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운 수필가의 진해소재
작품과 그 내력 찾기
오하룡 시인
들어가기
김소운 수필가는 누구인가
1) 연보
2) 진해와의 연고
3) 마산과의 연고
김소운 거주지와 문학의 중요성
김소운 수필가의 창원 소재 작품
들어가며
진작부터 김소운(金素雲) 수필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진해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작품이 얼마나 되는지 다 모아보면 좋겠다는 생각 또한 당연히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그의 작품에서 관련 작품을 모두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더욱 거기에 연관된 배경이나 연유까지 살피는 것은, 그를 본격연구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어서 필자 같은 어중가비가 쉽게 나설 일이 아니었다.
우선 아쉬운 대로, 김소운 선생이 우리지역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는 정도만이라도 지역 독자들을 위해 미리 소개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진해문학> 2호(1991년)에다 쉽게 눈에 띄는 그의 대표작품 몇 편(고향 아닌 고향, 창원장날, 살아있는 덕조, 토마토 덕분으로 모면한 위기, 안민령 천자봉의 산용(山容)만이, 못 버리는 이율배반, 도마소리, 카츄사)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1997년의 경남문협에서 펴낸 <경남문학선집>에 ‘도마소리’, ‘동몽연기(童蒙年紀)’, ‘운명론자’를 소개하였다. 이것은 필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접근 방법이었으며, 좀 더 심도 있게 접근하는 것은 다음에 차차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이번에 진해문화원의 연간 <진해문화> 편집진이 김소운 선생의 진해관련 문학을 특집으로 기획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김소운 문학을 처음으로 앞서 <경남문학선집>과 <진해문학>에 소개하는데 관여했던 인연으로 외람되게도 필자와 김소운 문학이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필자 능력의 미력함에 비쳐 보아서는 벅찬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김소운 문학의 애독자로서, 억지로라도 김소운 문학과 좀 더 친숙할 수 기회가 된다는 데 의미를 두더라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이렇게 서투나마 길을 열어두면, 앞으로 진해관련 김소운 문학을 본격 연구하는 분이 나서게 되는 지름길이 되리라는 희망도 가져 보는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김소운 문학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의 저서 확보가 기본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 업적이 방대하기 때문에 그 모두를 파악하기에는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차피 그의 연구에 본격 나설 수도 없는 입장이므로, 부끄럽지만 쉬운 방법으로 <김소운수필문학선집(金素雲文學選集 전5권, 1978, 아성출판사)>에 의존할밖에 없음에 이해를 구해야 될 것 같다.(이후 ‘김소운수필문학선집’은 ‘선집’으로 표기)
김소운 수필가는 누구인가
김소운 선생에 대해 가장 직설적인 평가는 선생의 사후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소설가 조용만(1909-1995)이 육당 최남선의 언급을 소개한데서 잘 드러난다.
“해방 전 이야기인데, 무용가 최승회가 동경을 비롯한 일본 각지를 순회하면서 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우리나라 민요를 소재로 한 무용을 발표해 절찬을 받고 있을 때, 최남선이 일본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젊은이의 우수한 재질을 보여준 사람으로 최승희와 김소운을 꼽았다. ‘최승희는 물론 천재적인 무용가지만 김소운도 그에 못지않은 천재야. 소운의 일본말 표현은 일본사람 자신들도 얄미울 정도로 잘 되었다고 놀라고 있거든!’”(조용만, 중앙일보 1985.2.4.)
김 수필가는 1981년 11월 3일 별세했다. 1908년생(양력 1월 5일, 음력으로는 1907년 12월 2일이니 만 73세 때이다. 그러니까 선집이 1978년에 나왔으므로 선집이 나온 후 3년째에 별세한 것이다.
“음력으로는 12월 2일이란 내 생일이 양력으로 바꿔지면서 1월 5일로 되었다. 1년이 늦추어진 셈인데, 호적에는 음력과 같은 해(丁未年)로 되고 날짜만 1월 5일로 고쳐졌다.”(선집 5. 白秋城, 112P)
그동안 단편적으로 책이 나올 때 마다 약력이 붙었으나, 선집의 권말에 실린 것이 본인이 평생을 통해 최종적으로 정리한 연보로 보이므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진해(창원 포함)와의 연관된 부분을 챙겨보기 위해서는 다소 장황하나 연보를 중심으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국립 중앙도서관의 자료도 찾아 보완하고 본문 중에서 사실을 인용하는 노력도 병행하나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본격 연구한 결과가 아니어서 회의감을 어쩌지 못한다.
1) 연보
김소운은 본명 김교중(金敎重), 필명 김소운(金素雲)으로 나중 호적을 만들며 호적명도 이 필명으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40대 이후 한때 소운에 싫증을 느껴 가운데 자만 바꾸어 김소운(金巢雲)으로 쓴 적도 있다.(선집2. 筆名始末記, 323p)
#1908년 1월 5일(음 1907년 12월 2일).(필자 주; 이 자료를 본인이 직접 검토한 최종 자료로 보았을 때, 현재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위키백과 등이 음력 연도 1907년과 양력 생일 1월5일을 생년월일로 쓰는 것은 오류로 보임. 음력 연도 1907년을 쓸 것 같으면 생일을 12월 2일을 쓰고 음력 표시를 해야 할 것으로 보임.) 부산 절영도(絶影島, 오늘의 영도)에서 구한말탁지부(구 韓末度支部)관리 김옥현(金玉顯, 모 朴德水)의 장남으로 출생한다. 이듬해인 1909년 경남진주에서 부친이 동족에 의해 피살된다.
부산 절영도의 재력가였던 조부모(祖父母) 일가가 2개월여 아들의 장례에 몰입해 있는 동안, 관리자의 배신으로 재산을 잃고, 그 충격으로 가솔을 이끌고 1911년 진해로 이거(移居)하게 되면서 진해와 인연을 갖게 된다.
“출생은 부산 영도. 그 후 조부모님이 일족을 거느리고 진해로 이주하게 되어 본적지가 창원군 진해면 덕산리로 옮겨졌다.”(선집 2. 회상의 북녘땅-고향 아닌 고향, 375p)
이때 모친은 시부모와의 불화로 아라사(제정 러시아)로 떠나게 되어 모친과 생이별하게 된다.(선집 5. 미운 어머니, 17p)
#1914년(7세) 진해면 경화동 사립 대정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1915년에는 김해읍의 고모댁으로 옮기게 되어 김해공립보통학교 1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이때 하학 후에는 정운회 한문사숙(鄭雲會漢文私塾)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 통감(通鑑) 등을 배운다.
#1916-19년(9-12세)에 부산 절영도 사립옥성(玉成)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다니게 된다. 조부모네는 계속 진해에 거주했으나 막내 삼촌이 절영도로 나와 이발소를 하고 있어 따라 나온 것이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옥성학교 시절 독서기록은 그의 초기의 지식형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육당 최남선이란 이름을 <나는 불쌍한 동무>라는 책에서 처음 알았다. 일본어로 번역된 책으로는 <플란다스의 개>란 이름으로 이 책이 나와 있으나 어려서 읽은 그 감명과는 비할 나위가 없다.
<누구의 죄> 같은 탐정소설이며 H.G. 웰즈의 과학공상소설(요즘 SF라고 약칭으로 부르는 <타임머신>같은 것도, <항시기(航時機)>란 것도 이 시절에 읽었다. 하나밖에 없던 국문 신문 매일신문의 연재소설은 거의 빠짐없이 읽었다. 아마 민 우보(閔 牛步)의 번안인가본데 말로 원작인 <부평초(浮萍草, 일역 집 없는 아이)>도 기억에 남는 신문소설의 하나이다.
춘원의 첫 작품 <무정(無情)>은 책 어느 쪽 페이지에 무슨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것까지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겨우 여남은 살 어린 주제로도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흥미와 관심은 있었다.(선집 5. ‘새 시대의 맥박이’, 28P)
#1919(12살)년 양계초(梁啓超)의 <월남망국사>를 읽게 되고 여기에 자극받은 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구라파각국 소년병사들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데 자극되어 절영도소년단을 창설하고 단장이 된다. 여기에 가까운 혈족인 이모 박정수(朴貞守, 후 海辰)가 20세전 처녀의 몸으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투옥되는 현장도 목격한다.
이런 요소들이 김소운의 애국정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제에 의해 소년단은 곧 해체의 운명을 맡게 되고 이에 반발하여 옥성학교를 졸업(당시 4년제)도 못하고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다.
#1920(13살)년 8월 대여섯 살 위의 종형과 함께 비상금 2원(圓)으로 산 영국담배 웨스트민스트 200개비 한통을 기관장에게 커미션으로 건네고 석탄운반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을 하게 된다. 미리 와 있던 고모가 오사카에 살고 있었으나 오래 신세질 형편이 못되었다.(선집5. 恩讐의 첫길, 39P)
#1921-3년(14-16살)나름대로 도쿄로 옮길 궁리를 하며, 애독하던 소년잡지(소년의 벗)를 통해 형편을 살핀 후 도쿄로 떠난다. 이 소년 잡지는 독자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취직도 가능한 것처럼 농촌이나 빈민 문학 소년들을 현혹시켜 왔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모른 채 기대했던 소년 잡지사를 찾아갔던 그는 형편없는 개인의 영세 업체에 불과한데 크게 실망하고, 하루를 꼬박 굶을 채 절망하며 헤매고 있을 때 마침 명문대(와세다대 재학) 고학생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야마토상점(大和商店)이란 데 취직을 하게 된다.
인정이 많았던 주인 덕분에 안정을 되찾으며 도쿄 가이세이(開成)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공부의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형편도 기복이 심한 사회여서, 그가 취직한지 겨우 1년이 될까 말까한 시점에, 야마토 상점이 문을 닫게 되면서 그는 다시 거리의 고학생의 길에 들어선다.(선집5. 도서관대학, 47P)
신문팔이 시절의 일화에 이런 사실이 있다. 비가 와서 길이 질척이는 날, 신문을 쌓아놓고 팔고 있는데 중학생 한 떼가 지나가며 흙물을 튕겨 신문을 버려놓고 가 버린다. 억울한 그는 그 학교를 찾아가 보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학교의 반응이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왜 학생들만 그러했겠느냐, 그 길을 이용하는 다른 사람들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니냐?’ 하는 식의 대응이 나왔던 것이다. 그는 억울한 심정을 당시 제법 인기가 있던 신문(미야꼬신문, 東京新聞 전신)의 독자란에 투고를 한 것이다.
“누구라 즐겨서 고학을 하랴. 탁류를 거슬러 노 젓는 괴로움-, 어느 때는 다 내던지고 흐르는 대로 흘러가고 싶은 유혹과도 싸워야한다. 부모의 슬하에서 편한 공부를 하는 그대들에게 단 하루만이라도 고학의 맛을 보여주고 싶구나-(선집5. 미야꼬신문, 50P)”
이 기사를 보고 근처의 화류계 기녀(妓女)들이 신문을 사러 오면서 잔돈을 두고 가거나 기어이 근처의 괜찮은 식당으로 데려가 음식을 대접하는 여자들도 있다.
김소운은 이 불행한 여성들로부터 호의를 받는 것이 자존심에 걸린다. 잔돈을 두고 간 여성을 따라가서 돌려준다. 음식 값을 치르고 갔는데도 식당주인에게 다시 음식 값을 치르고 그 여자가 오면 돌려주라고 요구한다. 여기에 대해 훗날 김소운은 이렇게 밝힌다.
“지금 와서 나는 소년기의 귀염성 없고 괴팍스러웠던 나 자신을 미워한다. 그때 그 여인들을 만일에 지금 만난다면 백 번이라도 사과를 하고 싶은 그런 심정이다.(선집5. 도서관대학, 52P)”
이 여성들의 관심을 피해 당시 최고의 장소로 꼽히던 장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자신은 더 못한 장소를 선택하여 신문장사를 계속한다.
“열넷에서 3년 동안 이 가이세이(주간은 開城중학교, 야간은 開城中等이라 불렀다.)중등에 학적을 두기는 했다. 그러나 주간인 가이세이중학교 모표에 초승달이 더 붙은 가이세이 중등학모를 쓴 시간은 도합 해서 1년은 못될 것 같다. 근로소년을 상대로 하는 이 중등학교는 결석에 대해 관대하다. 직업이 바뀔 때 마다, 거처가 달라 질 때 마다 학교를 한동안씩 쉬는 것은 소학교 때부터 내 몸에 배인 습성이다.
그 대신 낮에는 틈만 나면 도서관에 간다. 학교 공부와는 차원이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거기 있다. 푸시킨,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홉, 휘트만, 카아핀터, 키이츠, 하이네, 바이런, 베를레에느, 스콧, 테니슨, 하우프트만-, 명치 중기 이후 일본의 작가 시인군 이와노 호오메이(岩野泡鳴), 기다무라 도오고꾸(北村透谷), 구니끼타 도꾸보(國木田獨步), 시마자끼 도오손(島岐藤村), 기타하라 하쿠슈(北村白秋), 센께모또마로(千家元磨) 들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들의 작품을 처음 대한 것도 이 시기이다.“(선집5. 도서관대학, 52P.)
그는 이 기록에서, 이 부분은 도서관대학의 예과 부문이고, 본격 공부는 동경대진재이후 동경, 대판에서의 도서관 공부와 서울에서의 매일신보 학예부기자를 한 5-6년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실토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는 대학에서 월사금 없이 1년쯤은 교실에 드나들어도 아무도 탈잡는 사람이 없어 자신도 사립대학 두 서넛을 돌며 공부 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1923(16세)년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혹은 동경대진재)로 동포들에게 큰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일본 전체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므로 오사카 숙부댁으로 옮겨 반년을 보낸 후 귀국하게 된다.
#1924년(17세) 2월, 외가와 본가의 친척이 있는 부산에 있던 차에 외가 쪽과 친면이 있던 언론인 오택(吳澤)씨의 소개로 동인지 백조(白潮) 등을 통해 명성을 듣고 있던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 범부 김정설(凡父 金鼎卨), 포석 조명희(抱石 趙明熙),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등 여러 문단 선배들을 만나 교유를 트게 된다.
“그해 봄에 서울엘 왔다. 듣고 보는 것이 새로웠다. 공초, 범부, 포석-이런 분들에게 소개장을 써 준 이가 외가댁에 자주 드나들던 오택(吳澤) 씨-양쪽 귀 옆에서 턱까지 ‘와그너 수염’을 기른, 3.1운동 때 2년 복역을 마치고 나온 ‘신문장이’었다. 오택 씨는 그 전후해서 새로 생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들의 지국을 경영하면서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던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씨와는 사제(師弟)의 의(誼)로 특별히 가까웠던 분이다.”(선집5, 애련의 가시밭길, 55p)
역시 외가 쪽과 친분이 있던 언론인 김학수 씨 소개로 그해 5월 경성 명치정(明治町, 지금 명동)에 있는 <제국(帝國)통신> 지사에 나이를 다섯 살 보태어 입사, 전문(電文)을 원고에 옮겨 쓰는 일을 맡는다. 이해 창간된 시대일보(時代日報, 사장 崔南善, 주필 秦學文)에 제국통신의 축사를 전달한 인연으로 최초로 습작 시 ‘가을’, ‘신조(信條)’ 등을 발표한다.
“내 숙소는 지금 도동(桃洞)이라고 하는 요시노마찌(吉野町)를 지나 미사까오오리(三坂通)에 있었다. 동향인 김학수라는 오오사까마이니찌(大阪每日)의 지국기자- 거기를 부산 외가댁에서 소개해 주었다. 나는 그 김 씨 댁 방 하나를 빌려 거기서 기거를 하면서 역시 그 김 씨의 주선으로 데이쯔으(帝通)라고 부르던 데이고꾸쯔으신(帝國通信) 경성지사에 견습 기자로 들어갔다.”(선집 5. 蓮이, 61p)
이 무렵 첫사랑인 ‘연(連)이’ 와의 파경으로 직장을 나와 도보로(1925년 6월) 부산으로 내려가는 모험을 한다. 부산에서는 오택 씨 댁에 기거하며 그가 경영하는 조선일보 부산지사 일을 돕게 된다. 9월에 첫 시집(연보에는 시첩(詩帖)으로 표기하고 있다) <출범(出帆)>(友文館)을 부산 초량의 경남인쇄주식회사에서 조명희(趙明熙) 서시, 안석영(安夕影) 장정, 나혜석(羅蕙錫) 속표지그림으로 하여 500부를 인쇄한다.
그러나 인쇄비를 지불하지 못하여 아쉽게도 견본정도 10여부를 찾는 것으로 끝내고 만다. 1926년 8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도쿄 부근 교포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구전민요(口傳民謠) 채집에 몰두한다. 시라토리 쇼오고(白鳥省吾) 주재의 시지 <지죠라꾸엥(地上樂園)>에 조선의 농민가요를 6회 연재하게 된다.
이것이 일본에 우리의 구전민요(口傳民謠)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 된다. #1927년(21세)에 지죠라꾸엥 동인들의 입회로 영문학을 전공한 아홉 살 연상의 오가와시즈코(小川靜子)와 동거에 들어간다. 오가와는 당시 유명한 도쿄의 <정칙(正則)영어학교>를 나온 여자로 저명한 영문학자 사이토히데사부로오(齋藤秀三郞)의 문하생이었다(선집 5. 白秋城, 116p, 上典의 수염, 136p, 조각구름 먹구름, 149P).
#1928년(22세) 9월 조선민요집을 일본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에게 미리 보여준 인연으로 그의 개인적인 초대로 도쿄 간다(神田)의 한국식 식당 명월관에서 김소운 소개의 밤을 가진다. 시인 하기하라사꾸다로오(萩原朔太郞), 음악가 야마다고오사꾸(山田耕作), 양화가 야마모도(山本鼎), 극작가 나카다(長田秀雄) 등 각 방면 원로인사 20여명이 참석한다.
#1929년(23세) 8월, 일문판 <조선민요집(朝鮮民謠集)>을 시인 기타하라하쿠슈 서문, 음악가 야마다게이사꾸(山田耕作) 채보, 기시다류세이(岸田劉生) 장정으로 도쿄(泰文館)에서 간행한다. 10월 귀국한다. 서울 매일신보사에 학예기자로 입사한다. 이후 2년간 전국독자의 협력을 얻어 각지의 구전동민요(口傳童民謠) 3천여수를 채집한다.
#*1930년(23세) <애상시편(哀想詩片)>, <승천(昇天)한 바닷물>이 신민사(新民社)에서 나온다.
#1931년(25세) 11월 신문사를 그만두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구전민요집을 출판하기 위해 동양문고, 명계회(茗溪會), 학사회관 등과 교섭에 나선다. 이 무렵 동양대, 일본대 등에서 청강하며 이른바 넝마주이 공부에 열정을 쏟는다. 햇수는 정확하지 않으나(필자의 짐작으로) 이 사이 시즈꼬와의 수년간의 별거에 따라 조선여자 H, J형제와 일본여자 T와의 혼사와 염문으로 하여 깊은 갈등을 겪는다(선집5. 조각구름 먹구름,149P, 단추와 단추 구멍, 185P).
#1933년(27세) 1월, 일본의 민속학자 쯔지다교오손(土田杏村), 신무라이즈무(新村出) 두 사람의 주선으로 순 한글판 <조선구전민요집(朝鮮口傳民謠集)>을 도쿄 <다이이찌서방(第一書房)>에서 간행한다(선집5. 조선구전민요집.144P). 때를 같이 하여 한글판 원본과 가사번호로 연결된 초역 <조선동요선(朝鮮童謠選)>과 <조선민요선(朝鮮民謠選)>을 각각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간행한다.(선집5. 岩波書店 145P.)
8월 들어 여기에서 얻은 자금을 밑천으로 귀국하여 소년잡지 <아동세계(兒童世界)>, <신아동(新兒童)>, <목마(木馬> 등을 4년 동안 간행한다.
#*1935년(28세) <동요에 나타난 어머니>가 (가톨릭청년사)>에서 나온다. #*1937년(30세) <아츰이슬, 민요>, <못가겠네, 성진지방민요>, <파랑새, 동래지방민요>, <농부가, 민요>가 <조선금융연합회(朝鮮金融聯合會)>에서 나온다. #1940년(34세) 5월, 다시 일본으로 가서 처음으로 조선대표 시인들의 일역시집 <젖빛 구름(乳色의 雲)>을 도쿄 (河出書房)에서 출간한다. 1941년(34세) <조선민요집(朝鮮民謠集)>을 도쿄(新潮社)에서 출간된다.
#1942년(35세) 4월, 사화(史話; 三韓昔語>(도쿄 學習社), 6월 동화집 <석종(石鐘)>(도쿄 東亞書院), 11월 동화집 <푸른 잎사귀>(도쿄 三學書房), 평전 <은전목공(恩田木工)>을 연달아 출간한다.
#1943년(36세) 4월, 증보판 <조선사담(朝鮮史譚)> (도쿄 天佑書房), 동화집 <황소와 칡소(黃牛와 黑牛)>(天佑書房), 8월, <조선시집(朝鮮詩集,전기)>, 10월, <조선시집(朝鮮詩集, 후기)>을 각 도쿄(興風館)에서 출판한다.
#1944년(37세) 1월 태평양 전쟁의 격화에 따른 민족감정의 불협화음으로 그때까지 동거하던 오가와시즈코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1945년(38세) 1월, 북만주로 여행을 떠나 시인 청마 유치환과 하얼빈에서 재회한다. 6월, 김해 활천산 중턱의 김해김씨 재실에서 아키다 견 <다로오>와 더불어 자취생활을 한다. 8월, 언론인 석천 오종식(昔泉 吳宗植)의 권고로 강원도 월정사로 2-3년간 입산 하려 한 3일전에 8.15해방을 맞아 무산된다. 10월, 종제 용환(龍煥)과 같이 부산 광복동에서 그릴 <백랑(白廊)>을 경영하며 귀환동포 자제를 위한 근로소년 한글강습회와 일요문학강좌를 진행한다.
11월 서울 연무관도장에서 한글학자 이극로(李克魯) 주례로 동향인 김한림(金韓林)과 결혼한다.(김한림은 ‘약산의 천주사’편에 평북 정주 정화고녀 가사 선생으로 나오는 R이 그녀로, 여기에 자세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선집 5. 247p)
“그때부터 R의 영상이 내 마음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서 이번에는 나 혼자 또 한 번 영변을 찾게 된 것이다. R은 1년만의 재회를 진심으로 반기면서 나를 위해 약산 동대 중턱에 있는 천주사에 교섭해서 방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며칠을 거기 묵는 동안 5리가 넘는 산길을 일부러 학생을 시켜 매일같이 우유니 도우넛을 보내 주었다. 물자며 과자 등속이 몹시 군색하던 시절인데도 나는 R의 덕분으로 결핍을 몰랐고 R을 따라 학부형네 댁에서 여러 차례 저녁 초대를 받기도 했다. R도 틈을 내어 자주 천주사 까지 찾아 주었다.
부녀들이 몸빼를 입던 시절에 치마저고리로 몸단장을 한 R이 고국냄새에 주렸던 내 눈에는 초생 달처럼 신선하게 보였다. 달 없는 밤 팔각정까지 산책 나갔던 길에 우리는 그 정자에서 처음으로 입을 맞대었다. R이 서른둘, 내 나이 서른아홉-. 벌써 청년기는 지났는데도 마음은 소년처럼 어렸다.“
#1946년(39세) 5월 동래로 들어가 양돈, 양계, 젖양 사육, 육묘 등 원예생활을 시작한다. 1948년(41세) 1월, 월탄 박종화 등 몇 분의 협찬을 얻어 국내 최초로 상화(尙火) 시비(詩碑, 나의 침실로)를 그의 고향 대구 달성공원에 건립한다.(선집 1. 상화시비제막기, 87p) 9월, 서울 명동에 출판사 청려사(靑驢社)를 세워 주간 풍자지 <만화행진(漫畵行進)>을 발간했으나 10월 10일의 여순반란사건으로 가판 금지를 당해 그만둔다.
#1950년(43세) 3월, 개정판 <조선구전민요집(朝鮮口傳民謠集)>(서울 永昌書館)이 발간된다.
#1951년(44세) 7월, 동란속의 한국을 지옥으로 부르고 일본을 천국이라고 한 주간 일문 잡지 <선데이 매일(每日)>의 좌담기사를 묵과할 수 없어 ‘일본에 보내는 공개장’ <목근통신(木槿通信)>을 <대한신문(大韓新聞)>에 연재한다. 11월, 목근통신의 번역문을 일본 작가 가와바다야스나리(川端康成, 후에 노벨문학상 수상)를 통해 일본 종합지 <중앙공론(中央公論)>지에 특별기고로 전재하여 일본국민의 큰 반향을 일으킨다.
#1952년(45세) 3월, 동화집 <보리알 한 톨>(부산 首都文化社)이 간행되고 7월에는 수필집 <마이동풍첩(馬耳東風帖)>(대구 高麗書籍)이 나온다. 9월 유네스코초청 이태리 베네치아 국제예술가회의에 소설가 김말봉, 조각가 윤효중, 극작가 오영진, 건축가 김중업 등과 참가한다.
12월, 프랑스 말세이유 항에서 프랑스선박으로 지중해 인도양을 거쳐 일본 요코하마 항에 닿는다. 그러나 회의 참석 전에 일본을 경유하는 도중 도쿄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 인터뷰한 내용이, 당시 집권 자유당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주일대표부 유모 공사의 직권으로 여권이 압류되어 귀국길이 막힌다. 이후 타의에 의해 13년간 일본에서 체류하는 운명을 맞는다.
#1953년(46세) 3월, <조선시집(朝鮮詩集)> 합권이 도쿄((創元社)에서 나온다. 6월, 동화집 <당나귀 귀의 왕>이 도쿄(講談社)에서 나온다. 민화집 <파를 심는 사람>이 도쿄(岩波書店)에서 나온다. 1954년(47세) 4월, 일본 전국 학교도서관 협의회 추천도서대상 6천 권중 9권의 하나로 <파를 심는 사람>이 선정된다. 11월, 문고판 <조선시집>(岩波書店)이 나온다. <마이동풍첩(馬耳東風帖)>이 대구(南鄕文化史)에서 나온다. 1955년(48세), 삼오당 잡필(三誤堂雜筆)이 대구(進文社)에서 나온다. 삼오당에 관한 김소운의 변(辯)이 재미있다.
“-지구위에 허다한 나라를 두고 하필이면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제1의 과오가 아닐 수 없고, 이왕 태어났으면 농사나 짓고 장사나 할 것이지, 인간의 운명이니 감정에 관련된 문필작업 같은 이런 고생길을 택했다는 것, 이것이 둘째 과오-, 또 하나 그런 괴롭고 불행한 가시밭길을 택했거든 콜레라, 장티부스, 별의별 병이 다 많은데, 30전후에 죽어서 애석하다는 소리나 들어볼 것이지 죽지 않고 살아서 응시소매(應時小賣)의 잡문 부스러기를 쓰고 앉았다니, 이게 무슨 과오일까 보냐?- 이것이 내 신학설인 삼오당 변이다.(선집 1. 푸른 하늘 은하수, 231p)"
7월, <파를 심는 사람> 영역 <스토리 백(story bag)>이 히가시(東節子)역으로(charles.E.tuttle.co)출판된다. 9월, <파를 심는 사람> 판화전을 도쿄 <신쥬꾸화랑(新宿畵廊)>에서 갖고, 이어서 발레 공연이 10월 도쿄 <다이이찌 세이메이 홀(第一生命)>에서 일본인의 손으로 개최된다. 12월, 일문 수상집 <아직 희망은 버릴 수 없다>(河出書房)가 간행된다.
#1956년(49세) 4월, 일문 수상집 <아시아의 4등선실(四等船室>(講談社)이 간행된다.
#1957년(50세) 5월, 오사카에서 <코리안 라이브러리> 출판사를 설립하고 한국문화의 보편적인 소개와 교포자제들의 조국에 대한 인식을 배양할 목적으로 <목근문고(木槿文庫)>, <목근소년문고(木槿少年文庫)>를 간행한다. <단종육신(端宗六臣)>, <민족의 일음(日蔭)과 일향(日向)>, <면의 종(棉種)>, <세개의 병(甁)> 등이 그런 책들이다.
#1964년(57세) 우리말 수필집 <희망은 아직 버릴 수 없다>(남향문화사)가 나온다.
#1965년(58세) 10월, 여권 압류가 풀려 마침내 영구 귀국한다. <이 일본사람들을 보라(목근통신) -일본에 보내는 편지>서울(수도문화사)에서 나온다.
#1966년(59세) 1월, 자선수필집 <건망허망(健忘虛妄)이 서울 (남향문화사)에서 나온다.
#1967년(60세) 7월, 수필집 <일본의 두 얼굴>이 서울 (三中堂)에서 나온다. #1968년(61세) 7월, *편저 <정해 한일사전(精解韓日辭典)>이 서울(휘문출판사)에서 나온다. 7월, 수필집 <물 한 그릇의 행복>, 11월 자전에세이 <하늘 끝에 살아도>가 연이어 서울 (동화출판공사)에서 나온다.
#1969년(62세) 9월, <동경, 그 거대한 촌락(村落)>이 서울(배영사)에서 나온다.
#*1970년(63세) 소설 가와바다야스나리<설국(雪國) 외> 번역(동화출판공사)나온다.
#*1971년(64세), <새 일본어1-3>(문조사)가 나온다.
#*1972년 <한일사전>(高麗書林)이 나온다. * 소설 가와바다야스나리<설국(雪國) 등> 번역(동화출판공사)
#*1973년(66세) 10월, <목근통신>이 서울(삼성문화문고)에서 나온다. *<새 한일사전>(휘문출판사)이 나온다.
#1974년(67세) 3월, 수필집 <밑없는 항아리>가 <중앙출판공사>에서 나온다. *<목근통신(木槿通信 외>가 (삼성문화재단출판부)에서 나온다. 7월, 일문 수필집 <일본이라는 이름의 기차>가 도쿄(冬樹社)에서 나온다.
#1975년(68세) 5월, 일본어역 <한국미술전집(韓國美術全集,전 15권) >이 서울 <동화출판공사>에 나온다. *수필집 <물 한그릇의 행복>(중앙출판공사)이 나온다. 8월 일본어 역 <현대한국문학선집(現代韓國文學選集,전 5권)>이 한국 (동화출판공사)과 일본 (冬樹社)에서 공동 편찬되어 나온다.
#*1976년(68세), 수필집 <붓 한 자루>(범우사)가 나온다. *김성한(金聲翰) 장편소설 <이마이야기> 번역 출간된다.
#1977년(70세) 1월, 수필집 <외투(外套)-삼오당수필초(三誤堂 隨筆抄)>가 서울(민중서관)에서 나온다. 5월, <토분수필(兎糞隨筆)>이(민음사) 나온다. 6월 수필집 <정원사(庭園師)의 기도(祈禱)만이>(갑인출판사)가 나온다.
#1978년(71세) 2월 <김소운수필선집(金素雲隨筆選集)> 전5권, *일역 <한국현대시(韓國現代詩) 상.중.하>가 서울 <아성출판사>에서 나온다. *동화 <하늘의 벚꽃>(中河興一) 번역(샘터사)이 나온다. 이후에 출간된 책을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에서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78년(71세) <기본 일본어(日本語>(文潮社),
#*1981년(74세) <한국의 구전동민요(韓國의 口傳童民謠)>, <천량(千兩)으로 못사는 보배>(중앙일보사), <등불이 꺼지기 전에 젊은이와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다>(남향문화사), 수필집 <향충(香蟲)>(태창출판사), 일문 수필집 <여기의 벽(壁)>, <안개가 걷혀가는 날>(사이마루 출판사),
#1981년(74세) 11월2일 별세. *1982년, 유작에세이 <나 자신과의 약속>(범우사),
#*1989년 수필집 <물 한 그릇의 행복>(중앙출판공사),
#*1993년 <물 한 그릇의 행복>(한글출판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은 추가 자료임
2) 진해와의 연고
김소운의 진해와의 연고를 살펴보면, 작품으로서의 진해를 무대로 한 글과 진해에서 거주하면서 쓴 작품으로 대별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진해를 소재로 한 글
1. “-내가 꿈에 보는 고향은 다섯 살에서 일곱 살까지 조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진해이다. 염전이 있고 개울이 흘러가고, 동네아이들이 갈퀴를 들고 나무하러가는 동뫼(洞山)에는 탕건 바위가 있고- 그런 잠자듯 고요한 마을이라고 어느 글속에 쓴 일이 있다. 부산서 나서 진주로, 목포로, 진해로, 김해로, 다시 부산으로- 이렇게 전전했지마는 내 동심의 보금자리는 역시 진해뿐이다. 어려서 겨우 두어 해, 동경대진재로 일본서 돌아온 17,8세 적에 1,2년- 모두 합해서 3, 4년밖에 안 되는 짧은 인연인데도 진해의 기억은 하나하나가 어제일 같이 마음속에 살아있다.” (선집1. 고향 아닌 고향,19p)
2. "진해서 자라던 어린 시절, 일요일이면 조부님을 따라 5리길이나 되는 경화동 예배당에를 다녔다. 신작로 길은 멀고, 질러가는 지름길은 비가 오면 진창구덩이가 되는데다, 개울물에 놓인 징검다리는 어린 내가 건너기에는 돌과 돌 사이가 너무 멀어 발을 옮기기가 무서웠다.”(선집 2. 현세를 위한 종교라야, 342p)
3.“진해 덕산 마을에서 조부모님과 같이 살던 고모님이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빼스'를 같이 데려갔다. 정들었던 개와 이별하는 것이 죽도록 서러웠지마는 꿀꺽 참을 수밖에 없었다. '빼스'가 도망을 가버렸다는 통지가 서울서 온지 일주일쯤 됐을 때인가... 기다랗게 줄이 달린 채 빼스가 덕산 마을에 돌아왔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며, 기다란 줄이 온통 흙투성이가 된 것으로 보아 그동안 빼스가 겪은 고초를 짐작할 만 했다.(선집3. 늘어진 개 팔자라지만, 100p)
불과 3,4년의 인연이지만 얼마나 그 여운이 강력했으면 수필가 김소운은 진해가 꿈에 보는 유일한 고향이며, 동심의 보금자리라고 설파하고 있다. 작품
1.‘동몽년기(童蒙年紀)’(선집1. 동몽년기, 53p)의 ‘카추샤’, ‘손톱’, ‘털외투’와 ‘고향 아닌 고향’(선집5. 고향 아닌 고향, 19p)의 ‘깨어진 유리문’, ‘엽전 두 푼’, ‘벽을 향해서’, ‘진남포로‘는 진해의 유년시절에 체험한 생생한 자전적 사연의 기록이며, ‘살아있는 덕조’는 ‘덕조’(선집 2. 살아있는 덕조, 143p)라는 진해지방의 전설 같은 거지의 실존의 기록이다.
2‘창원장날‘(선집 1. 車中見聞),29p)은 동란직후 이 지역의 한 경비경찰집단의 딱한 식량 사정을 보고 고뇌하는 관찰적 기록이다.
3 유년기 기록의 한 토막이다. 모두 진해가 소재이다.
‘도마소리’(선집1. 도마소리, 51p)는 ‘연’이라는 첫사랑의 여인이, 그녀도 중년이 되어 돌아와 도마소리를 내는 것으로 상상하는 애틋한 사랑 감정을 기록한 것으로, 알고 보면 그 여인은 20여 년 전에 병사하였던 것이다. 도마소리의 ‘연’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보아야 제대로 이야기가 연결 된다.
(전략) “연(蓮)이-. 이 연이를 두고 ‘도마소리’란 짧은 글 하나를 쓴 적이 있다. 부산서 서울로 오기 전 조부님이 계신 진해에 들려, 어려서부터 내 약혼자라는 연이를 처음 만났다. 어느 날, 낮잠이 든 나를 한 마을에 사는 작은 고모님이 와서 깨우면서, 장인이 오셨으니 일어나라고 한다. 장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고모가 웃으면서 어려서 조부님과 그 장인 사이에 언약이 있어 내가 그 집으로 장가를 들게 마련이라는 이야기다.
우스개로 흘려버리도록 내 이성(理性)이 자라지 못했고, 형제가 있고 누이가 있는 사람이 몹시 부러웠던 내게는, 그런 엉뚱한 말이 무슨 즐거운 소식처럼 들리기도 했다. 일어나서 그 장인을 만났다. 수염이 허연- 조부님과 별로 차이가 없는 노인이다. 연이가 막내둥이라 50세 가까워서 낳은 딸이란 것은 나중에 안 일이다.
그 뒤 몇 차례를 나는 연이네 집 손님이 되었다. 연이에게는 나보다 몇 살 위인 오라비가 있어 하나는 일본에 가 있고, 둘째 오라비만이 집에 있었다. 이 둘째 오라비가 숫제 나를 매부로 대접해서 몹시 다정하게 굴었다. 어떤 때는 밤이 늦어 사랑채에서 자고 오기도 한다.
조부모님이 사는 덕산리(德山里)와 연이네 집이 있는 북시가(北市街)와는 10리 상거(相距)이다. 그런데도 그 길이 먼 줄을 몰랐다. 저녁을 마치고는 등불을 켜들고 일직선으로 뻗은 신작로 길을 걸어서 연이네 집으로 간다. 그러나 연이와는 서로 얼굴을 대했을 뿐 말을 주고받은 일은 없다. 내 눈에는 연이가 달덩이같이 예쁘게 보였다. 목소리도 어여뻤다. 연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랑방에 놓인 자명종 시계가 시끄러워 이불속에다 시계를 쑤셔 넣은 적도 있다.
-내 알뜰이는 골무를 깁고 냉이를 캐는 시골처녀였다. 집안끼리 인정한 사랑이건만 손목 한번 숫제 쥐어보지 못하고 연이는 딴 데로 시집을 갔다-.
15년 전에 쓴 ‘도마소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해방 후 오랜만에 진해로 가서 어느 날 연이 오빠 집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내 귀에 또닥 또닥 또닥 하는 도마소리가 들려온다. 연이의 올케 되는 이는 내 옆에서 사과를 베끼고 있고, 며느리는 친정에 갔다니 내 알기로 그 집에 다른 여인네라고는 없다.
시집가서 도요하시(豊橋)에 산다던 연이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빠 이웃에 살다가 부엌일을 거들러 온 것이나 아닐까-. 혹시나 그 저 도마소리가- 그러자 연이 오빠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올케 입으로 연이가 스물여섯에 일본서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기차가 도요하시를 지날 때마다 한 번씩 플랫폼을 거닐어 보던 그 쑥스러운 버릇이, 혼자 속으로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런 얘기다-.
‘손목한 번 숫제 쥐어보지 못하고-’ 글에는 이런 거짓이 있다. 글의 목적이 달랐기에 그때는 그렇게 썼지마는 연이와는 손목도 쥐었고 입술도 서로 맞대어 보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하루는 연이와 연이의 둘째오빠, 그리고 나 셋이 시가지로 산책을 나갔다. 연이 오빠가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준 찬스다. 진해 신사(鎭海神社) 뒤에 꽤 넓은 숲이 있다. 숲속에 우리를 놔 두고 연이 오빠는 어디로인지 가 버렸다. 한 시간후 오빠가 나뭇가지를 툭툭 치면 그것을 신호로 우리는 신사 앞에서 만나기로 마련이다.
그 오빠가 얼마나 고마웠으며 그 한 시간이 어찌나 짧았든지-. 그러나 읽는 이가 상상하도록 로맨틱한 즐거운 시인은 거기서는 전개되지 않았다. 숲속에서 약간 언덕진 곳을 찾아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 늙은 홀아비와 과부처럼 귀염성 없게 거리를 두고-. 이제 얼마 안 가서 내 아내로 맞아들일 사람- 그 사람에게 뒷날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먼저 앞섰다.
소년답지 않게 점잔을 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고 거기 대답하는 연이 목소리는 모기소리같이 가늘고-. 무엇을 읽었느니, 무슨 책을 보내겠다느니, 그런 싱거운 얘기에 한 시간이 지나버리고, 연이 오빠가 나무를 치는 소리를 듣고야 겨우 일어서서, 한번 껴안아 보고 입술을 맞대어 보았다. 얼빠지고 쑥스러운 첫 경험이었다.
그러던 연이- 서울 미사까도오리(三坂通) 김학수(金學秀) 방으로 조심스러운 먹 글씨 편지를 여러 차례 써 보낸 연이- (그 편지에 ‘서방님 전상서’라고 쓴 것을 꾸짖어 보낸 나 자신을, 그 뒤 긴 세월을 두고 몇 십번 몇 백번을 뉘우쳤을까-) 그 연이가 이쁘고 고운 그 용모로 해서 사고를 저질렀다.
-저질렀다는 말은 전 책임을 당자에게로 돌리는 의미가 된다. 연이의 경우는 분명 피해자요, 희생자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그렇게 분석하고 구별하지 않는다. 그 소문을 듣고 서울서 내려간 내 귀에 진해 사람들의 비판이 추상같았다. 장인이 왔다고 나를 낮잠에서 깨우던 고모님부터 펄펄 뛰면서 만나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눈길을 밟아 또 한 번 연이를 찾아갔다. 그날이 연이를 마지막 본 날이다.
연이의 과실(過失)이란 것을 새삼스레 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궁금하게 생각하는 독자도 있으리라. 그 경위를 줄거리만이라도 쓰려면 그 당시 진해 농민만이 아는 특수한 농지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
민유지(民有地)가 있고 군용지(軍用地)가 있다. 군용지란 해군 요새사령부(海軍要塞司令部)가 미리 점유해 둔 전지(田地)를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빌려주어서 경작케 하는 땅이다. 합방 후 1전 2전으로 일본 군대가 사들인 땅이, 그 당시에는 평당 2원이란 시세였다. 군용지는 매매는 못하나 경작권만은 양도할 수 있다. 민유지의 2원에 대해서 경작권은 평당 50전-. 민유지 1천 평 살 돈으로 군용지 4천 평을 경작할 수 있다.
곡식은 민유니 군용이니를 가리지 않고 같은 씨를 뿌리면 같은 수확을 거둔다. 재력이 넉넉지 못한 농민들은 민유지보다 군용지를 가지고 싶어 한다.
연이 아버지 되는 이는 이 군용지의 경작권을 중개하는, 시쳇말로는 토지 부로커이다. 몇 백마지기의 논문서, 밭문서가 그의 주머니 속에 언제나 들어있었다. 해군이 진해에 비행장을 건설하게 되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군용지에 말뚝이 박혔다. 수십만 정보의 광대한 경작지가 농민들의 손에서 회수 되었다. 본대 무상으로 빌려 준 것이니 보상이란 것도 없다. 자손 만대도록 내 곡식을 거두리라고 믿었던 농민들은 이래서 하룻밤 사이에 땅을 잃었다.
한 평에 50전 하던 군용지의 문서가 모조리 휴지로 화해버리고 연이 아버지는 일조에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약간의 보상이라도 찾아보려고 별별 애를 다 썼다. 어떤 일인(日人)이 해군사령부의 고급 군인에게 다리를 놓아준다고 해서 연이 아버지는 그 일인에게 운동을 맡겼다. 맡겼다느니보다 전 운명을 거기 걸었다는 것이 옳을까-. 연이의 몸이 그 운동비로 쓰였다는 것이다.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오, 연이 입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다. 한방에서 등불이 미치지 않는 구석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은 연이-, ‘감히 바라지는 못하나 연분이 있는 것이라면...., 그저 자네 처분만 기다리네.’하고 한숨을 내 쉬는 그 부모들의 말로 해서 소문이 근거 없는 낭설만이 아닌 것을 겨우 짐작했을 뿐이다.
만일에 그날 저녁 그 자리에, 연이와 단둘이 얘기를 할 수만 있었다면, 내 소년의 순정은, 연이의 과실을 책하고 나무라기보다 가엾은 생각, 측은한 생각이 앞섰을지도 모른다. 그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나 자신의 휴우먼에 스스로 도취할 수도 있는 그런 심정이었다.
놓인 위치는 다르나, 나는 그날 그 자리에서 톨스토이의 부활의 한 장면을 마음속에 되씹고 있었다. 그날 밤을 연이네 사라채에서 새우고 나는 이튿날 서울로 돌아왔다. 월급이 오르고 견습이란 딱지가 없어져도 내 마음이 거기 있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이다.
명동 어귀에 다이마쓰(大松)라는 일본 국수집이 있었다. 그 2층에서 전표로 술을 마시는 술을 배웠다. 때로는 중국집 배갈도 마셨다. 연이-, 연이-, 가엾은 연이-. 그러나 일본인의 품에 단 한번이라도 껴 안겼던 그 연이를 일생토록 사랑하리라는 자신은 아무리해도 가져지지 않았다.“(선집5. 연이, 51P)
이 작품에서 보면, 진해의 여러 곳이 작품의 무대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김소운의 첫사랑 진해 처녀 ‘연’이와의 데이트 장소가 신사(神社) 뒤쪽의 숲으로 알려졌다. 신사자리라면 지금의 남산초등학교 자리다. 제황산 공원 일대가 그곳인 셈이다.
다음으로는 1930년대 일제하의 진해 민심과 진해사회상의 실상이 잘 드러나 있다. 진해비행장이 들어서기 전에, 일본 군대는 해군 군용지로 많은 땅을 미리 평당 1전 2전의 헐값으로 강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땅은 한동안 무상으로 경작이 허용되었으나 수요자가 많다보니 경작권리권이 생긴다. 그러나 진해비행장이 구체화 되면서 경작권이 실제 상당한 값으로 형성되고 있는 데도 무시하고 그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재산권을 잃는 피해자가 생긴다.
거기 대표적인 인물이 ‘연’이의 아버지가 되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일본 관리에게 청탁성 뇌물로 ‘연’이가 이용되는 줄거리이다. 이 작품으로 하여 당시의 진해실상이 일부나마 드러난 것은 이 작품이 주는 또 다른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위에 언급한 예문이나 작품들은 진해를 무대로 한 것이다.
다음으로 진해에서 거주하며 쓴 글
광복이 되던 그해 11월 서울에서 김한림과 결혼한 이후의 행적이다.
1“-해방 후 두 달 후 나는 진주서 나온 종제(從弟)를 데리고 부산서 다점(茶店)겸 그릴을 시작했다. 자금이라고는 아우의 점포를 판 1만원, 그리고 월 2할로 빌린 4만원이 있을 뿐이다. 일인의 거주를 인계받은 것은 아니기에 그 집에는 젓가락하나 밥공기 하나가 없었다. 지대(地帶)의 이(利)와 아마추어 상법(商法)의 주효로 처음부터 장사는 꽤 번성했다.
(중략)
-2원하던 커피 한잔이 5원이 된 개업 7개월 후에 종제에게 경영을 맡기고 나는 동래로 들어갔다.”(선집 1. 詩碑餘話, 104p)
2. “ 6.25사변을 전후해서 나는 한 때 진해에 거처를 둔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살던 덕산 마을과는 10리나 떨어진 시가지 산기슭이었다.(선집5. 안민령 천자봉의 산용만이, 352p)”
3. “26년 전 6.25가 불을 뿜던 바로 그날, 나는 진해 희망원의 토마토 밭에서 아이들과 같이 약을 치고 있었다. 희망원은 그 당시 진해교회의 이약신 목사가 경영하던 고아원이다.(선집5. 토마토 덕분으로 모면한 위기, 381p)”
4. “연 나흘을 개이지 않던 비가 그날이야 들었다. 서울행이 4,5일 늦어진 것을 한탄하면서 나는 진해 희망원에서 분무기 호오스를 들고 토마토 밭에 약을 치고 있었다.(선집 1. 누에에서 나비로, 19P)
5. “교우반세기의 첫 페이지에 적어야 할 소년기의 친구로는 진해 경화동교회의 장로 아들인 안창해(아명 斗守)군의 이름을 뺄 수가 없다.(선집 5. 소년기의 길동무, 349p)”
6. "부산을 저녁 여섯시에 떠나는 마산행 객차(客車)-, 나는 가끔 이 차를 타고 가족이 있는 진해로 돌아간다. 창원역에서 바꾸어 타면 진해행 접속선에 차가 기다리고 있다. 진해에 닿는 시간은 으레 통금 시간이 지난 열한시 전후-, 어느 때는 열두시를 넘는 경우고 더러 있다.(선집 1. 通學奇譚, 37P)
7. 서울서 진해로 가는 차중에서 나는 겨울 방학으로 귀성하는 남녀학생 몇몇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선집 1. 혈서, 150p)
8. “진해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할 필요가 있어서 수표를 찾기 전에 은행에 물었더니 은행에서는 그런 편법이 없다고 한다.(물론 옛날에는 가능했다.) 그래 현금으로 바꾸어 우체국으로 갔다.”(선집1. 전신송금,201P)
9. (전략)“아들 형제를 조국에 바친 분이시다. 아우는 사변직후(6.25)양주 방면 전투에서, 형은 두 달 늦게 8월 18일에 대구 야전병원에서-. 아버지는 아들들의 전사를 이내 알았지만 숨겨두고 말이 없었기에 이 어머니는 진해에 와서 1년이 넘도록 까지 그것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중략)
거기- 그 몇 장의 노우트 조각에는 목석(木石)을 울리는 단장(斷腸)의 가고(歌稿) 60여수(首)가 적혀져 있다. 조국에 바친 제물-, 전사한 두 아들을 두고 구절마다 가락마다 사무치고 애끓는 어머니의 한과 눈물이 피로 자욱지듯 그려져 있다.
그날 내 집을 찾아준 이무영(李無影), 윤효중(尹孝重) 양객 앞에서 나는 이 가고를 읽어가다가 두어 수를 못 읽고 목이 메어 객들도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눌렀다.(선집1. 한국의 어머니, 320-324p)“
1.은 김소운의 진해에 거주한 행적 더듬기의 첫 단계다. 그는 해방 2달 후 부산 광복동에서 종제와 다점 겸 식당 그릴을 개업한다. 그러다가 7개월 후 영업권을 종제에게 넘기고 동래로 들어간다. 해방 2개월 후면 1945년 10,11월쯤으로 추정되고 이때로부터 7개월 후에 사업을 접었으니 이듬해인 1946년 6월경 동래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2. 김소운의 진해 사는 거주지의 구체적인 사실기록이다. 어릴 때 살던 덕산에서 10리나 떨어진 산기슭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곳이 어디쯤인지 전혀 알길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3-4. 는 6.25전후하여 진해에 거주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진해의 고아원 희망원의 농장 일을 거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는 토마토 역병의 방제작업을 하느라 서울에 꼭 올라갈 일인데도 미루었다가 6.25사변을 피한 사실을 이 내용에서 밝히고 있다.
5. 진해서 사귄 안창해라는 친구를 여기서 눈여겨보는 것은, 김소운이 진해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보여서이다. 이 친구에 대해서는 여러 군데 기록이 있다. 이 친구의 부인이 나병에 걸려 격리시키려 애쓴 사람도 김소운 자신이다. 해방 후 이 친구는 귀국하여 진해 속천에서 조그마한 조선소를 경영한다. 그러나 김소운이 일본에 강제로 남게 되면서 다시 만나지 못하고 나중에 소문으로 그가 타계한 것을 알게 된다.
6-8은 김소운이 진해에 거주하는 진해사람으로서 기차로 부산과 진해를 오가는 애환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외지에서 진해로 생활비를 부치는 일도 상당히 번거로울 수밖에 없는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9. 김소운의 글을 읽고 찾아온 한 부인의 이야기이다. 이 부인은 두 아들을 전쟁에 잃고 그 애상(哀想)을 글로 써 찾아왔던 것이다. 마침 그 자리에는 당시 현역으로 해군에 참전하고 있던 소설가 이무영과 조각가 윤효중도 동석한 자리였다. 이 글로 보면 진해사람으로서 당시 김소운은 이 지역에 연고가 있던 지식인들과 상당한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소운 선집에는 글 끝에 글 쓴 날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선집 1권(마이동풍첩, 삼오당 잡필, 목근의 뜰 등)은 거의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전후의 시기의 글이 집중 발표되고 있다. 따라서 진해를 소재를 한 작품은 물론이고 이 시기에 쓴 많은 작품이 진해에서 씌어졌음을 유추하게 하는 것이다.
즉 그 시기에 쓴 많은 작품의 산실이 진해로 보인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예사로 넘길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진해지역은 김소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마산과의 연고
1.“-그해 9월 하순,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유네스코가 초청한 국제예술가회의란 것이 열린다고 해서 한국에서도 다섯 명이 참석하게 되었다. 극작 오영진(吳泳鎭), 조각 윤효중(尹孝重), 건축 김중업(金重業), 문학 김말봉(金末峰)...거기다 내 이름도 하나 끼었다.
이해 여름 들어 어느 날 부산서 내가 숙소겸 서재로 쓰고 있는(내 집은 그 당시 마산에 있었다.) 일가 댁 방에 윤효중 군이 불쑥 들어오며 ‘형님, 이탈리아 안 가실라우-’하고 한마디 내 놓는 것이 이야기의 발단이다.“ (선집 1. 얼룩진 회상 8, 378p)
2.“-6.25동란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어머니가 40년 만에 몸 하나로 나를 찾아오셔서 북마산 철둑 곁에 있던 내 집에서 내 가족들과 같이 살게 된지 한 달이 못가서 나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런지 불과 몇 달 후에 어머님은 또 집을 나가셨다는 얘기다. 동경까지 돌아온 내게 그 소식을 알린 아내의 편지엔-”(선집 2. 어머니 노우트 364p)
3.“-가족들의 생활을 맡겼던 소꿉놀이만한 마산시내버스-, 명의만은 내 아내요, 실무는 종제(從弟)가 담당했던 그 버스가 학생 셋인가를 치어서 그 보상으로 소멸해 버리고 가족들은 노두(路頭)에 나설 지경이다. 혼일할 때 이태만 살아주었으면 했던 병약한 아내- 어린 자식들- 그들을 위해서라도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선집 1. 얼룩진 회상, 392P)"
이 내용으로 보아 김소운은 진해에서만 산 것이 아니라 1951년에 시작된 마산과의 연고는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1.은 베니스에서 열리는 국제예술가 회의에 참석하려는 무렵의 이야기다. ‘그해 하순’은 1951년 하순을 말한다. 김소운은 이 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일본에서 기자회견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후 14년간 일본에서 발이 묶이게 된다. 이때 서재는 부산의 ‘일가 댁’ 방을 쓰고 있지만 집은 ‘마산에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2.는 ‘어머니가 6.25로 말미암아 재산을 다 잃고 마산의 ’북 마산 철둑 곁에 있는 내 집에 가족들과 지내는’ 것을 보고 일본으로 갔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이때가 1951년 후반으로, 앞서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난 날, 진해 희망원에서 일을 볼 무렵에는 진해 ‘덕산에서 10리 떨어진 산 밑’에 산다고 했었다. 그 사이 진해에서 마산으로 집을 옮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3.은 생활 수단으로 ‘마산시내버스’를 부인 명의로 한 대 가지고 있었으나 교통사고가 나서 그 버스라는 생활수단이 없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아무튼 이때 생활기반을 마산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일본에 발이 묶였다가 1965년 귀국했으니까, 그동안 내내 가족은 마산에서 생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소운은 귀국 후에도 가족의 거처에 대해서는 잘 드러내지 않고 있다. 자신은 서울에서 이사를 자주하며 동가식서가숙 하는 생활을 하고 있음을 여러 글에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부인 김한림의 행적에서, 1970년대 둘째딸 김윤이 반정부 활동에 가담하여 5년여의 옥고를 치룰 때, 그 따님을 위한 <구속자가족협의회>에 적극 참여한 기록이 있다. 그 무렵 그는 마산에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소운은 비록 마산에 정착하지 않았으나 그 가족은 마산사람으로 십 수 년 간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김소운의 거주지와 문학의 중요성
이상으로 수필가 김소운의 연보와 작품을 통한 진해와 마산의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오늘날 여러 지역에서 어진간이 이름이 있는 문학가나 예술가들에 대해 그 연고권을 주장하며 유적지 보존과 관리에 정성을 기울이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단순 비교는 쉽지 않겠지만 천상병 시인의 경우, 출생지는 마산이나 그가 한때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의정부시에서 그를 기리는 문학제를 열고 있으며, 심지어 그의 작품, ‘귀천(歸天)’이 하늘의 귀환을 상징한다고 하여 하늘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천상병문학상’을 제정하고 그 행사를 하는 지리산 자락의 산청군 같은 곳도 있다. 소설가 박경리의 경우도, 작품을 쓴 곳인 원주는 물론 작품 토지의 무대를 관광지로 꾸며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대구에서는 노산 이은상의 ‘사우(思友, 동무생각)’의 가사의 일부분이 대구출신 박태준 작곡가와 관련되어 그 연고지가 대구에 있다고 하여, 그곳을 유적지로 꾸며 관광지화 하여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마산의 경우, 마산에 한때 거주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산문학관에서 그 업적관리를 맡아하는 문학인만 여러분인 것으로 알고 있다. 더러는 그 지역을 구체적으로 문학으로 형상화하여 남긴 작품도 드물고, 더욱 그 지역에서 문학을 생산한 흔적이 미미한 데도, 문학인이라는 상징성만으로 기림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김소운의 진해와 마산의 거주 사실이 뒤 늦게나마 제대로 정리되고, 그가 이 지역에 적을 둠으로써 지역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진해의 주요지역을 문학화 하는 선구적인 문인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는 제언을 하고 싶은 것이다.
(진해문화 2014)
첫댓글 김소운 선생 연구 오랜만에 정말 심도있게 쓴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