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 철새들이 날아와 강에 내려앉는다. 버거웠을 날갯짓에 지쳤던 때문일까. 달아오른 열을 식히려는지 파래진 물에 연신 자맥질해댄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우두머리나 경계심에 두리번거리던 녀석들도 잠시 쉬어갈 요량인지 무거워 보이는 날개를 접었다. 어디서 날아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곁을 내어주며 다소곳이 품어준다. 석양이 질 무렵 낙동강 술뫼공원 풍경은 마냥 포근하고 따뜻하다. 공원은 강가의 언덕에 자리한다. 원래 이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 옆에 펼쳐진 강변으로 봄에 당근을 심고 가을이 되면 향미 가득한 땅콩과 속이 꽉 찬 배추를 재배할 만큼 토질이 좋았다. 씨앗만 뿌려 놓으면 싹을 틔우고 토실한 열매를 맺을 정도로 잘 자라 둔덕은 싱그러운 초록빛을 잃지 않았다. 김장철에는 트럭이 둑을 넘나들었고 해지는 줄도 모른 채 아낙들의 웃음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주민들의 휴식처로 거듭나서 파릇한 채소 대신 부드러운 잔디가 깔렸다. 농사를 짓던 곳에 강을 개발하면서 초창기에는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다. 하천이 오염되는 일과 사람의 손을 타 습지와 모래밭이 훼손될까 우려해서였다. 더구나 인근에 식수를 공급하는 취수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각자의 셈법에 따라 뿌연 안개가 동네를 감쌌다. 이런저런 이유로 적지 않은 걱정에 애를 태웠다. 하지만 모두의 바람대로 더 친숙한 숲으로 바뀌었다. 체계적인 개발 덕에 한 번도 드나들 수 없던 곳까지 발길이 닿게 됨은 물론이고 호젓한 탐방 길이 번듯하게 뚫렸다. 결국 수변 지역은 새로운 쉼터로 다시 태어났다. 옛날에 노동을 강요받던 둔치였다. 언제부턴가 탁 트인 하늘 아래 웅장한 팔각정이 들어서고 나무 그늘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생기가 감도는 터가 되었다. 아침마다 경로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이젠 산책로를 향한다. 운동기구를 통해 노쇠한 근육에 살도 붙이고 골병든 허리의 긴장도 풀어준다. 물길은 바람을 따르고 그 뒤를 물안개와 동행하며 활기찬 하루를 연다. 제집을 찾은 듯 갈대숲 사이를 날아다니는 참새도 여간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마치 물고기 떼도 강을 박차고 뛰어오를 것만 같다. 해가 중천에 이를 즈음 가장 붐비는 곳이 있다. 강둑 옆 파크골프장이다. 파크골프는 일반 골프보다 배우기도 쉬운 편이다. 어렵지 않은 규칙과 남녀노소 누구나 적응하기 쉬워 여가생활로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근력이 떨어진 노인에게는 걸으며 다리에 힘도 붙일 수 있어 부쩍 찾는 이들이 늘었다. 딱히 갈 곳이 없어 두문불출하는 경우가 일상이었는데 공원이 들어선 이후로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아침에 마을 주민이 이용했다면 한낮에는 주인이 바뀌어 인근의 시민들이 찾는다. 게임이 시작되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면 박장대소를 하다가도 홀컵에 빨려 들어가면 내 일처럼 좋아한다. 제법 멋을 부린 핑크빛 재킷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공과 함께 잔디 위를 누빈다. 잃었던 건강에 대한 자신감도 조금씩 되찾아간다. 마음과 몸이 서로 엇박자로 웃음을 주지만 궁색했던 어제보다 훨씬 나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 노년의 삶은 되새김이다. 혼자만의 틀 속에 갇혀 오랫동안 누리지 못한 갈증을 감추며 참 멋없이 살아왔다. 때로는 서글픈 현실에 소리치며 격함을 토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게다. 무언가를 망설임 없이 누군가에게 내어주기는 쉽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시기에 되돌려 받기란 힘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아온 여정이 그들의 참모습이다. 오래전 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작은 규모였지만 무거운 분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달리 깨끗하게 잘 꾸며져 쾌적했다. 말끔히 차려입은 열 분 남짓의 어르신들이 계셨고 허옇게 탈색된 머리에 거동만 조금 불편할 뿐 희미해진 기억의 소환은 가능해 보였다.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가사를 따라 흥얼거리기도 하고 휠체어에 앉아 메말라 가는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상념에 빠진 분도 계셨다. 그냥 세월 앞에 일상이 멈춰 남들과 다른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첫날에는 단순한 청소를 하고 식사를 도왔다. 차츰 목욕과 같이 힘에 부치는 일이 있으면 기꺼이 씻어도 드렸다. 아버지 육신을 직접 염습한 이후 처음으로 쇠약해진 타인의 몸을 닦았다. 깡마른 등에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하게 휘어졌고 줄어든 근력만큼 기운도 빠져 무척 안쓰러웠다. 어색함이었는지 가끔 초점을 잃은 채 벽만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등을 밀어주던 추억이 떠올랐는지 각박하게 살아온 훈장 같은 주름이 펴졌다. 꽃이 지면 다시 피듯 자연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반면에 사람의 몸은 수를 더해 갈수록 반작용한다. 이마엔 한숨의 깊이만큼 주름은 늘어만 가고 보폭이 좁아진 걸음걸이는 점점 더뎌만 진다. 그렇지만 그들도 한 시대를 호령했던 호기로움으로 ‘백세시대’를 향해 항해 중이다.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어쩔 수 없이 접었던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옹이 박힌 고목이 아닌 단단한 거목으로 우뚝 서려 통증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걸음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저무는 해가 낙동강을 곱게 물들인다. 진분홍 양산을 받쳐 든 여인의 모양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물결은 수줍게 얄랑거린다. 속살을 감춘 강물은 요란스러운 소리 대신 묵직한 침묵으로 모래톱을 쌓고 새 생명에 목을 축여준다. 그 옛날 젖가슴을 내어주던 내 어머니 손길처럼 따사롭다. 철새가 다시 비행을 시작한다. 경험이 많은 새가 선두에 나서 무리를 이끈다. 처음 나선 어린 새에게는 든든한 안내자요 노련함을 배울 기회다. 설익은 감보다 농익은 홍시가 더 달듯이 늙어 간다는 것이 꼭 서글픈 것만은 아니리라. 술뫼공원에 황혼녘의 인생 꽃이 다시 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