시작하면서 바로 5번째 년도임을 순번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미국에서 생성된 문서임에도 삼삼한 이야기가 관심을 갖는 부분이 5월1일자에 표기되었다. 그대로 한 번 옮겨와 본다.
May 1 – The Unification Church is founded in South Korea.
아예 컴퓨터 위키피디아 문서에서 복사해서 붙였다.
한반도의 남쪽 대한민국의 문서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록이 영문판 위키에 정확하게 나타났다. 한글로 다시 옮긴다. “5월 1일- 통일교회가 남한에서 창설되었다.”
이 부분에 이르게 되면 이 삼삼한 이야기는 어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승자가 되어 보지 못했던 민초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더 애착이 간다. 갈릴리 해변을 주유했던 나사렛 예수님의 자리일 수 있겠다. 예수님은 절대로 그 시대의 승리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만든 삶의 환경에서는 처절한 실패자였다. 법률가와 종교제도의 위계질서가 만들어 갔던 로마제국 식민지 상황에서 비탄에 빠진 민초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던 악의 구조물들을 제거하기도 했고 참 자유함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법을 선언해 갔던 예언자였다. 이야기는 이러한 서사 구조를 담고 있다.
다시 이 삼삼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이제 그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이 무대에 나와 주길 바란다.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청년기를 맞이하며 대학과 직장 혹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이제 인생의 고진감래를 다 겪어가고 있었으리라. 등장인물은 하나씩 보일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서 시대를 알려야 할 것은 당연한 일. 소나무 아래에서 각자의 이니셜이 남겨있지 않아도 적어도 그 소나무 아래에 다가서서 결의했던 마음들은 여전히 남아있을 터. 이제 정리해서 회계를 해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삶은 무대에 올랐다가 행했다가 분별과 느낌과 생각과 색과 공의 조화의 자리에서 움직여 갔지 않았나? 우리 삶의 결산을 나누기 위해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눈치 챘겠지만 삼삼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민초들이다. 그들의 욕망이 있겠지만 적어도 삼삼에 온 마음을 다해 헌신했던 사람들은 삼삼이 주는 하늘을 보았고 삼삼이 펼쳐가는 들판을 본 사람들이었다. 유토피아였다면 그렇게 분별해도 좋겠다. 따라서 승자들만 기록된 역사는 진정한 역사가 아니었음을 믿기에 시작하는 역사기록이다.
첫번째 등장인물은 통일교회라는 타이틀이다. 삼삼에서 통일교는 중요한 자기 반성의 거울이 된다. 왜 자기 반성의 거울이 되는가에 대한 것은 통일교의 탄생과 직결되는 이야기를 서사로 다시 남겨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되 짚어가야 할 시점이 되었다. 한국 기독교회사를 언급하면 걸출한 백낙준 박사의 저작물과 그의 제자인 민경배 교수의 한국기독교회사가 있지만 그 외에도 개신교가 아니라 천주교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들도 다수 있다. 최근에는 그 맥을 잇는 이덕주 교수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국 기독교 전래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천주교의 흐름보다는 개신교의 흐름에 삼삼이야기는 더 많은 서사의 빛들을 마주하고 있음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삼삼이 지향하는 시대의 흐름 혹은 섭리라는 단어가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자어 섭리는 삼삼에서 중요한 지표가 된다. 첫 번째 이야기 통일교로 이어지는 것 역시 개신교이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구한말 근대 조선의 개화기에 들어오는 과정에 대해서는 연세대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광린 교수의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라는 저작을 열람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미 백낙준과 민경배 그리고 이덕주 교수의 저서에 다 포함되는 내용이긴 하나 더욱 더 세밀한 이야기가 생생히 증언되는 역작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개혁이라는 말을 여기서 꺼내야 할 것이다. 개혁은 다른 말로는 혁명이기도 하다. 또 다른 온건한 말을 빌어온다면 변화 혹은 개량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틀리는 것은 아니다. 변화는 중요한 말이다. 우리는 변화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티즘의 자리를 삼삼의 이야기 서두로 꺼내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흐름 전반에 흐르는 변화의 물결을 타고 오는 양식은 언제나 박해의 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 기독교가 출렁거리는 물결처럼 와 닿았던 시기는 여러 차례였다고 기독교 사가들은 표현한다. 이미 중국의 당나라를 통해 신라에 기독교의 이단으로 불렸던 경교가 접하고 있었으며, 13세기 몽고의 고려침공 무렵에는 압록강 가에 함께 했던 윌리엄 루부르크 선교사가 교황청에 쓴 편지에 나온다. 한반도에 대한 선교실현을 기도문의 형식으로 보고한 편지였다. 여기서 그는 '코리아'라는 표기를 사용했다. 16세기의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을 통해 기독교는 한반도에 상륙했었다. 고니시 휘하의 장병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포르투갈 수사 세스페데스의 파송으로 전후 일본에 잡혀간 포로들을 위해 전도의 문을 열게 된 기록이 전해진다. 후일 일본의 기독교박해 시기 이들을 통해 순교자들이 나왔다.
어찌보면 박해와 순교는 변화의 출발이자 동력이었다. 우연한 일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처럼 한반도에 접근한 기독교는 모두가 다 우리 민족이 처해 있던 비극적 전란 혹은 시대적 아픔의 자리에 있었다. 개신교의 형태로 쇄국정책을 펴던 조선 왕조의 문을 두드리던 시기였다. 근대 조선조 말기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반도의 우리 민족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이미 18세기의 조선 땅에서는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변화의 움직임을 터득한 개종 천주교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간 가톨릭의 순교와 수난의 자리는 피할 수 없었던 기독교 전래의 굳건한 뿌리가 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완고한 조선양반사회의 토대에서 서학은 사교였다. 뿌리깊게 뻗어내린 유교의 위계질서는 기독교의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미 문명개화기의 시점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철저하게 문빗장을 단단히 잠그고 있었다. 더 자세한 시대배경을 참고하려면 이미 언급했던 학자들의 저서와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만큼 시대는 격랑의 파고가 높이 치달아 오르는 상황이었다.
먼저 개항한 일본은 한반도에 자신의 영향력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뻗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강화도 조약으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고 바로 이어서 친일세력을 확보하며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의 치욕을 우리 한민족에게 주면서 식민지로 만들었다. 어찌보면 기독교, 특히 개혁의 종교로 변화한 프로테스탄트의 개신교는 어김없이 한반도 어둠의 시기, 처절한 아픔과 슬픔 죽임에 온 천지에 가득찬 상황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미 개신교는 천주교의 토양이 마련해 온 무대위에 서 있게 된 형국이었다. 그러나 시기가 절묘했다. 또한 세계적 전염병이 괴질로 세상을 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역병과 괴질, 신학문에 대한 열망, 새로운 서양의료의 도움과 기독교계 학교들의 잇단 개교 등으로 조선 한반도는 간접적으로 기독교의 영향권이 싹을 내고 줄기를 내고 있었다. 교파위주로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된 한반도는 여러가지 국제정세의 시대의 흐름 안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력이 서서히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것 역시 삼삼에서는 중요한 카이로스의 시기로 받아 들인다. 기독교가 두드리고 두드려서 오게 된 세 번째 열린 문이 된 것이다. 여기서 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에 대한 평가를 내린 언더우드 선교사의 언급을 따옴표에 담아 본다.
“사실 한국에 와서 보니 듣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한국인의 성격이 명랑하고 접하기가 매우 편하였다. 한국인은 중국인처럼 느릿하지도 않고 일본인처럼 들떠 있지도 않았다. 즉, 한국인은 중국인이 철석(鐵石)같이 완고하고 보수주의를 지키고 있는 것과 달리, 또 일본인처럼 변덕기를 갖고 있고 가벼운 적응성을 갖고 있었던 것과는 달랐다. 한국인들은 찬성할 때나 반대할 때 냉정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화가 참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전통으로 되어 있던 신념이나 관습도 경솔하게 버리지를 않고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중국인과 같이 낡은 종교에 헌신하지도 않고, 과거의 전통에도 성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며, 일본인처럼 모방적이고 야심적이지도 않았다.”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우리나라 근대화와 선교활동-,' 1991년 연세대학교 출판부. 22면.
언더우드 선교사가 파악한 한국인의 장점을 이광린 교수가 담아 낸 것이다.
개화백경 신문화의 도래와 더불어 함께 한 한반도의 기독교의 발아는 교육의 토양에서 이뤄진다. 배양영재의 고종황제가 아펜젤러 선교사에게 하사한 교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교육이었다. 가르침이었고 계몽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품격있는 인재양성의 자리로 자연스럽게 지향점을 찾았다. 힘을 잃어버린 국가는 단박에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본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한반도의 개신교의 전개는 당연히 민족교회로 지향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신앙이 바로 민족의 독립과 함께 하는 정체성의 확립이 되었다. 뜻을 높이 세운 유학자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반도의 경계선을 넘었다.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가산을 정리하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었다. 유명한 모델로는 만주의 명동촌에 자리잡은 용정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송몽규 열사와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시인의 고향이다. 모두 유학자의 살신성인의 가르침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마을이었다. 그 후 1919년의 3.1 독립만세의 함성이 한반도 방방곡곡에 울려퍼지고 해외 동포들도 함께 했다. 미국 기독교회가 언급한 다음의 말은 지금 다시 언급해도 기독교가 식민치하의 한국민들에게 어떻게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예수 교인만이 참혹한 식민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한국민입니다.”-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성서와 기독교, 연세대 출판부, 381면.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문제위원회 편, The Korea Situation(1919,4.30), 재인용)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집요한 면이 있었다. 각종 당근과 채찍을 통해 그리고 이간질의 첩자와 고도의 심리전을 적용하면서 식민지를 구석구석 다스리고 있었다. 이미 서구 식민지 정책을 연구하면서 배웠던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경험을 재 적용해 갔다. 사회적 문화적 대 변혁의 시대였다.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과 이미 씨앗을 배태해 가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는 식민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기독교회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전래되는 사상적 변화의 조짐들은 그대로 식민지에서도 퍼지고 있었다. 일본 식민제국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사상범의 대상을 사회주의자들에게도 그대로 폭을 넓혔다. 민족교회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기독교 개신교였다. 세월이 흐르고 사회적 변화기에 기독교의 신앙의 힘도 무뎌지고 있었다. 사회적 기독교 운동의 도래 종파적 다양성의 확산 그리고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로 교회는 이미 초기의 순수했던 열정이 다변화 되어 가고 있었다. 이 무렵에 주목하게 되는 현상이 신비주의적 경향의 기독교 였다. 한민족에 스며들던 기독교의 정체성의 또 다른 한 면이 부각되는 이유는 이미 밝혔다. 민족의 독립과 일체감을 이루었던 기독교계의 신앙은 일제식민지 정책의 유화와 또 다른 세계전쟁의 참전으로 변화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 현실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지연되어 가고 있었다. 초기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빼닮았다. 현실안주, 신사참배의 강요에 진실된 신앙의 길은 무엇일까? 하늘로부터의 직접적인 심령의 길을 추구하는 산상복음적-소종파적 신비주의 모임이 유독 강하게 민초들에게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삼삼 이야기는 이 신비주의 성향의 기독교 운동의 맥을 되짚어 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제대로만 그 맥을 이어갔다면. 하지만 오염물질이 흘러 들었다. 샘터에. 수 많은 스캔들- 성 추문과 상처들이 이 귀한 샘터를 오염시키고 말았다. 이순화의 새신대 천국건설운동, 남방여왕의 순회전도운동, 김성도 새주님파, 유명화, 백남주, 김백문, 황국주, ,,,,이 반열에 유독 눈에 띄는 한 분이 있다. 독립운동가인 한진교 선생의 다른 이름, 한에녹의 영원한 복음,,,,, 한에녹에 대한 실질적인 기록은 한진교 라는 이름으로만 제대로 밝혀진다. 한에녹의 한때두때반때의 풀이는 본 삼삼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단초가 된다. 암울했던 식민지시절 오직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냈던 한진교 선생은 뜨거운 신앙의 사람이었다. 기억해 본다. 영원한 복음-한 때 두 때 반 때의 표제어!
2023년의 1-4분기 진행중인 시점에 다시 꺼내 보아야 하는 이유다.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넷플릭스 다큐-나는 신이다!-를 보고 또 보면서 한 괴물의 등장과 연결되었던 시절이 뿌옇게 떠오른 부유물처럼 말갛게 가라앉았던 샘터를 어지럽히고 있다. 삼삼이야기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다. 3-3 그 셋이라는 이야기가 담아야 했던 결의는 절대로 아니었음을 알려야 하는 의도로 준비했었다. 어쩌랴! 불가피하다. 피할 수 없다. 이 부유물을 걸러야 내가 마실 수 있는 샘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분명 해일이 몰려왔다. 후쿠시마를 죽음으로 몰고간 쓰나미다. 다시 작가가 독자를 염두에 둔 글을 챙기고 허기진 배를 채워가듯 나는 조금은 각도를 변경해야 했다. 칼 세이건이 나사 프로젝트에서 보이저에 달린 우주 카메라의 앵글을 돌리게 했듯…. 하여 그 유명한 베스트 셀러의 목록에 기록된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사진 한 점이 전하는 반성적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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