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원문학관
- 입상 (입선, 당선 등)의 서사(敍事) 또는 서견(書見) 편
[입상(당선, 입선작 들)]
1. 1975년의 2월의 화전리와 ‘늦겨울 아침’
-샘터시조상 가작 1석 입선
내가 삼척군의 산간 탄광마을에 있는 화전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고 간 것이 1973년 10월 13일이었다.
그 이듬해인 1974년에는 신출내기 교사의 어리숙한 1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글을 모아 『나룻배』라는 문집을 발간하였다. 강의 나루에서 이쪽저쪽으로 손님을 건네 보내는 역할을 하는 나룻배, 나는 그 나룻배로 살기로 한 것이었다. 그 당시 이렇게 꽤 그럴듯하게 문집 제목에 대한 철학적인 변경까지는 늘어놓지 못하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 문집이 내가 교단에 발을 들여놓고 펴낸 문집 중에는 제일 첫 번 째 문집인 셈이다.
이렇게 내 문학의 글쓰기 작업은 아이들 곁에서 1974년부터 시작되었다.
1975년엔 『꽃밭』이라는 학급문집을 만들었다.
1975년엔 문학작품에 대한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71년과 1972년의 대학생활에서는 『문학사상』,『현대문학』등의 잡지와 소설집을 주로 읽기만 했다. 대학 도서관에서 원효 사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책을 읽고 사유에 몰입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입시 위주 공부가 이루어졌지만 그 틈새에 시적 사유에 대한 시간을 많이 가졌다. 특히 점심을 끝내고나면 강릉고등학교 본관 건물 뒤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옆에 앉아 쉬며 시적 정서를 만끽하였다. 고등학교 때에는 조병화의 ‘의자’를 인상적으로 읽고 외웠다. 한시에서는 두목의 ‘산행’이 매우 깊은 정취와 의미로 다가왔다. 또 빨갛고 두툼한 표지의 김소월 시집을 사서 지니고 다니면서 뽐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어릴 때의 고향 산천과 드 당시의 가족, 마을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고향에서 지낸 기간은 12년의 기간이다. 그런데도 그 기간은 그 이후인 55년의 삶보다 더 긴 시간으로 많은 역사적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 지금도 그 고향의 크고 작은, 아름답고 무서운 이야기들은 저 황하의 물줄기처럼, 양자강보다 더 긴 흐름으로 내 삶의 주요한 부분을 이어주고 있다.
1975년 초, 문득 내 눈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때가 1975년 2월의 어느 눈부신 아침나절이다. 마을이 탄 무더기로 여기저기 얼굴을 드러낸 게 마치 검은 먹물이 쿨렁쿨렁 흘러나온 듯했다. 그런 마을에 이틀 전에 내리던 하얀 눈이 마을을 모두 덮어버렸다. 그리고 해가 뜬 것이다. 해는 눈 위를 맨발로 밟고 찾아오는 손님 같았다. 움막 같은 관사 지붕에서는 낙숫물이 작은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다. 물방울이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흙벽 바로 아래의 흙들은 햇볕이 묻어 뽀송하였다. 슬레이트로 덮은 관사의 헐렁한 지붕을 나는 고향의 초가집 지붕으로 환치(換置)해 놓았다. 그러자 이 모든 것이 그려내는 풍경은 신비로웠다.
단숨에 붓을 들어 시조를 그려나갔다.
햇살이 눈을 밟고 달려오는 이 아침
지붕엔 토옥 토독 겨울이 헐리는데
볕 묻은 흙담 밑에선 봄은 자릴 트는가
- 늦겨울 아침 -
이렇게 써 놓고 ‘늦겨울 아침’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냥 말 그대로 늦겨울 아침에 일어난 일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3월 초, 나는 이 작품을 월간 『샘터』에 응모하였다. 75년 5월호인가에 이 작품이 게재되었다. 내 나이 스물 세 살 만으로는 스물 한 살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인쇄된 책에 내 이름 석자가 시를 쓴 작가로 올려진 것이다.
전국의 많은 여성들이 감동이 있었다고 편지를 보냈다. 이 작품이 연말에 심사위원들에 의해 [샘터시조상 가작 1석]에 뽑혀 1976년 샘터 1월호에 게재되었다. 이것으로 나는 한국문단에 시조 또는 동시조라는 장르로 얼굴을 내민 것이다. 당시 나는 갑자기 보통의 인간에서 뭔가 달라진 인간으로 착각하였다. 우쭐거리는 기분도 들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그 치졸한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두 번 째 인쇄된 책에 실린 것이 동시 작품 ‘호수’이다. 이 작품은 강원아동문학 3집(1975. 8. 5.)에 발표되었다. 1975년 3월 1일자로 화전국민학교에 최도규씨가 전근 오셨다. 그는 황지중앙국민학교에서 오셨다. 그 분은 이미 강원아동문학회에 회원으로 활동하며 많은 시를 쓰고 계셨던 분이다. 그 분을 만나면서 내 문학의 불꽃은 활활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2. 기독교아동문학 현상 작품 가작 입선
1978년엔 기독교교육협회에서 실시하는 아동문학 현상작품 모집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 동시조 ‘함지’를 응모하였다. 이 작품이 제7회 기독교 아동문학 현상 작품 동요.동시부문에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이 작품은 내가 살던 고향 마을이 함지처럼 생긴 것에 착안하여 쓴 동시조이다.
함 지
멀리서 멀리서 보면 숲속은 작은 함지
가만히 함지 위에 파란 보자 씌워지고
함지속 오골오골 끓는 팥죽같은 새소리떼
올망졸망 푸른 산도 내려앉은 함지 속
졸졸졸 시냇물도 노래처럼 흘러가고
귀연 채 어여쁜 황새 꽃이 되어 서 있네
오솔길엔 쪼르르르 다람쥐도 꺼내놓고
돌담가 흐드러지게 꽂아놓은 찔레꽃
그리운 봄바람 한 떼 넝쿨처럼 엉켰네
밤이면 작은 별들 동전 같은 달이 뜨고
단잠 든 아기 새들 고요만 깊어갈 때
그윽한 물소리들만 함지 가득 채운다.
1978년 기독교교육협회에서 실시한 현상모집에 고향의 정겨운 풍경을 담은 작품이 뽑혔다. 그 고향에 1979년에 교사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금의환향했던 것이다. 늘 꿈꿔 오던 일을 현실로 이룬 것이다.
고향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문우들을 불러들여 천렵을 한 일이었다.
제방을 넘어 넓은 장광에서 솥을 걸어놓았다. 창죽분교장에 계신 최도규 형과 화전학교의 김진광, 마석규 선생을 모시고 매운탕을 끓였다. 물고기는 내가 손수 오신 분들과 같이 반두로 잡은 것들이었다.
그때 매운탕 맛은 내 생애에 몇 번 못 잊는 맛있는 매운탕이었다. 어릴 때 멱을 감던 산제골 소 앞에서 어릴 때처럼 맨발로 텀벙거리며 고기를 잡았다. 그 옛날 추억도 반두 속에서 찾아내었다. 돌이켜보면 참 아름다웠던 여름날의 추억이었다.
3. 1980년 8월,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시조 당선
고향에 와서 이룬 성과는 1980년 한국문인협회에서 출간하는 『월간문학』신인상 공모에서 시조 부문에서 당선을 한 일이었다.
1980년 3월 무렵 시조를 몇 편 썼다. 그 내용은 ‘가을’을 소재로 한 글이었다.
당시 가을밤에 듣던 고향집 풀벌레 울음소리는 시작도 끝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가는 이별의 노래처럼 들렸다.
달빛 비치는 밤, 소곤대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아스라이 깜박이는 별들은 모두 고독한 밤을 위해 존재하는 벗이었다. 외로움이 몰려드는 가을밤의 정취는 잠 못 이루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그 밤의 쓸쓸한 서정 속에 침잠하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가을밤을 통해 비로소 솔리튜드의 촉감을 느끼고 싶어 했던 마음이 한 편의 시를 낳게 하였다.
이 시조를 동시와 함께 응모하였다. 처음엔 동시가 당선된 줄 알았으나 나중에 월간문학 책을 보고 시조가 당선된 것을 알았다.
가을 산조(散調)
1.가을밤
마당엔 산이 누워 깊숙이 생각이 크고
뉘집 창 불빛 사위듯 저물어가는 풀벌레 울음
이 세상 인연과는 먼 곳으로 자꾸 떠나는 저 삶은 ...
2.귀뚜리
별들이 잎새 위에 스러져 잠이 든 밤
달빛은 가만가만 고독을 덮고 엎드려
마을 끝 댓돌 밑까지 귀뚜리 소리를 파내더니
그 울음 잠에 고인 목소리를 끌어내어
동구 밖 여기저기 씨 뿌리 듯 뿌려놓고
저만치 멀찍이 떨어져 희죽이 웃는 뜻은...
뛰르뛰르 뛰르르르 뒤뜨르 뒤뜰뒤뜰
달빛이 서러워서 삶이 너무 서러워서
가을 밤 하얗게 열고 낭자히 구르는 독경소리
3.밤의 숲
어둠 갈피갈피 고요를 접어넣고
잎새들 설핏한 머리칼 잘라먹는 바람 한 떼
짓푸른 피냄새 맡으며 바람 뒤에 내가 섰다.
갈기갈기 펄렁이는 개구리 울음처럼
목 말라 목이 말라 갈증을 펄렁이는 풀벌레
갈색 잠 연한 개울가에서 물소리를 씹는다.
별들이 산에 안겨 무성하게 자라는 밤
하늘은 달을 떼다 산마루에 걸어놓고
외로움 짙은 눈빛을 풀어 잠든 산을 태운다.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통보를 받기 전날 밤에 꿈을 꾸었다. 우리 반 아이 전순희가 내게 쪽지를 전해주는 꿈이었다. 그 꿈을 꾼 다음 날 관사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누가 밖에서 문을 ‘드르륵’ 하고 열었다. 얼굴을 내미는 아이가 전순희였다. 그 아이의 손에는 전보 용지가 들려 있었다.
“선생님께 온 전보예요.”
전순희는 전보 용지를 전하고 이내 돌아갔다. 전보는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통지 전보였던 것이다. 간 밤의 꿈은 당선 소식을 알리는 꿈이었던 것이다.
문학과 관련된 꿈은 이것이 두 번 째였다. 첫 번째는 아동문예 동시 추천완료 할 때 무 4개를 고향의 학교 뒤 실습지에서 뽑은 꿈이고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었다.
4. 1982년 그 해 겨울, 12월의 스릴러(thriller)
-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되다
1982년엔 강원도 정선읍소재지의 병설 벽탄 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은 강원도 시범 연구학교로 국민 학교와 중학교가 함께 있어 수업도 서로 교사들이 교류하여 가르쳤다. 나는 국어를 맡아 가르쳤다. 중학교 국어와 국민 학교 국어 과목이었다.
당시 여름에 나는 강릉에 내려와 있었는데, 그곳에서 문인들 몇이 모였다. 서울의 김원석 작가도 내려오셨다. 여름밤 경포해변에 문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해 한국문예진흥기금을 받았다고 하였더니 김원석 선생께서 그 돈으로 동시집을 주선 발간해 주시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여 발간한 책이 첫 동시집 『싸리울』이었다.
벽탄에 와서 11월이 되자, 신춘문예 준비를 하였다. 아이들이 다 간 뒤 교실에 남아 난롯불을 피워놓고 응모작품을 써내려갔다. 시 작품을 썼는데 당시 6군데나 되는 서울의 신문사에 보냈다. 그리고 제일 떨어진다고 생각한 작품을 지방지인 강원일보에 보냈던 것이다. 나는 그 작품들이 모두 당선될 것을 믿고 ‘그 많은 곳에 당선되면 상금을 어디에 써야 하나?’하고 걱정에 쌓이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과대망상증,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어찌되었든 패기 하나 만은 만만하였다.
얼마 후, 정선 읍내에서 정선문학회인 <아라리문학회> 모임에 나갔다. 그곳에는 전태규 시인 등 여러 명의 문학 동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신춘문예 작품 보낸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필명을 ‘청파’라고 했다는 말까지 하였다.
전태규 선생이 그 말을 듣더니 “에이, 벌써 틀렸어. 필명으로 ‘청파’로 보내면 안 되는 거야.” 하며 말했다.
그런데 전태규 선생의 말은 거의 들어맞았지만 한 가지는 빗나갔다. 강원일보 신춘문예에서만은 ‘청파’란 이름으로 당선된 것이었다.
12월 23일 무렵인가, 나는 서울에 첫 동시집 『싸리울』을 찾으려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춘천 강원일보사에 들렀다. 동시집을 강원일보 문화부에 전하고 올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김기중 문화부장이 동시집 『싸리울』책을 보며 내가 벽탄국교에 있는 것을 알고 혹시 ‘청파’라는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왜 그러시냐고 하자, ‘청파’라는 사람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라고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 이름은 필명이고 내가 그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당선소감을 썼다. 숨 막히도록 감격스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선 소감을 쓰려고 창밖을 보니 때맞춰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게 아닌가. ‘우와, 하늘도 나를 축복하고 있구나!’ 또다시 이런 망상에 사로잡혔다. 망상이라 해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이 후 신춘문예에는 더 이상 작품을 보내지 않았다.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에 대해 크게 만족해 있었던 것이다.
봄빛
새벽으로 가는 안개들의
푸른 길옆에
산의 손 시린 물소리
마을로 마을로 오고 있다.
들판은
번쩍이는 햇살과
귀가 아픈 새떼 속에
일어서고
우리들의 삶 한가운데
희디 흰 소금으로 남아
짭짤하게 등허리를 절이고 있는
풀뿌리 밑에서
아침은 깨끗한 피부를 드러낸다.
벌써 몇 광주리 씩 푸른 바람을
이고
대문을 나서는
아주머니들
땀과 거름으로
기름진 잎들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빛 속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
(「강원일보」신춘문예 당선 시, 1983. 1. 1)
5. 실망하다 돌아선 기쁨, 감동의 「계몽사어린이문학상」당선 !!!
1982년 초 계몽사에서는 어린이문학상 모집 공고가 났다. 나는 3월초 쯤 공모작을 써서 보냈다. 그러자 4월경에 내게 계몽사로부터 서신 한 통이 배달되었다. ‘와아, 당선 소식이구나.’ 기쁨을 감추고 편지를 뜯어 읽었다. 다 읽고나서 좀 허탈하였다. 응모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차라리 보내지나 말지…’ 이런 원망도 들었다.
그리고 1983년 나는 재차 응모하였다. 그런데 또 4월초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또 응모해주어서 감사하다는 편지인 줄로 알았다.
「제2회 계몽사어린이문학상 작품 모집에 응모해 주신 선생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여기 까지 읽으니 ‘그러면 그렇지 탈락된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구나.’하며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글이 작년과는 좀 달랐다. 엄정한 심사 결과 선생님의 작품 봄빛3장 외 4편이 동요동시부문에서 당선작에 뽑혔음을 알려 드립니다. ‘아니, 뭐야, 뭐야? 내가 당선된 거라구?’ 다시 읽고 또 다시 읽다가 다음을 내리 읽어갔다.
우선 축하의 뜻을 전하며 시상식 안내장 제작에 필요한 사진 2장과 약력을 적어 곧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실망으로 이어지던 내 생각이 기쁨의 도가니가 되었다.
입상자 발표는 조선일보 1983년 5월 1일자에도 공고가 났다.
6. 문학평론 신인문학상 당선
- 1996년 『문예한국』겨울호, 평론 당선「오순택론」
1996년 문예한국에 평론 작품을 응모하였다. 겨울호에 신인상 당선으로 평론 등단을 하였다. <문학평론가>라는 이름 하나를 더 얻었다.
7. 강원도 문화상에 도전하다
- 2003년 강원도 문화상 문학부문 수상을 거머쥐다
2001년 나는 강원도문화상 문학부문에 도전장을 냈다. 당시는 옥천동 밤나무 집에 살 때였다. 그곳은 도로접근성이 좋아 걸어다니며 아이들 글짓기 가정방문을 할 수 있기에 편리하였다.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추천서를 받아야 했다. 강릉문화원장님을 찾아뵙고 추천서를 받았다. 나는 응모를 했으나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2002년 다시 도전을 했지만 또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2003년에는 힘이 빠졌지만 용기를 내어 다시 세 번째로 도전을 했다. 이제 떨어지면 다시는 강원도문화상 문학부문 도전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화상 문학 부문에 당선이 되었다.
7월 강원도민의 날 춘천에서 시상식이 있었다. 아내와 강릉의 문인들과 함께 시상식에 참여하였다. 시상 중에 서울에서 사진사들이 와서 마구 사진을 찍더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사진 값을 지불할 돈이 없다고 하니 사진사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놀라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강원도문화상 수상자들은 대개 교수들이거나 재력이 어느 정도 있는 지도층이었던 것이다. 그 분은 나 같이 가난한 사람이 이런 상을 받은 것에 대해 아주 당연하게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후일, 사진을 받고도 돈이 없어서 사진 값을 보내지 못하였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후에야 사진 값을 지불하려고 전화로 알아보니 그 사진관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때 그 사진사 사장님께는 지금도 죄송스럽고 미안하다.
2003년, 강원도문화상 문학 부문 수상은 1975년 강원아동문학에 작품 ‘호수’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한 이래 29년 만의 문학에 대한 결실이었다. 어찌 기쁘다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살아온 받은 상이기에 기쁨보다는 아픔이 컸다. 아내는 함께 시상식에 참석하였지만 나도 아내도 그렇게 기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8. 2010년, 불교 동요곡 작사 모집에 최우수상 당선
- 참선을 해 보세요
한마음선원에서 불교 동요 현상공모를 하였는데 응모를 하였다.
제3회 한마음선원 어린이 선법가 가사 응모작품
*스님을 뵈오면
*참선을 해 보세요
*마음의 문이 열리면
*응모자: 남진원
*강릉시 용강동 임영로 157번길 10호
*010-3643-6366
스님을 뵈오면
스님을 뵈오면
손을 모으고 합장합니다
스님을 뵈오면
조심스레 따라 걷습니다
깨달음의 밝은 세상
안내하시는 우리 스님
부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우리 스님
스님을 뵈오면
스님을 뵈오면
스님은 우리 마음에
연꽃을 방글방글 피워줍니다
스님은 우리 마음에
자비의 등불을 달아줍니다.
스님 스님께 손을 모으고
스님 스님께 마음을 모으고
합장합니다.
참선을 해보세요
조용히 앉아서 참선을 해 보세요
마음으로 보는 눈이 생긴대요
마음으로 나를 들여다보면
거짓에 찬 내 모습 거울처럼 보인대요
마음으로 나를 들여다보면
내 속에 숨어있던 부처님도 만난대요
조용히 앉아서 참선을 해 보세요
마음으로 보는 눈이 생긴대요
마음으로 꽃을 들여다보면
한송이 꽃에도 관세음보살님 보인대요
마음으로 벌레를 들여다보면
징그러운 벌레에게서도 부처님이 보인대요
조용히 앉아서 참선을 해 보세요
마음으로 듣는 귀도 생긴대요
마음의 귀를 열고 들어보며는
어디서나 행복한 노래를 들을 수 있대요
마음의 귀를 열고 들어보며는
자비로운 부처님 음성도 들을 수 있대요
마음의 문이 열리면
댕그렁 범종소리 누리에 번지면
어리석음에 갇힌 마음의 문이 열리죠
마음의 문이 열리면
대자대비 거룩한 모습
만나 뵐 수 있어요
룸비니 동산 같은 꽃밭을 지나
저 언덕 손잡고 가는 우리의 친구들
모두 들 웃음이 솟아요
기쁨이 피어나요
큰 스님 할 소리 고요속에 번지면
어둠에 잠든 마음의 문이 열리죠
마음의 문이 열리면
대자대비 인자한 모습
만나 뵐 수 있어요
룸비니 동산 같은 숲속을 지나
저 언덕 손잡고 가는 우리의 형제들
모두들 희망이 솟아요
행복이 피어나요
이 세 편 중에서 ‘참선을 해 보세요’라는 동요 작품이 최우수당선 작으로 뽑혔다.
이 작품을 <한마음선원>에 보내놓고 잊고 있었다. 그날은 음력 11월 8일, 양력으로 12월이었는데 할머님 기일이었다. 할머니 제사를 준비하여 지내려는 차에 전화가 왔던 것이다. ‘어린이 선법가 가사 공모’에 대상이 없는 최우수 당선이 되어 시상식에 참석하라는 전화였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도와주신 것 같았다. 상금은 50만원이었지만 매우 기뻤다. 늘 그랬지만 그때는 돈 만원이 무척 아쉬운 때였다.
9. 2015년 10월, 제1회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기원
노랫말 우수 작품 당선
남진원 노랫말, <동상> 수상
- 하나 되는 세계 -
1.
나는 듯 춤추는 듯
미끄러진다 내달린다
여기, 평창에 세계인이 모여
굳센 힘과 기량으로
당당하게 승부한다
설원에서 펼쳐지는 잔치 한마당
추위를 녹여서 꿈을 만든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2.
차별을 없앤다
갈등마저 풀어낸다
여기, 평창에 세계인이 모여
화합과 평화로
서로를 다져간다
빙판 위에 펼쳐지는
잔치 한마당
겨울을 녹여서 희망을 만든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후렴구]
아 -
하나 되는 마음
하나 되는 세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노랫말 당선소감 - 남진원
고맙습니다
한나라 무제 때에 풍류가객 사마상여는 시문을 잘 지었고 거문고의 명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양왕에게 여옥부(如玉賦)를 지어 바쳤습니다. 양왕은 감탄하였고 대신, 명금 녹기금(綠綺琴)을 선물했습니다.
어느 날 사마상여는 거부인 탁왕손의 연회에 가서 녹기금으로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탁왕손의 딸 탁문군도 그 노래를 들었습니다. 탁문군은 그 노래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라는 것을 알고 감동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봉이란 새가 천하를 떠돌지요.
이제 제 짝을 찾아다니다 고향에 돌아왔소.
저기 저 곳에 계시는 아름다운 여인이여,
내 마음 울렁이게 하는구려.
우리 한 쌍의 원앙이 되면 어떠리오.
음악과 시를 통해 사랑을 이룬 두 남녀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재주지만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제 노랫말이 뽑혔습니다. 문득 사마상여의 이야기가 떠올라 적어보았습니다.
말석을 차지한 제 노랫말입니다. 그러나 동계올림픽을 위한 노래로 불러지길 기대해 봅니다.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위해 노래한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저는 사마상여의 기쁨에 두 배를 더하여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10. 2018년 6월, 이름시 짓기 공모 당선 – 방터골
강원문인협회에서 「이름시 짓기 공모전」을 하는데 공모를하였다. 방터골의 아름다움을 글로 써서 보냈다.
방터골
방터골 산속에
한 시인이 살았네
터밭에서 호미질하면
곁을 주는 산내음 풀내음
골짜기 고요한 진달래
미소로 벗하네
11. 2018년 8월, 강원사랑시화전 공모 당선작
– 개구리 우는 밤에
파종을 끝내고 나니 어둑해졌다
내 고향 정선 골지리에 살던 이후
한번도 실하게 듣지 못했던 개구리 울음소리
오늘 밤 신선 땅, 방터골에서
듣는구나, 환하게 듣는구나
수목이 짙어지는
밤
문 다 열어놓고 허공처럼 앉았다
무슨 부귀를 더 구하랴.
강원문인협회에서 강원도를 전국에 널리 알리기 위해 강원사랑시화전을 공모하였다. 13편을 선정하는 데 든 작품이다.