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인의 한국인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에 대해 누군가가 한 말이 기억난다.
“한국의 경제 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 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
가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
났다. 자기 나라로부터 수백만 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한편 2021년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어(투르크어)를 사용하는 국가 기구
(영어로 가칭 OTS)를 출범시켰는데 회원국은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이 회원국이다. 여기에 회원국은 아니지만 이름부터 알 수
있는 투르크메니스탄과 흉노의 후예-물론 논란이 있지만-인 훈족의 나라 헝가리가 참가
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 것은 소위 “신돌궐제국”으로 중국이 긴장하고 있음은
역사가 웅변한다.
참고로 독일에는 300만-700만 명으로 추정되는 튀르키예인이 있는데 최근 우리에게도
알려진 은퇴한 독일 국가대표 축구선수 메수트 외질은 외모를 보면 보통의 독일인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는 오스만 터키가 독일의 동맹국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것과
관계가 있다. 물론 독일에 대한 우호보다는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근본 이유일 것이
며 독일은 그 댓가로 튀르키예인을 이민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1853-1856의 크리미아 전쟁은 러시아의 오스만 터키에 대한 야욕을 분쇄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군의 편에 서서 러시아를 격파한 전쟁이다. (이 지역에 현재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있다) 약 50년 후의 러일 전쟁(1904-1905)
에서도 영국은 미국과 함께 일본을 지원하였다. 러시아의 패전으로 300년에 걸친
로마노프 왕조가 망하게 되고 역사는 소비에트 러시아(소련)가 약 70년간 그 뒤를 잇게
하였음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다.
물론 우리 한국인이 터키(튀르키예)라고 할 때 지금은 없어진 퇴폐 터키탕 따위를 연상
한다면 튀르키예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터키는 제국 말기인 1915-1916년 인접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인을
100만-150만 명을 학살했으다. 같은 이슬람교도인 자국 내의 쿠르드족을 또한 박해하고
있기도 하다. 둘 다 이들이 독립을 추구한다는 이유에서다. 아르메니아 학살 당시 서방
국가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려있지 않으므로 오스만 터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아르메니아인의 비극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 주도하에 구소련(러시아)에 대한 방어책의 일환으로 군사적으로는 북대서양
조약기구 나토(NATO)에 터키의 가입을 허락(보다는 종용에 가깝다고 하겠다)하였으나
유럽의 경제기구 EC는 튀르키예의 가입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물론 종교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튀르키예는 이제까지 중립국이었던 스웨덴과 핀란드의
가입을 반대하고 있다. 나토는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이 두 나라는 가입에
제동이 걸린 상태이다. 또한 이 나토와 러시아 사이의 중립국이던 두 나라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놀라 나토에의 가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약소국에 대해서 자기가
하는 부당한 일을 자기보다 강한 나라에게 그대로 당한다고 하는 역사의 비정(非情)
함이 가슴 아프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했던가?
또한 튀르키예가 한국전쟁에 많은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나토의 가입권을 얻어
1951년 가입하게 되었고-다분히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이자 대책이기도 하지만-
튀르키예의 적대국인 그리스 역시 나토에 가입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지중해의
섬 사이프러스(키프로스)를 두고 분쟁관계이다.
우리가 인생을 생각할 때 매사에는 그 원인이 있으며 또한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
이다. 따라서 우연 속에서 필연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글을 쓴 보람이 있다고
하겠다. 졸고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다시 한번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 북부를 휩쓴 참혹한 지진의 피해가 더 이상 커지지 않기를 그리고 하루빨리
조속한 복구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